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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죽음, 죽음의 정치

  • 등록일
    2009/07/23 09:15
  • 수정일
    2009/07/23 09:15

* [미디어스]에 실린 글이다.

 

정치의 죽음, 죽음의 정치

 

용산 참사 6개월. 또 한 사람이 갔다. 이번에는 평생의 반려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노동자의 아내. 남편의 넥타이에 목을 맸다. 죽은 아내를 두고 그가 오열했다.

 

용산의 철거민들도 그랬다. 가족을 위해 망루에 올랐으며 그 망루에서 천 도의 열기에 질식하고, 새카맣게 타 죽었다. 가족들이 오열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였다. 가해자는 MB 정권의 공권력이고 피해자는 철거민들이었다. 온 국민이 그것을 생생한 화면으로 목격했다.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이 분명한 관계가 역전된다. 알리바이는 권력이 독점했으며, 인민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다. 심지어 고인의 아들이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 왜 그런가? 바로 삶의 정치가 죽고, 그 시신 위로 죽음의 정치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의 피를 먹고 살이 찐 권력은 필연적으로 삶의 정치가 아니라 죽음의 정치에 기생한다.

 

인민을 살리는 삶의 정치는 죽은 화폐나 토지, 건물보다 사람과 노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복지요 환경이고 삶의 질이다. 우리는 이 정치를 민주주의로도 코뮤니즘으로도 부른다. 하나의 이념으로서 민주주의의 심화가 코뮤니즘이 되고, 물질적 기반을 갖춘 코뮤니즘이 다중의 일상 안으로 정치화되어 대의체제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이 둘은 삶의 정치를 위해 서로를 추동하고 자극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정치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건강한 정치 활동이 하루아침에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용산의 고인들은 이 삶의 정치를 권력에게 요구하다가 죽어갔다. 따라서 용산은 그러한 삶의 정치가 살해되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권력은 사람보다, 복지보다, 그리고 삶의 질보다 토지와 건물과 화폐에 더욱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죽음의 정치는 산노동의 활력이 아니라 죽어 결정화된(crystalized) 노동에 기반을 둔다. 나아가 그것은 산노동을 죽은 노동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시켜야 살아 갈 수 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권력은 자본의 편으로 넘어” 갔다고. 그런데 자본은 피가 돌지 않는다. 피가 돌아야 할 곳에 화폐가 순환하고, 기쁨을 생산해야할 공동체 대신에 먹고 먹히는 살벌한 규율이 들어선다. 죽은 대통령이 말한 그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자본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가장 어두운 본성이 백주대낮에 곤봉으로 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사회구성체를 지칭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기획에 어긋나는 일체의 사회기반을 철거하고 게토화하면서, 합의나 절차보다 일방성과 공권력에 더 의존한다. 신자유주의의 반인간적이고 친화폐적인 요구 자체가 합의나 절차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의 자유는 국가 공권력의 일상화와 확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용산은 신자유주의 막차에 올라탄 MB 정권이 삶의 터전이 있던 곳에 화폐의 마천루를 짓기 위해 벌인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그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인 토건세력이 후미에 있었고 포위대형의 선두에 경찰이 배치되었으며, 참모막사에 검찰이 앉아 있었다. 살해가 끝나고 검찰은 계획대로 경찰에 면죄부를 주었고, 오열하는 가족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용병(역)들을 현장에 보내고 있다.

 

그리고 수사기록 3000쪽. 마땅히 공개해야할 정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하긴 근본은 거기 있지 않다. 수사기록은 법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일 뿐. 윤리적으로 우리는 용산 학살의 범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김석기 그리고 MB, 또한 이 명령체계의 골간을 이루는 자들. 그들은 아직 사과 한 마디 없다.

 

저들은 이 모든 것이 ‘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한다. 맞는 말이다. 법은 권력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들은 제대로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법치는 알아서 기라는 권력의 신호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짓밟힐 것이라는 협박이고, 감히 도전했다가는 바위에서 밀어 버리거나, 태워 죽이겠다는 구체적이고 명증한 명령이다. 카프카가 파시즘을 예견하면서 말했듯이 법이란 권력과 관료체계에 의해 인민의 몸에 인두질되는 폭력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그 본질을 저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법치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우리가 이해 못할 짓들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다.

