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개인주의 & 자유주의 (김지석 서평)

기독교-개인주의-자유주의 / 과학-성장-낙관주의

 

"(...) 서구문명의 핵심은 무엇이며 그것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갖는가 (...).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서구의 정체성은 기독교, 낙관주의, 과학, 성장,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독특한 여섯 가지 사상의 공동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서구의 자멸>(아래 참조)은 말한다. 이 가운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중요하다. 모든 개인에게 개성과 깊은 내면, 확고한 자아가 있다는 생각은 서구 정체성을 이루는 기본 요소다. 개인주의의 상승은 기독교에서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현대 경제·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기독교는 개인의 헌신을 요구하고 개인 책임을 물은 첫 종교라고 한다. 기독교가 보편화시킨 영혼이라는 개념은 세속화해 자아 개념이 됐으며, 이는 노력·자기개발·자기책임 등 개인주의 핵심 요소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개인주의를 사회적 차원에서 실현하는 유력한 방법이 민주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다. 이런 사회는 종교의 자유, 양심, 관용, 협동력,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시민들의 의지 등을 특징으로 갖는다. 자유주의가 그냥 생겨난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교육 수준과 독창력, 독립심을 갖춘 자유롭고 자치적인 시민은 자유주의 사회의 결과물이라기보다 전제조건이다. 또한 자유주의는 그에 걸맞은 경제·정치 체제를 요구한다. 과학·성장·낙관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찬란한 승리다. 처음에는 성장이 과학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을 줬으나 지난 3세기 동안은 과학이 성장의 주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18~19세기에는 서구의 과학적 주도권이 경제 주도권으로 이어졌고, 경제성장은 낙관주의자들의 힘을 키웠다. 계몽사상가들은 개인의 자율성과 진보를 옹호하면서 낙관주의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개인화한 사회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의 중압감을 증가시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분열, 사회자본과 공동체의식의 붕괴가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책임과 근심이 엄청나게 높아진다. 서구의 자유주의도 도덕적 기반으로부터 분리, 공동체에 대한 헌신 약화, 열정 부족 등의 문제에 부닥치고 있다. 서구 문명이 앞날은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인주의·자유주의의 활력을 되살릴 수 있을지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가·종교 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해방의 이념으로 출발한 개인주의와 민주적 자유주의는 자신감과 신뢰, 평등과 솔선, 책임감을 기반으로 아래에서부터 솟아나는 문명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구의 위기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런 장점이 침식되고 보수적 성격이 강해졌음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 개인주의·자유주의의 진보적 성격(*)을 충분히 맛보지 못한 상태다. 문명 패권의 향방을 가름할 중요한 열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보수화한 자유주의의 운명은"[일종의 서평], 기사등록 : 2009-03-20 오후 07:25:45 ⓒ 한겨레)

 

(*독자註) "개인주의·자유주의"를 아직 우리가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어떻게 바로 "진보적 성격"이 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우리가 못 가진 서구적인 것은 다 '진보적'일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 발상이 낳은 실언이 아닐런지... 물론 여기서 또 '진보'의 개념에 대한 왈가왈부가 필요한 시점인데, 거듭 말하지만 진보란 '진보=좌파이념'이지 '전진하는(개혁) 우파'의 그것까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좌파가 '개인'과 '자유'를 말살하고자 하는 이념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는 우파-자본주의에 충실히 복무해 온 가면 쓴(거짓으로-빈말로 위장한) '주의'일 뿐이고, 진짜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좌파와 통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기초한다면, 상기 발언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다. 부연하자면, 원래가 "개인주의·자유주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중세적 종교와 지배의 틀로 족쇄 채운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해방을 낳은 개인과 자유에 대한 존중의 이념이 다시 인간을 자본주의의 틀에 묶어버리는 과업에 복무했으니, 여기서 개인과 자유에 대한 왜곡이 있었다는 말이다. 고로, 다시 '해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 개인과 자유에 대한 재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

 

서구의 자멸 | 원제 Suicide Of The West 
리처드 코치, 크리스 스미스 (지은이), 채은진 (옮긴이), 말글빛냄, 2009-01-02, 양장본 317쪽, 15000원
Richard Koch &, Suicide of the West (Paperback), Continuum Intl Pub Group, 2007-ix.

 

여섯 가지 키워드 [출판사 책소개 -약간 우습지만-]

 

1. 크리스트교 : 서구의 성공과 부절제, 실패에 있어서 크리스트교만큼 중요한 요인도 없다. 크리스트교는 고대 세계를 세우고 천상과 지상의 관계를 변화시켰으며 현재까지 서구인의 생활양식과 인격을 정의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트교는 세계 최초의 개인화되고 행동주의적인 자기수양 운동이었다. 모든 서구인들이 크리스트교도나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심지어 다른 종교 신자들도 비서구인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이는 서구가 지구상의 다른 40∼50개 문명보다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크리스트교는 몇 가지 행동효과를 남겼다. 1)개인의 책임, 2)그리스도의 힘을 통한 변화, 3)약자에 대한 원조, 4)저주받은 이들의 구원 또한 변화와 개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근세기 들어 “신은 죽었다”는 사상이 출현했으며 크리스트교 내의 분열은 오늘날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분열의 축도라고 볼 수 있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자유로운 정신, 내적 자아라는 개념의 도입, 개별화와 권력에 대한 거부와 개인 관계에서의 사랑을 강조하는 태도, 학대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평등 요구, 자기수양과 자기개선 장려 등은 서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 서구를 분열시키고 나아가 세계를 분열시켰다. 그리하여 내부에 더욱 강하게 존재하는 위협으로 남아 있다.

 

2,3,4: 낙관주의, 과학, 성장 [생략]

 

5. 자유주의 : 모든 서구사회는 자유주의 원칙과 제도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비서구사회에서는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서구사회가 자유주의적인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며, 자유주의는 서구의 고유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자유주의 사회는 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자유정신과 공평함, 모든 시민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회다. 자유주의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인간 생명의 신성과 존엄, 모든 구성원의 교육, 기회의 균등, 개인의 자유, 과학과 예술 장려, 모든 인류동포의 본질적 평등을 훨씬 더 중요시한다. 이처럼 서구 자유주의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훨씬 큰 이익을 시민들에게 제공해준다. 20세기에 서구 자유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민족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의 도전으로 거의 사멸할 뻔했다. 현재 자유주의에 대한 외부의 위협들 -이슬람 혁명주의와 수많은 형태의 테러리즘- 은 서구에서 대중적인 호소력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며 군사적으로도 약하다. 그러나 자유주의 문명은 그 성공과 외부의 적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무시무시한 위협을 받고 있다. 가장 심각한 위험들은 모두 자유주의 문명이 자초한 것이다. 20세기 자유주의 어젠다가 서구 시민들의 안전과 복지, 자유를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증가시켜주었지만 현재 자유주의는 과거에 비해 훨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인 실천과 개선이 필요한 것이다.

 

6. 개인주의 : 서구의 중심적 특징은 개인주의다. 개인주의는 크리스트교에서부터 르네상스, 종교개혁, 현대경제 및 현대사회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모티프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비슷한 뿌리는 다른 어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개인화된 사회의 문제는,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개인의 중압감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전통적이고 중앙집권화된 사회는 제도와 권력 관계, 뚜렷한 역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정체성을 통해 움직인다. 개인화된 사회는 전혀 다르다. 사회가 개인화되고 우리가 가족, 친구, 이웃, 클럽, 교회, 조합, 공동체집단 등과 단절될수록 ‘사회 자본’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정신적 건강과 경제적 성공의 중요한 요소인 신뢰는 우리가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갈수록 붕괴된다. 개인화된 사회는 자유를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지시되거나 자동으로 결정되던 어려운 선택을 우리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개인주의는 서구의 성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였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그렇다. 개인주의는 서구의 도덕적 가치관과 낙관주의, 과학, 정치적 안정, 경제적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위험요소들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계급사회에서 개인화된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은 개인적인 상호관계와 지역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계급사회의 종말이 개인적 성공에 대한 피해의식과 냉소주의로 귀결된다면 서구는 더 이상 서구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세계의 미국화 :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미국의 활발한 국제적 지휘와 개입이 더 필요한가? 전 세계의 맥도널드화가 더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때때로 세계의 미국화는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보스니아 사람들을 집단학살로부터 구하기 위해 개입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세계의 미국화는 인도주의적인 중재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세계은행, GATT, IMF 등 미국이 주도하는 수십 개의 국제기구들이 그리는 것은 대체로 미국의 양식을 따르는 경제적·정치적·인도주의적 세계 질서다. 미국은 세계의 미국화를 위한 기반과 힘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완전한 미국화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미국의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이 계속해서 널리 퍼져나간다고 생각해보라. 필연적으로 강자에게 유리한 자유무역이 전 세계에 보편화된다고 생각해보라. 군사적·과학적·경제적 주도권을 바탕으로 미국은 새롭고 영속적인 문명을 이루게 될 것이다. 미국은 제국주의 로마만큼이나 무자비하게 세계의 대부분 혹은 전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자멸은 불가피한가? : 지난 2세기 사이 서구문명은 다른 어떤 문명도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 바로 풍요로운 사회와 문화다.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모든 세대가 그 부모 세대보다 풍요로운 생활수준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중요한 자유의 풍요도 이루게 되었다. 서구문명은 많은 것을 소망했고 많은 것을 이룩했다. 그러나 서구문명은 막대한 성공을 가져다준 사상을 이제 단념해버린 것일까? 서구문명은 스스로 만든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 것인가? 서구문명은 훨씬 덜 매력적인 문명으로 변하기 시작하여 머지않아 훨씬 덜 성공적인 문명이 되고 말 것인가? 서구문명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걸어가기가 좀 더 쉬운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냉소주의와 지독한 이기주의, 무관심, 권력의 재집중, 공격성 등이 놓여 있다. 이 길은 무정부주의에서부터 신파시즘, 환경 파괴, 새로운 미제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모두 서구문명을 종말로 인도할 것이다. 다른 한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용기의 회복, 서구인들 스스로와 서구 문화에 대한 확신, 미국 내와 유럽 내, 유럽과 미국 간, 다른 유럽인 정착지들과의 감정적 단결, 책임감 있는 수많은 개인들이 권력이나 맹목적인 전통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 낙관주의, 이성, 연민, 평등, 개인주의, 상호 동일성 등 스스로 발견하고 스스로 인정한 속성들을 통해 한데 뭉친 사회와 문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 여행을 위해서는 혁신적인 방향의 전환이 필요하다. 서구의 숙명은 모든 서구인들의 소망과 잠재력과 도덕성을 발휘함으로써, 그리고 인류를 매혹시킬 만한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인도적이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리처드 코치 (Richard Koch) - 기업가이자 투자가, 경영컨설턴트. 컨설팅, 개인업묵관리, 호텔에서 레스토랑과 주류사업, 변화관리 교육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하고 있다. 베인&컴퍼니(Bain&Company)의 창립 멤버이자 파트너였으며, 엘이케이컨설팅(LEK Consulting)을 공동 창립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oston Consulting Group)의 컨설턴트로도 활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 등이 있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80/20 법칙>의 저자다. 최근에는 영국의 전 문화부장관 크리스 스미스와 <서구의 자살(Suicide of the West)>을 공저했다. 필로팩스, 벨고, 플리머스 진, 캡스톤 등을 운영하며 기업가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룩셈부르크와 영국의 상장 벤처 캐피탈 회사 등을 포함한 몇 개 기업의 사외 이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강의와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크리스 스미스 - 최근까지 영국 하원의원이었고 문화언론체육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로크 칼리지의 명예연구원으로, 여러 개의 주요 미술 단체를 이끌고 있다.
채은진 - 서울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다 빈치의 유산> <권력과 광기>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 앙토넹 카렘 평전> <아인슈타인, 신이 선택한 인간> <누가 달을 만들었는가> <인류의 조상을 찾아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등이 있다. 또한 <여성에게 물어라> <변호사처럼 설득하라> <그레이 매터스> <먹히는 말> 등을 공동 번역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The Russell Tribunal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건)

