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Hälfte des Lebens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7

몇가지 관찰.

1.
„Hälfte des Lebens“의 첫 행에 왜 „mit gelben Birnen“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노란 배’라고 하는데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호루병 모양의 독일산 배가 노랗지 않기 때문이다. 잘 읶어도 누렇지 노란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란 꽃’이라고 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노란 배’라고 하니까 한참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 루이제 카쉬니쯔의 추측이 맞다면 횔더린은 이 시에서 보덴제 호수 근방의 전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최근 가서 본 결과 배보다 사과가 더 많다 (횔더린 당시엔 배가 더 많았을 수 있지만). 암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 표현이다.

그래서 그랬나? 이 시가 처음 출간될 땐 ‚mit gelben Blumen’(노란 꽃)이었다고 한다. 근데 Nobert von Hellingrath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분석하고 „mit gelben Birnen“으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시 세개를 하나로 엮고 첫 두행을 새로 창작하고 거기다 제목을 „Die letzte Stunde“에서 „Hälfte des Lebens“로 바꾼 것을 볼 때 이 시의 출간이 시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다시 음률을 분석해 보면서 이 시의 첫 두행이 현실전경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목가적인 전경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몇자 적어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첫 두행이 묘사하는 전경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제도된(konstruiert) 전경이다.

첫 두행은 약강이 엇갈리는 약강격으로써 각 3개의 강(Hebung)을 가지고 있다. 이 강을 따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e (gelb-en) – i(Bir-nen) – ä(häng-et)
o (voll) – i(wild-en) – o(Ros-en)

다시 나는 소리에 따라 음성기호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Ɛ – i – Ɛ
o – i – o

일정한 규칙성이 엿보인다. 끝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마치 원과 같이 갇힌 구조다.

이렇게 보니 첫 두행이 그리는 전경이 그저 목가적이지 않다. 뭔가 썰렁하다. 그리고 „mit gelben Birnen“이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합법칙성에 따라 선택된 표현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2.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이 대목에서 일종의 수행적 자기모순이 엿보인다.

백조가 하는 행동을 보면 입맞춤에 만취하여 머리를 굽혀 물에 적시는 하향동작이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고 대려 상향한다. „trunken“의 u에 따르는 ü는 반음 정도가 더 높고 다음 행 „tunkt“의 u는 다시 반음 더 올라가 „trunken“의 u 보다 한음이 더 높다. 여기서 수행적 자기모순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읽을 수 있다면 이게 내가 이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맥락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직 명료하지 않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5

2.4 „Weh mir“ – 속임수에서 깨어난 비명

„Hälfte des Lebens“를 엄밀하게 읽어보는 동기는 이 시를 헤겔 정신현상학의 „Die Wahrnehung –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지각 – 혹은 사물과 착각/불량거래/속임수“와 맑스의 상품분석 그리고 이에 기대는 상품미학(Warenästhetik)의 맥락으로 연결지으려는 시도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덜 읶은 시도일 뿐이다.  헤겔과 맑스의 해당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시도의 첫 실마리를 „Weh mir“라는 비명에서 찾고자 한다.

„Weh mir“를 „서러워라“ 혹은 „슬프도다“라고 번역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골수에 사무치고 동정을 거부하는 이 비명이 자기연민에 빠지는 정도의 슬픔으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중심을 뒤 흔드는 이 비명에는 당사자가 이토록 비명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는데 깊이 참여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파우스트> 그레첸의 „Weh“ 비명이 그렇다. 그러면 왜 참여했을까. 속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각/속임수에서 깨어난 반응은 분노다. 그레첸은 하인리히에게 „Heinrich! Mir graut’s vor dir.“/하인리히, 널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라고 한다.

„Weh mir“는 또 요새 쓰지 않는 말이다. 이 표현을 요새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 질문에 „나는 멍청했다.“(„Ich bin doof, blöde, ein Blödian, eine dumme Gans.“)라는 대답이 가장 많은 호응을 받는다 (http://de.answers.yahoo.com/question/index?qid=20090628110742AAZlS7Z). 이것도 „Weh mir“란 표현의 중심에 멋모르고 속았다는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Weh mir“를 뒤의 내용하고만 연결하면 이런 강렬한 비명이 될 수 있을까? 안 그럴 것 같다. 백조에 기대했던 착각에서 깨어난 시적 주체의 비명으로서만 이런 비명이 가능할 것 같다.

1연의 마지막 낱말 „Wasser“이후 연속되는 w-두음 (Wasser, Weh, wo, wenn)도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4

2.3.1 5행 „und“와 성사되지 못한 대화

이 시 5행의 „und“는 사전적인 의미로, – 비트겐슈타인을 따르자면 – 구체적인 사용과 괴리하여 이해하고 번역할 수 없을 것 같다.

여기 이 „und“의 구체적인 사용에 관하여 두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새로운 상황의 전개이며 다른 하나는 말을 주고 받는 대화상황이다.

루터 번역 독어 성경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있다.

„Und Gott sprach: Es werde Licht!"

한글 번역은 다 이 „und“를 생략하고 있다. 여기 이 „und“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됨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und는 대화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말을 건 사람이 말을 다하고 나서 „Und?“하고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고문실에서 고문하는 사람이 고문 당하는 사람을 잔뜩 협박하고 나서 „Und?“하고 „술술 말하기“를 기다리는 상황도 이런 상황에 속한다.

