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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1/10
    주례가 둘이더라(8)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6/01/10
    우연한 만남(4)
    손을 내밀어 우리

주례가 둘이더라

 

1월 8일 낮 2시에 용산 웨딩코리아 5층 그랜드홀에서

우리 연맹의 박준형 동지와

보육노조 인천지부에서 일하는 박지영 동지의 결혼식이 있었다.

 

두 동지는 같은 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하고

둘 다 사회진보연대의 열심회원이기도 하다.

 

나도 좀 별나게 결혼식을 올렸지만,

이 결혼식은 몇 가지 특색이 있었다.

 

-주례가 둘이었다. 따라서 주례 말씀도 둘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결혼서약 대신에 "결혼에 대한 약속"을 신랑 신부가 낭독했다.

-낭독 직후 곧바로 신부, 신랑의 순으로 결혼에 대한 다짐어린 인사말을 했다.

-다른 곳에서 종종 보지만, 신랑신부가 동시에 나란히 입장하였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사회자의 역할을 주례가 거의 대신하였다. 사회자는 주례 소개, 신랑신부 입장 안내, 자기 소개만 했던 것 같다.

 

예식순서는,

신랑신부 입장/ 남성주례 말씀/ 여성주례 말씀/ "결혼에 대한 약속" 낭독/ 신부 발언/ 신랑 발언/ 신랑부모님 말씀/ 신부부모님 말씀(생략)/ 축가/ 신랑신부 행진, 의 순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남성주례(박하순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 말씀, 여성주례(여성학자 조주은) 말씀, "결혼에 대한 약속" 낭독, 신부의 발언, 신랑의 발언, 신랑 아버님의 말씀까지 연달아 들어야 했는데, 나보다 젊은 주례들 말씀도 재미있었고(음미해 보려고 녹음까지 했었음^^, 신부와 신랑의 생김새와 능력에 대해서 한껏 추켜세우는 것은 여느 주례들과 똑같았지만 생동감은 있더라-) 신부와 신랑의 얘기도 쏙쏙 와 닿았다.

 

전통적인 결혼식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신부와 신랑이 생각하는 결혼의 의미를 잘 담기 위해서 꽤나 고심한 것 같던데, 한가지 아쉬운 점은 번드르르한 예식장을 떠나서 다른 공간을 결혼식 장소로 선택했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두 동지의 결혼을 축하하고,

아마도 두 동지의 역작임에 틀림없을 "결혼에 대한 약속"을 덧붙인다.



박지영과 박준형, 우리 둘은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동안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결합합니다. 우리의 우정어린 결합의 유대에서 서로는 고유한 성적 차이를 존중하고 그러한 차이에 근거한 각자의 권리를 갖습니다. 이에 따라 둘은 결혼으로 구성하는 가족의 성격과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할 의무를 서로에게 가집니다. 임신여부와 그 회수를 선택할 시민적 권리는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성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소득에 상관없이 공동으로 소유합니다. 부득이한 경우, 공정하게 분할하거나 남은 사람이 그것을 물려받을 권리를 갖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결합할 것을 우리는 약속합니다.

 

* 이 '약속'은 프랑스혁명기의 여성혁명가 '올랭프 드 구즈  Olympe de Gouges(1748-1793)'의 [여성의 권리와 여성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1791) 중 "남성과 여성의 사회계약의 형식"에 따라 현재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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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만남

 

지난 주에는

금요일(6일)에 전교조 비대위원장 부친상(수원 아주대병원),

토요일(7일)에 대학노조 위원장 빙부상(대전 평화원장례식장),

일요일(8일)에 박준형 동지와 박지영 동지의 결혼식(용산 웨딩코리아),

이렇게 조사와 경사가 이어졌다.

 

그러니까 금요일의 일이구나.

혼자서 수원 아주대병원에 가는 길에, 사당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낯익은 한 어른을 보았다. 누구더라, 아, 안재구 선생님이시다. 92년에 안재구 선생께서 충남대학교에서 특강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 때 처음으로 뵙고 나서 14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감옥을 한두번 더 다녀오셨지 아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틈에 서 계신 선생님을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기가 멋쩍어서 줄의 끝에 기다렸다가 버스를 탔다. 다행히 선생께서는 혼자 앉아서 PMP로 책을 읽고 계셨다. 그 옆자리에 앉았다. 책읽기에 집중하고 계셔서 가만히 있다가, 과천쯤 지나서 전화를 받으시느라 책읽기를 멈추신 선생께 인사를 드렸다.

