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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또는 길눈이 말씀

작년 5월에 난데없이 주례 한번 맡고 나서

너무 어리다고, 젊다고 타박을 많이 받아

섣부른 경거망동(?)을 삼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통혼례의 축사(길눈이 말씀)를 하라는

신랑신부의 청탁(!)을 결국 뿌리치지 못했다.

 

2004년 11월 7일 12시 30분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잔디밭

신랑 김동중

신부 권도경

 

일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맺어진 동지들이니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 믿는다.

 



 

안녕하십니까?

저의 동료들이자 사랑스런 후배들인 신랑 김동중 동지와 신부 권도경 동지의 혼례를 축하하러 오신 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요즘 결혼식에서 주례사에 해당하는 이 길눈이 말씀은 저보다 좀 더 연륜이 쌓이고 경험도 많은 어른께서 하셔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신랑 신부와의 적지 않은 인연이 저를 끝내 이 자리에 서게 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 모두 신랑과 신부에게 한마디씩 덕담을 선물하셨을 것입니다. 그 덕담 하나하나가 모두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 이상으로 신랑 신부에 대한 애정과 격려가 실려 있습니다. 사진과 비디오 촬영이 그것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신랑과 신부는 일생에 단 한번 두 사람의 삶에 모든 부모, 친지, 동료, 선후배 하객들의 염원이 집중되는 이 시간을 기억 속에 뚜렷하게 아로새겨 인생을 참되게 사는 힘으로 삼아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신랑과 신부를 각각 훌륭한 동지로서 오래 전부터 만나 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이 일고, 그 마음이 기다림 속에서 저마다의 고통 속에서 입술이 마르고 애가 타고, 이윽고 젖은 장작이 서서히 불씨를 키우듯이, 이렇게 두 사람이 활활 타는 젊은 불꽃으로 만나서 부부의 연을 맺는 오늘까지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지켜봐 왔습니다.

사랑은 뜨거운 몸뚱아리를 아낌없이 던지는 것이요, 사랑은 거대한 불구덩이에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요, 그래서 바다와 같이 깊은 가슴으로 모든 것을 끌어안는 것이요, 하늘과 같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것이요,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가 되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 열리는 것이라고, 그렇게 저는 사랑을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부부사랑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함께 나누는 소망과 장래에 대한 공동체의 희망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그런 사랑의 마음이 넘치고 또 넘쳐야 한다는 것을, 그러한 사랑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그 동안 둘만의 사랑을 다지는 것 이상으로 이 나라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약속을 함께 해왔습니다. 청첩장을 보신 분은 이미 느끼셨겠지만, 오늘의 신랑 신부가 참 자유 참 평등의 부부가 되기 위해서 나누었던 숱한 다짐과 약속, 진실로 이 사회의 진보를 갈구하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싸우고자 하는 두 사람의 굳은 마음, 모든 사람들이 고루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떠한 역경도 무릅쓰고야 말겠다는 두 사람의 각오, 그러한 소중한 것들을 우리 모두 오래도록 기억합시다. 그리고 혹시라도 신랑 신부가 힘겨워할 때 오늘까지 지녀왔던 관심과 애정으로 격려하도록 합시다.

이제 신랑 신부의 부모님께, 신랑 신부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하객들을 대신하여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신랑 신부를 이토록 건강하게 키워 주시고 부부로 이어주신데 대해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의 문화가 만나고 교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랑 신부가 보듬고 키워온 사랑이 두 집안이 오래도록 지녀온 전통과 풍습과 교훈들과 서로 잘 어우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들께서도 익히 경험하셨듯이, 사회도 생물체처럼 변화하고 바뀌어갑니다. 삶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는 이 부부가 스스로 새로운 전통과 풍습과 교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두 집안의 친지분들과 함께 젊은 마음으로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랑과 신부는 이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겨레가 하나되기를 바랍니다. 노동자와 서민이 살맛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부모님 그리고 하객 여러분, 신랑 신부가 바라는 세상은 우리가 함께 바라고 만들어야 할 세상 아니겠습니까?

신랑 신부가 지나온 세월, 부모님 품 안에서 놀던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기 전에 따로 살아온 30년 세월은 말할 것 없고, 흙바람 부는 연구단지와 대화동의 저녁 거리와 막걸리잔 거나한 주막을 오가며, 힘찬 노랫가락에 신명으로 얼싸안았던 청춘의 모든 시기들, 그 만남의 또렷한 기억들, 그러면서 굳게 다진 사랑과 서로의 삶에 대한 약속들, 하나하나 새롭게 새기고 보듬어 가면서, 아무리 모진 일이 닥친다 하여도 오로지 처음 그 마음과 그 사랑으로 이겨 낼 수 있도록, 부모님과 가족 친지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분들 모두, 이제 두 사람 함께 내딛는 걸음마다 우리 모두의 염원이 축복으로 그 위에 얹힐 수 있도록 힘찬 함성과 박수로 이 좋은 잔치마당에 함께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04.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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