지난 3월 4일 벨기에 브뤽셀에서 '국제전범재판소'(일명 '러셀재판소')에서 기자회견이 열렸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태에 대한 '전범재판'을 2010년(확인요망)에 연다는 발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지금 '스테판 에셀'이라는 프랑스 대사가 재판소의 대표인 모양인데, 그래서인지 브뤽셀이라서인지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래 동영상에서 그가 불어로 발표를 한다(노인의 독특한 발음을 아래의 텍스트에서 따라가면 아주 재미있다). 다음에 링크된 '국제 전범재판소' 사이트에 가면 다른 사람들의 영어 발표문 등도 있음. 지나는 길에 간단한 '러셀재판소'에 대한 소갯글은 위키페디아에서 도입부만 잘라왔다. 우리는 '전범재판소'라는 명칭에 익숙하지만, 이 사람들은 흔히 '러셀재판소'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 재판소는 1966년 러셀(B.Russel,1872~1970)과 사르트르(J.-P. Sartre,1905~1980)에 의해서 창설됐다고 함. 기타 자세한 내용은 불어판보다 훨씬 상세한 영어판을 참조할 것:
Tribunal Russell // Le tribunal Russell, aussi désigné par Tribunal international des crimes de guerre et Tribunal Russell-Sartre, était un tribunal d'opinion fondé par Bertrand Russell et Jean-Paul Sartre en novembre 1966 suite à la publication du livre de Russell, War Crimes in Vietnam. (...)
Russell Tribunal // The Russell Tribunal, also known as the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r Russell-Sartre Tribunal, was a public body organized by British philosopher Bertrand Russell and hosted by French philosopher and playwright Jean-Paul Sartre. Along with Ken Coates, Ralph Schoenman, and several others, the tribunal investigated and evaluated American foreign policy and military intervention in Vietnam, following the 1954 defeat of French forces at Dien Bien Phu and the establishment of North and South Vietnam. (...) http://en.wikipedia.org/wiki/Russell_Tribunal.

Le tribunal Russell pour la Palestin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동자, 소외를 넘어 소비의 주체로? (박노자)

아래에 옮기는 글에서 박노자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람들(노동자)이 갖는 '소비 욕망'을 야구에서부터 섹스투어까지 어디서나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상품의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가 --맑스의 말처럼-- 자기가 만든 상품에서 소외되고 소비의 주체에서 멀어지는 것이 이제는(21세기에는) 아니라, 더 많은 외적 대상을 소비 품목(상품)으로 삼음으로써 --심지어는 스스로도 계급시스템의 상위그룹에 소비대상으로 노출하면서 동시에 하위그룹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자본주의가 기획하고 조장하는 "분리통치"와 '소비-욕망-시스템'에 깊숙히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의 창궐에 충실히 복무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 즉 인간의 이런 욕망 시스템에 부응할 새로운 세상은 무엇일지, 이런 것을 "자본주의 '이후'"의 그림으로 한번 고민해 보자는 것인 듯하다. 물론 각자가 저열한 본능적 욕망을 제어하여 엄숙한 성인군자가 되자는 도덕적 훈계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분리-지배-시스템'에 사람들이 익숙해지거나 그것을 즐기는 경향성을 갖게 된 원인은,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해 그런 경향성이 더 노골화 되고 강화되도록 함으로써 자기(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려는 자동적이고 구조적인 동력에 있는 건 사실이겠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이런 경향성 자체가 본연적으로 자본주의에 더 잘 조화되고 그래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끈 때문은 아닌지 하는 의심도 든다. 만약에 이런 의심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인위적으로 꾸미고 제시될 '자본주의 이후' 시스템의 모습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사람들에게 먹혀들지(잘 적용될지) 약간은 의문이다. 여기서 인류학적 인간 개조론이나 교육론이 나오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개조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신의 몫이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면, 다만 그 본능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을 가둘 다른 류의 감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예컨데, 도덕 말고, 나를 나의 존재론적 가치로부터 소외시키는 족쇄로서의 감옥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무사히'(타인과의 충돌없이) 실현시키기 위한 인위적 틀로서의 감옥 같은 것...

 

 

[펌] 박노자,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

 

"What constitutes the alienation of labour? Firstly, the fact that labour is external to the worker – i.e., does not belong to his essential being; that he, therefore, does not confirm himself in his work, but denies himself, feels miserable and not happy, does not develop free mental and physical energy, but mortifies his flesh and ruins his mind. Hence, the worker feels himself only when he is not working; when he is working, he does not feel himself. He is at home when he is not working, and not at home when he is working. His labour is, therefore, not voluntary but forced, it is forced labour"

"노동의 소외란 무엇인가? 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재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노동자의 실존적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노동자는 그 노동에서 자신을 확립시키지 못하는 것이고 그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노동자는 노동 과정에서 불행하고 불쾌하게 느끼고, 유쾌한 심신의 기운을 발산하지 못하는 반면 그 심신을 파괴시킨다.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을 때만 행복감을 느끼고 노동할 때에 불행감을 느낀다. 노동하지 않을 때에 집과 같은 느낌이고 노동할 때에 '바깥'이다. 즉, 그의 노동이란 자원적이지 않은, 강요받은 노동이다." (『경제-철학 초고』(1844))

 

 (...)『경제-철학 초고』에서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많이 생산할수록 덜 소비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생산자를 소비자로 보지 않았는데, 21세기 벽두 자본주의의 제1철칙은 바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不二'입니다. 자본주의가 바뀌었다면 그게 바뀐 것이지요. 노동자가 5주 휴가 동안 그리스에서의 호텔과 각종의 휴양 서비스를 소비할 수 있는 유럽은 그렇다 치고도, 5주 휴가가 없는 이 '중간적' 준주변부의 대한민국에서마저도 노동자가 '노예 노동'의 8~10시간을 꾹 참고 견디고 나면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소주와 삼겹살 이외에도 많습니다. '한일전'에서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쪽바리들을 깨부셨다는 국민적 승리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의 유명 연예인의 표정연기와 예쁜 하얀 살갗의 이미지, 달콤한 유행가의 소리, 그리고 백화점에서의 판매원 아가씨의 친절한 웃음과 존대말….

 

(...) 착한 사람 마르크스는, '완성된 인간'이 되기를 지향하는 노동자가 당연히 자기 상품화를 거부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상품화를 노동자가 즐길 수도 있다는 걸, 아직 원시적 축적 상태인 그 당시의 영국 자본주의를 보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지요. 그러나 노동자 밑에도 노동자가 있고, 노동자 위에도 노동자가 있는 오늘날의 완숙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에 있는 노동자에게 밑에 있는 노동자의 자기 상품화란 '즐거움' 그 자체가 될 수 있지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는 전문직 남성 정규직 노동자가 여승무원의 섹시한 외모와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 매너 등 강요받은 그 친절을 안 즐기나요? 은행에 들르는 정규직 노동자는, 창구에서 노동하면서 그 친절도의 평가를 손님한테 받아야 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무조건적 친절'을 안 즐기나요?

 

사진 편집: 레디앙

 

(...) 복합화된 자본주의 사회라는 피라미드에서는, 약간이라도 높은 위치를 점한 노동자는 거의 당장에 그 생활 양식/성향상 '새끼 자본가'로 둔갑되지요. 부동산과 주식 투자 등을 통해서 자본의 세계와의 연계를 모색해도 그 밑에 있는, 보다 가난한 여성/저숙련/외국인/청년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꺼립니다. 분리통치가 지금처럼 완벽해질 수 있다는 걸 마르크스가 예측할 수 있었나요? 자본주의의 주기성 - 필수적 공황의 도래, 이윤율저하 원칙 등 때문에 노동자들이 구조적 고통을 받게 돼 있지만, 약간이라도 체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갖게 되면 그 체제의 아주 보수적일 일부분이 되고 맙니다. 감옥이 즐겁고 달콤하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 감옥의 종신 수인을 자청할 확률은 매우 높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자본주의적 대안의 매력을 보여주자면 (...) 자본이 없을 때에 앎이란 얼마나 맛이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게 더 효율적일 걸요. (...) 다른 차원에서 자본주의 '이후'를 '가시적으로'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한일야구부터 섹스투어까지-[나의 혁명론⑦] 맑스의 꿈…현대 노동자들이 누리는 것, 레디앙,  2009년 03월 19일 (목) 09:31:39)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랑스 300만명이 거리로..

약속대로(*), 어제, 3월 19일 전국단위의 파업이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실행됐다는 소식이다. 지난 1월 29일 총파업(**)에서 250만 명이 파업에 동참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규모가 조금 더 늘어난 300만 명이라고 한다. 물론 사르코지 정부는 '국민의 목소리에 귀는 기울이겠지만 더 이상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며 버티고, 노동조합 측은 '승리의 그날까지 투쟁은 계속된다'며 결의를 재확인 했다는데... 학교도 문을 닫고 교통도 절반 이상이 멈춰섰고, 심지어는 신문도 배달이 불가능하므로 인터넷에서 공짜로(원래 PDF 판은 유료) 보라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르몽드(석간)는 대문에 걸어두기도 했다.  

(*) 2009.02.19 | 26억euro, 부족하다, 3월 19일 다시 보자!  http://blog.jinbo.net/radix/?pid=87
(**) 2009.01.30 | 20년만에 거리로 나선 프랑스 봉급쟁이들  http://blog.jinbo.net/radix/?pid=71

 

  "Le Monde" disponible gratuitement
En raison d'un mouvement de grève, le quotidien "Le Monde" daté du 20 mars ne sera pas disponible en kiosque. Retrouvez gratuitement le journal électronique.

