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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월

  • 등록일
    2008/11/16 01:48
  • 수정일
    2008/11/16 01:48

유월입니다. 

과거를 반추해 봅니다.

오늘 길거리로 나가서 촛불을 들고 다시금 길거리에 걸어봅니다.

그 당시 학생으로서 갔었으나 이제는 민주시민의 구성원 한 사람으로 참가해 보고자 합니다.

노찾사 유월의 노래를 틀고 글을 써봅니다. 

아마 늦은 저녁에 시청앞 광장에 갈 예정입니다.     

 

4. 3 제주항쟁, 4. 19 민주혁명, 5,.18 민중항쟁, 6. 10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근현대사의 단면에서 늘 어눌해야 했던 대학시절을 떠올려봅니다.

 

대학선배들이 늘 부르던 노랫말에서는 노찾사의 4월의 노래, 오월의 노래, 유월의 노래를 부르며 푸르디푸르던 잔뒤밭과 허름한 목노주점에서 막걸리잔과 소주잔을 부어가며 말하던 그 근현대사가 떠오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던 대학초년생이던 나를 그렇게 선배들과 주고 받는 술잔과 이야기속에서 나의 무지와 역사의식이라는 새로운 단면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와서 배우게된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역사적 주체의식과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사상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다닐때 한두권쯤은 읽던 책들이 일명 사회과학서적이었습니다. 

사회과학서점도 많았지만 출판사 또한 많았습니다, 깨 알 같은 글씨의 글귀 이해가 될듯 안될 듯한 글귀를 읽고 아니 그 당시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외우기에 급했던지 세미나를 하면 늘 선배들에게 타박을 받으며, 책이 요구하는 전체적 방향과 맥락을 이해라고 꾸짖었던 것이 어느새 18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나와보았을 집회.... 체루탄 분말가루가 난사되며 밀고 당기는 가두투쟁이 학기초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늘 교문투쟁이라고도 하고 교문박치기라고 표현되는 일명 교박투쟁이 4월 총학생회 출범식(해오름제)이면 어김없이 하였던 터입니다.

 

새롭게 입학한 신입생들은 그간 배웠던 현대사와 역사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그렇게 대학시절을 적응하고 몇몇 후배들은 일명 운동권이 되어 수업보다 길거리 현실정치에 나가 학기의 중요한 시기를 수강실이 아닌 길거리를 헤매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민주화니 사회발전이니 진보니 이야기하기전 그전에는 민주라는 단어조차 금기시되었던 시기에 살았던 선배들은 안치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노래를 부르며 민주주의여 만세를 목놓아 이야기하였고, 다른 동아리 선배는 일면 볼세비키즘에 물들어 공산당선언과 무엇을할 것인가? 그리고 프랑스혁명사와 러시아 혁명사에 나오는 선동문구들을 동아리방에서 강연하듯 이야기하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민주주의가 보통명사가 되어 아무도 눈치와 불안해 하며 이야기하지 않지만 그 당시는 백지에 써보내려가며 소리를 낼 수 없었던 금지된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맑스와 레닌의 저작이 사회과학 도서라는 명칭으로 서점에 비치되었지만 찾는이가 없어서 도서가 폐간되서나 사회과학 서점이 문을 닫거나 사회과학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문을 닫아 절판된 책들이 많은 상황을 보며 조금은 개탄스럽기도 합니다. 

 

저의 과거 그 당시 책들은 선배들에 의해 물려받거나 헌책방 또는 사회과학서점에 주문을 하여 기다려야 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돈이 없던 사람들은 늘 과학생회실 또는 동아리연합회 사무실에 찾아가 책들은 복사해 프린트된 책들로 세미나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책장에 꽃힌 책들이 버리기도 아깝지만 저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 책들은 지금까지 갖고 있습니다. 남들은 미련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책들은 보면 제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꼈던 신세계를 접하게 되었던 것에 소중함이 간직되어 미련스럽게 이사를 다닐때 마다 제일먼저 챙깁니다.

