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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6

(§16)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와 같은 확신은 우리가 밤이 된<지금>이나 밤을 맞이한 자아가 있다고 주의를 환기하여도, 자기 자리를 떠나 이[우리]쪽으로 오는 법이 없으므로 우리가 그에게 다가가 그가 주장하는<지금>을 보여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보여달라고 하는 것 외 다른 방법이 없는 이유는 이와 같은{말로 표현되지 않는} 직접적인 관계가 담고있는 것은[1]자신을 깎아내려 하나의<지금>, 혹은 하나의<여기>에 자신을 묶어놓은 개별적인<나>를 고집/견지하면서<이것 보라>고 하는 자아가 존재하는 터전이기[2]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밤을 담고 있는<지금>을 나중에 다루거나 혹은 나무를 담고 있는<여기>와 동떨어진 곳에 서서 낮을 담고있는<지금> 혹은 집을 담고 있는<여기>를 제시한다면, 이것은[고정된] 감각적 확신이 담고있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대상과 자아로 구별되지 않고 한 묶음으로 고정되어 있는] 감각적 확신이 존재하는  터전이[3]되는 바로 그 직접성을 걷어치워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고정된] <나>라는 자아가 자리하는[4]시간 혹은 공간적인 위치에 똑같이 들어서서 그 직접성을 보여달라고 해야 한다. 이 말은 아는데 있어서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는<나>를 고집하고 그 개별성을 내세우는 자아가 우리를 그와 똑 같이 만들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 그럼 우리를 이렇게 세워놓고 보라고 하는 직접적인 것이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1]원문 <Wahrheit/진리>

[2]원문 <dies Wahrheit dieses Ich>. 좀 장황하게 <개별적인 … 존재하는 터전>으로 번역하였다.

[3]원문 <Wesen/본질>. <존재하는 터전>으로 번역하였다.

[4]원문 <Punkt>. <점>. 역자는 여기서 롤랑 바르트가 “La chambre claire-Note sur la photographie”에서 이야기한 <Punktum>을 연상한다. 불행히도 이 책을 아직 읽지 못했다. <Studium>, <Punktum>을 알게 된 것은 데리다의 “Les morts de Roland Barthes”를 통해서 였다. 원본이 아니라 한겨울 조개탄냄새와 안개로 스산한 크로이쯔베르크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손에 쥐게 된 번역본 “Die Tode von Roland Barthes”를 통해서 였다. 롤랑 바르트가 누군지 데리다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죽음을 복수형으로 하여 “die Tode”한 제목이 마음을 사로잡았고, 몰이해의 바다를 표류하다가 가끔 보이는 이해의 섬을 기뻐하면서 읽어 내려간 책이었다. 이 책이 지금 옆에 없다. 한때 서너 권만 남겨놓고 책을 다 정리했는데 그때 함께 정리되어 버렸다.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다. 아무튼 <직접성>과 함께 사진, 그리고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Punktum>으로 헤겔을 맞설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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