 

Vidéo
Colères de cadres dans le cortège parisien
LEMONDE.FR | 19.03.09 | 20h39  •  Mis à jour le 19.03.09 | 20h53

Durée : 2:40  |  Images : Le Monde.fr
Les cadres, parmi lesquels beaucoup n'avaient jamais manifesté, étaient au rendez-vous du défilé entre la place de la Bastille et la Nation, à Paris jeudi 19 mars.
Reportage réalisé par Stéphane Mazzorato et Jonathan Parienté.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레비스트로스 1 (탄생 100돌-2008/11/28)

1/3.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돌 ‘구조주의 학술 파티’

‘구조·탈구조와 우리’ 주제, 김형효·최용호 교수 등 인류·철학자들 논문 발표, “구조주의 영향 되짚을것”

 
대표작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로 친숙한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사진)가 28일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신화·결혼규칙·요리체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의 심층에는 ‘형제와 자매’ ‘구운 것과 끓인 것’ ‘손님과 친족’ 같은 이원적 대립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혀낸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의 로만 야콥슨,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과 함께 구조주의 시대를 열어 젖힌 20세기 지성계의 거목으로 꼽힌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회 제도가 생물학이나 개인 심리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관계망’ 속에서 구성된다는 구조주의의 발견에 대해 20세기 지성사는 “데카르트 이래 인류가 자부해 온 주체의 존엄성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푸코)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93년 <보기 듣기 읽기>라는 비평집을 낸 뒤 모든 대외 활동을 접었던 까닭에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는 15년 가까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사이 프랑스에서는 지난 5월 그의 저술 7편이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로 묶여 나온 것을 계기로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의 매체가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대대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100번째 생일을 일주일 남짓 앞둔 19일 현재까지도 프랑스를 제외한 서방 언론의 반응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주의의 변방’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헤겔·하이데거로 상징되는 독일 철학과, 미드·래드클리프브라운 등의 영미 인류학에 밀려 변변한 학맥조차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기호학회가 22일 서울 덕성여대에서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주년-구조·탈구조와 우리’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선 원로 학자인 김형효·임봉길 교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10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최용호(한국외대)·박여성(제주대)·김기국(경희대)·윤성노(숭실대) 교수 등 인류학·철학·불문학·국문학계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와 관계를 맺은 학자들이 총출동한다.

 

 

 » 1981년 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한 레비스트로스(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전통 한옥구조를 둘러보고 있다. 한길사 제공 
  
사실 레비스트로스와 한국의 인연이라면, 그가 1981년 10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해 20일 가까이 머물며 경주와 통도사 등을 방문한 뒤 돌아갔다는 것 정도다.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1968년 방한한 프랑스 문학비평가 질베르 뒤랑이 강연을 통해 그의 이름을 언급한 뒤, 같은해 잡지 <사상계>에 3회에 걸쳐 ‘레비스트로스 기획’이 연재되면서부터다.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학자도 그의 대표작 <신화학> 1·2권을 번역한 임봉길 강원대 교수가 유일하다. 임 교수는 프랑스 인류학의 대가 마르셀 모스 밑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수학한 조르주 콩도미나스 교수에게서 인류학을 배웠다. 임 교수는 “3년 전 번역한 <신화학> 1권을 레비스트로스 교수에게 보냈더니 ‘표지 디자인이 좋다. 한글도 아름답다’는 내용의 친필 답장을 보내왔다”며 “지난해부터 기력이 쇠해져 파리의 집에서 칩거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89년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라는 책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사상을 국내에 본격 소개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구조주의의 ‘학문적 시민권’ 획득이 지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어를 모르고, 또 구조주의 이론 자체가 워낙 난해하니까 철학이나 인류학 쪽에서는 제대로 소화를 못했다. 게다가 감정으로 모든 것을 결단내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선험적 구조’를 중시하는 구조주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송효섭 기호학회장은 “포스트모던과 탈구조가 논의되는 21세기의 시점에서 그의 이론과 방법론은 아직도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며 “구조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의 석학과 중진, 신진기예를 망라해 그의 탄생 100년이 던지는 의미와 공과를 짚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기사등록 : 2008-11-19 오후 07:36:24 ⓒ 한겨레)

 

 

2/3. 위의 기사에서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언급해준 덕분에 찾아보니 이런 게 있다.

Le centenaire de Lévi-Strauss : Un Indien dans le siècle

Nº2269 / SEMAINE DU JEUDI 01 Mai 2008 < Le Nouvel Observateur < Un Indien dans le siècle
Père tutélaire du structuralisme, à la fois philosophe et ethnologue, l'auteur de «Tristes Tropiques» va avoir 100 ans et entre en Pléiade. Il est l'auteur d'une oeuvre considérable dont la portée est universelle

 

Cent ans de solitude à travers un âge contemporain qu'il n'aura guère aimé. Cent ans d'une vie sereine et discrète, indifférente à tous les projets de récupération, à contre-courant de toutes les modes. Si Claude Lévi-Strauss a profondément marqué la pensée de son temps, jamais ce dernier n'a recueilli le moindre éloge de la part du grand ethnologue, qui lui a toujours préféré la compagnie des mythes bororo, des opéras de Wagner ou de la prose dix-huitiémiste de Rousseau, le seul maître-penseur qu'il se reconnut vraiment, à l'exception peut-être de l'auteur des «Mémoires d'outre-tombe».


«Il n'y a plus rien à faire : la civilisation n'est plus cette fleur fragile qu'on préservait, écrivait-il dans «Tristes Tropiques» en 1955, le livre unanimement salué par Bataille, Aron ou Blanchot, et qui le révélera au public. L'humanité s'installe dans la monoculture; elle s'apprête à produire la civilisation en masse, comme la betterave.» Emprise totale de l'homme sur une nature massacrée, destruction accélérée de toute diversité culturelle à travers le globe, ainsi le chercheur désenchanté, qui n'avait jamais envisagé sérieusement de transformer politiquement le monde, a-t-il aussi fini par renoncer à le sauvegarder. «Ce n'est pas pour perpétuer cette diversité que je lutte, déclarait-il ainsi dès 1967, à la parution du deuxième volume des «Mythologiques», mais pour en préserver le souvenir.»(*) Conserver la mémoire sensible d'une danse nambikwara ou le geste d'une main qui allume le feu, contre une barbarie technicienne et marchande en passe d'imposer partout sa paix blanche et de stériliser tout germe de création spirituelle à venir, c'est ainsi que Lévi-Strauss a modestement conçu son travail. Curieuse situation à cet égard que celle des ethnologues, qui ne doivent l'existence de leur discipline qu'à un colonialisme destructeur de «tout ce à quoi nous attachons du prix», soulignait-il lors de son premier cours au Collège de France en 1959. C'est sur le conseil de Paul Nizan que le jeune agrégé de philosophie affirmera avoir choisi cette voie, comme porte de sortie à l'enseignement. En 1935, à 27 ans, il se retrouve ainsi au Brésil, découvrant la vie d'«épuisement physique et mental constant» de l'ethnologue de terrain. Un certain absolutisme l'y poussera également. Avec la philosophie occidentale, il aurait eu l'impression de «s'arrêter à mi-chemin», dira-t-il, de se borner aux enceintes mentales bâties par la Grèce et par Rome, à cette civilisation à la fois très tardive et très circonscrite dans l'espace qui, depuis des milliers d'années, s'était servie de la pensée dite «primitive» comme d'un paillasson. Avec l'ethnologie, au contraire, il ambitionne d'embrasser la totalité des expériences humaines connues ou possibles, et ainsi d'«aller jusqu'à l'extrême limite de ce qui était le but même de la philosophie».

[대충 요약하면] 레비스트로스는 문화 다양성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가속화에 반감을 갖지만, 그렇다고 (거창하게 맑스처럼) '세계를 변혁하기'에 심각한 정치적 고려를 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는 말하길, "내가 투쟁하는 것은 문화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문화 다양성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기술과 상품이 갖는 야만의 (문화에) 대항하는 그런 기억 말이다. 아마도 이런 야만은 우리 모두를 가격에 옭아매게하는 파괴적 식민주의의 결과일 것이다. -하여튼 아주 겸손한 투쟁목표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더 거창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A ce donquichottisme revendiqué, Lévi-Strauss, issu d'une lignée juive d'origine alsacienne, consentira parfois du bout des lèvres une autre explication. Comme tant d'autres, ce petit-fils de rabbin versaillais expérimente l'antisémitisme des années 1930. «On m'a traité de sale juif dès l'école communale...» Et encore au lycée, où il répond par le coup de poing. «Se découvrir subitement contesté par une communauté dont on croyait être partie intégrante peut conduire un jeune esprit à prendre quelque distance à l'égard de la réalité sociale, contraint qu'il est de la considérer simultanément du dedans où il se sent et du dehors où on le met.» Une situation qui, si elle le mènera d'une certaine façon au «regard éloigné» de l'ethnologue, ne le poussera jamais au rejet d'une identité française que Lévi-Strauss revendiqua toujours «intégralement et exclusivement». «Je me sens concerné par le sort d'Israël, affirmera-t-il des années plus tard, de la même façon qu'un Parisien conscient de ses origines bretonnes pourrait se sentir concerné par ce qui se passe en Irlande : ce sont des cousins éloignés...»

레비스트로스는 어릴 적부터 '나쁜 유대인'이라고 놀림과 배척을 당했고, 이런 경험이 그가  "동화-통섭-합류 / 배제-배타-거부" 등의 어휘를 인류학 연구에 꾸준히 적용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Revenu du Brésil, le jeune chercheur ne prend pas tout de suite la mesure du danger hitlérien. En septembre 1940, il a même la ferme intention d'occuper le poste au lycée Henri-IV où il vient d'être nommé. «Avec le nom que vous portez, aller à Paris ? Vous n'y pensez pas ?», l'avertit le fonctionnaire de Vichy chargé d'examiner son dossier. Ce sera donc l'embarquement sur un vieux rafiot pour New York, Lévi-Strauss bénéficiant du plan de sauvetage des savants européens menacés par les nazis initié par la Fondation Rockefeller. Arrivé sur place, son nom pose encore problème... mais cette fois c'est à cause des fameux blue-jeans. On lui conseille de le changer sans quoi les étudiants «would find it funny» -, et on lui confie sans tarder un cours de sociologie contemporaine de l'Amérique du Sud, dont il ignore alors presque tout.

 

Ces années new-yorkaises seront d'une fécondité exceptionnelle. C'est là qu'il s'attelle à la rédaction d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 dépouillant des monographies ethnologiques du monde entier. C'est là aussi qu'il côtoie les surréalistes, Breton, Ernst ou encore Duchamp, qui lui communiqueront le goût des rapprochements abrupts et imprévus, procédé esthétique qu'il transformera en méthode d'analyse. «Nos soirées me faisaient penser, toutes proportions gardées, aux précieuses ou à l'Hôtel de Rambouillet», dira-t-il en 1985, au moment de la parution de «la Potière jalouse». C'est aussi à New York, pendant ces années de guerre, qu'il fera la rencontre intellectuelle décisive, celle du linguiste Roman Jakobson. «Je faisais du structuralisme sans le savoir. Jakobson m'a révélé l'existence d'un corps de doctrine déjà constitué.» C'est une illumination. Une dizaine d'années après son retour en France en 1945, Lévi-Strauss sera devenu la figure emblématique de ce mouvement aujourd'hui encore mal compris.


