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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접근을 통한 변화' - 3

미국 대통령은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지 않는 범위에서 동구권 국가들과의 교역이 가능한 한 많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을 독일에 적용하면 대단히 넓은 [실용]영역이 전개된다. 이 영역을 먼저 우리들의 가능성 및 한계들의 관점에 따라서 [시침바느질하듯] 길잡이가 되게 나누면(abstecken) 좋을듯하다. 내 생각에는 [이런 가능성들이] 지금까지 언급된 그 어떤 수보다 훨씬 더 크다. 앞에서 언급한 제한아래 동서교역의 강화가 서구의 이익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im Interesse des Westens) 게 틀림없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면 그것은 또한 독일의 이익으로 해야 할 일이고, 독일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 때에 우리는, 익히 알려진 [조무래기의] 자세를 일컫는 잘 알려진 쾰른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고집을 피울(pingelig sein)1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정치의 목적은 물론 동독지역의(Zone) 협박일 수 없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정권은, 더군다나 동독지역에서와 같이 위협을 받은 정권은 경제관계들에 의해서 자신이 성격이 변경되게 내버려 둘 수 없다.2  [그런 변화를 반대급부로 요구해야 한다고 하지만](aber) 그것은 엄밀하게 따져보면 폴란드에 신용대출을 할 때 미국도 요구하지 않았고 그게 또한 강화된 동구권교역을 원하는 미국이 뜻하는 바(Sinn)도 아니었다. 우리가 직면하는 상황에선(uns) 먼저 인간이 문제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인간의] 상황을 편하게 하는 생각가능하고 책임질 수 있는 모든 시도를 철저하게 다 이용하는 게 문제가 되어야 한다. 물질적인 개선은 [아마] 동독지역에서(Zone) 긴장완화의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보다 더 강화된 소비품공급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 소련에서 소비욕구가 불어나 긍정적인 효과에 기여했다. 이게 동동지역에서는 (Zone) 아니라고 하는데 왜 그런지 이해할 수가 없다. 소련은 서구를 따라잡고 추월하겠다는 목표로 [서구와의 경쟁에] 나섰다. 다른 영역이 아니라 서구가 가장 강한 생활수준의 영역에서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목적이야말로 필경 서구를 모범으로 삼고 서구의 능력에 눈을 맞추고 있다는 건 차치하더라고 이런 정책이 동구권에서 동독(Zone)만을 제외할 수 없다는 건 명료하다. 생활수준의 향상 과정을 가속하는 건, 이를 통해서 다층적인 종류의 편익이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강화된 경제관계로 강화된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그럼 [그런 편익이 제공됨으로써] [동독의] 동포들의 [동독 정권에 대한] 불만족이 느슨해지지 않나하는 [그래서 분단이 영구화되는]걱정까지 할 수 있겠다. [잘못된 생각이다.] 역으로(aber) 바로 그게 바람직한 것이다. 바로 그게 통일과정에서 통제 불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 결과 [상황을] 필연적으로 [통일의] 후퇴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요소가 누락되는 또 다른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편익으로] [동독] 정권을 지원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aber) 나는 바로 [동독] 정권붕괴를 통해서는 실천가능한 길이 전혀 없다는 걸 [증명하는 논리의] 개발을 시도했다. 나에게는 오직 소련의 이익을 고수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소련의 개입을  불러일으킬 혁명적인 격변의 위험이 수반되지 않게 극소량의 분량으로 생활고를(Erleichterung für die Menschen/여태 편익으로 번역함) 덜어주는 좁은 길만 보일 뿐이다.

 

연방정부는 최근 정부성명에서 ‘[우리는] 동독지역의(Zone) 형제[자매]들이 [우리의 협상요구에]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응할 수 있다면, 많은 것에 관한 대화의 창구가 될(mit sich reden lassen)’ 준비가 되어있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이때 인도적인 고려가 민족적인 고려보다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나의 상술을  이런 맥락의 토론에 기여하는 것으로 알아차리고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장벽이 약함의 증후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게 공산주의 정권의 불안과 자기보존의 증후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전적으로 정당한 [동독정권의] 근심걱정을 점진적으로, 동독이 보기에 [서독과의 협상이 수반하는] 위험이 감수할 만하기 때문에, [동독의 동의하 철통같은] 경계와 장벽의 완화가(Auflockerung) 실천가능하게 될 때까지 덜어주는데 있다. 이것은 접근을 통한 [점진적] 변화라는 말로 축약될 수 있는 정책/정치다. 나는 우리가 이런 정치/정책을 아무런 환상 없이 추진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다고 굳게 확신한다. 나아가 이런 정치는 평화전략이라는 서구 구상에 꽉 들어맞는(nahtlos) 정치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적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이건 정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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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쾰른 등 라인강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 'pingelig'의 어원은 ‘peinlich'로서 죄(poena 라틴어)를 의식하면서 한편으로는 수치심을 느끼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나 뭔가를 잘못하지 않았는지 지나치게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잘못을 꺼내는 소시민적인 심정을 일컫는 말. 주지하다시피 쾰른시민들은 느긋하다. 유유히 흐르는 라인강을 보고 살아서 그런지 쾰른 대성당을 짓는데도 근 600년이 걸렸다. 돈이 떨어지면 공사를 중단하고 돈이 생기면 계속하고. 앞 포스팅에서 소개한 ’저항의 미학‘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활동에서 느끼는 감정을 ’peinlich'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불쾌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수치심을 돋우는 거’라고 번역했는데, 독어에는 이런 [변증법적] 관계에서 부동하는 말들이 많다. 이런 웅성거림의 번역이 참 어렵다. 이런 웅성거림 때문에 독일에서 변증법이, 해석학이, 소통이론이,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이런 웅성거림을 해소하자는, 차후 20세기 영미철학의 주류가 된 의미론이 태동하지 않았나한다. 내친걸음 한마디 덧붙이자면 칼 슈미트가 지적했다시피 독어는 신학자와 장인의 언어인 것 같다. 이런 결합의 결정체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아니가 하고. 횔더린은 휘레리온에서 독어의 장인적인 성격에 통탄한 반면 헤겔은 장인의 숙련을 높이 평가했지 않나한다. 암튼 숙련된 장인은 느긋하다. 엄밀한 잣대로 재봐야 하니 어쩌니 등 개고집을 피우지 않고 수많은 시도로 숙련된 눈짐작으로 벽돌을 척 둘로 나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진보넷 바깥블로그 EM님의 글 ‘숙청과 공개처형 사이’가 이 논리를 정교하게 전개하고 있다. http://socialandmaterial.net/?p=5736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