 

또 하나 더 있다. 6개월 동안 저들은 ‘버텼다’. 신영철이 대법관 자리에서 버티고 있듯이 말이다. 이 질긴 버티기에는 분명 철석같은 신념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분명 ‘대중은 무지하며 망각에 능하다’는 히틀러의 말을 믿고 있을 것이다. 노무현 서거, 미디어법 공방으로 이어지는 정세 속에 묻어가다 보면, 대중이 용산을 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영철은 벌써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MB는 신영철 케이스를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목숨들을 태워 죽인 희대의 권력을 매일매일 뉴스로 대하면서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잊을 것인가? 사실 권력은 이것이 두렵다. 마주 대하기 싫은 진실 말이다. 그러니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 노래소리를 들으며 반성했다는 말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아예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밖에.

 

그래서 그랬나보다. 이문동 가게에서 상인의 호소를 귓등으로 들으며 ‘뻥튀기나 사먹으라’고 부하들에게 고함친 것이 말이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자 하고, 듣기 싫은 소리는 피해가려는 이 ‘증상’은 참으로 구제불능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돌아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5명의 원혼의 한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동정이나 애도를 바랄 것인가? 어림없다. 이 권력은 이제 어떤 죽음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서거를 대하는 태도를 보라. 그리고 몇 일 전, 이 공권력은 반성은 커녕 용산 망루와 똑같이 생긴 망루를 다시 세우고 진압훈련을 했다.

 

죽음의 정치를 구사하는 권력은 흉기를 휘두르는 살인자와 마찬가지다. 폭력과 거짓으로 쌓아올린 권력은 수명이 길지 않다. 지하벙커 안에서 스스로 독약을 마시거나, 측근에게 암살 당하거나, 혁명이 그를 단두대로 이끌었다.

 

오늘도 용산 현장에서 미사가 진행되었다. 경찰은 유족들에게 ‘불법’집회를 그만두라고 했다. 5 살배기 아이가 들고 가는 촛불도 불법이라고 했던 저들이다. 이해한다. 측은하다. 겁에 질린 공권력. 스스로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그 법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모든 압제자들, 그 죽음의 정치가들은 법을 말했고, 그 법으로 권력을 집행했다. 그러니 그 법이 ‘평등’을 구현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법은 평등하지 않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을 희롱하며, 죽음의 정치는 천칭의 오른쪽에 인민의 시체를 얻어 놓고 자신의 위력을 가늠한다.

 

자신의 허약함을 감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인민의 피를 전시하는 저들의 위악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덤을 팔 것이다. 죽음의 정치는 그렇다. 죽음 앞에 권력 자신이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산이야말로 저들의 무덤자리이며 가까운 어느 날 거기서 똑같이 죽어갈 것이다. 그게 우리의 법이다. 불법집회를 그만두라고? 살인과 복수를 당장 그만두라!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요한계시록 13:10).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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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국 잠복과 적대 전선의 선명화

  • 등록일
    2009/07/06 20:41
  • 수정일
    2009/07/06 20:41

 

서거정국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에 따라 촛불이 잠재화되고 일정화되면서, 49제까지 문화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시국선언은 계속되고 있으나 쟁점화되기 보다 일상화되는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나도 시국선언’, ‘네티즌 시국선언’ 등의 형태)1

그러나 이 소강국면은 전선의 첨예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잠재화되는 국면일 뿐이다. 늘 그렇듯이 현실적인 사안들보다 어두운 궁륭을 울리며 숨을 몰아쉬는 새파란 분노가 더 중요하다. 이 지속되는 분노에 늘 촉수를 대고 있어야 한다.2

