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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들판. 앞과 다른 장소) (지속되는 무서운 폭풍)
리어:
바람아 불어라, 볼이 찢어지게 [불어라]! 미쳐 날뛰어라! 불어라!
너희 물벼락과 폭풍아, 내뱉어라,
종탑이 물을 먹을 때까지, 풍항계가 잠길 때가지!
생각처럼 번뜩이는 너희 유향 불이여!
참나무를 쪼개는 벼락의 전신이여!
내 흰 머리를 그을려라! 그리고 너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이여!
두꺼운 원형 지구를 때려 납짝하게 만들어라! 자연의 주형을 깨부수고
배은망덕한 자를 만드는 씨를 당장에 엎질러버려야!
바보:
아저씨, 아늑한 집 안에서 [궁중의 성수(聖水)] 아첨의 침을 뒤집어 쓰는 것이 문밖에서 이런 비를 맞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현명한 아저씨, 들어가서 따님들의 자비를 구해요. 오늘같은 밤은 무자비해요. 현인, 바보 가리지 않아요.
리어:
그래 네 뱃속 가득히 우르렁 거려랴! 불아, 토해내라, 비아, 뱉어내라!
비, 바람, 번개, 천둥, 너희 그 누구도 내딸이 아니다.
너희 [자연의] 원소들이여, 나는 너희들이 타락했다고 비난하지 않겠다.
나는 너희에게 왕국을 내주지 않았고 너희들을 자식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너희는 내 앞에서 길 필요가 없다. 그러니 맘껏 퍼부어라
너희 참혹한 즐거움을. 나 비켜서지 않겠다. 너희들의 노예가 되겠다.
가난하고, [물러]설곳 없고, 병들고 멸시받는 이 늙은 사람 나.
그러나 이 말은 꼭 해야겠다. 너희들이야말로 비굴한 들러리들이라고.
악독한 두 딸의 편에 더하다니
저 높은 곳에 뿌리를 둔 전사들을, 이렇게
늙고 허연 머리를 상대로 하여. 아니야, 이건 아니야.
바보:
자기 머리를 둘 수 있는 집이 있는 사람은
좋은 머리보호대가 있는 셈이지.
불알보호대만 만들고
[귀]두의 집은 생각하지 않으면
[귀]두와 불알에 다 이가 들끓게 되지.
거지들의 짝짖지가 많은 경우 이래.
발가락을 심장이 차지해야 할 자리에 모신 사람은
티눈에 비명을 지르고
편안한 잠을 뜬눈으로 셀거야.
지금까지 얼굴이 판판한 여자치고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려보지 않은 여자가 없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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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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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아시아타임스에 게재된 글을 번역해보려고 합니다.http://www.atimes.com/atimes/China/EE14Ad01.html
자기기만의 문제
1부- 식민주의에서 혼란으로
현재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위기는 홍콩이 “일국양제”라는 인위적 분리에도 불구하고 분리할 수 없는 중국의 일부라는 명백한 사실을 강조한다.
1997년 7월 1일 중국은 1세기 반에 걸친 수치스러운 식민지 점령 후에 홍콩에 대한 주권을 되찾았다. 90% 이상이 중국인들인 홍콩 주민들에게 국가적 자긍심과 번영의 회복의 시대가 시작될 수도 있었으나, 지난 5년간 홍콩은 정체성 위기의 혼란과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위축의 충격으로 전락했다. 영국은 떠나기 전 15년간 가장 사악한 정치제도인 식민주의를 가짜 민주주의와 엉터리 자유의 안식처로 위장하고 식민지배하의 거품경제를 자유시장 근본주의의 허위 모범으로 제시함으로써 홍콩을 중국의 시한폭탄으로 만들어놓았다.
눈먼 사랑의 열병은 결함을 미덕으로 위장한다. 식민주의 백성들과 사랑에 빠진 러디어드 키플링이 인종주의적 착취를 “백인의 짐”으로 생각한 것처럼, 식민지 홍콩과 사랑에 빠진 노벨상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의 식민주의 주인들과 매판 자본가들의 향응접대에 현혹되었다. 홍콩의 고도로 조직된 식민 지배경제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먼은 홍콩의 식민 경제제도를 자유시장으로 착각했다.
