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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극(間隙)의 비극

고상한 마음과 병든 몸 사이의 골은 얼마나 깊을까?

 

프랑스 혁명전야에 아직 이상주의에 흠뻑 젖어있는 괴테는 1783년 <신적인 것>이란 시 첫 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상한 마음을 품어라, 사람아,

도움을 베풀고 선량하라!

 

 

독일에 “Tatort”(범죄현장)란 범죄수사드라마가 있다. 독일 제1공영방송 ARD가 1970년 이후 거의 매주 일요일 방영하는 드라마다. 자주, 독일 사회에서 여론화되는 문제들을 주제화하여 다루기 때문에 거의 거르지 않고 본다. 40년이 넘도록 타이틀 자막이 바뀌지 않았다. (독일 사람들, 좋게 보면 옛것을 쉽게 버리지 않고, 나쁘게 보면 고리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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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내 기억에 보여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리즈 한 편을 다시 보여주었다. 제목이 재밌다. 앞 괴테의 시, 첫 연 두 행을 비틀어 제목을 달았다. “Edel sei der Mensch und gesund.”(고상한 마음을 품어라, 사람아, 하지만 건강해라).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의료공급체계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의한, 특히 고질병 환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둘러싼 의사부자간의 갈등사이에서 벌어진 죽음과 살인을 다루는 드라마다. 아버지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거부하고 불법행위(청구서날조)를 마다하지 않고 환자를 돕는 반면, 아들은 개원병원을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인수받아 달리 운영하고자 한다. 아픈 사람의 동지가 되자는 것과 환자를 온통 돈벌기 수단으로 사용하자는 대립이다.

 

독일 의료보험 및 공급체계의 개혁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거의 매년, 개혁이 이야기되었고 또 뭔가가 바뀌어 왔다. 전문가가 아니면 뭐가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잡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서민들이 피부로 느낀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서민이 고통 받는 시스템으로의 대대적인 의료공급체계개혁은 슈뢰더의 적․녹(사민당/녹색당) 연정이 추진하고 관철했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야당이었던 기민/기사연합과 자민당은 겉으로는 막 비난했지만 속으로는 ‘잘 한다’라고 박수갈채를 보냈고. 이제 와선 공공연히 사민당 슈뢰더를 칭찬하고.

 

슈뢰더 적․녹 연정의 의료공급체계개혁의 골자는 1) 서민의 부담(약 구입, 진료, 입원 등에서 자비부담률) 증대와 2) 병원 등 의료공급체계에 신자본주의적 경영논리(민영화, 진료비의 상한선을 긋는 질병군별 포괄수과제Disease Related Groups/DRG) 도입 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개혁과정에서 언론과 신자본주의 정책연구소들이 동원되었다. 특히, 유럽에서 가장 큰 언론미디어업체인 베르텔스만의 출자로 운영되는 베르텔스만 재단의 역할이 컸다. 지속가능성, 다문화사회의 ‘인정의 정치’ 등의 주제들은 진보적으로 다루지만 노동시장문제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100% 견지하는 방향으로 연구 활동을 하면서 정부를 자문하는 재단이다. 그리고 공공운영의 병원을 민영화화는 파일럿 사업을 이 재단이 설립한 “Centrum für Krankenhausmanagement”(병원관리를 위한 센터)가 기획하고 자문하였다 (기민연합에서도 꼴통보수가 가장 많은, 장기집권으로 일정부분 사민주의적인 정책을 수용한 바이에른의 기사연합보다 더 꼴통인 헷센주에서 당시 주총리였던 꼴통보수 총수 코흐(Koch)가 추진해서. 병원운영비용은 물론 줄어들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다른 지면에서).

 

 

TV 드라마로 돌아와서.