Le «structuralisme», pour dire les choses simplement, est avant tout une façon de ne pas se laisser duper par le sentiment de l'identité personnelle. A rebours de l'existentialisme sartrien, Lévi-Strauss entre en guerre contre le «sujet», «cet insupportable enfant gâté qui a trop longtemps occupé la scène philosophique, et empêché tout travail sérieux en réclamant une attention exclusive». Ainsi se place-t-il résolument du côté de la «rationalité sans sujet» contre les tenants du «sujet sans rationalité». Du marxisme, sa pensée hérite l'idée que toute conscience sociale est trompeuse et que l'existence pratique des hommes conditionne leurs productions psychiques. Du freudisme, celle que même les expression!s en apparence les plus arbitraires voire absurdes de l'esprit peuvent être déchiffrées. Ainsi Lévi-Strauss se lance-t-il dans un inlassable décryptage des invariants et tracés obligatoires qui se dissimulent derrière l'apparente infinité des mythes et autres faits culturels.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반대하여 주체에 대항(한겨레 기사의 푸코 발언 참조)하는 전쟁에 돌입하며 이렇게 말한다 : "이 참을수 없는 응석받이 아이(사르트르)가 너무 오랫동안 철학 무대를 장악했고, (실존주의에) 일종의 배타적 주목을 주창하며 모든 진지한 연구를 가로막았다."

 

Claude Lévi-Strauss / né en 1908, Claude Lévi-Strauss est le fondateur de la théorie structuraliste française. Philosophe de formation, il devient ethnologue au Brésil dans les années 1930. Elu en 1959 à la chaire d'anthropologie sociale du Collège de France, il y enseignera jusqu'en 1982. Académicien depuis 1973, il est notamment l'auteur de «Tristes Tropiques» (1955), de «l'Homme nu» (1971) et de «Regarder, écouter, lire» (1993), tous publiés chez Plon.

Aude Lancelin / Le Nouvel Observateur

  

 

3/3. 탄생 100 주년 기념 신문 기고문 3편


Lévi-Strauss depuis le temps / par DENIS KAMBOUCHNER

Le philosophe en rupture de philosophie et anthropologue aura 100 ans le 28 novembre

On dira «le siècle de Lévi-Strauss». Lui n’en croit rien. «Le siècle de…», quelle présomption ! Cela ressemble à tout ce qu’il faut fuir, formules, slogans et hyperboles. La moindre décence l’indiquera : un siècle n’est à personne. Et d’abord, quel siècle ? Quand on a commencé sa vie dans le Paris de Proust, avec ses restes de campagne et ses voitures à chevaux, et qu’on l’achève à l’âge d’Internet, cela fait bien trois siècles en un.

Et puis, songez à l’héritage : un monde si dévasté. Laideur industrielle, océans de déchets, espèces et cultures éteintes en nombre, et l’agressivité démultipliée par le numérique… Non, pas son siècle. Le siècle qui aura été le sien, de cœur, s’il y en eut un, c’était il y a longtemps, disons : pas après les années 60. La «civilisation mondiale» qu’annonçait la fin de Race et histoire, nous y sommes, et elle n’est, comme prévu, «civilisation» que par antiphrase.

Pas le sien, donc - et pourtant le siècle est là, qu’on ne franchit pas par hasard. Sans une rare endurance doublée d’un régime de chaque jour, impossible d’y compter. Était-ce un but ? A soi seul, non bien sûr. Regarder, écouter, persévérer dans sa propre veille, la parfaire encore, oui, si l’on veut, c’est là le but. Mais dans le cas de Lévi-Strauss, longueur de vue aura rimé avec longévité.

Lettres. Depuis longtemps, sans pose aucune, cet homme s’est installé dans une forme d’intemporalité. N’imaginez pas une absence. Retiré, oui, il l’est depuis longtemps, sortant fort peu, ne se mêlant à rien qu’il n’ait choisi. Mais le fait provient d’avant la retraite, et va de pair avec une merveille d’attention : à preuve ses lettres toujours si exactes, dans leur belle encre terre de Sienne. Tout est là, dans ce sens de la correspondance, ce juste emploi du temps et cette très ancienne courtoisie.

 

De même pour l’œuvre. Quand donc Lévi-Strauss s’est-il, à sa manière, installé dans l’intemporel ? Lui le sait peut-être, nous non. Mais on peut répondre : quand son style a été formé. Ce style se reconnaît, comme celui des plus grands, à quelques mots. Voyez le début des Structures élémentaires de la parenté (1947) : «De tous les principes avancés par les précurseurs de la sociologie, aucun n’a, sans doute, été répudié avec autant d’assurance…». Ou sur un autre registre celui, si fameux, de Tristes tropiques (1955) : «Je hais les voyages et les explorateurs. Et voici que je m’apprête à raconter mes expéditions. Mais que de temps pour m’y résoudre !» Rien ne fut jamais mieux frappé. C’était l’autorité d’un Descartes ou d’un Bergson (pour lui deux figures adverses), ou encore celle d’un Bach, d’un Poussin, d’un Montaigne, avec une extrême ouverture du champ, et le soin apporté à chaque nuance.

Masques. Grand style classique ? Bien sûr. Poli dans le solide lycée des années  20, mais surtout nourri de toutes sortes d’expériences : société, conversations, paysages, peinture, musique, littérature, philosophie, histoire et politique - action comprise, comme de rigueur à l’époque. Le fruit, en somme, d’une culture intensive et très tôt plurielle dans un esprit d’avance indépendant. De quoi nous renvoyer tous à notre éducation bancale, et à nos ignorances, qui sont légion. Pourquoi le nier ? L’œuvre de Lévi-Strauss a eu d’emblée quelque chose à voir avec le musée. Ainsi au départ de la Voie des masques (1979). Le musée : non simple collection publique ou privée, mais conservatoire d’une multiplicité rendue sensible et lisible. Pourtant, le musée n’est pas son espace : ce que cette œuvre donne à voir est tout en extérieur. Ouvrez au hasard le même livre : «Il n’est donc pas dépourvu de sens, ni de portée, qu’une version kwakiutl du mythe de l’amant-chien s’achève sur un repas de Scorpénidé rouge» (p. 212). Cette poésie du symbolique est partout, et avec elle toute une nature et toute une vie de peuples presque disparus. L’intemporel ne tient pas simplement ici au style ni à l’espace : tout autant à la substance, immémoriale, et au regard qui distingue tout.

Philosophe en rupture de philosophie («la pensée» s’enivre si souvent de son verbe…), Lévi-Strauss avait fait une exception pour Spinoza. De la connaissance la plus haute, Spinoza dit qu’elle est «éternelle». Et donc, quiconque a cultivé ce genre de connaissance, «la plus grande partie de son esprit est éternelle». L’idée a sa tradition, qui remonte aux Grecs. Ses objets étaient tout autres. N’empêche : aux prises avec une complexité chatoyante et condamnée, les grands livres de Lévi-Strauss, dont ses Mythologiques, réalisent quelque chose de cette éternité.

Lévi-Strauss, dernier stoïcien ? néoplatonicien dissident ? Non, s’il vous plaît, pas de formules. Et quant au «siècle», oui, il s’y est mesuré. Mais pour la profondeur du temps, c’est encore peu. (Liberation Culture 13 nov. 6h51)

 

 

Il nous a anticipés / par Patrice Maniglier 

Quand je suis entré à Normale-Sup, au début des années 1990, Lévi-Strauss était complètement absent du paysage philosophique. Il y avait un repli de la philosophie sur elle-même, et ceux qui, dans ma génération, s'intéressaient au monde contemporain, étaient nourris par des auteurs comme Deleuze, Foucault, Derrida, voire Wittgenstein. Le structuralisme passait pour une théorie des systèmes immobiles, que ces philosophes-là avaient dépassée en faveur d'une pensée du changement.

Or quand j'ai lu Lévi-Strauss, j'ai eu la surprise de découvrir un penseur fasciné par la variabilité des cultures humaines, et qui considére que rien n'a de sens sinon ce qui est en train de se transformer. Au moment des débats sur le pacs, et alors que certains utilisaient Lévi-Strauss pour justifier le refus d'accorder des droits aux couples de même sexe, j'ai eu l'impression que ses textes étaient au contraire un instrument propre à éclairer ce qui avait changé pour que le mariage ou l'adoption par des couples de même sexe deviennent soudain au moins pensables, alors qu'ils ne l'étaient pas vingt ans auparavant.

Dans un autre domaine, il permet de comprendre comment la philosophie peut se nourrir d'un film pour teenagers comme Matrix : non pas en proposant une interprétation profonde, mais en acceptant qu'un film hollywoodien, comme le mythe selon Lévi-Strauss, n'a pas un sens figé, et qu'il en produit en combinant des aspects de la culture très éloignés les uns des autres, la religion et la bande dessinée, le cinéma et la métaphysique. Bref, qu'on se veuille "post-moderne", "queer" ou "pop", Lévi-Strauss nous a anticipés, il nous a situés ; et il nous a justifiés mieux que nous ne l'avions fait.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6.11.08. LE MONDE | 25.11.08 | 10h28  •  Mis à jour le 27.11.08 | 10h03 / Patrice Maniglier est philosophe, professeur à l'université d'Essex (Grande-Bretagne). Propos recueillis par Jean Birnbaum)
  

 

L'absolue fragilité des sociétés / par Stéphane Breton   

Que découvre-t-on lorsqu'on lit Lévi-Strauss pour la première fois ? L'existence d'une chose que l'on a pourtant sous les yeux, "la société", que tout dans nos habitudes modernes conspire à dissimuler ou à juger scandaleuse, aliénante, contraire à notre frénésie d'émancipation. Et cette société, qu'on trouve aussi bien chez les Indiens du Mato Grosso que chez les habitants des pays industrialisés, en elle tout se tient, c'est cela qu'on lit dans Lévi-Strauss. Bouger une pièce change l'équilibre général.

C'est pourquoi elle est si fragile : pas tant sous le coup des crises que dans l'érosion désinvolte des habitudes et des valeurs qui vont de soi et sur lesquelles repose notre vie la plus simple. C'est cette éblouissante fragilité des sociétés lointaines ou proches qu'après être devenu ethnologue j'ai voulu peindre dans mes films documentaires : en recréant une totalité, en saisissant une atmosphère plus vaste que les personnages.

