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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봄날은 간다

트위터에 잠깐 들렀다가 기형도를 만났다.

오늘은 기형도가

서울의 어느 극장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지 꼭 32년 된 날.

살아있으면 주변의 몇몇 동료들과 같은 나이.

아, 성석제가 그의 친한 친구라고 했지.

 

그의 시를 읽다가 먹먹한 심정으로 눈시울을 훔쳤던 적이 여러번이었는데

김진숙 동지의 트윗에서 다시 그런 마음과 눈빛을 기억해낸다.

 

한숨쉬다가 그냥 또박또박 옮겨 본다.

몹시 바쁜 시간인데, 잠시 쉬어야겠다.

 

<봄날은 간다>

-기형도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열풍(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 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인사(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소읍(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 뿐

숙취(宿醉)는 몇 장 지전(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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