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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8-후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지금>과 <지금>을 보여주는 것이 [단순하기는 한데], 이 어는 것도 [감각적 확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있는 그대로, 아무런 접힘/굽힘/기울임/주름이 없이/들지 않게 존재하거나 또는 들어 보여줄 수 있는] 자기 안에 아무런 매개를 갖지 않는 그런 단순한 것이[1] 아니라 둘 다 [다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서] 각 단계마다[2] 굽혀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3] 자기도 모르게 갖고 [그것을 줄줄이] 밖으로 드러내는 {다단계적인} 일개/일련의 [총체적인] 운동이[4] 되는 성질인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바로 이것>이라고 내놓는다[5]. 근데 내놓고 보니 뭔가 <다른 것>을 내놓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바로 이것>이 파기된[6]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젠] <바로 이 다른 존재>[7], 달리 표현하면 처음의 존재가 파기된 것으로 존재하는데,  이것 역시 다시 파기되어 처음의 존재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 존재는 [시간적인 맨 처음으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헤겔이 논리학에서 말하는 논리적인? 처음을[8]] 자기 안으로 반성한 제일 존재로서[9] 이 존재는 [시간적인] 맨 처음의[10] 존재와 온통 동일한 것이 아니다. 즉 맨 처음의 존재[양식]이었던 일개의 [굽힘이 없는] 직접적인 것이[11]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12] 자기 안으로 굽혀 들어간 것이다.[13] 달리 표현하면 다른 것으로 존재해도 [거기에 쏠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 유지하여 흩어짐이 없는] 단순한[14] 것이다.  <지금>은 개별적인  [쪼갤 수 없는] 하나로서[15], 이것을 [나누고 또 나눠봐도 모두가 다 <지금>이 되는]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16] 다수의 <지금>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이 정말로 {존재하는 모습}이다. <지금>을 쪼갬이 없는[17] 하루라고 하면, 이 하루는 [아무런 쪼갬이 없이] 온통 <지금>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지금>, 즉 시간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시간이라는 <지금>은 수많은 분을 <지금>으로, 일분이라는 <지금>은 수많은 초를 <지금>으로 포함하고 있고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 <지금>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지금>이 참으로 무엇인지 전부 다 말하는[18] 운동이다. 즉 <지금>이란 결과, 즉 수많은 <지금>을 하나로 묶어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을 보여주는 것은 <지금>이 [모든 <찰라>가 빠짐없이 갖는] 보편적인 것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1]원문 <ein unmittelbares Einfaches>

[2]원문 <verschieden/다양한>

[3]원문 <Moment/계기>

[4]원문 <eine Bewegung, welche verschiedene Momente an ihr hat.> 여기서 <an ihr>는 <자기도 모르게 갖고 밖으로 드러내는>으로 번역하였다.

[5]원문 <setzen>

[6]원문 <aufheben>

[7]원문 <dieses Anderssein>

[8]원문 <erst>. 여기서 <erst>는 영어 <first>, 독어 <Fürst/영주>, 라틴어 <princeps/시간적으로 그리고 열의 제일인자>, 희랍어 <arche/처음, 시작, 원리, 지배>라는 말들과 가족관계를 이루는 것 같다.

[9]원문 <dieses in sich reflektierte erste>

[10]원문 <zuerst>

[11]원문 <ein Unmittelbares>

[12]원문 <eben>

[13]원문 <ein in sich Reflektiertes>

[14]빈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의 “eine edle Einfalt, und eine stille Größe“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페터 스존디(Peter Szondi)를 따르자면 [참고: 페터 스쫀디, 시학과 역사철학 I] 독일의 이상주의/관념주의는 빈켈만의 논문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 그리스가 남긴 작품을 모방하는 것에 관한 고찰”Gedanken ü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hauerkunst)로 시작하는데, 이 논문의 핵심표어가 라오콘 동상의 음미의 결과로 산출된 “edle Einfalt”와 “stille Größe”를 접목시킨 것이다. 빈켈만은 이 두 가지를 바다와 비교하여 설명한다. 폭풍이 일면 바다가 표면적으로는 사납게 요동하지만 깊숙이는 항상 조용한 것처럼 그리스 조각품의 석상들도 [표면적으로는] 모든 격정을 보이지만 [안으로는] 자기 중심을 갖는 묵직한 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Das allgemeine vorzügliche Kennzeichen der griechischen Meisterstücke ist endlich eine edle Einfalt, und eine stille Größe, sowohl in der Stellung als im Ausdrucke. So wie die Tiefe des Meers allezeit ruhig bleibt, die Oberfläche mag noch so wüten, ebenso zeiget der Ausdruck in den Figuren der Griechen bei allen Leidenschaften eine große und gesetzte Seele.“ 이 “edle Einfalt“와 „stille Größe“를 역동화한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아닌지 모르겠다.

[15]원문 <ein Jetzt>

[16]원문 <absolut>. <서로 떨어져 상관하지 않는>이란 의미로 번역하였다.

[17]원문 <einfach>

[18]원문 <ausspre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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