L'homme à la caméra et l'ethnologue ont au moins une chose en commun. Ils savent que ce qu'ils observent, ce ne sont pas seulement des "agents", mais une société. Ce n'est pas de manière neutre qu'ils voient ce qui leur est étranger, mais selon leurs propres habitudes de pensée. Ils savent aussi que lorsqu'ils regardent quelqu'un, celui-ci les regarde en retour, équipé de "sa" culture. C'est toujours une société qui en regarde une autre.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6.11.08. LE MONDE | 25.11.08 | 10h28 / Stéphane Breton est ethnologue et cinéaste au Musée du quai Branly, où il dirige la collection de films documentaires "L'usage du monde". Propos recueillis par Patrick Kéchichian)

 

 

[기타] 

Lévi-Strauss a 100 ans / A l'occasion du centenaire de l'anthropologue, aujourd’hui, le musée parisien du Quai Branly organise une série de manifestations en son honneur. DOMINIQUE POIRET, http://www.liberation.fr/culture/1101216-levi-strauss-a-100-ans:i-2 [사진모음] 

Lévi-Strauss, l'éternel retour / L’anthropologue et philosophe a cent ans aujourd’hui. L’Humanité de vendredi rend hommage avec quatre pages spéciales à l’inventeur du structuralisme, qui a parcouru les sociétés humaines pour en faire surgir les rationalités ancestrales. Avec entre autres un entretien avec Vincent Debaene, qui a coordonné et préfacé le volume des Œuvres de Claude Lévi-Strauss dans la Pléiade. Ainsi que des points de vue de Emmanuel Terray, Christian Bromberger, Marc Augé, http://www.humanite.fr/Levi-Strauss-l-eternel-retour [뤼마니떼에는 특집으로 신문 네 면을 할애했다는 말만 있고 내용은 아직 안 나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레비스트로스 2 (저작,영상인터뷰,etc.)

1/3. 쁠레이아드(Gallimard-Pleiade)의 레비스트로스

레비스트로스(*)가 살아서 작년에(2008-05-01) 갈리마르출판사의 '쁠레이아드' 판에 들어갔다기에 찾아다 옮긴다. 과연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이 꼴렉시옹(총서)에 살아서 들어간 자가 누가 있을지 궁금하다 (이건 조사를 할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생략). 이러다가 어쩌면(조금만 더 오래 살면) 살아서 빵떼옹(Phantheon-만신전: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자들의 공동묘지)에 자리를 예약해 두는 아마도 최초의 산 자가 되지 않을는지도 모르겠다는(유네스코 건이라는 아주 큰 물건도 있고 하니) 무례한 상상을 해본다.

(*) 어떤 사람들은 '레비'가 이름이고 '스트로스'가 성인 양 둘을 띄어쓰는 경우도 있는데, '레비-스트로스'(Lévi-Strauss)는 전체가 성이고 그의 이름은 '끌로드'(Claude) 이다. 비슷한 예로 메를로-뽕띠(Merleau-Ponty)의 성도 뽕띠나 퐁티가 아니라, 이 전체이고 그의 이름은 '모리스'(Maurice) 이다.

   

Résumé - Oeuvres // Alliant le classicisme du style et la modernité de la méthode, l'oeuvre de Claude Lévi-Strauss est à la fois pensée du monde, expérience de soi, et expérience sur soi. « Pourquoi et comment devient-on ethnologue ? » « Qu'est-ce qu'un style ? » « Que peut-il y avoir de commun entre un oiseau - l'Engoulevent -, l'art de la poterie, et la jalousie conjugale ? » En quoi la mythologie indienne a-t-elle favorisé la conquête de l'Amérique par l'homme blanc ?... Questions surprenantes, mais qui sont pourtant à la source des enquêtes menées par Lévi-Strauss. Le ton est donné. Son oeuvre relève à la fois de la science et de la littérature, dirait-on, si de telles catégories pouvaient rendre compte de la singularité de son propos. Mais chez Lévi-Strauss, le cloisonnement n'est pas de mise, et le penseur fait « flèche de tout bois ». Ainsi le souvenir d'un tableau de la Renaissance sert-il de point de départ à une théorie de la structuration du sensible. Ainsi peut-on retrouver Totem et tabou dans un mythe jivaro. Ainsi la métaphysique bororo éclaire-t-elle d'un jour nouveau la figure de notre Père Noël. Lévi-Strauss est à la recherche des correspondances, au sens baudelairien du terme, entre l'esprit et sa manifestation matérielle. Il met en scène les affinités qu'il perçoit entre les différents objets, le fil caché qui les relie. L'objet de l'analyse se dérobe ; il ne contient aucun message qui soit immédiatement communicable. Car un objet, mythe ou autre, n'existe pas en soi mais dans le rapport, les correspondances, qu'il entretient avec les autres objets. Passerelles, rapprochements inattendus, résurgences, tels sont les jeux d'esprit auxquels invite la lecture de ces oeuvres, qui ébranlent notre vision du monde. 

La présente édition réunit sept ouvrages choisis par l'auteur : Tristes tropiques, remémoration des expériences de terrain de la fin des années 1930 qui resurgiront dans toute l'oeuvre à venir ; Le Totémisme aujourd'hui et La Pensée sauvage, charnières entre la réflexion sur la parenté et l'étude des mythes ; La Voie des masques, La Potière jalouse et Histoire de Lynx, les trois « Petites mythologiques » qui, sur le ton de l'énigme, proposent une version accessible de l'analyse structurale ; Regarder écouter lire, enfin, poursuite de la réflexion anthropologique sur le terrain esthétique. Des textes inédits sont proposés en appendice. Au-delà de leur fonction figurative et documentaire, les illustrations, environ deux cents, en noir et blanc et en couleurs, donnent une forme visuelle à la pensée.  

Livre - Oeuvres

Détails / Auteur : Claude Lévi-Strauss 
Editeur : Gallimard, Collection : Bibliotheque De La Pleiade, Date de parution : 2008-05-01 
EAN13 : 9782070118021, Genre : Ethnologie, Langue : français, Format : 170x105x0, Poids : 760g 

 

 

2/3. 위키페디아의 레비스트로스 (항목 중 특이사항 몇 가지만 발췌) 

Claude Lévi-Strauss, issu d'une lignée juive d'origine alsacienne, est né à Bruxelles de parents français. Son père était un peintre de portrait, qui fut ruiné par l'arrivée de la photographie et son grand-père était le rabbin de la synagogue de Versailles. Il fait ses études secondaires à Paris aux lycées Janson de Sailly et Condorcet ; puis des études supérieures à la faculté de droit de Paris (licence) et à la Sorbonne (troisième à l'agrégation de philosophie en 1931, doctorat ès lettres en 1948). Il est pendant cette période, brièvement engagé à gauche.

할아버지가 유대교 목사였고, 그렇게 LS의 근본은 유대인이다. 놀랍게도 LS는 프랑스 대가들이 다 나오는 고등사범학교를 안(못) 나오고 일반대학인 소르본느 출신이라 함 (고로 아주 드문 '비 고등사범계 대가'는 들뢰즈와 LS 정도. 또 누가 있을까?). 1931년에 철학 교사자격시험(아그레가씨옹)에 합격하고, 박사학위는 40세인 1948년에 획득.

 

1/ La rébellion contre la sociologie durkheimienne [뒤르까임 전통의 사회학에 반발]

2/ L’introduction de la linguistique structurale en anthropologie [소쉬르의 언어학이론을 인류학에 도입(접목)]

3/ Dialogue et rivalité avec la psychanalyse freudienne [프로이드 심리학과의 교감(대화)과 경쟁]

* 위의 세 항목 정도가 아주 흥미롭고 유익한 것이 되겠는데 모두 한참 길고, 기타 참고할만한 자료도 많기에 직접 링크된 곳을 방문하는 게 낫겠다 : http://fr.wikipedia.org/wiki/Levi-Strauss  

 

 

3/3. 인터뷰 (1972년 'arte'라는 불-독 합작 방송국에서 레비스트로스를 인터뷰한 영상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marx] Macherey,08) Thèses sur Feuerbach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marx] Thesen über Feuerbach

a d   F e u e r b a c h
[Thesen über Feuerbach]
Frühjahr 184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ad Feuerbach

  1
________


Der Hauptmangel alles bisherigen Materialismus (den Feuerbachschen mit eingerechnet) ist, dass der Gegenstand, die Wirklichkeit, Sinnlichkeit, nur unter der Form des Objects oder der Anschauung gefasst wird; nicht aber als sinnlich menschliche Thätigkeit, Praxis; nicht subjectiv. Daher die thätige Seite abstract im Gegensatz zu dem Materialismus von dem Idealismus - der natürlich die wirkliche, sinnliche Thätigkeit als solche nicht kennt - entwickelt. Feuerbach will sinnliche - von den Gedankenobjecten wirklich unterschiedene Objecte: aber er fasst die menschliche Thätigkeit selbst nicht als gegenständliche Thätigkeit. Er betrachtet daher im «Wesen des Christenthums» nur das theoretische Verhalten als das echt menschliche, während die Praxis nur in ihrer schmutzig jüdischen Erscheinungsform gefasst und fixirt wird. Er begreift daher nicht die Bedeutung der «revolutionären», der «praktisch-kritischen» Thätigkeit.

  2
________

Die Frage, ob dem menschlichen Denken gegenständliche Wahrheit zukomme - ist keine Frage der Theorie, sondern eine praktische Frage. In der Praxis muss der Mensch die Wahrheit, i. e.. Wirklichkeit und Macht, Diesseitigkeit seines Denkens beweisen. Der Streit über die Wirklichkeit oder Nichtwirklichkeit des Denkens - das von der Praxis isolirt ist - ist eine rein scholastische Frage.

  3
________

Die materialistische Lehre von der Veränderung der Umstände und der Erziehung vergisst, dass die Umstände von den Menschen verändert und der Erzieher selbst erzogen werden muss. Sie muss daher die Gesellschaft in zwei Theile - von denen der eine über ihr erhaben ist - sondiren.
Das Zusammenfallen des Ändern[s] der Umstände und der menschlichen Thätigkeit oder Selbstveränderung kann nur als revolutionäre Praxis gefasst und rationell verstanden werden.

  4
________

Feuerbach geht von dem Factum der religiösen Selbstentfremdung, der Verdopplung der Welt in eine religiöse und eine weltliche aus. Seine Arbeit besteht darin, die religiöse Welt in ihre weltliche Grundlage aufzulösen. Aber dass die weltliche Grundlage sich von sich selbst abhebt und sich ein selbständiges Reich in den Wolken fixirt, ist nur aus der Selbstzerrissenheit und Sichselbstwidersprechen dieser weltlichen Grundlage zu erklären. Diese selbst muss also in sich selbst sowohl in ihrem Widerspruch verstanden als praktisch revolutionirt werden. Also nachdem z. B. die irdische Familie als das Geheimniss der heiligen Familie entdeckt ist, muss nun erstere selbst theoretisch und praktisch vernichtet werden.