 

그래서 간혹 책장을 펴보면 그때의 생각들을 훔쳐보며 혼자 키득키득 메모를 보면서 웃음을 지어봅니다. 그 메모는 그 당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고 한폭의 드라마를 보는 추억의 보물상자이기에.....

 

저는 4월, 5월, 6월 일그러진 역사에 부끄러워 술잔을 많이 부끄러웠고 학교 방송국에서 나오는 노래 여전히 기억되는 예울림의 "우리투쟁이 사랑되어"라는 노래를 들으며 가슴에 울분을 가두어 놓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기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곁에 있던 많은 벗들도 떠났고, 잘난 선배들은 하나둘 가족, 결혼, 아이 핑계를 대며 돌아서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저 또한 뭐 잘난 것이 없어 남아 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유월입니다. 다시 길거리에 나서봐야 겠습니다.

6.10 촛불은 87년 6.10과 다르게 전 국민이 나섰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고, 의미 깊은 날입니다. 오늘 단단히 옷을 챙겨 나가보고자 합니다.

길거리에 하나의 점속의 군중이 되어 유월을 다시금 느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종환 시인의 시 하나 남겨봅니다.

 

뒷자리
  - 노선생님의 말


맨 앞에 서진 못하였지만
맨 나중까지 남을 수는 있어요

남보다 뛰어난 논리를 갖추지도 못했고
몇마디 말로 대중을 휘어잡는 능력 또한 없지만
한번 먹은 마음만은 버리지 않아요

함께 가는 길 뒷자리에 소리없이 섞여 있지만
옳다고 선택한 길이면 끝까지 가려 해요

꽃 지던 그 봄에 이 길에 발디뎌
그 꽃 다시 살려내고 데려가던 바람이
어느새 앞머리 하얗게 표백해버렸는데

앞에 서서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이들이
참을성 없이 말을 갈아타고
옷 바꿔 입는 것 여러번 보았지요

따라갈 수 없는 가장 가파른 목소리
내는 사람들 이젠 믿지 않아요

아직도 맨 앞에 설 수 있는 사람 못된다는 걸
잘 알지만 이 세월 속에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한가지예요
맨 나중까지 남을 수 있다는


* 시집 <부드러운 직선>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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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결혼이주민의 삶

  • 등록일
    2008/11/16 01:48
  • 수정일
    2008/11/16 01:48

캄보디아, 태국 여성결혼이주민이 센터에 찾아왔습니다.

캄보디아 여성은 이제 고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으며, 태국 여성은 돈을 벌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한국드라마와 브로커들에 속아 한국에 코리아 드림을 꿈꾸고 온 어린 여성결혼이주민들.....

한국의 드라마의 환상 그리고 이를 악용한 한국브로커들의 결혼주선으로 많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이 골든 러쉬하듯 한국에 부푼 꿈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실상 한국에 들어오면 거짓된 정보에 속아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20살 여성과 40살 아저씨... 재혼을 한 것도 아니지만 이렇게 속아서 옵니다. 그렇지만 다들 이러한 조건에서도 살아보고자 노력을 합니다.

 

문화적 간극과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이 새롭게 한국으로 들어오는 여성결혼이주민들을 어렵게 합니다.

 

경제적 궁핍과 문화적 차이 그리고 나이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은 싫다는 여성결혼이민자들.... 상담을 하다보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들 상담을 하면 사업주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당신 한국사람 맞아.... 노동법을 어긴 것과 한국사람이 무슨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게 하지만 자신이 필요할때와 필요하지 않을때와 180도 달리 태도를 취하는 우리내 잘못된 인식이 문제이지.... 돈을 주지 않고도 당당한 사업주들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라.... 큰소리를 치고 싶지만 그래도 참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필요할때와 필요없을때 인식의 차이는 전혀 다릅니다.

