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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A. 의식 I. 감각적 확신; <바로 이것>과 사념, §19

(§19)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고정시켜 [도려낸] <여기>도 위와 마찬가지다. 내가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한1<여기>라고 하지만 사실<여기>는 내가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할 수 없는 것으로서2 내가 지시하는 <여기>는 앞뒤, 위아래, 좌우 등 수많은 <여기>를 [동반하는] <여기>다. <위>를 따로 떼어놓고 봐도 마찬가지로 <여기>가 다시 위아래 등등 수많은 다른 존재가 된다. 찍어 보여주려고 하는<여기>는 매번 다른<여기>들 속으로 사라지고, 이런 상황이 반복되어3 다른<여기>들 역시 다 사라진다. {그럼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손가락으로 지시되어 고정되고 존속하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이것>이다.4 <이것>이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이것>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누가/헤겔 혹은 우리가 부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감각적 확신이 <여기>라고 지시하고  그<여기>를 자기가 지시하는 데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를 [우리가] 그대로 따를 뿐인데 우리가 감각적 확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여기>가 스스로 자신을 파기하기5 때문이다. 그래서 [감각적 확신이]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하면서 보여주는<여기>는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수많은 <여기>들만이 모인 {집합체로서 그 안에 아무런 구별이 없는} 단순한 총체다.6 [감각적 확신이] 쏠려있고/마음을 두고/헤어나지 못하고/사랑하는7 <여기>는 점과8 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그러나 감각적 확신이 meinen하는 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여기>가 이런 점으로 존재한다고 보여주는 행위는 이렇게 행위하는 가운데 스스로 직접적인 지가 아니라 사념된 <여기>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여기>를 거쳐서 보편적인 <여기>로 귀착하는 운동임을 스스로 드러낸다.9 이런 {운동결과로서의 보편적인} <여기>는 하루가 <지금>의 단순한 다수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의 단순한 다수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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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 <dieses>텍스트로 돌아가기
  2. 원문 <nicht dieses>. <손가락으로 찍어 지시할 수 없는 것>으로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원문 <aber>. <abermals>란 의미로 번역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원문 <ein negatives Dieses>텍스트로 돌아가기
  5. 원문 <sich aufheben>텍스트로 돌아가기
  6. 원문 <eine einfache Komplexion vieler Hier>. 여기서 <Komplexion>을 키케로가 “투스쿨란에서의 대화” 5권 10.20 “cumulata bonorum complexio”에서 <complexio>를 “Inbegriff”란 의미로 사용한 것에 기대어 번역하였다. “[나쁜 것은 다 빼고] 좋은 것만 모아 논 것”이란 의미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원문 <meinen>. 헤겔을 따라 <자기 [혼자만의] 생각>이란 의미로 번역하지 않았다. 감각적 확신의 입장을 최대한 강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8. 롤랑 바르트의 <punctum>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punctum>에 관한 이야기는 데리다의 <롤랑 바르트의 죽음들>과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사진에 관한 노트>를 제대로 읽어보고 나서 자세히 하고 싶다. 우선 롤랑 바르트가 그의 가슴을 꽉 찌르는 사진, 즉 엄마사진은 게재하지 않았다는데 주목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대충]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사진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이 사진은 오직 저에게만 존재합니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진입니다. 절대 우연적인 대상이 발현하는 수천가지 모습 중 그 하나일 뿐입니다. 잘해봤자 스투디움(studium)이란 맥락에서 당신의 관심을 끌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사진은 당신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www.lustauflesen.de/2010/barthes.shtml에서 인용.번역) 이렇게 보자면 점(puctum)은 보여줄 수 없는 것이고, 보여줘 바야 보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람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점일 뿐이다. 여기서 점의 존재가 문제인가?텍스트로 돌아가기
  9. 헤겔은 롤랑 바르트의 <studium>만 이야기하고 있는가?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