  5
________

Feuerbach, mit dem abstracten Denken nicht zufrieden, will die Anschauung; aber er fasst die Sinnlichkeit nicht als praktische menschlich-sinnliche Thätigkeit.

  6
________

Feuerbach löst das religiöse Wesen in das menschliche Wesen auf. Aber das menschliche Wesen ist kein dem einzelnen Individuum inwohnendes Abstractum. In seiner Wirklichkeit ist es das 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ältnisse.
Feuerbach, der auf die Kritik dieses wirklichen Wesens nicht eingeht, ist daher gezwungen:
1. von dem geschichtlichen Verlauf zu abstrahieren und das religiöse Gemüt für sich zu fixiren und ein abstract - isolirt - menschliches Individuum vorauszusetzen.
2. Das Wesen kann daher nur als «Gattung», als innere, stumme, die vielen Individuen natürlich verbindende Allgemeinheit gefasst werden.

  7
________

Feuerbach sieht daher nicht, dass das «religiöse Gemüth» selbst ein gesellschaftliches Product ist und dass das abstracte Individuum, das er analysirt, einer bestimmten Gesellschaftsform angehört.

  8
________

Alles gesellschaftliche Leben ist wesentlich praktisch. Alle Mysterien, welche die Theorie zum Mysticism[us] veranlassen, finden ihre rationelle Lösung in der menschlichen Praxis und im Begreifen dieser Praxis.

  9
________

Das Höchste, wozu der anschauende Materialismus kommt, d. h. der Materialismus, der die Sinnlichkeit nicht als praktische Thätigkeit begreift, ist die Anschauung der einzelnen Individuen und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10
________

Der Standpunkt des alten Materialismus ist die bürgerliche Gesellschaft; der Standpunkt des neuen die menschliche Gesellschaft oder die gesellschaftliche Menschheit.

  11
________


Die Philosophen haben die Welt nur verschieden interpretirt, es kömmt drauf an, sie zu verändern.



 

 

 

D e r   A u t o r
Karl Marx wird 1818 in Trier geboren. 1824 tritt die jüdische Familie zum Protestantismus über. Ab 1835 studiert Marx in Bonn und ab 1836 in Berlin Jura, später unter dem Einfluß Hegels Philosophie und Geschichte. Er promoviert 1841 in Jena. 1842/43 ist er Redakteur bei der «Rheinischen Zeitung». Nach der Heirat mit Jenny von Wetphalen geht er nach Paris, wo er 1844 zusammen mit Arnold Ruge die «Deutsch-Französischen Jahrbücher» herausgibt. Auf Anregung von Friedrich Engels beschäftigt er sich mit dem ökonomischen Werk von Adam Smith und David Ricardo und studiert die Theorien der Frühsozialisten. Gemeinsam mit Engels setzt er sich in der «Heiligen Familie» und der «Deutschen Ideologie» mit den Linksheglianern und den Theorien Feuerbachs auseinander und veröffentlicht mit Engels 1848 das «Kommunistische Manifest». Im gleichen Jahr gibt er in Köln die «Neue Rheinische Zeitung» heraus. Nach deren Verbot geht er 1849 nach London ins Exil. Hier entstehen unter schwierigen Lebensbedingungen seine ökonomischen Hauptschriften. In zahlreichen politischen Schriften und Artikeln beeinflußt er in den folgenden Jahren maßgeblich die sich entwickelnde Arbeiterbewegung. 1883 stirbt er im Exil in London.




 
 
 
D a s   W e r k
 
 
Betrachtung eines Jünglings bei der Wahl eines Berufs (Abituraufsatz 1835)
An principatus Augusti merito inter feliciores
reipublicae Romanae aetates numeretur?
 (Lateinabitur 1835)
De Hemsterhusii moribus (Lateinabitur 1835)
Gedichte (1835/39)
Oulanem. Trauerspiel (Fragment 1837)
Scorpion und Felix. Humoristischer Roman (Fragment 1837)
Brief an den Vater (1837)
Volksliedersammlung (1839)
Über die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 (Dissertation 1841)
Kritik des Hegelschen Staatsrechts (1843)
Die Judenfrage (1843)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1843/44)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1844)
Die Heilige Familie (zusammen mit Engels 1845)
ad Feuerbach [Thesen über Feuerbach] (1845)
Die deutsche Ideologie (zusammen mit Engels 1846)
La misère de la philosophie (1847)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zusammen mit Engels 1848)
Rede vor den Kölner Geschworenen (1849)
Lohnarbeit und Kapital (1849)
Die Klassenkämpfe in Frankreich (1850)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 (1852)
On British elections and parties (1852)
Über den Kommunistenprozeß zu Köln (1852)
On China and India (1859)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1859)
The civil war in the United States (1861)
Inauguraladresse der Internationalen Arbeiterassoziation (1864)
Lohn, Preis, Profit (1865)
Das Kapital (1. Band) (1867)
Das Kapital (1. Band) (2. veränderte Auflage 1873) nach der Internet-Ausgabe von Michio Akama
Randglossen zum Programm der deutschen Arbeiterpartei (Kritik des Gothaer Programms) (1875)
Das Kapital (2. Band) (posthum 1885)
Das Kapital (3. Band) (posthum 189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 '가족서사' 한국 (여성)문학의 함정

‘엄마의 위로’가 문학의 보수화 부른다
계간 문예지들 ‘가족서사의 부활’ 비판적 분석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하는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 소설 속 주인공들은 엄마를 잃어버렸지만, 한국 문학은 엄마를 되찾았다. 지난해 11월 초 출간된 소설은 4개월간 50만부가 팔렸으며 현재 한국출판인회의 집계 베스트셀러 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한국 문학의 큰 흐름 중 하나는 ‘가족 서사’의 귀환이다.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 서하진의 <착한 가족>, 2009 현대문학상을 받은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 등 가족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소설들이 잇달아 출간·발표돼 인기를 끌고 있다. 이 같은 ‘가족 소설’의 인기는 경제위기 속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문학에서 감동과 위로를 얻고자 하는 심리 때문으로 풀이된다. 1998년, 외환위기 속에서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가 인기를 끌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감동’과 ‘위로’가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문예지들은 봄호에서 문학계의 ‘엄마 열풍’에 대해 ‘문학의 보수화’를 가져오고 있다며 비판적 분석을 내놨다.

 

계간 문예지 ‘세계의 문학’ 봄호는 우리 사회의 보수화를 각 분야별로 진단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문학평론가 강유정씨는 가족서사의 부활이 그동안 ‘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오던 한국 문학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씨는 문학에서 모성의 귀환을 2007년 출간된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에서부터 읽어낸다. 90년대 공지영, 은희경 등의 여성작가들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기존의 가족 서사를 파괴하며 집 밖으로, 길 위로 나갔다. 그런데 그녀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강씨는 “그들이 박차고 나왔던 이데올로기이자 폭력과 억압의 장소였던 가족은 가장의 모습이 바뀌자 모성의 신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했다”고 지적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더욱 전통적이고 완벽한 어머니상을 구현해낸다. “<엄마를 부탁해>에 그려진 가족에는 생산, 재생산, 계급의 문제는 빠져 있다. 여기서 가족은 엄마를 위시로 한 숭고한 치유의 공간”이라며 “우리는 실종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신화적 가치를 추억하며 잠시 현실의 고달픔을 잊는다”고 분석했다. 강씨는 지난해 각종 서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황석영의 장편소설 <개밥바라기 별>의 인기 역시 “향수를 자극하는 낭만적 회귀로서의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 관객 200만명을 돌파한 독립영화 <워낭소리>는 “현실의 폐부를 짚어 내는 사실주의가 아니라 부재하는 향수를 환상적으로 찾아 보여주는 측면”에서 문화적 보수화의 한 징조라고 말한다.

 

‘문학수첩’ 봄호에서 문학평론가 고봉준씨도 “IMF 이후에 집약적으로 드러난 가족 서사의 변형은 경제적 위기에 의해 허물어지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최근 가족서사가 보수적인 방식으로 귀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그는 “가족 서사가 일률적으로 갈등을 봉합하고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에 충실할 뿐”이라며 “가족은 해체나 재구성, 혹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상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되고있다고 말한다. 고씨는 “가족과의 ‘소통’이나 엄마에 대한 ‘이해’를 내세워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 지금의 가족 소설은 추구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문학은 바야흐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들은 가능성을 2000대 이후 젊은 작가들이 벌여온 작업에서 찾는다. 강씨는 “젊은 작가들은 위기나 불황 속에서도 가족·과거·모성의 신화를 무너뜨리느라 바쁘다”며 김숨·정한아와 같은 작가들이 위로가 아닌 균열의 근원인 가족을 묘사하며, 김애란·황정은·박민규 등의 작가들이 아버지는 사물이나 동물 등 사소화된 존재로 그려내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영경기자 @ kyunghyang 입력 : 2009-03-05 18:34:06)

 


cf.) '가족'을 지양하는 국가(공동체-정치)로의 몸부림 [김상봉 편지8] http://blog.jinbo.net/radix/?pid=95
"(...) 가족공동체를 지양하지 못하는 사회에 참된 의미의 국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유로운 만남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내가 내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은 자유의 현실태일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와 보다 더 큰 만남을 위해 우리는 가족을 벗어나 더 큰 전체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야 합니다. 국가는 그처럼 보다 더 확장된 만남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창안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Simone Weil (1909~43) [2/3일, 탄생 100주년]

오늘자 르몽드(그러니까 르몽드는 석간이므로 2/27일자 종이신문에 실릴)에서 시몬 베이여*(Simone Weil) 특집판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기사 3개를 모두 옮겨온다 (르몽드는 이렇게 퍼다두지 않으면 나중에 기사가 유료창고로 가버려 돈주고 사야만 되는 불상사가 생김).

첫번째 기사는 프레데릭 봄스(Frederic Worms)라는 베르크손*과 현대철학에서 상당히 촉망받는 젊은 철학자와의 인터뷰인데, 여기서 그는 왜 시몬 베이여의 철학이 "필연성의 철학"인지 등을 설명한다 ; 두번째 기사는 지난 2월 3일이 시몬 베이여 탄생 100주년이었던 모양이고, 그래서 작년 이래로 많은 기념 출판물이 나왔다는 등의 출판 관련 소갯글 ; 세번째 기사는 그녀의 철학 만큼이나 난해한 삶(전기)에 대한 얘기로, 시몬 베이여는  레비나스(E.Levinas,1905~95), 사르트르(J.-P.Sartre,1905~80), 마담 보부와(S.de Beauvoir,1908~86), 까뮈(A.Camus,1913~60) 등과 비슷한 나이였지만 34세에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진가가 덜 알려진 경우, 그러나 그녀가 그 짧은 시간에 담아낸 세상과 사회와 철학에 대한 깊이와 정성은 감히 보부와 같은 부르조아 마담에게는 두렵거나 놀라운 충격이었다는데... (아마 마담 보부와와는 ENS동기일 듯). 