촛불이 잠재화되면서 그 바통을 쌍차 노동자들이 이어 받았다. 서거정국과 함께 화물연대 파업(박종태 열사 서거 국면)이 나란히 진행되었지만 금호 자본과 타협하면서 투쟁을 접었다.3이에 비해 쌍차 노조 옥쇄파업은 현재 40일이 넘었지만 그 투쟁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노동계급 투쟁의 중심에 쌍차 노조가 있다면 용산 투쟁이 또 다른 구심점을 형성한 채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이와 함께 부산 지하철 파업이 진행되었고,4경의선 신노선 전환배치 반대 투쟁이 결합하고 있다(☞'MB스타일' 경의선 개통, 결함 알고도 서둘러) 기륭을 비롯하여 동희오토 등의 장기투쟁 사업장도 잊어서는 안 된다(☞동희오토 l 사내하청지회 소식지 14호).

 

잠재화된 서거국면, 노무현의 역사화와 친노세력의 부상

서거국면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사실상 민주당이라기보다 친노인사들이다.5참여정부 말기에 레임덕을 함께 겪으며 부침했던 이들은 민주당내 주류 보수와 한나라당의 파상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대선국면을 거치면서 소멸했었다. 그런데 사실상 노무현이 봉하 마을에 터를 잡고, 청와대 자료 유출 건으로 정권과 날을 세운 후 ‘민주주의 2.0’을 개설하면서 이들의 부상은 일정정도 예견된 것이었다고도 보인다. 노무현 서거라는 변수는 조용히 내년 총선을 준비하던 이들을 더 바쁘게 만들었다.

따라서 현재 한국 사회 부르주아 정치권 내에서 이들의 정치적 위상 정립은 이명박 정권이 파쇼-반동화됨으로써 남아 있던 소부르주아 지분을 민주당 주류와 나눠 가짐으로써 차후 어느 정도 정리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 친노세력들은 자신들의 일정을 내년 선거에서 이번 10월 재보선 국면으로 재조정하는 중이다. 마침 민주당 쪽의 신호도 기대에 부합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서거국면을 통해 재결집했던 촛불의 역량을 대의체제 속에 해소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촛불을 대표한다고 하던 시민단체들은 이들 부르주아 의회 세력들과 연대를 형성하거나(‘민민연’의 경우)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함으로써(‘언소주’의 경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들 단체들의 활력이 촛불 전체의 활력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시민단체들이 촛불의 대표성을 자임하면서 부르주아 의회와 연대하는 것은 이들의 계급적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정세가 만들어내는 필연성의 강제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상 현장에서 노동계급이나 용산 범대위과 연대하는 것이 더 올바르겠지만, 사안을 정치쟁점화하고 제도화에 이르기까지 강제하기 위해서는 그런 방식이 일종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이 사후에 어떤 식으로 정당화되든 결과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하여간 대의 체제와의 연대는 노무현 서거가 가진 후폭풍의 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반MB 전선’이라는 단일 전선 구축의 강제력이 극대화된 지점에 우리는 있는 것이다. 한동안 이러한 상황은 지속될 것인데, 왜냐하면 친노진영에서 벌써부터 노무현을 ‘역사화’하기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로 출판과 강연을 통한 이데올로기 가공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이 작업들은 대중의 정서에 노무현을 민주주의의 진정한 ‘구현’(embodiment)으로 각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6친노들이 이 작업에 성공한다면(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길게 봤을 때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필두로 한 한국사회 ‘수구반동복합체’에 일대 타격이 될 것이고,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도 이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일정 정도의 반작용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무현의 역사화는 노동계급에게 이데올로기적인 재앙과 같다. 이 작업에 투여되는 리비도는 ‘신자유주의’와 ‘애국주의’라는 레떼르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계급 실천의 기반인 반자본과 국제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실물 차원에서 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는 불분명하지만 의식면에서 부정적 영향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를테면, 촛불들이 노무현 서거국면의 관성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 쌍차 현장 동력이 소진되고 있으며, 용산 범대위의 활동은 위축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안이 투쟁의 결집력을 높이고 적들의 심장을 겨누는 집중력이 비등할 때에는 이 리비도 투여가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잠재화된 상태에서는 역량의 출구를 다른 쪽으로 비틀어 놓을 필요가 있다. 노무현의 역사화는 이런 당면한 과제를 형해화하고 다중의 정치일정을 대의체제 안으로 급격하게 전치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대의체제 내에 각종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민주당에게 유리할 뿐이다. 앞으로의 선거 과정에서 드러날 테지만 이런 면에서 다중의 절망은 내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촛불이 부르주아 대의 체제 내에 일정한 균열을 도입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균열은 이를테면 ‘부재하는 주체’와 같은데, 계량할 수 없는 변수로서 촛불이 언제 어디서든 정치적 판단의 도처에 출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당이 용인하고 친노 측에서 진행하고 있는 노무현의 역사화 작업은 이런 촛불의 역할을 간과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들은 촛불의 재생산이 아니라 제2의 노무현, 제3의 노무현의 재생산, 즉 소부르주아 영웅의 재생산에 열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공안정국, 전교조 압수수색과 민노당 정책대회 그리고 북한 미사일

