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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르바흐 테제 받아들이기 힘들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읽어 본 사람이 한두명은 아닐 것이다. 노동운동하는 사람이라면 자본론은 읽어 보지 않았을지라도 몇 장 안되는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틀림없이 읽어 보았을 것이다. 11번째 테제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알만한 것이다. 이 정도 모르면 이제 교양없는 사람이 된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인생의 기로를 바꾼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학생들로 하여금 노동 현장에 뛰어들게 했다는 말이 아니다. 포이에르바흐 테제가 노동 현장에 뛰어든 학생들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의식화교육의 자료에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의식화자료로 쓰기에도 알맞다. 양이 그렇고 내용이 그렇고 특히 말의 흐름이 그렇다. 뭔가 새로운 것에 동참한다는 힘차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오래만에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읽어보고 내키는데로 번역해 보았다. 힘들다. 번역이 아니라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받아들이기 힘들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우선 이디오진크라지다. 포이에르바흐 테제는 아마 수많은 비판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포이에르바흐 테제에 기댄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참 힘든 비판이었다. 내용보다 어투가 마음을 상하게 했고 결국 관계까지 파괴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안에는 포이에르바흐 테제를 거부하는 뭔가가 있다. 두번째로는 맑스가 후에 포이에르바흐 테제에서 멀어졌다는 느낌이다. 이는 맑스가 쓴 글을 조목조목 인용하면서 주장해야겠지만 우선 맑스가 노동현장에 뛰어들지 않고 영국국립도서관에 10년동안 쳐 밖혀 자본의 운동을 담아내는 개념사업을 했다는 것으로 대체해 본다.

실천이란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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