 

 |

1 - Entretien "Une philosophie de la nécessité"

LE MONDE DES LIVRES | 26 février 2009 | Propos recueillis par Nicolas Weill | 605 mots

2 - Enquête Simone Weil, philosophe avant tout

LE MONDE DES LIVRES | 26 février 2009 | Nicolas Weill | 1150 mots

3 - Un défi pour ses biographes

LE MONDE DES LIVRES | 26 février 2009 | Nicolas Weill | 345 mots

 


1/3. Une philosophie de la nécessité (LE MONDE DES LIVRES | 26.02.09 | 10h11)

Frédéric Worms est professeur à l'université Lille-III et directeur du Centre international d'étude de la philosophie française. Entretien. 

 

Pourquoi peine-t-on à prendre Simone Weil pour une philosophe ?

Pour comprendre les idées, les pratiques et même la vie qui ont donné lieu à tant de ces jugements fascinés ou ironiques, il faut aller directement à la philosophie de Simone Weil, et même directement en son centre, qui est une philosophie de l'expérience de la nécessité. La philosophie a aussi pour rôle d'exprimer par les mots les plus "purs" cette expérience que font tous les hommes sous des formes extrêmes et opposées entre elles : vérité et justice, mais aussi force et malheur. Ainsi, la philosophie a ce rôle central : reconnaître ces expériences et ces expressions, critiquer ce qui nous en sépare et nous mutile. C'est donc là une grande philosophie, à la fois en elle-même et en ce qu'elle conduit au-delà de la philosophie.

[번역] 우리가 시몬 베이여를 철학자로 이해하려 애써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 시몬 베이여의 생각과 실천 그리고 역시 인생 까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녀의 철학으로, 그리고 바로 그녀의 중심으로 가야한다. 그녀의 생각-실천-인생이 (세상에 대해) 매혹되거나 야유를 보내는 판단들을 낳았다면, 그녀의 중심(핵심)이란 필연성의 경험에 대한 어떤 철학이다. 철학이란 이런 필연성의 경험을 가장 순수한 단어로 표현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경험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단어들의 극단적이고 상반된 형태로 나타난다: 진리와 정의, 마찬가지로 힘(능력-권력)과 불행 등. 그렇게 철학은 이런 중심 역할을 한다: 필연성의 경험과 표현을 인식하고, 그것들로부터 분리되고 단절된 무엇을 비판하는 것 말이다. 바로 여기에 시몬 베이여의 큰 철학이 있는데, 그것은 동시에 철학 속에서 그리고 그녀가 철학 너머로 이끈 무언가의 속에 있다.

[사족] 필연성이 진리의 다른 표현이라면, 그녀의 진리란 내 이웃의 불행(malheur)에 애정과 관심(attention)을 갖는 것이지 외면할 권리가 아니라는 대강으로 통할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은 종교적 도덕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불행(불의-불평등-비참)이 갖는 극복(타파)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필연성에의 천착이고, 이것이 바로 시몬 베이여의 철학이 아닐까 싶다.]

 

Peut-on comparer son itinéraire à celui d'Henri Bergson ?

S'il s'agit de leur commun passage, qui ne fut pas une conversion, du judaïsme au christianisme, tout, ici aussi, les oppose et les relie : du côté de Bergson, les paroles de l'Evangile dépassent infiniment les appels des prophètes à la justice, mais elles les prolongent aussi, dans le sens de la morale "ouverte" ; du côté de Simone Weil, l'amour mais aussi la Croix du Christ la conduisent à un refus lui-même violent d'un Ancien Testament réduit au Dieu violent "des armées". Mais on comprend aussi que, sur ce point comme sur d'autres, ces relations et ces ruptures sont plus subtiles et importantes qu'on ne croit. De fait, l'un et l'autre opposent finalement deux attitudes religieuses, et dans chaque religion, avec comme critère l'orientation vers la justice contre toute fermeture sur soi.  

 

Qu'est-ce qui relève chez elle des courants philosophiques français de son temps ?

Elle retient ce qui nous met en contact direct avec la nécessité, et critique ce qui s'intercale entre nous et ces expériences pures. Ainsi, Alain l'a introduite à la nécessité chez Spinoza ou Platon, ou encore dans l'action et l'art, mais il reste un penseur du "jugement" qu'il faut dépasser ; de même le "personnalisme" ou les "droits de l'homme" intercalent selon elle des entités fictives entre l'homme et le "sacré" ou entre l'homme et les "obligations", qui, selon L'Enracinement, nous sont immédiatement et éternellement imposées.  La science - y compris les mathématiques - n'est jamais seulement théorique, elle nous met en contact avec une nécessité égale pour tous, et la beauté de l'univers. A fortiori la connaissance du social doit en découvrir les mécanismes - et notamment celui de "l'oppression", ce qu'a fait Marx selon Simone Weil. Bien sûr pour le transformer, même si sa conception de la nécessité rend cela difficile. 

 

Quel est le legs de cette pensée ?

On ne mesure pas le degré de son influence après la guerre. Il y eut des fascinations - hagiographiques ou hypercritiques ; mais elle permit un double maintien de l'Absolu dans l'existence même, sous une forme critique d'abord (des mythes, des propagandes), pensée et vécue ensuite. Dans Europe 51, de Roberto Rossellini, explicitement inspiré par Simone Weil, Ingrid Bergman est conduite par le malheur à dépasser les illusions d'un monde qui veut l'enfermer comme folle, alors même que l'action qui en découle pour elle lui révèle le croisement "surnaturel" du malheur et de la joie. Car telle est la leçon paradoxale de Simone Weil, que les cris les plus secrets qui nous sont arrachés communiquent tous en un point. Il ne s'agit de s'en faire ni le disciple ni le juge, mais de la comprendre pour accéder à ce qui, pour chacun de nous, en accord ou en écart avec une telle philosophie, est un tel point, qui est le point même en chacun de la philosophie. (Propos recueillis par Nicolas Weill /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7.02.09.)

 

 

2/3. Simone Weil, philosophe avant tout (LE MONDE DES LIVRES | 26.02.09 | 10h11)

 

On l'aura voulue mystique, sainte laïque ou sainte tout court, toquée, anorexique... On aura brocardé, de son vivant même, sa mise déjantée, son éternelle pèlerine, ses énormes lunettes, sa laideur étudiée, ses cheveux de cocker, sa maladresse proverbiale ou son ton péremptoire. Aucun des stigmates habituels par lesquels on cherche à ridiculiser une femme qui pense n'aura été épargné à Simone Weil, elle qui pourtant ne se voulait pas "féministe" ; elle dont l'oeuvre restera pour l'essentiel posthume, recomposée en aphorismes par ses amis catholiques, comme Gustave Thibon (La Pesanteur et la Grâce) ou restituée par l'intérêt que lui vouera Albert Camus (qui publie L'Enracinement, rédigé peu de temps avant sa mort). 

D'elle on ne retient souvent que le séjour de la normalienne agrégée d'origine bourgeoise à l'usine, l'engagement aux côtés des républicains espagnols, la conversion inachevée au catholicisme, parallèle au rejet opiniâtre du judaïsme. Mais les exercices d'admiration ou de détestation qu'elle suscite manquent souvent l'essentiel : le fait que Simone Weil, qui aurait eu 100 ans le 3 février, a été d'abord une philosophe avide de cohérence, dans sa vie comme dans ses écrits. L'un des plus importants philosophes français du XXe siècle sans doute, si son existence n'avait pas été fauchée à 34 ans, au sein de la France libre qu'elle avait ralliée, comme son ami l'épistémologue et résistant Jean Cavaillès. Tuberculeuse, elle s'éteint le 24 août 1943 dans un hôpital londonien sous le coup des privations qu'elle s'était imposées par esprit de solidarité avec les restrictions dont la population française était victime. 

La publication, à l'été 2008, du quatrième tome de ses oeuvres complètes sous le titre d'Ecrits de Marseille est l'occasion de découvrir le penseur qu'elle a été d'abord. Ces textes concernent la période au cours de laquelle, de 1940 à l'exil à New York puis en Angleterre en 1942, elle réside avec ses parents dans le sud de la France, dans l'attente d'un départ dont elle espère qu'il lui permettra de rejoindre enfin le combat contre l'Axe. A première vue, rien de moins philosophique que cette séquence marquée avant tout par une aspiration déçue à l'action et par l'élaboration d'un suicidaire projet d'"infirmière de première ligne", qu'elle s'obstinera en vain à faire adopter par Londres et qui préfigure l'engagement humanitaire. L'heure semble vouée à l'approfondissement d'une quête religieuse commencée depuis les années 1930, qui la conduit "au seuil de l'Eglise" - un seuil qu'elle ne franchira pas, de son fait et à cause de la réticence de ses interlocuteurs chrétiens, déconcertés par cette catéchumène hors normes. C'est à ce moment qu'elle fait également la rude expérience de la ferme et des vendanges à Saint-Julien-de-Peyrolas (elle se récite le Notre Père en grec pour se donner du courage). En outre, encouragée par sa fréquentation du poète René Daumal, elle se passionne pour ce qu'elle juge être les sources non chrétiennes, platonicienne mais aussi orientale, du christianisme (le taoïsme, la Bhagavad-Gîtâ et les Upanishad). Dans le même temps, elle s'intéresse de près à l'histoire des sciences qui lui sont immédiatement contemporaines (la physique de Max Planck). 

 

LE TRAVAIL, RÉFÉRENCE ULTIME 

De cette exceptionnelle floraison entre fuite et émigration, trois des ouvrages suscités par la perspective du centenaire se font l'écho ou le commentaire. Chacun a le mérite de scruter ce qui pourrait constituer l'unité d'une production intellectuelle si disparate à première vue. Une production que les nécessités de l'heure et la relégation imposée par les lois raciales à celle qui rejette, jusqu'à la fin et de toutes ses forces, un judaïsme dont elle est familialement issue, laisseront irrémédiablement à l'état d'ébauches. On n'en sent pas moins apparaître un fil conducteur de plus en plus insistant dans cette pensée qu'il devient presque possible, grâce à la philosophe et traductrice Sylvie Courtine-Denamy, à Robert Chenavier, qui dirige les Cahiers Simone-Weil, et aux auteurs rassemblés dans le très éclairant collectif dirigé par Florence de Lussy, de reconstituer - pourquoi pas ? - en système. 