156년간 영국은 대영제국 왕관의 보석인 홍콩의 경제를 변화하는 글로벌 지정학적 세력들에 대해 영국에 유리하도록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교묘히 조종했다. 상황이 가장 좋았을 때조차, 홍콩 현지의 평균적인 중소기업들은 영국 식민정책의 지휘 아래 영국의 독점 무역회사와 은행들의 처분대로 운영되어야 했으니, 평범한 노동자들이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영국 독점기업들은 자신들이 군림하는 제도적 노예화를 자유시장으로 위장함으로써 규제되지 않은 무자비한 약탈적 경쟁의 공급망을 통해 가격을 낮출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적자생존의 경쟁체제가 아니라 분할지배 전략의 궁극적 목적인 적응하는 노예만이 생존할 수 있는 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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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먼은 외환시장 세력이 정한 자유변동환율제에 대한 옹호가 자신의 상표인 통화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홍콩의 재량적인 통화위원회에 사과하기까지 했다. 홍콩 달러의 연계환율제는 1997년에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기로 한 1982년 중영 공동성명에 대응하는 정략적 조치로서 1983년 영국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그 후로 정치적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흔히 주장하는 통화주의자의 통찰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중적으로는 페그제로 알려진 연계환율제는 1990년대 초 홍콩의 거품경제 배후에 있는 핵심요인이었고 1997년에 시작된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로 홍콩에게 꾸준한 나락의 굴레를 씌우고 있다,1935년부터 1967년까지 홍콩은 대영제국의 스털링 헤게모니의 일부로서 파운드 스털링에 고정된 고전적인 식민주의 통화위원회를 운영했으며, 이 제도는 정부가 아닌 영국 민간은행들이 통화를 발행했고, 이 관행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1960년대 말에 파운드 가치의 불안정 때문에 홍콩은 금이 뒷받침하는 미국 달러 페그제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브레튼우즈체제가 성립하면서, 조인국들이 사적인 목적으로 금을 수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영국은 조인국이었지만 포르투갈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 달러가 금을 벗어던진 뒤 2년 후인 1974년까지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금 밀수사업은 번성했다. 미국의 조치는 실질적으로 브레튼우즈체제의 고정환율제를 폐지했기 때문에, 홍콩은 1974년에 금을 수입할 때 특별한 자격증을 요구하는 법을 폐지했다. 포르투갈의 꼬마 식민지 마카오는 이 시기에 세계 최대의 금 수입국이며 재수출국 중 하나가 되었다.
1971년 미국이 금 1온스당 미화 35달러에 고정된 달러와 연동된 브레튼우즈체제의 고정환율제를 중단한 뒤, 미국 달러 역시 주기적인 공격을 당했고 결국 달러는 자유변동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홍콩도 변동환율제를 택했고 그런대로 잘 흘러가다가 홍콩의 중국 반환에 관한 중영 협상이 시작되자 이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위태로운 식민지 통화인 홍콩 달러에 대한 무모한 투기의 고삐가 풀렸다. 1983년 10월 말경, 홍콩 통화는 7.8:1의 비율로 미국 달러에 고정되어 있었고, 홍콩 달러는 과거 정상시장의 고정비율인 약 5:1에 비해 실질적으로 가치가 50% 하락했다.
