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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자크 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 공저
배경: 이라크전쟁에 참여하자는 몇 유럽국가의 결정(2003.1.31)과 이에 항의하는 유럽시민의 시위(2003.2.15)
원문은 여기
우리는 두 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스페인 총리가 [이라크침략]전쟁을 자진하여 [쾌히 승낙하는] 유럽 정부수반들을, 다른 유럽정부수반들 몰래, 부시에게 받치는 충성서약에 [이른바 ‘8인의 편지’] 초대했다는 사실을 신문들이 알려 독자들이 깜짝 놀라 어리벙벙했던 날[2003.1.31]을 망각해서는 안 되고 이런 기습적인 손장난에 대응하여, 런던과 로마에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베를린과 파리에서, 대중들이 일어나 대대적인 시위에 참여했던 2003.2.15를 망각해서는 더욱 안 된다. 이런 압도적인 - 2차 대전 후 가장 큰 - 시위들의 동시성은 나중에 돌이켜보면 아마 유럽 공중(Öffentlichkeit)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이라크전쟁 발발 이전에 [납을 먹은 듯 억누르는] 둔중한 시간들이 몇 개월 지속되는 가운데, 도덕적으로 파렴치한 분업이 감정들을 휘저어 흥분하게 했다. 군대를 거침없이 집결하는 물류공급의 대작전과 [이에 대비하여 구제사업의 작동을 준비하는] 인도주의적 구제기관/단체들의 분주한 활동들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척척 진행되었다. 이런 야단법석은 모든 자발적인 대비를 박탈당하고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는 이라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진행/완성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감정의 힘이 유럽 시민들을 일어서게 했다. 달리는 동시에 [이라크]전쟁이 이미 [좌초의 조짐을 보이고] 그 길로 들어선 유럽공동외교정책의 좌초를 유럽인들이 인식/의식하게 했다. 세상 어디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슴없이 만민법을 깨는 일이 유럽에서도 국제질서의 미래에 관한 다툼을 불러 일으켰다. 이 상황을 지켜보는(aber) [유럽 ‘진보’ 지식인] 우리들은 편을 가르는 논증들에 의해 더욱 깊은 타격을 받았다.
[중략]
함께 당하고 함께 그 형상을 다듬어야하는 정치적인 숙명을 가진다는 인식/의식을 일으키는 역사적인 경험, 전통, 그리고 성과들이 유럽인들에게 있는가? 매력적인, 정말 [온 사람의 마음에] 박히는/새겨지는 미래 유럽에 대한 “비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이 비전은 오로지 앞길을 가를 수 없다는 느낌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더 분명하게 (aber) 우리 유럽인들이 반추하여 우리 자신을 간추려야 하는 궁지에서 배출될 수 있는 비전이다. 또한 이 비전은 수많은 목소리들이 횡행하는 공중의 어지러운(wild) 지저분한 말(Kakophonie) 가운데에서 자기 말을 [찾고] 주장해야(artikulieren) 한다. 지금까지 이 주제가 아젠다로조차 설정되지 않았다면, 이건 [전적으로] 우리 지식인들이 [할 말을 하지 않고] 지식인의 기능/역할을 하지 못한(versagen) 결과다.
[중략]
오늘날 우리는 자연발생적이라는 가상을 뒤집어쓰고서 [거역할 수 없는] 권위로 받아들이라고 강제하는 많은 정치적 전통들이 “꾸며진” 것임을 안다. 이와 달리 공중이라는 투명성(Licht/빛) 가운데 탄생하는 유럽의 정체성은 애당초부터 뭔가가 구성되었다는 점을 은폐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지 억지가 만들어 낸 구성만이 임의라는 결함을 가질 것이다. 자기와 소통하고 이해하는 과정들을 해석학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자신을 들어내고] 자기를 내세우는 정치적-윤리적 의지는 억지(Willkür)가 아니다. 우리가 계승하는 유산과 우리가 물리치기를 원하는 유산 간의 구별은 그 유산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읽기에 관한 결정만큼이나 큰 [주변을 두루 살피는] 신중함을 요구한다. 역사적인 경험들은 단지 의식적인 [애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성취를 위한 후보일 뿐이고, 이런 성취 없이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힘을 획득할 수 없는 역사적 경험들이다.
[중략]
유럽의 열강들은 다 제국주의적인 권력팽창의 전성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다 중요한 점은 제국의 상실 경험을 다스려 소화해 냈어야만 했다는 점이다. 이런 하강경험은 많은 경우 식민지 상실과 연결되어 있다. 유럽의 열강들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식민역사와의 거리가 커지면서 또한 자신과 [거리를 두는] 반성적인 간격을 취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렇게 이들은 패자의 관점에 서서 자신을 폭력자로, [정신적-사회적-전통적] 뿌리를 뽑는 현대화를 강요하고 폭력을 [가한 자로] 책임추궁을 받는 [제국주의] 승자라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각하는 깨달음이 가능했다. 이게 유럽중심주의에 등을 돌리게 촉진하고 세계내정이라는 칸트의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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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의식의 표출과 동시에 은폐다. 그리고 그 은폐기제의 원리와 작동을 추적하는 게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이고.
“위안부 피해 이용녀 할머니”
심히 불쾌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곳 진보넷 채널광장에서도 아무런 비판 없이 위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더 화난 이유다.
왜?
1.
순전히 내 개인의 문제일 거다. 내 안에 있는 할머니의 이미지는 절대 “이용녀”가 되지 않는다. “이용녀”라는 수식이 있을 수 없다. 어렸을 때 옆에 계셨던 할머니는 항상 정숙한 모습이었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용, 거래 등등 이 세상의 말이 통용되지 않는 곳에 계셨다. 누가 알겠소만, 살아버린 날들이 살날들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 시골에 갔을 때 가장 반가운 모습은 하얀 고무신, 하얀 저고리에, 하얗고 검은 머리를 비녀로 정돈한 정숙한 모습의 할머니였다. 지붕만 달랐지 옛 초가집 모습의 집에서 내외분이 깔끔하게 생활하고 계셨다.
2.
“이용”은 도구의 대명사다. “이용녀”는 주체가 없는 도구일 뿐이다. 주체성을 박탈하는 이 말은 강제와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 폭력에 의해 끌려간 할머니의 주체성을 다시 한 번 박탈하고 있다.
3.
“이용녀”는 일본이 씀직 할 만한 말이다. 조선의 여성들이 “이용당하긴”했지만 강제와 폭력은 없었다고. 마치 돈 벌게 해주겠다는 거짓말로 다른 나라 여성들을 서구에 데리고 와서 성매매를 강제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일제에 의해 끌려간 할머니의 주체성이 부각되어야 한다. 일제를 견디고 살아남으신 분들이시다. 이용당하신 분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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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세계내정'은 유럽에서 태어난 반유럽적인 이념?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