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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또 회의가 있었다.

 

밤 11시 30분이 지나서야 회의는 끝났다. 내가 투덜투덜했다. 아니, 10분만 일찍 끝냈으면 12시 고속버스 막차는 탈 수 있었는데, 지금 끝내면 저더러 어쩌란 말이요?

 

그래도 내심 꿍꿍이는 있었다.

회의가 늦게 끝나서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이 밤을 지내게 된다면

밤 늦게 강남에서 만나고 있을 선배와 친구를 한꺼번에 만나 보도록 하지 뭐.

 

선배...

25년전부터 내 삶의 어느 모퉁이에 불숙 나타난 선배...

기록을 들추어 보니 14년 전에 만나서 밤새 술마셨던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지난 번에 속초에서 운전하다가 전화를 받았던 바로 그 선배이다.

내가 존경하는 또다른 인물과 친구로 허심탄회하게 만나는 그 선배이다.

 

그 선배가 밤에 전화를 했다.

저녁에 영호를 만나기로 했는데, 너도 올 수 있냐?

회의가 제대로 끝나면 곧바로 대전 갈 것니까 쉽지 않다고

다른 날에 일찌감치 만나자고 했다.

 

회의가 끝나기 전에 영호가 전화를 했다.

올 수 있냐?

글쎄 아직도 회의가 계속되고 있으니까 모르겠다.

와라.

막차를 놓치면 가지.

 

영호...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 같은 해에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가

학교는 짤리고 안산에서 조직활동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그러다가 여기저기에서 활동하다가 93년에 늦깎이로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지금은 의사가 된 친구, 의사로서 노동운동하기는 멋쩍으니까

차라리 이주노동자와 함께 하는 활동을 하겠다고 나선 친구.

 

그래서

새벽 1시쯤 선배와 친구를 만났고,

먼데서 택시타고 온 선배의 친구이자 나의 존경하는 동지를 만났고,

여전히 세상이 참 좁기도 한 것이,

선배의 친구와 내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것도 모자라서

영호라고 하는 내 친구가 다시 대학교에 가기 전에 함께 일했던 동지가

바로 선배의 친구라고 하는 그 분이시네.

 

-그러니까, 한달 전만 하더라도 서로 모르는 줄로만 알았던

  네 명의 사내가 오늘 알고 보니 서로 서로 오래도록 알던 사이라는 거.

 

20년전쯤, 30년전쯤의 얘기를 마구 하는 선배 앞에 있다가 보니

내 맘도 마냥 어린 날의 기억이나 추억으로 돌아가더구만.

 

그러니 술이 술술 잘도 들어갈 수밖에.

 

같이 집에 가자는 영호의 제안을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정중히 사양하고,

일산에 살고 있는 영호와 선배의 친구는 택시타고 가고 난 다음,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선배를 집 앞까지 바래다 준 다음,

 

택시를 타고 뚝섬 사무실로 왔다.

 

어, 이 시간에 전화가 오네, 일단 끝.

 



술은 내공이다.

한 3년간 쉰 적이 있었다. 바쁜 인생사에 무엇하러 그렇게 오랫동안 쉬었냐고
질책할 사람도 있겠지만, 남의 인생사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 내가 쉬든 말든...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슈..??

그 오랜 휴식의 시작은 타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그렇게 오래 끌고 간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광장에 대한 두려움,,,또다시 겪고 싶지 않은 배신과 좌절, 그리고 삶의 허무함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세상에는 신의 선물이 있었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우연히 깨달았다. 마치 항상 곁에 있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항상
지켜주는 마누라의 엉덩짝의 고마움을 전혀 모르듯..그렇게 모르고 살던 것 중의
하나가 내 앞에 자동 택배로 배달되어 와 있었다.

그것은 술이었다. 한잔도 아닌 한 병도 아닌 한 궤짝의 무엇이었다. 그것은 한
상자의 소주였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고 또 째려보아도, 그것은 내가
매일 끼고 살던 참이슬 진로소주였으며, 그것도 한 박스였다. 열지 않았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처럼,,, 나는 그 궤짝을 비워나가는 재미를 누리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얼마나 빨리 궤짝을 새것으로 바꿔치기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내기를
걸어 그 재미를 더하는 기교까지 부리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것도 무슨
경지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나는
배신자들을 용서하지 못했고, 인간신뢰에 대한 절망으로 삶의 허무함을 과장되게
느끼기도 하며, 자칫 그 허망함을 가장 절망적이고 창피한 형태로 보여줄 뻔하기도
했었다. 겨우 그 불을 진정시키고 난 뒤에도 그만큼의 또 오랜 시간동안, 나는
사람이 그리웠다. 아무나,, 사람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나를 버리고 떠난 부하
직원들,,거래처 사람들,,친구들,,,그리고 심지어는 나의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부모 형제까지도......그 미치도록 그리운 두 손 두 발을 가진,, 내게 속삭여 줄
수 있는 세치 혀를 지닌 동물이 너무도 그리웠다. 내가 생각하는 의미의 삶이
그리웠다. 배신하지 않고, 나를 억울한 절망에 빠뜨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그리웠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 몇몇 옆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공포에 질려 막으려
했고, 나와 성격이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무조건 오는 사람이 좋았고,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이 인간이 하의 사람이든,,
전과자이든,,,천하의 개망나니이든..... 나는 구분할 힘을 잃고 있었다.
어쨋거나, 나는 Leaving Las Vegas,,,,Leaving Seou1,,, Leaving my 1over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 한 궤짝의 진로소주를 즐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할수 있었다.

