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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대 황 – 적대적 계급 대립과 홍콩의 우산운동” 재번역 후기

1.

이 글을 재번역하게 된 동기가 이 글이 운동 서술에 시사하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있다는 점은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 글의 들어가는 부분과 나오는 부분이 불가항력적인,  알 수 없는 힘과의 대립을 전제하는 비극을 극(劇/드라마)의 형식이 아니라 서사의 형식으로 서술한다고 지적했다.

 

2.

들어가는 부분과 나오는 부분 외의 서술은 면밀한 분석이다. 홍콩 우산운동의 역학과 역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좌파의 고무된 분석, 예컨대 참세상이 번역소개한 미셸 첸(Michelle Chen)의 글 “10,000 Workers Strike in Support of Hong Kong's Protests”(홍콩 민주화 시위, 중국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해외]포스트 식민주의와 권위적 자본주의 사이에서 시작된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에 예리한 반론을 제기한다.
 
3.

그러나 들어가는 부분과 나오는 부분의 서술에서는 문제점을 느낀다. 특히 이 부분에서 그런다.  

“The breaking of the status quo cuts a glimmer of possibility in a horizon that had appeared before as nothing but sheer doom. There is an opening.”(현 상태의 파괴는 온통 파멸만이 존재하는 지평선에 한 가닥의 가능성이란 칼집을 낼 것이다.  여기에 [꽉 막힌 공간의 탈출구처럼] 트임이 있다.)

 

“트임”(opening)에서 즉각 연상되는 건 하이데거의 “Lichtung”이다. Lichtung은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나무가 빽빽히 들어 선 남독 숲을 홀로 산책하다 보면 갑자기 나오는,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열린 터다. 실존주의의 영웅주의적인 사조가 깃들어 있는 표현이다.

 

이런 영웅주의적 사조는 에른스트 융어(Ernst Jünger)의 “Waldgang”(산행)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재앙에 처하고 재앙 안에서 존재해야 하는 인류의 비극에 맞서 사회를 떠나 “산행”하는 소수의 자주적인 사유에 미래를 건다.

 

필자 “An American ultra”가 영웅주의적으로 독존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그의 사유가 들어가는 부분과 나오는 부분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웅주의적인 사유는 결국 낭만주의로 귀결된다. “And, even if it keeps raining for years to come, people have umbrellas.” (그리고 우기가 수년 간 계속될지라도 사람들에겐 우산이 있다.) 이건 낭만의 극치다.  “비가 다년간 올지라도”라는 말은 표현상으로는 천진난만(harmlos)하나 이게 실질적으로 서민에게 의미하는 것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배고품과 아사와 병들어 죽기와 이주노동자 신세와 전쟁을 의미한다. 여기에 한 치의 낭만도 있을 수 없다.

 

차라리 모든 “덮개”를 거부하는 리어 왕 처럼 행동하는 게 더 낫다.

 

그리고 “우산”이 불편하다. 앞으로 다가올 재앙에 대비해서 각자가 알아서 준비하는 것을 상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상황은 우산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갈릴 것이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과거  “큰 우산”을 만들어 그러저럭 살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이젠 알아서들 우산을 마련하라고 독촉한다. 예컨대 독일의 아젠다 2010 개[악]혁은 법적연금을 무너뜨리고 이른바 ‘3축 노후대책’이란 미명아래 알아서들 사적연금 및 부동산 투기 등으로 보충된 우산을 마련하라고 독촉했다.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더 좋은 우산을 장만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저소득 층은 갖고 있는 우산마저 빼앗기게 되었다.

 

우산이 있다고 하는데 대다수는 이제 우산이 없다. 비가 오면 속수무책이다. 공산주의 현실 외 대책이 없다.

 

4.

번역에도 문제가 있다. “nationalism”을 민족주의로 번역하지만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줄곧 고민한다.  한국산 쌀로 지은 밥 맛이 태국산 쌀로 지은 밥 맛과 다르듯이 서구에서 말하는 민족주의가 한반도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와 맛이 같을 수가 없다.  근데 문제는 세상 어디가나 똑 같은 맛인 맥도널드의 햄버거를 먹고 자란 사람들이 “민족주의”하면 그게 무슨 지독한 청국장 냄새라도 풍기는듯이 코를 막고 얼굴을 돌린다.

 

그리고 지명 표기도 어렵다. 왕각이 옳은지 몽콕이 옳은지 모르겠다. 중국말을 모르고 더구나 관둥 사투리를 모르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말이 다르다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지만 어떤 표기가 과연 피지배자의 말인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지 못한 채 지명을 한문에 기댄 한글로 표기했다.

 

5.

관둥어 사투리로 흘러간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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