이 시 5행의 „und“이 이런 상황을 알리고 있다. 백조님들의 태도가 예기치 못했던 것이고, 그들과의 대화가 단절됨을 알리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3

2.3 Und trunken von Küssen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Ins heilignüchterne Wasser.

보통 이 시의 1연은 목가적인 풍경을, 2연은 이에 대조되는 아픔과 쓰라림을 노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앞 행 „Ihr holden Schwäne“의 소리가 목가적이지 않다. 밝은 모음 i-o-e에 시작했지만 ä-e 어둔운 모음으로 끝난다. ‚ä’는 비운을 느끼게 한다. 뭔가 기대하면서 백조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기대했던 것을 받을 수 없다는 비운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은 이 행의 흐름을 주관하는 약강 혹은 단장(Iambus) 음보(音步)가 마지막에 가서 한 걸음 빠져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완성된 음보라면 ‚Ihr holden Schwäne da’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뭔가 허전하다. 뭘 기대했는지 알 순 없지만 말걸기(Anrede)에 대답하는 말받기(Gegenrede)가 없을 것을 예상하게 한다. „Schwäne“라고 부르고 뭔가 허전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런 허전함에 이어지는 다음 행 „Und trunken von Küssen“은 음율의 속도가 빨라진다. 느릿느릿 오르락 내리락 했던 잔잔함이 서둘러 앞으로 나가는 박자로 바뀐다. 행진곡에 쓰여지는 약약강(Anapäst) 음보가 5,6 행의 경우 중간에서 속도를 높이고 있다. 6행에서는 또 상박없이 바로 강/장으로 들어가는데 허둥댄다는 느낌까지 준다 (Karl Eibl: Der Blick hinter den Spiegel. Sinnbild und gedankliche Bewegung in Hölderlins „Hälfte des Lebens“ (20.02.2004). In: Goethezeitportal. URL: http://www.goethezeitportal.de/db/wiss/hoelderlin/haelfte_eibl.pdf, 2012.2.3 참조). 여기 진보넷 블로거 Daydream님이 이 시를 읽으면서 전쟁을 연상하기도 했는데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백조님들이 하는 짓이 우아하고 사랑스럽지 않고 행진하는 군인과 같이 무지하고 꼴 사나운 면이 있다. 기계적이다.

그리고 „und“가 이해하고 번역하기 어렵다.

고트프리드 벤(Gottfried Benn)은 이 시를 읽으면서 5행의 „und“가 눈에 거슬린다고 했단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이런 경유를 생각해 보자.

„나는 죽어라고 일했는데 넌 뭐했어? 잠만 퍼 잤잖아!“

이 표현을 독어로 번역해 보면 이 정도 되겠다.

 „Ich habe mir den Arsch aufgerissen und gearbeitet. Und du? Was hast du gemacht? Du hast nur gepennt.“

이 시 5행의 „und“도 und의 이런 사용법이 아닌가 한다. 기대했던 것과 어긋나는 행위, 그리고 기대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행위를 이 „und“가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시와 관련해서 이야기되는 비운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백조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3행의 „Die Mauern stehn/Sprachlos und kalt, im Winde/Klirren die Fahnen“의 시제가 현재형임을 봐서도 비운은 겨울이 오면/되면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2

2.2 Ihr holden Schwäne

‚hold’의 의미도 쉽지 않다. 요새 쓰지 않는 말이다. 좀 아이러니하게 가미하지 않으면 느끼하기 때문이다. 횔더린이 살던 당시에는 안 그랬단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그냥 ‚사랑스럽다’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루크레티우스 „De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첫 줄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Aeneadum genetrix, hominum divomque voluptas,/alma Venus“/’에네이스 가문의 시조이시며, 인간과 신이 모두 군침 흘리며, 젖 가슴이 풍부한 비너스여’. 근데 이 표현에서 „alma Venus“/’젖을 주는 비너스’를 독어로 흔히 ‚holde Venus’로 번역한다. 이에 기대어 ‚hold’의 의미엔 젖 먹이면서 아이를 굽어 살펴보는 엄마의 자세가 스며있다고 짚어보자.  
 
헛다리 짚은 것일까? 어원사전을 보니 안 그런 것 같다. ‚hold’은 (광산이나 채석장 등에서 석탄 혹은 돌을) ‚비스듬하게 높이 쌓아 올린 더미’란 의미가 있는 ‚Halde’와 어원을 같이 한다. 이런 어원에 기대어 롤프 쭈버뷜러(Rolf Zuberbühler)는 ‚hold’가 백조가 머리와 목을 비스듬히 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고 한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 다. 그리고 1793년 요한 크리스토프 아델룽(Johann Christopf Adelung)이 편찬한 사전 „Grammatisch-kritisches Wörterbuch der Hochdeutschen Mundart, mit beständiger Vergleichung der übrigen Mundarten, besonders aber der Oberdeutschen“은 ‚hold’를 „Geneigt, des anderen Glück gerne zu sehen, Liebe gegen denselben zu empfinden/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즐겨 살펴보고 애정을 느끼는 쪽으로 기울어진 [그런 disposition이 있는]’이라고 설명한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Ihr holden Schwäne“하면서 백조를 부르는 말걸기(Anrede)에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말걸기로  시적 주체가 등장하다. 근데 한가지 눈에 띄인다. 주체가 주체로 등장함과 동시에 아무런 형태없이 사라진다.

시적 주체(poetisches Subjekt)는 보통 강력한 창조자(poietes)로 등장한다. 시적 주체가 등장하는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 호라티우스가 „반두지아의 원천/fons bandusiae“을 노래하는 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 네번째 연, 2행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me dicente“. 문장의 흐름에 종속되지 않고 따로 우뚝 서 있는 소위 ‚ablativus absolutus’격으로 시적 주체가 등장한다. 해석해보자면 반두지아의 원천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노래하기/말하기 때문이다’란 것이다.

근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백조에 말을 거는 시적 주체가 대려 객체가 되어 ‚날 좀 봐줘’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