Textes originaux et littérature secondaire aboutissent en effet à mettre au centre de cette pensée la notion de travail. Celle-ci joue le rôle de référence ultime que remplit par exemple "le monde de la vie" dans la philosophie tardive d'Husserl. Elle comme lui s'inquiètent du cours des sciences modernes, qui s'affranchissent de plus des limites de la perception. Le travail représente pour Simone Weil l'expérience humaine formatrice de notre rapport au réel. C'est en ce sens, et en ce sens seulement, que l'on peut la considérer comme une "matérialiste". Chez elle comme chez Marx, qu'elle a lu très tôt, la matière ne renvoie pas à un donné inerte, mais est d'abord le résultat de l'élaboration humaine. C'est le travail qui introduit de l'unité et de la continuité dans l'univers. Or l'une et l'autre sont menacées par l'évolution scientifique ainsi que par le machinisme et la technique, dont Simone Weil a, très concrètement, bien avant les prêtres-ouvriers ou les maoïstes "établis", éprouvé dans sa chair la violence, à l'usine en 1934 et 1935. 

Pourtant, paradoxalement, le travail - celui du manoeuvre précise-t-elle - incarne également l'obéissance consentie à la nécessité et la douleur. Il est donc l'indice le plus certain de notre participation à la création. Non que cette incessante révoltée ait prêché la moindre résignation à une condition vouée au malheur qui transforme, selon elle, la personnalité en chose. Mais parce que le malheur, qui cloue l'être comme le papillon sur la planche de l'entomologiste, constitue la modalité de la rencontre avec un ici-bas dont elle pense que Dieu s'est retiré pour le créer. Pour être à la mesure de cette absence que la Croix symbolise, l'homme doit en passer, lui aussi, par la souffrance et l'esclavage. Il doit se soumettre à la "décréation" et s'absenter le plus possible du monde. Ce que les mystiques désignent comme la kénosis ("vide" en grec), devient chez Simone Weil le mode privilégié de notre relation à Dieu, l'expression adaptée de notre vie religieuse. La sainteté pour un chrétien est le minimum qu'on puisse attendre, ira-t-elle jusqu'à affirmer. Nul masochisme donc, mais une démarche dont la logique transparaît dans ses écrits ; l'édification d'une constellation dont les éléments se répondent, puisant autant à la mystique rhénane d'un Maître Eckhart qu'à Homère. Dans son Iliade ou le poème de la force (1940-1941), Simone Weil loue l'aède qui chante la guerre sans prendre parti. La beauté de l'horreur devient objet d'amour dans le poème en laissant entrevoir, derrière la nécessité brutale, l'idée d'un ordre

La marche asymptotique de Simone Weil vers le catholicisme ne s'accompagne d'aucun renoncement à la raison. Dans cet agencement de la foi et du savoir à l'ère moderne - question à laquelle elle aura tenté de répondre -, réside l'un des intérêts principaux de cette oeuvre. Ce qui ne meurt. 

ŒUVRES COMPLÈTES, TOME IV. ECRITS DE MARSEILLE (1940-1942) de Simone Weil. Edition publiée sous la direction de Florence de Lussy. Gallimard, 608 p., 35 €.

SIMONE WEIL. LA QUÊTE DE RACINES CÉLESTES de Sylvie Courtine-Denamy. Cerf, "La nuit surveillée", 154 p., 18 €.
SIMONE WEIL. L'ATTENTION AU RÉEL de Robert Chenavier. Michalon, "Le bien commun", 126 p. , 10 €.

SIMONE WEIL. SAGESSE ET GRÂCE VIOLENTE sous la direction de Florence de Lussy. Bayard, 318 p., 25,50 €.

(Nicolas Weill /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7.02.09.)

 

 

3/3. Un défi pour ses biographes (LE MONDE DES LIVRES | 26.02.09 | 10h11)

Comment parler de Simone Weil ?, s'est demandé un jour Emmanuel Levinas(1905~1995), lui reprochant, dans Difficile liberté, l'extrême dureté avec laquelle elle s'était attaquée au judaïsme. Dans l'attente d'une nouvelle "vie" de Simone Weil qui s'ajoutera à la célèbre biographie de son amie Simone Pétrement (La Vie de Simone Weil, Fayard, 1997), on se contentera des livraisons, fragmentaires ou subjectives, occasionnées par le centenaire. L'existence de la philosophe pose, il est vrai, un redoutable défi à ses biographes tant sa brièveté est proportionnellement inverse aux événements dont elle a été remplie. 

Fille de médecin, née à Paris en 1909 dans une famille juive et agnostique, Simone Weil suit à première vue le cursus honorum classique de la bourgeoisie éclairée de son temps - normalienne, agrégée de philosophie -, n'eût été son militantisme d'extrême gauche acharné et un souci exacerbé de la misère du monde qui laissera pantoise sa condisciple Simone de Beauvoir(1908~1986). Elle s'expose volontairement à la violence de son temps, en usine d'abord, puis en Espagne, où elle s'engage dans le camp républicain, avant d'entrer en résistance contre l'occupant allemand. 

Le ton parfois hagiographique adopté aussi bien par Christiane Rancé que Laure Adler ou les poètes Christine Rabedon et Jean-Luc Sigaux laisse pourtant une impression d'insatisfaction, même si tous ces ouvrages apportent des précisions intéressantes sur tel ou tel point. En effet, ils donnent tous l'impression que Simone Weil et son oeuvre ont encore besoin d'être défendus. Contre quoi ? Elle-même a su de son vivant rectifier ou regretter certaines erreurs de jugement (son pacifisme obstiné d'avant-guerre, par exemple). En revanche, son anticolonialisme farouche reste a posteriori lucide. Sans doute l'aspect fragmentaire de son oeuvre a facilité toutes les réappropriations, dévotes, politiques et autres. Mais plus qu'en "sainte", c'est sans doute en intellectuelle engagée de son temps qu'elle nous parle encore le mieux.  

L'Insoumise. Simone Weil, de Laure Adler (Actes Sud, 278 p., 20 €) ;

Simone Weil, de Christiane Rancé (Seuil, 256 p., 18 €) ;

Simone Weil. Mystique et rebelle, de Christine Rabedon et Jean-Luc Sigaux (L'Entrelacs, 256 p., 16 €) ;

Simone Weil. Le ravissement de la raison, textes choisis et présentés par Stéphane Barsacq (Points, 94 p., 5 €).

(Nicolas Weill / Article paru dans l'édition du 27.02.09.)

 

*시몬 베이여(Simone Weil)는 예외적으로 사전에 발음기호가 병기된 경우인데, [wej] 라고 돼 있으니 베유-베이유-베일 등이 아니라 '베이여' 정도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인터뷰기사에서 언급되는 베르크손(H. Bergson)도 같은 경우로, 사전에 [berkson]으로 돼 있으니 '베르그송'이 아니다. 참고로 이 인터뷰 기사의 주인인 프레데릭 봄스(F. Worms) 라는 젊은 사람은 프랑스 최고의 베르크손 전문가인데, 릴3대학과 ENS에서 주로 활동한다 함.

 

 

[부록] De l’expérience mystique à l’engagement progressiste

저작 마지막권(08-05-22 간)에 대한 서평 (l'Humanite, Tribune libre - Article paru le 18 décembre 2008 idées)

 Oeuvres complètes : Tome 4, Volume 1, Ecrits de Marseille (1940-1942)Écrits de Marseille, 1940-1942. OEuvres complètes, de Simone Weil

(tome IV, volume I), publiées sous la direction d’André Devaux et Florence de Lussy. Éd. Gallimard, 2008, 622 p.

 

Que sait-on aujourd’hui de cette philosophe militante née à Paris le 3 février 1909 et morte de la tuberculose à Ashford, dans le Kent, le 24 août 1943 ? On ne comprendra pas grand-chose à sa biographie si l’on ne saisit pas le fil conducteur de sa courte existence : « vivre avec ». Avec Dieu, avec le syndicalisme révolutionnaire, avec son idéal libertaire… et pas seulement vivre la souffrance concrète causée par l’exploitation. L’oeuvre de Simone Weil est immense, source de multiples contresens logiques. C’est pourquoi elle a pu faire peur à certains de ses condisciples néopositivistes.

La pesanteur et la grâce (1) sont si rarement réunies en une seule et même personne !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on préférait se moquer d’elle pour cacher l’espèce de terreur qu’inspiraient l’étendue de son savoir et sa vivacité d’esprit. D’origine juive, elle s’est finalement tournée vers le christianisme après avoir milité dans divers mouvements libertaires. Cette jeune fille d’origine bourgeoise désirait participer à la « condition ouvrière » de l’intérieur. Ce sera le titre de son ouvrage le plus connu. Elle s’engage encore plus totalement durant ses vacances d’été à vingt ans et travaille dans les champs à Marnoz, dans le Jura. Un an plus tard, elle obtient son diplôme d’études supérieures en philosophie. Seule jeune fille de sa promotion, elle est reçue sixième à l’École normale supérieure. Reçue septième à l’agrégation en 1931, elle connaîtra à plusieurs reprises l’épreuve de la sous-alimentation. Elle fut ouvrière chez Renault en 1934-1935 puis s’engagea dans les Brigades internationales lors de la guerre d’Espagne. Elle quitta la France en 1942 pour New York puis pour Londres où elle travailla dans les bureaux de la France combattante.

Son « désir le plus ardent » était de subir « autant de souffrances et de dangers que ceux qui en subissent le plus ». C’est dans cet état d’esprit qu’elle demanda en vain à la France libre de Londres d’être parachutée sur le territoire français pour participer à la résistance intérieure. Les Écrits de Marseille confirment ce qu’on pourrait appeler la thèse de « l’expérience mystique ». Aussi, aucun lecteur de cet ouvrage ne s’étonnera de la séduction grandissante qu’exerçait sur elle un certain spiritualisme dont même Henri Bergson se défendait. La question de la conversion de Simone Weil reste l’objet de polémiques. Elle se convertit au catholicisme, selon Georges Hourdin (Simone Weil, Éditions La Découverte, 1989), à la veille de mourir d’une tuberculose, après avoir refusé de se nourrir et de se soigner. D’autres doxographes prétendent que l’épisode demeure incertain. Elle disparaît à trente-quatre ans, philosophe d’inspiration chrétienne, solidaire de ses origines juives, après avoir épousé le syndicalisme  révolutionnaire et l’idéal libertaire. C’est précisément cette pensée en colimaçon qui fait sa force et son oecuménisme. « L’expérience mystique » peut parfois générer une pensée plutôt progressiste. Pour elle, « la pensée de malheurs ou de dangers auxquels je n’ai pas pris part me remplit d’un mélange d’horreur, de pitié, de honte et de remords qui m’ôte toute liberté d’esprit ; la perception de la réalité me délivre de tout ça ». S’il est une pensée qui s’est constituée à partir de ce que son auteure a vécu et éprouvé en cherchant des solutions à des problèmes qui lui paraissaient être ceux de son époque : la misère, l’inégalité, et surtout l’humiliation des faibles à l’usine et des colonisés, c’est bien la sienne. (Arnaud Spire)

(1) Titre d’un de ses livres (Éditions Plon, 194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