홍콩 식민정부에게는 애석하게도, 프리드먼은 1997년 후 “홍콩 달러는 위안화에 흡수되고 홍콩의 외환보유고와 해외자산은 중국이 인수하는 길밖에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이것은 합리적 제안이었고, 홍콩 특별행정구(SAR) 정부가 그 제안을 따랐더라면, 홍콩은 자유태환에 의해 과대평가되는 통화로 인한 디플레이션 때문에 마이너스 성장 대신 중국 경제와 더불어 지금쯤 9% 성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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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홍콩 총독인 크리스 패튼이 홍보한 가짜 민주주의와 프리드먼의 환상이 창조한 자유시장 신화는 홍콩의 열렬한 자기기만을 부채질해왔다. 오늘날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의 홍콩에서 너무나 자주 화제에 오르는 이른바 법치란 현지 화교기업이 150년간의 식민 재판에서 영국 무역회사를 상대로 단 한 건의 소송에서도 이겨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홍콩의 낮은 세금 신화는 1세기가 넘도록 추접하게 주요 땅 투기꾼 역할을 해온 정부가 터무니없는 토지세를 감추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홍콩 경제를 항상 움직여온 것은 자유시장 근본주의가 아닌 지정학적 조건이었으니, 민주주의나 법치는 말할 것도 없다.대부분의 분석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홍콩의 미래는 중국의 일국양제 정책 고수, 홍콩 내부 자치권에 대한 불간섭, 공상적인 자유시장 체제의 지속, 법치를 가장한 식민법의 통치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홍콩의 미래는 홍콩이 냉전 종식 이후 글로벌 지정학 지형의 변화를 재인식해서 그 속에서 홍콩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역할에 대처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일국양제 정책이 홍콩의 식민체제를 있는 그대로의 식민통치와 지배경제가 아닌 민주적이고 자유시장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실수였다. 일국양제 원칙을 바탕으로 작성된 홍콩의 소헌법인 기본법에는 영미 프로파간다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홍콩의 정치, 경제 제도를 규정하는 조항들이 있다. 기본법은 본질적으로 반환 후 50년간 중국의 주권 아래 서방의 신제국주의의 지속을 용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헌법 조항들은 SAR 정부가 현실을 직시하고 진정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그 어떤 시도도 제약한다.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헌법은 이제 홍콩이 (중국 남부 광둥성의) 진주강 삼각주의 급성장하는 경제와 통합하려는 노력에 장애가 되고 있다. 중국은 지금처럼 직접 접촉이 가능한 시대에 홍콩의 매판세력(compradorism)이 필요하지 않으며, 서방에 있는 중국의 교역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10년에 걸쳐 미국이 도입한 글로벌화 속에서 세계무역은 변했으며, 임박한 붕괴와 재구성에 따라 다시 변하고 있다. 중국 땅의 국제 무역중심지로서의 홍콩이 생존하려면 새로운 지정학 지형에 따라 변해야 한다. 식민 통치를 신자유주의로 위장하는 영국의 프로파간다 때문에 중국 주권 하의 홍콩이 정책 마비상태의 덫에 걸려서 노화로 인한 기능장애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는 사실을 알려주는 부인할 수 없는 조짐이 점점 늘고 있다. 영국이 지난 1세기 반 동안 그러했듯이, 홍콩에서 영국을 대신한 중국이 지배경제가 중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봉사할 수 있는 정책을 세울 때에만 홍콩은 번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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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반에 홍콩은 중국 남부의 낙후된 벽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언젠가 지정학에 의해 세계무역 중심지로 변할 것이라는 징후는 전혀 없었다. 19세기 내내 중국은 해외무역에 관심이 없었다. 따라서 남중국해 연안에 있는 수심이 깊은 천연항은 중국 경제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1800년대 초 홍콩은 주로 토착 농민, 어민, 해적, 밀수꾼이 사는 곳이었다. 그 당시에 중국은 홍콩에서 북으로 145km 떨어진 진주강 상류의 광둥, 더 올바르게 말하면 광저우에서 점점 더 못살게 구는 서방과 마지못해 접촉했다. 중국 관리들이 엄격히 단속하는 격리구역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무역업자들이 거주하면서 일했던 곳은 바로 광둥이었다. 