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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실천 변증법을 위하여

일러두기: ( )는 필자가 사용. 사전적인 의미에서 좀 벗어나는 번역일 경우 역자가 원문 삽입으로 사용. { }는 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한 삽입. 필자의 주석은 번역하지 않음. 

 

 

글쓴이: 볼프강 하우크

출처: DAS ARGUMENT 274/2008


 

1. 실천 변증법을 이론 변증법과 구별하여 주제로 삼는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할 수 있겠다. 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형이상학에서 철학을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으로 구분하고, 전자를 제일 철학이란 이름으로 실천 철학 위에 놓았다. 거기서 이론 철학은 움직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즉 원리와 근원을 다루고, 실천 철학은 변화하는 것을 다룬다. “이론 철학의 목적은 진리이고, 실천 철학의 그것은 행위{와 그 결과인 작품}(Werk)이다.” (형이상학 993b, 20) 이에 기대어 우선 이렇다고 해보자. 이론 변증법의 목적은 진리이고, 실천 변증법의 그것은 행위라고. 근데 행위와 진리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2.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이론 변증법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반면 실천 변증법은 음지의 삶을 살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된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차용할 때, 최소한 그것의 획일적인 차용에 있어서, 그건 “단지 뚜껑과 껍데기의 역할 뿐”(Volksfreunde, AW 1,57)이고, 모순적인 조건 하의 역사적인 행동(Handeln)이야말로 변증법이 입증되어야 하는 그 고유한 영역임을 레닌이 이미 설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모택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 다루기를 그가 이해하는 정치의 중심에 놓았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중에서는 브레히트와 블로흐가 두드러진다. 실천 변증법에 대한 브레히트의 감각은 총명하다. 그는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레닌의 변증법은 {멀리하고}) 레닌의 “전환”(Wendungen)이란 실천 변증법을 재장전하여(aufgreifen), 이를 <전환의 서> (Me-ti, W 12)에서 선명하게 한다(verdichten). 이론 변증법에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실천 변증법에 쓸모 있는 것이다. 그는 변증법을 “사물들 속에서 프로세스를 인식하고 그걸 이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이런 변증법은 “행동(Handeln)을 가능케 하는 질문을 가르친다”고 한다. (GW 12, 475) 블로흐는 <세계의 실험>에서 그가 “진정한 미래”라고 호명한 것, 즉 “지금 막{누락된 부분 추가} 일어나는 일들이 {외형적인} 출현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완전히 전제 조건에 달려있지 않고 규정되지도 않는, 그래서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아직 유동적인, 그래서 전환이 가능한 {미래를} 앞에 두고 있음(Vorsich)“에 주목하게 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식의} 모든 것을 무효로 하는 무()란 반동의 제자리걸음(statisch)“이 혁명적인 것의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니고, 혁명과 제자리걸음 간의 결정이 수없이 회자된 나비의 날개 짓과 같은 우연에 회부된 경우, 원칙적인 전략보다 전술적인 유동성에 우선을 두고, “우연을 수단으로 하여 반동적인 전환의 우연”에 맞서라고 불로흐는 조언한다 (142).


 

3. 마르크스가 말한 이론 변증법의 매우 실천적인 법칙, 즉 “생성된 모든 형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당시의 생성} 운동의 흐름 안에서, 다시 말해서 {한 형태의 항시적 측면을 파악하는 가운데} 또한 그 필멸의 측면”을 파악해야 한다는(MEW 23, 28) 법칙이 마르크스를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서 필멸의 불필멸적인 형태들(unvergängliche Formen der Vergänglichkeit)이란 교의로 전락되었다. 이렇게 이 법칙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다. {영원한 진리의 형태를 추구하는 경직된} 형이상학을 “운동의 흐름” 안으로 용해하자고 나선 저 법칙에 흐름 자체가 얼어붙어 변증법이란 이름 하에 형이상학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변증법이 사물화되었다. 브레히트를 따르면 “세계상을 확립하는 성격”(Arbeitsjournal, 29.1.40)이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예상했든지} 신의 말처럼 아리송한 경고의 말을(orphisch) 남겼다. „운동으로부터의 추상 외에 부동적인 것은 없다. - 불{필}멸의 멸{죽음}(Misère de la philosophie). „부동성”이란 추상은 공허하다(weltleer). 그 내용은 동의미어 반복으로 운동으로부터의 추상으로 환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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