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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20-후부

의식인 이상 모든 의식은 이와 같은 진리, 예컨대<여기는 나무다> 또는<지금은 대낮이다>라는 따위의 주장을[세움과 동시에] 스스로 파기하고 그 주장과 대립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는 나무가 아니라 집이다>. 나아가 의식은 처음 주장을 파기하는 다음 주장에 처음 주장에서와 같이 감각적으로 와 닫는<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있다면 다시 그 것을 지체 없이 파기해버린다. 그래서 의식이 감각적 확신 안에서[끝내] 정말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언사행위 혹은 지시행위로서의} <바로 이것>이[온통] 보편적인 것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은{감각적인<이것>이 의식이 마주하는 진리이고 이것을 경험하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라고 내세우는} 앞의 주장과 대립되는 것이다. — {<이것>의 실체를 주장하는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앎/지로서의} 보편적 경험을 운운하는 사람들에게는{정신현상학에서 나중에 이야기 되는 생명체, 즉 욕망으로서의 결정체를} 앞당겨{모든 생명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뭘 하는지라는} 실천적인 차원을 적용해 보는 것이 어쩌면 보다 알맞겠다.[1] 이와 같은 차원에서 감각에 와 닫는 대상의 실재가 진리이며 확신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지혜학교의 가장 낮은 수준, 즉 고대 엘로이시스 고장에서 행해졌던 케레스신과 바쿠스신의 비밀 종교 의식을 배우는 반으로 되돌아가 우선 빵 먹는 비밀과 포도주 마시는 비밀부터 터득하라고 꼭 일러주고 싶다. 왜냐하면, 이런 초보적인 비밀을 전수 받고 나면 감각에 와 닫은 사물의 존재가 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 헷갈리게[2]될 뿐만 아니라, 헷갈림이 심해져서 갈기갈기 찢긴 만신창이가 되고 도무지 자신과 대상을 간추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3], 한편으로 스스로 감각에 와 닫는 사물의 공허성을[4]{먹어치움으로써} 집행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적으로 와 닫는 존재들이{스스로} 그 공허성을 집행하는 것을 본다. 동물도 역시 이와 같은 지혜 밖에 있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 가장 깊숙이 빠져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동물은 감각에 와 닫는 사물을 대할 때 그것을 불변의 존재로[5]생각해서 그 앞에 멈춰서는 법이 없고, 오히려{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이 공허성을 알아차리고??} 이런{공허한??} 실재에 찢기고 또 찢기어[6]그 사물의 공허성을 완전히 확신하는 가운데 그것을 거침없이 낚아채 집어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엘로이시스 비의는 사실 감춰진 비의가 아니다.} [이 비의는 동물과 함께 자연 전체에 드러나는/계시된 것으로서] 자연은 감각에 와 닫는 사물의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비의의 축제를 공공연히 벌이고 있는 것이다.



[1]원문 <Bei dieser Berufung auf die allgemeine Erfahrung kann es erlaubt sein, die Rücksicht auf das Praktische zu antizipieren.> 헤겔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 알쏭달쏭하고 이해하기 힘들다.  <antizipieren>하면 나중에 이야기되는 것을 미리 언급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일어나는 일을 미리 내다본다는 의미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뭘 내다본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das Praktische>를 앞당겨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럼 이 <실천적인 것>이란 건 도대체 뭔가? 역자는 우선 이 <실천적인 것>을 의식이 등장하는 첫 모습, 즉 <앎/지>와 대조되는 것으로 보고 이어서 <실천적인 것>을 의식이 등장하는 다른 모습, 즉 욕망의 결정체인 생명체(Leben)와 연관시켜 이해한다. 여기서 헤겔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감각적 확신은 절대로 앎(Wissen)의 차원에서, 즉 이론적인(theoria/관조하는) 차원에서 <이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없고 오로지 욕망을 실현해 나가는 가운데 <이것>이 공허한 보편적인 것임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또 무슨 말인지 두루뭉실하지만 이런 말에는 익숙한지라 뭔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 문제에 달리 접근할 수도 있겠다.  역자는 서설 §26에서 헤겔이 1796년 8월 횔더린에게 헌사한 시 <엘로이시스>을 언급하였다. 그러니까 <정신현상학>을 완성하기 10년 전에 쓴 시다. 이 시에서 헤겔은 엘로이시스 비의에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실체와 하나되어 직관이 되는 것을 숭배하면서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정신현상학의 <감각적 확신>에서 헤겔이 취하는 입장은 <엘로이시스>시에서 그가 취했던 입장과 정반대인 것 같다. <엘로이시스>에서는 „아무런 맹세도 없었지만 우리 가슴 속에 뿌리내린 이 언약은 오직 자유로운 진리만을 삶 속에서 실현하고, 생각과 감각에 족쇄를 채우는(regeln) 겉치레와는 (Satzung) 절대,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언약이었지 않았던가.“(Des Bundes, den kein Eid besiegelte,/der freien Wahrheit nur zu leben,/ Frieden mit der Satzung/ Die Meinung und Empfindung regelt, nie nie einzugehn.)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Satzung)를 Meinung과 Empfindung에 족쇄를 채우는 감옥으로 생각했지만 <감각적 확신>에 와서는 언어야 말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Meinung은 막스 폰 쉔켄도르프의 시 „Freiheit, die ich meine“(“내게 진정 사무친 자유“)에서 <meinen>이 사용된 것과 같이 번역해야 올바를 것 같다.} 이 문제는 아무튼 두고 더 살펴봐야 할 문제인 것 같고, 나중에 생명체와 더불어 욕망을 이야기할 때 되돌아와서 다시 한번 살펴볼까 한다.

[2]원문 <Zweifel/의심>

[3]원문 <Verzweiflung>. <헷갈림이 심해져서 … 상태>로 좀 장황하게 번역해보았다. <절망>하면 라틴어 <desperatio>에서 유래된 말들 (despair 등)과 똑 같은 구조다. <desperatio>는 어쨌든 간에 <희망/spes>과 관계하고 있고, 이것은 <절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어의 <Verzweiflung>은 희망이 아니라 <Zweifel/둘로 갈라짐, 의심>과 관계하는 것으로서 <갈라짐>이 심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M. Theunissen의 철학개념사 사전의 Artikel <Verzweiflung>참조. 서론 §8과도 비교해 보아야 할 것 같다.

[4]원문 <Nichtigkeit>

[5]원문 <an sich seiend>

[6]원문 <verzweifelnd an ihm [am Sein der sinnlichen Dinge]>. 번역은 했지만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뭐에 <verzweifeln>한단 말인가? 사물의 실재에? 아니면 실재라고 생각하고 애타게 쥐어 붙드는 것이 매번 공허한 것이 되어서? 동물이 이런 절망을 보인다?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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