영국 외항선은 홍콩의 침수항이 진주강과 광둥을 왕래하면서 화물을 싣고 내리는데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역은 아주 느리게 그리고 중국에 유리하게 진전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경제가 서구경제로부터 무역을 통해 받을 수 있는 것보다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영국인들은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꾸준히 은을 유출시키는 이런 무역불균형에 대한 대책을 곧 마련했다. 영국인들은 주로 영국령 인도에서 재배하는 아편을 불법으로 중국에 수입했다. 아편은 옹정제(1723-35)의 치세였던 1729년 이래로 판매와 사용이 금지되었고, 가경제(1796-1820) 치세에는 수입과 재배가 불법이 되었다. 불법 아편무역이 번성하면서 영국인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남긴 것은 바로 광둥에서였다. 1840년 즈음에는 영국인들이 매년 아편 4천 궤를 수입했으며, 영국인들에게는 궤당 미화 25달러의 아편을 2,075달러(160스털링)에 팔았다.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와 혈연관계인 델라노가와 같은 미국 무역업자들도 터키 아편을 중국에 실어 나르고 보스턴행 양키 클리퍼선에 중국 차와 도자기를 싣고 돌아오면서 거대한 부를 쌓았다. 보스턴의 상당한 부가 이런 마약무역에서 나왔고 미국의 서부진출을 위한 자본을 제공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경제 중 하나였던 중국으로부터 이렇게 막대한 부의 불의한 이전은 1800년대 유럽과 북미의 경제발전의 자금을 마련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의 아편중독은 단기간 내에 전염병 수준으로 증가하면서 중국 사회의 각계각층을 피폐하게 했다. 청 왕조는 1840년 광둥 특사를 임명하면서 은밀히 퍼지는 아편무역을 근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명된 지 1주일이 지나서 임칙서는 군대에게 광둥의 국제 거주지를 포위하라고 명령했고, 영국 마약딜러들에게 아편 밀수품을 전부 넘기라고 요구했다. 6주간 대치 끝에 영국 마약딜러들은 2만 궤가 넘는 마약을 내주었고, 임칙서는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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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회사와 홍콩에서 지금도 활동하는 주요 영국기업인 자딘 매디슨(Jardine Matheson) 회사를 앞세운 영국의 아편 무역업자들은 1차 아편전쟁(1839~1842년) 당시 영국군의 적대적 대응을 선동했다. 식민지 홍콩학교에서 사용되는 영국 발행 교과서는 아편전쟁을 사유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으로 묘사했다. 1841년 1월 26일 영국 왕립해군이 경비가 없는 홍콩 북서부해안에 상륙해서 유니언잭을 게양한 뒤 전쟁을 북쪽으로 확장하기 위한 해군기지로 삼기 위해 섬을 점령했다. 시대에 뒤진 중국의 해군과 육군은 대포로 무장한 영국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차 아편전쟁은 1842년 난징조약으로 끝났다. 이것은 그 후 반세기에 걸쳐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쇠락하는 청 왕조에 부과한 수많은 “불평등조약”의 시작이었다. 굴욕적인 조건들 중에서도 특히 이 조약은 중국이 중국의 5개 무역항에서 영국의 치외법권적 특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한다. 또한 이 조약은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했다.20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2차 아편전쟁(1856~1860년)이 또 다시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북경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런던은 중국 본토에서 홍콩섬을 연결하는 스톤커터섬과 구룡반도에 대한 영구적 통치를 주장했다. 세기말 경 다른 유럽 열강들과 일본이 몰락의 최종단계에 접어든 청 왕조에게 무수한 양보를 요구해서 받아냈다. 홍콩의 안전을 핑계로 영국은 장차 신제(New territories)가 될 구역의 99년간 점유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 땅은 구룡반도보다 훨씬 더 중국과 인접해 있다. 임대차 계약은 1898년 7월 1일에 시작되어 1997년 7월 1일에 만료된다.
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뉴욕시와 뉴저지의 대부분을 정부가 마약왕의 영향 아래 있는 콜롬비아에 양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면 된다. 노쇠한 청 왕조를 전복한 1911년 혁명 후 중화민국 새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국가적 수치의 이 시기에 중국에 부과된 모든 불평등 조약들의 무효를 선언했다. 1949년 10월 1일 수립된 인민공화국 역시 같은 입장을 취했다.
