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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2

1. 기도

 

하나님 앞에서는 받침대(substantia)와 거기에 부과 된 것(attributum) 간의 관계가 뒤집어 진다.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네가 정의롭다’고 말하면서 주는 겉옷. 그러나 인간의 받침대는 여전히 죄.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받침대는 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정의로운 겉옷만을 보신다. 이 루터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기를 희망한다.

 

대타는 타자(他者)를 대신하여 들어오는 대타(代打)가 아니라 타자(他者)의 자리에 타자(他者)를 넘어서는 ‘비타자’(非他者, “non-aliud”)로 들어오시는 하나님. 쿠자누스의 하나님이 나를 지키는, 지켜보는 하나님이 되기를 희망한다.

 

‘비타자’인 하나님 안에서 사과를 구하는 사람의 운동과 사과하는 사람을 받아주는 사람의 운동이 만나기를 희망한다.

 

 

2. 오류

 

가리키는 일에서 오류를 범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일은 아마 사유의 바탕일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차원에서 오류가 있었다.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를 나는 ‘위안부 피해’, 그리고 ‘이용녀 할머니’로 읽지 않고 ‘위안부 피해’, ‘이용녀’, 그리고 ‘할머니’로 읽었다. 이름을 서술구로 읽은 것이다.

 

3. 오류의 원인

 

1) 

 

한문의 한글표기와 관련된 한글사용 특유의 상황은 지나간다.

 

2)

 

‘지성’에 요구되는 신중이 없었다. 지성이 신중을 다한다는 표징은 글의 사운드 체크를 해보면 알 수 있다. 뭔가를 묻은 사운드가 있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자아를 넘어서 타자를 향하고 그를 진정 존중하는 글에는 오로지 타자의 대답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열린 물음이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기본적인 [질문특유의] 소리다. 이 소리는 간혹 빤히 바라보는 눈이 될 수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글에 이런 물음이 없다.

 

3)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란 표현으로 가리켜지는, 한반도란 땅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경험을 하고 살았던 이용녀라 불리던 분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이런 관심결여는 “이용녀”가 이름이었다고 알았을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름을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다. 이름이 대상을 틀림없이 가리키는 서술의 다른 표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름을 이걸 넘어선다. 이름은 내가 말을 건네고 나에게 대답하면서 나를 묻는 사람을 가리키고 그를 존중하는 상황의 대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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