그래,, 바깥세상이 아니라, 내 속에서 나의 절망을 찾아내고, 내 속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본능적 느낌과 경험으로, 허무함의 정체를 파악해 낼 수 있는 사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기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한 궤짝의 참이슬,
진로소주의 행렬이 시작된 날로부터였다.

오로지 술만이 그런 허황된 논리의 비약을 못 본 척 눈감도록,,나 자신의 잘난
이성을 마비시켜 줄 수 있었다. 그 이성을 완전히 까뭉개지 않고는 내 속의
운명과, 내속의 삶의 본능적 욕구와,,,,잊혀져 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
을,,, 내 맘속에 다시 그 기억의 불씨를 지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정상적인
사유의 메커니즘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그 사유의 괴리, 견강부회,
엉뚱한 비약,,,

그러나 본능적으로 삼아남는 쪽으로 치열하면서도 끈질기게 짜깁기를 해 나가는
그 힘은 누가 무어라 해도 그 한 궤짝씩 내 앞에 배달되어 오던 참이슬 진로
소주의 힘이었고,, 나는 그것을 창피해 하지 않고,,알코올중독이라는 누명을
억울해 하지도 않고,, 오로지 내 삶의 재건을 위해서 철저히 그것을 이용하는
현명함을 익힐 수 있었다.

한병, 또 한 병, 그리고 또 한 병...이런 방식이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그 어려운 일을,,,나는 한 궤짝의 소주와 함께...끝없이 추락해 보자는,,그래
어디까지 떨어지나 한 번 해 보자는,,,
감히 니가 내 건강을 어떻게 할 것이며,,
니가 퀭하게 두 눈만 살아서 반짝 반짝 빛나는,,,24시간 술취한 이 광기어린
인간을어떻게 할 수 있는 지,,,,,어디 한 번 보자는.....
그 말도 안되는 무모함으로,,,나는 겨우 이겨낼 수가 있었다..
그 궤짝 단위의 소주를 배달받기 시작하면서.......

이제 나는 그 내공으로 먹고 산다...
지하실의 조그마하고 곰팡내나는 지저분한 방에 쥐새끼처럼 숨어서,,,
그 궤짝들을 비워나가며,,,,그 빈 병의 숫자를 세어가며,,,,그 빈 병의 정연한
줄서기가 혹시나 잘못되랴 눈자로 재고 또 재고,,,,앞으로 나란히...좌우로
정렬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외치며 의식의 가닥을 놓지 않으려 버티며,,,,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이틀이 지나고,,,1달이,,,2달이,,,,1년이,,,,2년이,,,,
3년이 흐른 후 나는 그것이 내공임을 깨달았다..

오랜 세월을 그와 함께 하며,, 도디어 훌쩍 40인치를 넘어버린 나의 똥배의 힘으로
나는 이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지겨운 날들동안 내 옆에 있었던 그 사랑하는
진로소주의 힘으로,,비록 몸매는 볼품없이 변했지만,, 나는 이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기교를 익히는 기막힌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그 새지 않는 기나긴 밤들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기교들을 나는 배웠다.. 망상이 공상이 되고,,공상이
꿈이 되어서,,그 꿈이 내 눈앞에서 하나 하나 펼쳐지게 할 수 있는 기교를 배웠다...
절망과 배신감이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용서와 두터운 인생의 경험창고가 되어버리게
할 수 있는 기교를 부릴 수 있게,,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자기 세뇌와 자기
최면의 힘이 무엇보다 강력하게 빛을 발할 수 있는 때를 어떻게 스스로 만드는지를
배웠다..

절망을,,이길 자신없어 보였던 외로움을,,,어떻게 내 노리개로 만들어,,내가
원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지,,가지고 놀 수 있는가를 배웠다.. 일성, 이성,
삼성,,,,,,,구성,,,,,그리고 최고의 경지인 십이성의 경지에 주화입마 없이 오를
수 있는 호흡조절법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 그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로
그 날이.,, 그 날이 오기 전까지의 나날들도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들일 수 있는지를,
아니 오히려 그 날 이전의 시간들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음을 그에게서 배웠다

잠이 깨면 바로 바꾸러 가야 했던 그 궤짝들을 아쉬워하며,,아침부터 시작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던 그 궤짝들에게서,,나는 절망이 사람을 갉아먹지 못하게,,,
외로움과 허무함이 사람을 썩게 하지 못하게,,,,나는 스스로를 그날이 올 때까지
방부처리하고 동면시키는 방법을 배웠다..1병으로는,,,2병으로는,,10병으로는
불가능했던 일을 나는 어느 날 내 눈앞에 우연히 자동택배로 배달되어온 진로소주
한 궤짝에게서 발견했으며,,,그 먹이를 놓치는 어설픈 맹수가 되는 불운은 피해갈
수 있었다. 차라리,,도시가스처럼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계량기 소주였으면
좀 더 나은 무공을 익힐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나는 그 한 궤짝의 진로소주
정도의 무공비급만으로도 내 남은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며,,
그 경지에서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내공을 지금도 꾸준히 연마하고 있다...

이제 나는 그 내공의 힘으로 하루,,이틀,,1달,,,,1년,,,이제 2년째 살고 있다.


(2001년 05월 06일 13시 08분 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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