 

1. 개원병원

연금생활을 하는 고령의 올라프 뮐하우스는 만성적인 장 질환(크론병)에 시달리는 환자다. 오랫동안 사겨온 친구이며 의사인 게르하르트 슈무클레의 치료를 받아왔다. 어느 날, 진찰을 받기 위해서 친구를 찾아온다. 슈무클레는 다른 왕진 때문에 그를 여의사 베르게에게 맡긴다. 식욕이 떨어져서 잘 먹지 못하고 현기증에 자주 넘어진다는 뮐하우스에게 베르거는 ‘잘 먹어야 한다’고 충고하면서 식욕을 돋우는 약을 처방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처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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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뮐하우스의 집

 

딸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장면. 딸이 차려준 밥을 먹지 않고 숟갈을 놓는 아버지에게 화가 나서 딸이 밖으로 나가버리는 장면. 그래서 뮐하우스가 친구가 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던 식욕을 돋우는 약을 먹는 장면.

 

3. 대학병원 부검실

뮐하우스(시신), 학생들, 살인전담 형사 2명. 사망원인: 함께 복용해서는 안 되는 약을 동시에 복용.

 

4. 수사 1

뮐하우스의 시신에서 확인된 다른 약물은 주사 한 대당 8000유로(약 1200만원) 상당의 고가약물. 병원차트에는 뮐하우스가 이 약을 infusion 받은 기록부재. 다른 병원에서 치료 받지도 않음. 

 

5. 중간사건

슈무클레의 개원병원 맞은편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주잔네. 딸 조피아와 단둘이서 사는데 조피아는 무코비스치도시스에 걸려 호흡장애가 많음. 한번은 여의사 베르거가 응급치료를 해서 고비를 넘김. 그래서 셋은 친하게 됨. 형사 틸은 주잔네에 관심을 보임.

 

6. 수사 2

슈무클레가 매 사분기마다 1만 5천에서 2만유로 정도의 상한액을 웃도는 지출을 한 것으로 드러남. 의료보험회사 직원 청구서에 문제가 많다고 짜증.  그와 동시에 여의사 베르거가 집에서 살해됨. 추가 수사결과 슈무클레가 개인의료보험을 든 사람들의 치료비 청구서를 날조한 것으로 드러남. 사분기마다 일정한도 이상의 처방을 제한하는 의료공급체계개혁으로 필요한 약을 다시 받기 위해서 다음 사분기를 기다려야 하는, 혹은 필요하지만 비싸서 약을 못타는 법적보험가담자 환자들을 위한 불법행위로 드러남. 형사들에게 ‘니들은 살인을 담당하기’ 때문에 이런 ‘비리’는 고발할 필요가 없지 않냐 하면서 묵인을 간청. 뮐하우스도 이렇게 비싼 약 처방을 받았는데, 그게 비극이 됨.

 

7. 조피아의 긴급구조

항생제 복용 부작용으로 질식. 긴급구조. 슈무클레는 구급의사에게 토브라마이신을 처방해야 한다고 조언. 수사 및 의료보험회사의 압력으로 조피아에게 비싼 토브라마이신을 처방할 수 없게 된 게 조피아의 질식을 야기한 걸로 드러남. 효력이 떨어지는 값싼 약 복용으로 폐에 염증이 생기고 항생제를 복용하게 되었는데, 결국 항생제가 부작용을 일으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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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의사 베르거가 조피아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슈무클레의 ‘비리’를 알게 됨. 주잔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베르거는 이를 폭로할 의도를 견지. 병원을 슈무클레의 아들과 함께 인수하기 위해서. 딸 조피아의 지속적인 치료를 걱정한 주잔네가 베르거를 살해.

 

마지막 장면. 조피아는 깨어남. 주잔네를 은근히 좋아했던 형사 틸. 병원을 나오면서 의자를 걷어참.

 

“좆같은 세상”이라 속말했을까?

