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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II - 이성과 겸손

횡설수설하는 인간이 어찌 유럽 정신사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이성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겠소만, 그래도 답답한 마음에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게다가 겸손까지 곁들어 놓고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본인도 알송달송하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오래된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어딘가에서 베껴다 놓은 한 구절이 생각나서 중이 목탁 두드리듯 키보드를 두드려본다.

 

“… quantum ipsa lux quae iluminat cor quaerentium se nobis aditum rerum quas ingredi conamur aperuit ostendemus.”

 

알고보니 9세기에 살았던 아일랜드 출신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annes Scottus Eriugena)의 <예정론>(De praedestinatione)의 1장 2절 첫 문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빛이, 궁금해서 안절부절 하는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는 빛이, 우리가 애써 파헤쳐보려는 노력하는 사물로 들어가는 문을,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이미 얼마나 열어 제켜놓았는가를 보여줄 생각이다.”

 

이 구절을 음미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이성과 겸손이었다. 여기에 유럽에서 말하는 이성의 본질이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미 이해의 장에 들어가 있다는 해석학적 이성 혹은 아프리오리나 존재적/존재론적 아프오리 말이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물론이고.

 

후쿠시마 사태를 보면서 이건 합리성으로 추락한 이성의 결과물이라고 비약해본다. 이성이 합리성으로 추락하면서 교만한 것이 되었다고.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가 나사로를 다시 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예수가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를 매우 사랑하고, 나사로를 일러 친구라고 하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누이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41절 이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의 자세다. 예수가 “나사로야 일어나라” 해서 나사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나사로는 이미 일어나 있는데, 다만 자기가 하나님과 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양해를 구하고 그렇게 소리질러 명했다는 것이다. 에리우게나의 자세가 구조적으로 이런 예수의 자세와 비슷한 것 같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모세는 이 부분에서 실수를 저질러 가나안 땅을 보긴 했지만 들어가진 못했다.

 

그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성이란 무엇인가? 물론 무엇이라고 들어올려 보여줄 수 없지만 달리 할 수 없어 무엇인가라고 질문해 본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지만 아픔과 아픔의 기억이 발하는 빛에 기대에 “그건 아니다”라고 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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