 

-저, 안재구 선생님 아니십니까?

=아니, 젊은이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시오?

-예, 저는 예전에 충남대에서 선생님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라, 그래요? 지금은 무슨 일을 합니까?

-예, 노동조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명함을 드렸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선생께서는 수원에서 살고 계시고, 일주일에 두어번씩 범민련 일을 하러 서울로 나온다고 하셨다. 통일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젊은 활동가들의 생활이 최소한의 수준이라도 유지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몫인데도 쉽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셨고, 한편으로는 이리 저리 눈치를 보며 명망을 좇아 가는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이나 관료들과 젊은 날 자기가 몸담았던 조직에 대해서 없어져야 할 단체라고 도리어 침을 뱉는 변절한 인간들에 대해서 개탄하기도 하셨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괜찮았는데, 나이가 드니 심장도 좀 안좋은 것 같고...  이래저래 늙으니 약기운을 빌어 살기도 하고 그렇네요.

-올해 연세가....?

=이제 일흔넷이 되었구만.

-그래도 정정하십니다. 하하.

 

벌써 일흔넷이 된 선생께서는 PMP를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고 계셨다. 수원과 서울을 오가면서 시간을 헛되이 버리지 않으려고, PMP를 구입해서 책도 보고 음악도 듣는다고 하셨다. PDA는 전화까지 다 되지만, PMP는 전화 말고는 책읽고, 동영상보고, 음악듣고, 이런저런 기능이 다 있다면서 설명까지 해 주셨다. 젊은 벗을 만난 듯 우리는 경쾌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국가보안법 얘기, 미국 얘기, 그러다가 사학법 얘기까지 화제가 번졌다. 

 

-제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성광고등학교라고, 대구역 뒷편에 있는...

=아, 이규현 선생이 있던 곳인데, 내가 그 양반은 잘 알지.

-이규원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 이규원 선생. 내가 4.19 지나고 대학에서 교원노조하다가 해직되었을 때, 어디 고등학교 선생이라도 할라고 여러군데 찾아다녔는데, 사람들이 아예 만나주지를 않는 것이야. 그 때 성광고등학교에 갔더니, 이규원 선생이 내 얘기를 다 듣더니, 선생님 걱정마시고 우리 학교로 와서 근무해 주십시오, 언제까지라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받아 주셨어. 그 분은 통이 컸던 분이고, 남다른 데가 있었어. 나는 남의 눈이 많은 주간부보다는 야간부가 좋겠다 싶어서 야간부를 자원했고, 그래서 한학기 동안 수학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생물까지 가르치기도 했지. 그러다가 그 다음 학기에 덜컥 복직이 되었지. 한학기만에 학교를 떠나야 하니, 미안해서 차마 이규원 교장선생님께 말씀도 못드리고, 찾아가서는 그냥 앉아 있었더니, 이규원 선생님이 왜 그러냐 해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아이구, 선생님, 그거 잘된 일 아닙니까, 우리는 선생님 오래 계실 거라고 생각안했습니다, 축하합니다, 하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시더라고.

-그게 62년도쯤 일이겠군요?

=그렇지. 벌써 40년도 더 지난 얘기지...

 

그 이규원 선생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80년에도 성광고등학교 교장이었으니, 참 장기집권을 하셨구만. 암튼, 일흔이 넘은 나이까지 교장을 하고 있던 이규원 선생에 대해서 그리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는데(교장선생님의 별명이 두꺼비였다), 졸업하고 26년이나 지나서 그분의 또다른 면모에 대해서 알게 되다니... 거기다가 안재구 선생께서 성광고 야간부 교사까지 하셨다는 사실도 신기한 일이었다.

 

아주대학교 근처에서 안 선생님과 같이 버스에서 내렸다. 선생께서는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과 나중에 수원역으로 갈 경우에 타야 할 버스노선을 일일이 일러 주셨다. 헤어지면서, 사진 하나 찍어서 보관하고 싶다고 했다. 그게 위의 사진이다.