전교조 시국선언은 정권측에서 보기에 일종의 ‘빌미’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시국 선언에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지금에야 검찰을 끌어들인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전교조 시국선언은 공무원 노조 시국선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정권 측에서 다루기 쉬운 측은 전교조다. 전교조에 대해 오래 들씌워져 있는 ‘빨갱이’ 낙인이 공안정국 조성에 더 수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공안정국 조성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첫째는 시국 선언의 끝물에 전교조를 붙들고 ‘중앙’ 차원에서 민심을 불안하게 가공하는 것,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전국에 산재한 통일운동 섹터들을 각개 격파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의도는 경찰 내부에서 회람된 ‘공안사범 검거 100일 작전’에서도 드러난다(☞경찰 "공안사범 검거 100일 작전중"). 경찰이 앞장서고 검찰이 뒤를 봐주며, 정권이 용인하는 이 방면의 공안 정국 조성은 통일운동 섹터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면서, 언론을 통해 압수수색과 검거를 보도함으로써 대중들의 불안을 조성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을 보수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조직’ 차원의 공안 정국 조성은 궁극적으로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겨냥한다. 특히 얼마전 민노당은 1박 2일 정책대회를 통해 MB정권을 공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독재정권’으로 규정했다.7그리고 지난 3일부터 본격적인 독재정권 타도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정치일정이 정치검찰의 눈에 좋이 보였을 리 없을 것이다.

이와 함께 사이버 상에서 계속되는 공안 조성도 눈 여겨 봐야 한다. 미네르바 사건은 법원의 무죄 판결로 끝난 것이 아니다. 사실상 공안정국이란, 판결과는 상관없이 다중의 가장 취약한 정서, 즉 불안과 공포를 건드리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한나라당 정두언(한나라당 국민소통위원장)이 토론회에서 인터넷 실명제는 “유튜브 사태가 보여주듯 실효가 의심스러운 제도”라고 하고, 사이버모욕죄 추진에 대해서도 “동일 사안에 대해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논리라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말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과연 사이버 세계에 대한 정권의 항복 선언이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사실, 누가 사이버 세계를 ‘지배’하겠는가? 그건 말 자체가 맞지 않다), 당내에 전향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표지로 읽어도 될 것이다.8

두 번째 차원에서 행해지는 공안 정국 조성은 북한 미사일 발사, 대북 압박 강화, 전쟁분위기 조성이라는 나선형 상승국면을 형성하면서 이루어진다. 북한 미사일이 대미협상용이면서 북한 국내 정세용(체제수호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안이 한국 사회 보수화와 공안 분위기 조성에 상당한 영향을 행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협상' 포기하면 결론은 '무대책'이다). 이는 수구언론의 선전이 주요하게 먹혀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구언론의 경우 ‘북한위협’이라는 공안 변수가 그들의 사활이 걸린 사안이기 때문에 논리적 패착이나 사실 왜곡을 감수하면서도 견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분단체제라는 한반도 정세의 중추적 모순은 한국사회 다중이 계급모순을 보지 못하게 만들며, 이런 이유로 수구정권과 언론에게는 자신들의 이권과 권력 유지를 위해 아주 유용한 포석이 된다.