홍콩에서 새로운 영국 식민지 정착은 처음에는 천천히 성장했다. 인구는 1851년 32,983명에서 1931년 878,947명으로 늘어났다. 영국의 인종적 탄압에 대응하여 사회불안이 되풀이되면서 홍콩에서 국수주의적 함축이 담겨 있는 중국 제노포비아를 불러 일으켰다. 역사적으로 중국 사회는 유럽 식민주의의 도래 이전까지 다민족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었다. 이러한 국수주의적 소동의 배후에는 영국 통치자들이 굽실거리며 아양을 떠는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지탱하는 허울뿐인 안정과 번영이 숨어 있었다. 이 유지들은 그 보상으로 독점적 국왕 하사품 중에서 영국 무역회사들이 별로 수지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넘겨받았다. 홍콩이 경제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한 것은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망상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식민지배자의 지정학적 이익에 봉사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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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에 대항하여 쑨원이 이끈 1911년 혁명의 모태는 해외의 화교사회였다. 홍콩이 이런 활동기지 중 하나였던 이유는 중국어에 능숙하지 않은 영국 당국이 바로 코앞에 있는 중국 혁명가들의 활동을 적발해서 진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국 왕권에 대한 무례나 영국 당국에 대한 적대와 같은 어떠한 반제국주의적 표현도 구금 그리고/또는 추방으로 즉시 그리고 단호히 진압했다. 2차 대전 후에도 스포츠 행사가 시작하기 전이나 영화가 끝날 때 “God Save the King/Queen”이 연주되는 동안 기립하지 않거나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은 형사처벌 대상이었다.20세기 초의 수십 년 동안 홍콩은 1851년 태평천국 봉기와 1912년 중화민국 수립 후 군벌에 대항한 북벌 당시 본토의 사회불안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3대 노동쟁의, 즉 만주 철도노동자 파업 지지를 위한 1차 총파업(1920년), 선원파업(1922년), 광둥과 홍콩 총파업(1925~1926년)의 발발은 전반적인 혁명적/민족주의적 분위기와 홍콩 주민들과 본토의 동포들의 밀접한 관계를 반영했다. 이 파업들은 모두 홍콩 경제 활성화 유지를 위해 매판계급의 동의를 얻은 영국이 야만적으로 진압했다.
1927년 국민당(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군사작전을 확대했다. 모택동은 1928년에 농촌 게릴라기지를 세웠다. 일본이 1932년에 만주를 점령하자 중국 공산당 정부는 항일전쟁을 선포했으나, 중일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은 시안 사건 후인 1937년이었고, 일본 침략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이 형성되었다. 일본군이 중국으로 진격하자, 중국인 수십만 명이 영국령 홍콩으로 피난하면서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식민지 인구는 약 160만 명에 달했다. 중국인들의 유입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영국은 피식민의 복지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50만 무주택자들은 노숙을 했다.
피난민들만이 아니라 식민지 홍콩의 화교들에게도 삶은 가혹하고 모욕적이었다. 화교들이 살았던 벌집 같은 빈민굴은 질병, 화재, 태풍, 영국의 아편밀수를 위해 더러운 짓을 해주기 때문에 영국 식민정부가 용인하는 범죄자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짓밟혔다. 원시적 생활조건이 규제되지 않는 외국인들의 왕래와 뒤섞이면서 공중위생이 없는 식민지는 새로운 전염병 재발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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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사회는 특권적이고 부유한 영국 지배자들과 현지 매판을 통해 그들이 고용하고 지배하는 중국인들로 분리되었다. 홍콩 화교들은 인종주의적 통금정책 때문에 어두워지면 밖에 나갈 수 없었다. 화교들은 고용인들이 아니면 유럽인들의 거주구역이나 공원에 출입할 수 없었다. 홍콩에 사는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화교들을 “타락한 인종”으로 취급했다고 한 선교사가 증언했다. 그 당시의 또 다른 관찰자에 따르면, “홍콩 시내에서는 지팡이나 우산으로 쿠리를 때리는 유럽인을 찾는데 2분도 안 걸린다.” 이러한 인종갈등이 표면화된 사례로서, 1857년에 한 화교 제빵사가 자신의 서양인 고객을 독살하기 위해 빵에 비소를 넣었다고 고발당했다. 이 사건으로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고, 그 후 제빵사는 동기는 있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로 풀려났다.옮긴이: 관련기사 ‘중국의 쿠리’ 150년 만의 반전 드라마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884780
사회 전반에 확산된 아편중독과 그로 인한 은 유출, 주기적인 외국의 침입, 감당할 수 없는 전쟁배상금이 가져온 경제혼란과 관련된 중국의 사회적 무질서로부터 도망친 난민들이 식민지로 몰려든 1850년대와 60년대에 홍콩의 부는 증가했다. 신입자들은 마약거래 전초기지인 식민지가 영국의 경제적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생산기지로서 영구정착촌으로 진화하는데 기여했다.
서방의 변론인들은 영국이 자유방임 정책을 통해 홍콩에서 시장경제 발전에 공헌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영국이 한 것은 영국 식민주의가 지배하는 중국 연안의 섬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착취가 축적한 부를 영국으로 이전한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 식민주의가 우월한 경제제도의 힘으로 척박한 바위에 번영하는 세계도시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백인의 짐”이 인도에 문명을 가져다주었다는 키플링의 주장만큼이나 어처구니없다.
