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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을 어떻게 알파벳으로 표기하지? Isang, Yisang, Leesang, Lichan, Rheesang 등 어지럽다. 붙임표를 ‘이‘와 ‘상‘사이에 삽입하거나 ‘상‘을 대문자로 시작하면 그 변화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
게다가 ‘이상‘을 ‘스모모하코‘로 읽고 무슨 말인지 갸우뚱하듯이, ‘이상‘을 이상(理想)으로 읽고 <꾿빠이, 이상>은 도대체 뭘 말하는지 어리둥절해 할 수도 있겠다. 동독이 붕괴되기 직전 혼수상태에 빠지고 레닌의 동상이 크레인에 들려 병실 창문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다시 깨어나는 엄마를, 갑작스런 시대변화에 의한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아들의 노력을 소재로 한 <Goodbye, Lenin>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떠올리고 ‘사상의 종말‘에 접한 사회상을 그린 소설 제목인가하고 영 엉뚱한 길로 빠질 수도 있겠다. 내친 걸음 더 나아가면, ‘Goodbye‘가 ‘꾿바이‘로 넘어왔다가 다시 알파벳으로 넘어가면, 넘어오기 전의 ‘Goodbye‘로 다시 넘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도 가능하겠다. ‘꾿빠이‘로서의 ‘Goodbye‘와 ‘Goodbye‘ 사이에 차이가 있느냐는 말이다. ‘Ringwanderung’이 한국에 착륙하여 ‘링반데룽‘이 되었다가 되돌아가면 ‘Ringwanderung’이 되는지 아니면 ‘Ringwandelung‘이 되는지 궁금하다. (물론 ‘Ringwandelung‘이 독어에 없는 말이란 전제아래 그렇다. 독일에서도 산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말인데 나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다. 만약 독어에 없는 말이라면 ‘링반데룽‘이란 말을 만든 (한국의? 일본의?) 독어감각은 과연 뛰어났다고 할 수가 있겠다. ‘Schlafwandeln‘(몽유병)에서의 의미로서의 ‘wandeln’을 ‘Ringwanderung‘에 접목하여 새로운 낱말을 창조한 것이 아닌가.)
Traduttore/Traditore – ‘Schiboleth’이 ‘Siboleth‘이 되면 목을 내놓고 강을 건너야 한다. Schiboleth이 Siboleth이 되지 않게 하는 일이 쉬운 일같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알러(Aller)강에서 그랬던가, 칼 대제에 패배한 작센족은 ‘아멘‘하고 세례를 받으면 살았고, 그렇지 않으면 목을 잃었다. 강에 물이 흐르지 않고 피가 흘렀단다. 그냥 배반하고(거짓말하고) 넘어갈 수 없었을까? 목을 내놓은 사람들은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다른 것과의 등가교환은 고사하고 소통조차 불가능한 소유(Eigentum)가 낱말에는 있다. 그것이 (목)소리라고 폴 드 망은 니체에 기대어 설명한다(„Allegories of Reading“). 연인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꾿빠이, 이상>의 김연 기자는 정희의 깔깔거리고 „어머“하는 소리에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근데 깔깔거리는 소리와 „어머“하는 소리가 번역이 안 된다. 한독사전을 뒤적거려보니 ‘어머‘는 ‘ach!; ach Gott!; Wehe mir; du meine Güte!‘ 등이란다. ‚ach‘가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것 같은데, ‘어머‘하는 소리에 겹치는 정희의 모습은 ‘ach!‘하는 소리에 겹치는 여인의 모습이 아니다.
‘이상‘은 어떤 소리지? 그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여 어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어느 날 기억 속에서 사라진 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남도의 소리였다. 알파벳소리에 익숙해진 내 안에 다른 소리가 있었다. 내 이름을 남도의 소리로 부르던 그 목소리는 나를 뒤집어 놓았고, 나는 헤매다 그 소리로 돌아왔다. 그 소리가 내 짝지가 되어 지금 내 팔을 베고 고르게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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