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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는 필자가 사용. 사전적인 의미에서 좀 벗어나는 번역일 경우 역자가 원문 삽입으로 사용. { }는 역자가 이해를 돕기 위한 삽입. 필자의 주석은 번역하지 않음.
글쓴이: 볼프강 하우크
1. 실천 변증법을 이론 변증법과 구별하여 주제로 삼는 이야기는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할 수 있겠다. 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형이상학에서 철학을 이론 철학과 실천 철학으로 구분하고, 전자를 제일 철학이란 이름으로 실천 철학 위에 놓았다. 거기서 이론 철학은 움직이지 않는 것, 영원한 것, 즉 원리와 근원을 다루고, 실천 철학은 변화하는 것을 다룬다. “이론 철학의 목적은 진리이고, 실천 철학의 그것은 행위{와 그 결과인 작품}(Werk)이다.” (형이상학 993b, 20) 이에 기대어 우선 이렇다고 해보자. 이론 변증법의 목적은 진리이고, 실천 변증법의 그것은 행위라고. 근데 행위와 진리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2.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이론 변증법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반면 실천 변증법은 음지의 삶을 살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된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차용할 때, 최소한 그것의 획일적인 차용에 있어서, 그건 “단지 뚜껑과 껍데기의 역할 뿐”(Volksfreunde, AW 1,57)이고, 모순적인 조건 하의 역사적인 행동(Handeln)이야말로 변증법이 입증되어야 하는 그 고유한 영역임을 레닌이 이미 설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모택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 다루기를 그가 이해하는 정치의 중심에 놓았다.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중에서는 브레히트와 블로흐가 두드러진다. 실천 변증법에 대한 브레히트의 감각은 총명하다. 그는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레닌의 변증법은 {멀리하고}) 레닌의 “전환”(Wendungen)이란 실천 변증법을 재장전하여(aufgreifen), 이를 <전환의 서> (Me-ti, W 12)에서 선명하게 한다(verdichten). 이론 변증법에서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실천 변증법에 쓸모 있는 것이다. 그는 변증법을 “사물들 속에서 프로세스를 인식하고 그걸 이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이런 변증법은 “행동(Handeln)을 가능케 하는 질문을 가르친다”고 한다. (GW 12, 475) 블로흐는 <세계의 실험>에서 그가 “진정한 미래”라고 호명한 것, 즉 “지금 막{누락된 부분 추가} 일어나는 일들이 {외형적인} 출현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완전히 전제 조건에 달려있지 않고 규정되지도 않는, 그래서 완전히 예측할 수 없는, 아직 유동적인, 그래서 전환이 가능한 {미래를} 앞에 두고 있음(Vorsich)“에 주목하게 한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식의} 모든 것을 무효로 하는 무(無)란 반동의 제자리걸음(statisch)“이 혁명적인 것의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니고, 혁명과 제자리걸음 간의 결정이 수없이 회자된 나비의 날개 짓과 같은 우연에 회부된 경우, 원칙적인 전략보다 전술적인 유동성에 우선을 두고, “우연을 수단으로 하여 반동적인 전환의 우연”에 맞서라고 불로흐는 조언한다 (142).
3. 마르크스가 말한 이론 변증법의 매우 실천적인 법칙, 즉 “생성된 모든 형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것을 {당시의 생성} 운동의 흐름 안에서, 다시 말해서 {한 형태의 항시적 측면을 파악하는 가운데} 또한 그 필멸의 측면”을 파악해야 한다는(MEW 23, 28) 법칙이 마르크스를 따르는 추종자들에 의해서 필멸의 불필멸적인 형태들(unvergängliche Formen der Vergänglichkeit)이란 교의로 전락되었다. 이렇게 이 법칙은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다. {영원한 진리의 형태를 추구하는 경직된} 형이상학을 “운동의 흐름” 안으로 용해하자고 나선 저 법칙에 흐름 자체가 얼어붙어 변증법이란 이름 하에 형이상학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변증법이 사물화되었다. 브레히트를 따르면 “세계상을 확립하는 성격”(Arbeitsjournal, 29.1.40)이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를 예상했든지} 신의 말처럼 아리송한 경고의 말을(orphisch) 남겼다. „운동으로부터의 추상 외에 부동적인 것은 없다. - 불{필}멸의 멸{죽음}“(Misère de la philosophie). „부동성”이란 추상은 공허하다(weltleer). 그 내용은 동의미어 반복으로 운동으로부터의 추상으로 환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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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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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가 아닌 걸 명사로 사용하는 독일어 문구 번역은 머리가 아프다. 블로흐의 “das noch flüssige und so wendungsfähige Vorsich von Ereignissen, die sich erst noch bilden, die weder ihrem Eintritt noch gar ihrem Inhalt nach voll bedingt, bestimmt und so voll vorhersehbar sind“의 번역에서 “die sich erst noch bilden” 부분이 누락됐다. „비로소 생성되기 시작하는”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das … Vorsich von Ereignissen“의 번역이 어렵다. 전치사 구 'vor sich'를 명사로 사용하고 있다.
vor sich는 für sich가 일반화되기 이전에 사용되었다. 칸트에게는 양 표현이 동의어다.
'Das … Fürsich von Ereignissen'으로 바꿔 읽어보자.
<정신 현상학> 서설에서 헤겔은 an sich와 für sich 설명 용으로 씨앗 비유를 든다. 씨앗은 an sich다. 씨앗이 전개(展開, Entfaltung)하여 현존(Dasein)이 된다. 이렇게 인식 저편에 있었던 an sich가 대상, 즉 Sein für anderes 혹은 Sein für uns가 되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 씨앗이 열매가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한다. 이렇게 an sich가 현존(=열매)과 일치함으로써 Fürsichsein이 완성된다. '자연'은 이걸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보는 것이다.