 

안재구 선생에 대한 참고글 두개 덧붙인다.

 



안재구
1933년 경남밀양에서 출생한 그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독학하여 경북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북대, 숙명여대, 동국대에서 수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미분기하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20년동안 재직해 온 경북대에서는 학생운동에 동정적이란 이유로 재임용에 탈락되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사건에 연루되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세계수학자대회'에서 그의 수학적 능력과 양심적 가치를 호소하며 항의해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88년 마침내 가석방되어 1991년 경희 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중, 1994년 아들과 함께 '구국전위'사건으로 재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 후 1999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어 현재는 전교조 수학교사모임 고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지도위원 등 사회단체 활동과 강연, 저술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수학개론> <수학을 만드는 사람들1.2>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 <수학문화사> <할배, 외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 강>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외 다수가 있다.

 

[홍세화의 빨간 신호등]

안재구 교수와 나 99.6.14


이제 나는 그대에게로 가는 길목에 섰다.

오랫동안 꿈꿔온,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는 기찻길이 아니더라도 20년 만에 돌아가는 귀국길, 어찌 떨림이 없고 두근거림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방인이란 별다른 게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이방인이 이제 우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하늘과 땅, 산과 들판과 강물과 논둑길에서 함께 어우러져 사는 우리들 속으로 하염없이 파묻히고픈 것이다.

어찌 가슴 설레지 않겠는가.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알고 있으리라. 내 기쁨이 티 없는 기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진회색의 앙금이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대는 부디 나에게 환영한다는 말일랑 고이 접어주기 바란다. 환영받을 만한 사람도 못 되거니와 환영이란 말은 나에게 기쁨을 주기보다는 앙금을 더 무겁게 해 줄 뿐이겠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사의 한 단면

나는 개인적으로 안재구 교수를 알지 못한다. 남민전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분으로 전공 분야가 수학이고 숙대 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분은 지금도 감옥에 있다. 남민전으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10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 출옥했으나 세상에 나와 있던 기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사건 동료 중에는 현재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는 재구속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국민의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준법서약도 했다.

그러나 덜 유명하기 때문일까. 국민의 정부는 그를 풀어주지 않았다. 한편, 지금은 풀려났지만 그의 아들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양심수가 되었다. 그들 부자는 함께 감옥생활을 함으로써 20세기 후반 한국 정치사의 한 단면을 상징처럼 보여주었던 것이다.

지금 양복 상의에 금배지를 달고 있는 사람과 수의를 입고 있는 안 교수는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신분으로서도 대조를 이루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의정 활동이 좋든 나쁘든 종종 소개되어 잊혀지지 않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잊혀지고 있다. 장기수를 풀어준 것으로 양심수 문제는 이제 끝났다는 듯 거론조차 안 되는 실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또한 안 교수와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을 거의 감옥에서 보냈고 지금도 감옥에 있는데, 나는 요행스럽게 망명도생을 할 수 있었고 - 그것도 운좋게 프랑스땅에서 말이다 - 책도 펴내 제법 유명세까지 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귀국길에 오른다고 하니 대중 매체들이 카메라까지 들이대려 하는 판이다.

읽기보다는 `보기'를 주로 하는 사회, 생각하기보다는 보기를 주로 하는 사회, 즉 흥행 중심의 사회에서는 카메라와 조명을 받는 것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인식되기 쉽다. 그래서 이사람 저사람이 카메라를 받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사람에게는 카메라나 조명이 가까이 갈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찰하지 않고 보기만 하는 흥행 사회에서 사회적 왕따 현상은 더 심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잊혀지기 마련인데 잊혀진 대상에 무슨 가치를 주겠는가. 그런데 나는 도무지 나의 인간적 가치가 안 교수의 인간적 가치보다 더 높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20세기말 한국 정치사가 제공하는 기막힌 아이러니의 한쪽, 즉 프로피퇴르(이익을 챙기는 자)의 쪽에 서게 되었다.

“당신은 나의 시인입니다”

이번 귀국길에 안 교수를 면회할 수 있을까? 할 수 없다면 그대는 부디 다음 말을 전해 주기를 ….

“시인들은 자신의 시를 백 사람이 한 번씩 읽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번 읽는 쪽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안 교수님은 저의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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