 

여성결혼이민자들에 대한 태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먼 타국에서 결혼으로 입국하여 외로움과 불안감으로 한국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그녀들.... 그러나 현재 여성결혼이민자센터와 한글교실을 통해 만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은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의 여성결혼이민자센터들은 다문화가족에 대한 지원을 위한 서포터즈 기관이지만 그렇지 않은 여성단체와 이주노동자지원센터들은 위기/보호가 필요한 결혼이민자들과 이주여성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지원이 필요한 부분은 그/녀들의 한국생활지원보다 문화적, 그리고 가족내 폭력의 문제를 극복하여야 하지만 지금은 정주를 위한 지원을 하는 절름발이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실상을 살펴보면 더욱더 어렵습니다.

 

초기에 입국한 통일교로 들어온 여성 그러나 대부분 그래도 잘 정주하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현재 들어오고 있는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중국(한족), 중국교포,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 여성결혼이민자들의 간극은 사뭇 다릅니다.

 

결혼을 위해 들어와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이도 많지만 도시에 비해 지역으로 갈 수록 그리고 도시가 아닌 농촌지역으로 갈 수록 비록 적은 수 이지만 과거 관습으로 인해 시부모와의 갈등의 골은 깊습니다.

 

장애우와 결혼한 여성결혼이주민은 한국어를 배우기고 나서 처음 시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재산에 손 델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리고 이어지는 시댁식구들의 질타에 못이겨 집을 나와.... 혼인파탄사유서를 쓰고 체류비를 벌고 중국으로 들어간 이주여성.... 그리고 결혼이 아이들 장난이 아닌 것인데.... 무슨 여성이 상품인양.... 얼굴이 이쁘지 않다고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야 겠다며 폭력을 행사하여 쫓아내는 행태.... 술만 먹으면 짐승의 탈을 쓰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 농촌에 일을 부려 먹기 위해 데려 왔다고 일을 하지 않는다고 구박하는 시부모.... 씨받이를 위해 데려와 아이를 낳으면 소박을 하는 사람들.... 이게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다문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정주를 위한 지원에만 손을 뻗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여성결혼이주민센터들 또한 농촌지역이 아닌 대도시의 경우 지원과 프로그램을 통한 화목한 가정 꾸리기 찾아가는 서비스 등등 단편적 실적위주의 사업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그녀들과 마음을 트고 이야기를 하면 그녀들이 한국에 왔을때의 공포감과 고립감 그리고 외로움을 통해 한국의 일그러진 단면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러나 이러한 단면을 들어내고 보듬기 보다는 스스로들이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결혼은 일륜지대사라고 한 말이 지금에 와서는 사뭇 변질되어가나 봅니다.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재혼할 대상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여.... 여성결혼이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거짓 정보(남편이 유수대기업에 다닌다는 허위 정보)를 가지고 접근하여 여성결혼이주민을 현혹하는 몰지각한 국제결혼정보회사가 많습니다.

 

우리가 접하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작 위기/보호가 필요한 많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이 있으며, 출국을 당해야 할 처지에 센터에 찾아와 이혼파탄사유서를 작성하여 몇개월간 혹은 1년의 체류기간을 부여받아 고국으로 떠나야 하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눈물 겹습니다.

 

오늘 캄보디아 여성의 오빠가 와서 집에 가야한다고 그리고 내 동생의 인생을 위해 부모님이 있는 곳에서 위로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는 미등록이주노동자 오빠의 이야기에서 여성결혼이주민의 그늘진 모습을 다시금 발견하였습니다.

 

쉼터에 머물고 있는 태국여성.... 얼마간의 돈을 벌어 태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그녀...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한국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에 들어와 두려움과 고립감 그리고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그녀들.... 이제는 이런 일이 잃어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이구동성 이야기 합니다.

 

그녀들이 새롭게 그리고 기간 두려움에 대해 떨쳐버리고 새롭게 삶을 설계하기만을 바램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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