사건(Ereignis)에도 이런 변증법이 통할까? 잘 모르겠다. 암튼, 블로흐는 '안 그런다' 한다. 역사의 장에서 변증법을 이야기하려면 헤겔의 씨앗 비유보다 횔더린의 <라인강>을 참조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블로흐의 'Vorsich'가 가능태와 현실태란 전개(Entfaltung)의 저편에 있는 '역사의 장'을 참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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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4. 포이에르바흐 테제 11번에 기대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옳고 그름을 재판하는}강단마르크스주의(Offizialmarxismus)는 세계를 그저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착점(着點/ankommen auf)은 세계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있다고. 이런 맥락(Sinn)에서 개입하는 변증법과 해석하는 변증법을 구분하여 {챙겨야 한다}. 변증법적인 세계 해석이 불필요 하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한 건 해석하는 가운데 세계를 내다보는(anschauen) 변증법자는 자신의 사유 패턴을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관념에 치우치기 {쉽다는} 거다. {반면} 세계를 변화하는 변증법은 세계의 관계들 자체 속으로 들어가는 가능한 길을 {모든 촉각을 동원해} 탐지(探知, aufspüren)하는 데에 달려있다. 해석하는 변증법은 자신의 자리에서 머무르면서(selbst) 미래를 내다보는데, 이때 미래는 이미 선취된 것으로서 과거의 양태가 된다. {반면} 개입하는 변증법은 지금여기 도래하는 것(das gegenwärtig Kommende)에 주의한다. 블로흐가 말했듯이 후자에는, 생성되는 역사에는, “항상 돌변의 요소”가 박혀있다. 달리 표현하면 “위기, 아니면 구조(救助)의 요소가 {엇갈린다는} 것이다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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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미 엥엘스가 마르크스가 {사용한} 변증법이 그저 해석하는 기능이라는 주장으로 후퇴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부정의 부정과 같은 “헤겔의 붕 뜬 생각”으로, “그보다 더 좋고 명백한 방법의 결핍” 때문에, 자본주의 축적의 역사적인 경향을 구성했다는 오이겐 뒤링의 비난으로부터(MEW 20, 120f 인용) 마르크스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랬다. 간단하게 말해서, 마르크스가 헤겔 변증법의 도식들을 이론적인 인식의 생산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엥엘스는 우선 변증법의 위상(Status)을 과학적인 인식들에 대한 사후적 해석의 위상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축적} 과정이 한편으로는 이미 일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반듯이 일어날 것”이라고 “역사적으로 증명한” 다음 “그 과정을 정해진(bestimmt) 변증법적인 법(Gesetz)에 따라 완성되는 과정이라고 표시한다”(MEW 20, 125)고 했다. 나아가 엥엘스는 변증법에 발견을 이끄는 기능(eine heuristische Leitfadenfunktion)을 부여한다(zuerkennen).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변증법을 “발견 기술”(Findekunst)로 이해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런 발견 기술로서 변증법은 “총체적인 세계관의 싹”(같은 곳)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과학적인 인식 획득이란 실천적인 입장에서 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발견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비선형적인 발전의 가능성 혹은 직접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이 나타나는 현상들의 연관성의 가능성에 대한 감각을 날카롭게 한다. {그러나} 발견 기능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론 '변증법'은 연구를 위한 가치를(Nutzen) 상실할 뿐만 아니라 배후에서 엄습하는 탈변증법화를 당하게 된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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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석하는 변증법의 전형적인 다듬體(Ausprägung)는 루카치의 <정통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다듬체는 세계를 관찰할 때 항상 “전체의 절대적인(bedingslos) {지배적} 우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지시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W 2, 61f). 이와 달리 우리는 동질적이고 균열이 없는 전체라는 파르메니데스적인 관념에 {빠져있는} 우리 자신을 어느 때나 다시 일깨워(zurückrufen)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전체는 - 블로흐가 주제화한 “비완성된 세계 및 자연 상태”(64)를 넘어서 - 수많은 비전체적인 전체성들의 전체다. 전체성에도 역시, 마르크스가 전체성의 계기들에 관하여 말한 것, 즉 줄곧 형성되는 것 못지않게 무너지는 것으로서의 그것들을 “운동의 흐름”안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먼저 우리의 범주들에 적용{해야 한다.} 범주들의 {존재 양식은} “과정의 그것들로서 스스로 과정 안에 있는 것”이다 (Experimentum, 72). 이것은 또한 철학적인 범주로서의 변증법에도 적용된다. 변증법 역시 우리에게는(für uns) 궁극적으로 „이것이 무엇과 맺는 관계“(Beziehung eines Dass auf ein Was) 혹은 “소용돌이 현실의 현존이 주조(鑄造)한 것들”(같은 곳) 중 그 하나{일 뿐이다.}„전체성“을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 번역하면, 우리가 관계들의 변혁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 역시 관계들 속에 있는 {한 자리를 이미} 놓여있다는 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자기 및 세계 이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것이 „스스로 세계에 갇혀 있으면서 세계를 상황/정세로 {파악하고} 사유하는 사람의 {반사적인} 반응/반동(Reaktion)”(Buchheim 1994, 9)을 닮은 것과 마찬가지다. 차이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자기 및 세계 이해는 사회이론적으로 {자신을 교양하고 자기 모습을 유기적으로 조직해 내는}(informieren/{다소 라틴원어 informare에 기댄 번역})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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