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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6)

2.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정착과 비판 잠재력의 침식

 

아카데미에서의 정착 과정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 특히 미국에서 그랬지만 미국으로 제한되지 않고 - [인문]과학의 몇몇 영역에서 교전이 되었다. 이걸 두고 일련의 비판자들은 포스트구조주의가 초창기에 연결되어 있었던 많은 정치적인 함축들을 상실했다고 책망한다(참조. 예컨대 Lichtblau (2002년)의 비판). John Sanbonmatsu(2011: 230)는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던적인 영역에 대한 거친 비판에서 “이론[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점점 더 “섹시”한 형식을 장려하는 인센티브”와 “이런 형식을 발에 치이도록 북적거리는 아카데미 영역에서 [이른바]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입지․자리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향상시키는데 [용이한] 수단으로 사용한다.”(“incentives for increasingly “sexy” forms of theorizing as a way for ‘sympathetic’ or left intellectuals to maintain or advance their position in a crowded academic field”)고 진단한다. 어떤 아카데미 이론을 대하는데 있어서 그것의 사용가치, 즉 사회비판에 [용이한] 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교환가치만이 중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곳: 231). 이건 “외부”의 비판일 뿐이라고 [왜소화 할 수 있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이론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영역에서 자라나 분명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가장 요란한 비판자로 [부상한] 슬라보이 지젝은 “착취되는 소수집단들의 편에서는 진정한 사회개입”과 “다문화적인/포스트식민주의적인, 아무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는, 아카데미 미국의 ‘급진적인’ 무리들이 자화자찬하는 유유자적한 반항들”(지젝 2002: 20)을 구별한다.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Cultural Studies 의 탈-정치화를 비판한다. Cultural Studies가 정치적[이어야 하는] 투쟁을 “미미한(marginal) 정체성들의 인정과 차이들에 대한 관대를 둘러싼” 문화투쟁으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지젝 2001: 302). 여기다 Robert Misik은 독어권의 토론에서 “소수의 [자기]삶 꾸려나가기들(Lebenspraxen/삶의 실천들)을 우쭐하는(exaltiert) 이론들과 딱 들어맞게 하려고 노력하는” 제멋을 찾는 위대한 인물들(unorthodoxe Geister)을 발견하고 [비꼰다](Misik 2006: 190). 지배, 착취,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정녕 문제가 된다면, 탈-정치화로 이어진 문화주의[화](Kulturalisierung), [격양된 목소리로] 우쭐하는 복잡성의 강조와 추상, 그리고 [양자대립적인] 모순들을 끝없는 차이들의 짜임새로 해체한 것에 대한 반복되는 책망은 뭘 보고/뭘 얻기 위해서 그러는 것인가? 이런 책망이 포스트구조주의를 싸잡아서 신용을 떨어뜨리는데 기여하고,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사유가 제시한 [짚고 넘어서야 할] 과제들을 아예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게 드물지 않다 할지라도, 개별적인 [포스트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들은 분명 [아니라고] 털어낼 수 없는 것들이다. [먼저] 형식적인 면에 주목하면 실지로 극단적으로 붕 뜬, 용어가 [애매모호해서 바깥사람이 접근하기 어렵게] 밀폐되어 이해하기가 어려운 텍스트들로의 경향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특히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에 의한, 비판적인 쟁론과 수용(Rezeption)을 현저하게 어렵게 한다. 이와 같은 만연한, 전적으로 엘리트적이고 아카데미란 [지식]공장(Betrieb)에서 기능을 [발휘하는데] 전혀 위험하지 않는 추상으로의 도주는, 내가 아래서 논증하겠지만, 유동성, 편차, 풀뿌리적인 조직들 및 가동성 등으로의 내용적인 도주와 일치한다. 문제는 이런 운동 속에 배어있는 - 그때마다의 특수한 조건들 아래 실현되어야 하는 가능성이란 의미로서의 - 비판 잠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놀라운 일은 이렇게 도주하는 가운데 슬며시 전혀 “포스트구조주의지 않는” 손놀림으로  그들 자신이 적대적인 주류로부터 탄압받는 Underdog이란 자화상을 만들어 [그게 깨질까봐] 싸고돌고, 그런 식으로 [바로] 그들 스스로가 아카데미로의 편입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못 보게 한다. “[지식인들의 이런] 무식, 접수[하여 굴레 씌우기](Vereinnahmung), 그리고 아카데미로의 편입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효과들은 ‘위험한 이론-클래스’의 방종을 최대한 [제어하여] 무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일반적․담론적 ‘봉기토벌’의 구성요소들이다.” (Lorey et al. 2011: 18). 이 이론클래스가 근래에 와서도 (아직) 얼마나 위험한지는 유감스럽게도 거의 고찰되지 않고 있다. 내 테제의 핵심은 대학 좌파와 좌파 이론가들로 하여금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패러다임에 열광하게 한 것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이 내포하는 - 보통 그렇다고 스스로 시인하지 않지만 - 규범성에 있고, 바로 이런 [애매모호한] 규범성이 비판적인 (이론-)입장을 꼭 끝까지 다듬어 내놓지 않아도, 아니 그런 입장을 취하려고 [아예] 감행하지 않아도, 비판적인 제스처에 대한 욕구는 채워주는데 기여했다/한다는 점이다. [이런 행위의] 문제되는 결과는 단지 많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분석들의 탈정치화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좌파 일부가 [진정제를 먹은 듯이] 이론적으로 잠잠하다는 점이다. 이 비판이 겨냥하는 건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 [아직] 규범성이 잔재한다는 [자가당착 지적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좌파 양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규범성의 잔재를 이론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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