Hui Po-Keung 링난대 교수와 Tak-Wing Ngo 라이덴대 교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홍콩 식민지 매판정치, 독점적 중개 자본주의, 영국이 식민지 지배경제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 선전을 통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 신화의 전파에 관해 글을 썼다. 그들의 연구는 홍콩의 경제적 성공이 자유방임 정책의 결과나 자유시장에 대한 자유기업의 대응의 산물이라는 신화를 반박한다. 그들은 영국이 식민정책을 통해 영국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홍콩의 상업과 무역발전을 좌우했으며, 2차 대전 이전에는 어떠한 현지 산업화도 좌절시켰고 홍콩이 독립적으로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도 있었던 1960년대에 산업고도화 기회를 차단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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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영국 식민정부는 1930년대에 중국과 일본의 갈등을 철저히 변화하는 영국의 글로벌 지정학적 이익에 따라 대처했다. 떠오르는 일본의 반감을 사는 것이 두려운 영국은 반(半)식민지 중국을 외세가 점령하는 것이 국제적 규범이었던 원칙에 따라 일본의 만주 점령에 대항하여 영토를 보전하려는 중국의 투쟁을 가로막았다. 그 당시 영국소유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1930년대 초의 일본을 중국의 침략자로 묘사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묘사가 바로 홍콩에 대한 영국의 점령이 침략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이었다.1939년 일본이 만주를 강탈한 뒤, 영국 정책은 일본 침략을 지정학적 다윈주의의 자연적 효과라며 달래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중일전쟁을 개시한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부터 1941년 성탄절 일본군에 의한 홍콩 함락까지, 영국 식민성에서 “홍콩 양도(Passage of Hong Kong)”로 통하는 영국의 중국정책은 두 개의 국면으로 나뉘어졌다. 1938년 10월 광저우가 일본에 함락되기 전인 첫 번째 국면에서 홍콩은 영리를 목적으로 중국에 물자 공급이 허락된다. 영국이 가입한 국제연맹은 회원국들에게 일본에 대한 중국의 방어전을 방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일본이 광저우를 점령한 후인 두 번째 국면에서는 홍콩이 중국에게 어떠한 보급품도 제공하지 못하게 법으로 막았다.
중일전쟁에서 영국의 중립 덕분에 영국령 홍콩은 중국, 일본과 동시에 교역할 수 있었고, 교전국 양쪽에 전쟁 물자를 공급했다. 홍콩이 가장 소중한 소유물(crown jewel)인 대영제국의 안전은 영국과 일본의 비적대적 관계에 달려 있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과 연합한 독일의 팽창정책이 강화된다면, 중국에 대한 영국의 이익은 뜻하지 않게도 위협에 처하게 되고 극동에서 영국의 지위는 더 쇠퇴하게 될 것이다. 일본과 교역하는 영국과 홍콩 기업들에 반대하는 홍콩 화교들의 시위와 항의는 진압되었고 일본 상품 보이콧 요구는 자유무역,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식민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일본의 중국해안 봉쇄와 더불어 영국의 중립정책 때문에 홍콩의 빅토리아 항과 구룡-광동 철도는 극히 중요해졌다. 홍콩은 해외에서 배로 그리고 다시 기차로 광저우를 경유하여 중국군이 절박한 방어전을 전개하고 있는 우한으로 재화, 상품, 군수품을 운송하는데 필수경로가 되었다. 1937년 10월에 일본이 구룡-광둥 철도에서 중국 땅에 속하는 부분을 파괴하고 나서, 영국은 상업적 고려에 의해 1938년 초 대체경로로서 구룡-광저우 고속도로를 건설하자는 중국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러한 결정 역시 일본이 중국에서 완전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는 것을 막으려는 영국의 지정학적 이익과 부합하는 정책이었으며, 일본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등을 돌린 일본이 영국의 이익에 압력을 넣을 가능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버트 크레이기 주일 영국대사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영국 식민성은 1937년 11월 중국이 홍콩으로부터 영국제 항공기 9대를 수입하는 계획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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