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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그래도 눈칫밥…신고 어떻게 하나”

  • 등록일
    2005/04/18 11:11
  • 수정일
    2005/04/18 11:11
(중) 차별금지 “하루 12시간씩 쇳가루 먹고 무거운 쇳덩이 다루면서 받는 돈이 100만원 조금 넘어. 그냥 죽으나 사나 시키는 대로 일하는 거야. 그 법이 통과된다고 우리 월급이 늘어나겠어?” 매캐한 화학약품 냄새, 기계들의 굉음, 허공에 떠다니는 쇳가루와 먼지들. 눈을 뜨기도, 숨을 한번 들이쉬기도 편치 않은 경기 화성 기아자동차 주철주조공장의 일상 풍경이다. 여기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최아무개(65)씨는 “정규직이나 젊은 이들이 회피하는 힘든 일을 하지만 받는 돈은 정규직의 3분의 1”이라며 “지금은 회사가 마스크, 귀마개, 장갑을 주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규직들이 쓰고 버린 것을 주워서 써야 했다”고 말했다. ‘동일노동-동일임금’ 뺀 대책, 효과 의문 애매한 ‘차별’ 판단기준에 ‘금지’ 규정만 이 정도를 위해서도 큰 대가를 치렀다. 회사 쪽은 지난달 29일 이른바 ‘마스크 지급투쟁’을 벌인 ‘비정규직 노동자회’ 대표 2명을 해고하고, 다른 노동자 8명을 정직시켰다. 최씨는 “견디기 힘든 차별을 받지만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정규직처럼 노조를 만들어 싸우기도 어렵다”고 했다. 이번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해 정부가 가장 힘주어 말하는 대목이 바로 ‘차별금지’다. ‘노동시장’의 반응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어 ‘고용 규제’는 유연하게 했지만, ’차별금지’만큼은 분명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당사자인 현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반응은 싸늘하다. 무엇보다도 ‘동일한 노동에는 동일한 임금을 준다’는 원칙이 일찌감치 배제된데다, 여러 가지 차별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기준이나 수단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의 특급호텔 청소부(룸메이드)로 일하는 한 파견노동자(51)는 “룸메이드 업무 자체가 모두 파견직으로 대체됐는데 누구와 우리를 비교한다는 거냐?”고 반문했다. 그는 “적절한 비교 대상인 정규직이 없는 회사에서의 비정규직들에 대해선 있으나 마나 한 차별 금지”라고 화를 냈다. 한 대기업에서 정규직과 함께 전산 업무를 보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이아무개(34)씨도 “정부 법안은 탁상의 논리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입사한 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슷한 일을 하는 정규직의 임금 수준을 알게 되지만, 이미 입사하며 회사 쪽의 처우를 수긍한 처지에서 무얼 따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계약이 해지될까 눈치 보며 일하는데 어떻게 신고를 하느냐”며 “노조도 없으면 그저 꾹 참는 편이 낫다”고 했다. 김철희 노무사(노무법인 참터)는 “정부가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배제하는 순간 실효성 있는 차별해소 방안도 사실상 ‘손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평가에 노동부는 “(정부 법안이) 지금까지보다 진일보한 점은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심화하고 있음에도 현행 법령으로는 이렇다할만한 보호 장치가 없었지만, 새 법안에선 노동위원회의 시정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1억원까지 과태료를 매기도록 하는 등 제재 조항을 크게 강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언적 규정만 있을 뿐 무엇이 차별인지나 차별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애매하다는 지적도 많다. 정부는 “앞으로 노동위의 판정과 법원의 판례가 축적되면 차별의 유형별 기준이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명한다. 반면 노무사들은 과태료가 최대 1억원이라지만, 사용자들이 불복해 소송에 나서는 사이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 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차별이 아니라 남용” 노동관련 3대학회 ‘거꾸로 가는’ 정부안 비판 노·사·정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학자들은 정부·여당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정부 법안에 대해 노동 관련 학자들의 의견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현재 비정규직 노동 시장의 핵심문제는 차별보다 남용인데, 정부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노사관계학회·한국노동경제학회·한국노동법학회 등 한국의 3대 노동 관련 학회가 지난달 ‘비정규직노동의 현실과 입법정책’이라는 주제로 연 공동학술대회에선 이런 학자들의 시각과 의견이 드러났다. 학술대회에서 강성태 한양대 부교수(법학)는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가장 큰 문제는 ‘너무 많다’는 것”이라며 ‘비정규직 사용은 더 자유롭게 하고 차별은 고치겠다’는 정부의 기본 문제의식을 비판했다. 그는 “법안의 차별시정 조처는 환영할 일이지만 실효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며 “특히 기간제나 파견제의 확대에 상응하는 조처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조경배 순천향대 부교수(법학)도 “파견 근로 전면 확대나 (일정 기간 이상 근무할 경우)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는 ‘고용의제’ 조항을 과태료말고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고용의무’ 조항으로 바꾼 것은 명백한 개악”이라고 지적했다. 조준모 숭실대 교수(경제학)도 “입법추진 이후 기업들은 인사관리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단기 사용하기 시작했다”며 “정부 법안의 입법으로 기대되는 비정규직 보호효과는 기업의 대응으로 중화되거나 고용불안정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유성재 중앙대 교수(법학) 등 이날 토론과 발제에 참여한 대부분의 학자들도 “정부 법안에 찬성하기 어렵다”며 “법안의 무게중심이 (비정규직을 쓸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하는 방식 등을 통해 비정규직의 무분별한 남용을 막는데 맞춰져야 한다”고 밝혔다. 양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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