 

간극은 어디에? 그리고 거기에 끼어드는 행위는 어떤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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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 (7)

2.1 포스트구조주의에 배어있는(implizit) 규범성

 

포스트구주주의가 취하는 비판자의 [=비판적인] 관점은, 좁은 의미로 보자면, [전혀] 규범적이지 않다. 오히려 보편[주의]적으로(universal) 통용되는 규범카타로그를 [전면] 필히 거부하는 가운데 보편[적인 적용가능]성(Universalität), 안정성, 그리고 해방강조를 문제화하는 [자세로] 특징지어진 [反규범적인] 것이다. 규범(성)의 억압적인 성격을 들춰내 보여주는 일이야 말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의 핵심사안 중 그 하나라고 표시할 수 있다. “권력 혹은 [억제할 수 있는] 힘과 [무관한] 저편의 [터전에서] [자양분을 먹고 자라나] 스스로 자리한다는 일개의 규범복합체를 구축하는 일 자체가, 권력이 풍부하고 [억제하는] 힘이 있는, 개념적인 실천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런 실천은 자신의 권력놀이를, 규범적인 보편성이 [이런저런 장소에서 이때저때에] 뒤집어쓰는 외피[=특수성 혹은 관계]를 거론하는 가운데(im Rückgriff auf Tropen der normativen Universalität), 숭고한 것으로 만들고, 베일로 씌우고, 동시에 확장한다.” (Butler 1993: 36f.) 계보학적-포스트구조주의적인 윤곽으로 다듬어진 비판프로그램이 말하는 것은 “나는 옳고 다른 사람들은 그르다.”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단지 “다른 사람들이 부당하게 그들이 옳다고 주장한다.”(Veyne 1991: 214)란 것이다. 이건 그렇다 치자.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구조주의가, Andreas Reckwitz가 꼬집어 지적하듯이, 다 이야기 된 건 아니다: “이와 같이 규범을 멀리하지만 (...) [포스트구조주의의] 문화적인 코드들의 통제 불가능성이란 전제가 긍정적인 규범적인 함의(Konnotation)를 갖고 있다는 점이 간접적으로 분명해진다. 즉, 문화적인 시스템들이, 그들의 요구와는 배치되게, 분명 고정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통제가 불가능한 것으로 머문다는 점 [자체가] 바람직한 경향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Reckwitz 2008: 295, 강조는 SvD). 선택에 의한 가족관계를 맺어주는, 차이이론-포스트근본주의적인 제스처를 출발점으로 삼아, 바람직한 경향으로 {떠올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aufscheinen} 통제 불가능성과 구성적인[=의미이해에 따라 잡을 수 없게 이미 삼투되어 있는] 의미차연(Sinnverschiebung)은 별별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이론들에 의해서 각양각색으로 다듬어졌다. 이게 푸코에게는 우연적인 역사적인 조건들에 대한 계보학에 근거한 분석으로서 개별성들(Singularitäten)의 형태변화를 [초래하는] 잠재력을 밝히는 분석이었고, 들뢰즈와 가타리를 보자면 탈영토화로 향하는 다층적인 운동들로 [짜여진] 미시차원이 영토화/고정화의 거시구조들을 횡단․훼방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적인 읽기는  - [비슷하게] 다른 점을 강조하면서 데리다에 기대는 버틀러(아래 참조) - 의미의 구성적인 비종결성과 이에 따른 되풀이, 즉 반복을 타자성/차연과 연결하는 되풀이에 초점을 맞춘다. “되풀이는 기생적인 방식으로 [고정된 의미로] 확인하고 반복하는 바로 그것에 변화를 가하고 [이물질이] 스며들게 한다. 되풀이는 (항상 [따라 잡을 수 없게 앞서가는] 이미[란 시간성의 지배아래], 또한) 말하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싶고, 말하는 것과 말하고 싶은 것과 다른 것을 말하고, 뭔가 다른 것을 이해하는 등등”의 결과를 초래한다(Derrida 2001: 120). 라클라우와 무페는 사회의 의미구조(Sinngefüge)안에서 파악될 수 없는 (구성적인) 외부가 있고, 그게 외부지만 사회[안]의 의미구조를 지속적으로 성가시게 하고 싸움을 건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걸 정치적으로 착용하여 이 둘은 결정불가능성(필연적인 외부에 기인한 사회적 총체성/전체성의 불가능성)과 결정(일시적인 고정화)간의 간극을 [정치적인] 행위능력의 공간으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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