세 번째는 소위 ‘문화계 좌파 적출’이라고 알려 지고 있는 사안이다. 이는 공기업과 위원회의 단체장 물갈이, 시민단체 길들이기 연장선상에서 정권이 추진하고 있다. 한예종 황지우 총장의 사퇴로 공론화된 이 사안은 진중권의 공세적 입장표명을 통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는데, 사실상 이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문화세력과 진중권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세력에 대한 협박에 가깝다. 이를 통해 정권이 도모하는 것은 바로 학술, 문화계에 광범위한 공안 정국을 조성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벌써부터 영진위를 비롯한 영화계 일부에서는 ‘알아서 기는’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9

결론적으로 공안 정국 조성은 이명박 정권의 정당성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집권하고 있고 거대여당을 의회에 세워두고 있다 하다라도 이데올로기적 설득력이 없을 때 경찰력과 사정기관을 동원하는 것은 부르주아 정권의 보편적인 행태다. 문제는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이 정권이 1년 반이 채 안 된 상태에서 기반 붕괴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용하면 할수록 그 정당성이 더더욱 무너지게 되는 경찰력과 공안력의 특성상 이러한 붕괴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걷잡을 수 없게 될 확률이 높다 하겠다.

 

정권의 향배와 전망

이렇게 해서 이명박 정권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되는데, 이 또한 최소한의 정당성도 상실한 부르주아 정권이 밟아 가는 극히 보편적인 수순이라 하겠다. 이 와중에 대중의 공분은 시시때때로 각계 각층에서 현실화되어 분출할 것이고, 여의도 일정에 따라 각종 선거들을 통한 ‘심판론’이 정권을 더욱 압박할 것이 뻔하다. 여간한 출구가 형성되지 않고서는 이 패착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게다가 이명박의 소위 ‘통치 스타일’이라는 것이 반성을 모르는 ‘불도저형’이기 때문에 위기는 해소되지 않는다. 어떠한 쇄신요구도 수긍하지 않는 정권에게 위기는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 봉합하고 넘어 가는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다.10또한 반성이 없고 국정에 대한 적절한 수위 조절이나 시기 파악이 안 되는 정권일수록 방향만큼은 뚜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정권이 그러하다. 방향이 뚜렷하긴 한데 그것이 ‘나 홀로’ 방향이고 민심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 불통의 권력이 자신들이 존재하는 근거, 즉 수구세력들의 경고음조차 듣지 못할 때 발생한다. 정치 권력이 표면적으로는 한국사회 기득권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니다. 정치권력은 ‘수구반동복합체’의 일부일 뿐이다. 이 복합체는 한국사회 다중의 노동과 잉여가치에 기생하는 암덩어리와 같다. 삼성 재벌이 그러하고,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그렇다. 이들은 ‘이권’으로 뭉쳐 있는데, 만약 이들 복합체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이권에 기능부전이 생길 때에는 즉각 치유와 공격에 돌입한다. 과거 정권들에서 이들 수구반동복합체의 이권을 개혁하려고 한 시도들은 그래서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혼맥'을 알면 '조·중·동의 대한민국'이 보인다).

이명박 정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암적 유기체의 특성상 어느 정도 숙주의 건강이 필요한데, 이 정권은 이러한 숙주의 기본적인 건강성까지 해치면서 권력에 탐닉하고 있다. 특히 토건사업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예산의 방종한 집행은 벌써부터 수구언론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4대강' 무슨 일 벌어지고 있기에). 정권이 이들 수구세력들의 말에 조차 귀를 막고, 쇄신요구를 계속 거절하면서, 이권에 흠집을 내기 시작하면 이 암유기체 전체는 정권을 퇴출시키기 위한 작업을 할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유기체의 반응이 있으려면 대중투쟁의 진행과 성과, 대의 체제 내부의 균열을 유도하는 촛불의 활동, 노동계급의 가열찬 투쟁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측 역량이 낙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서거국면이 49재 일정 속으로 산개해 갈수록 촛불의 역량도 잠재화되었고, 쌍차 투쟁은 오랜 시일 끌어온 만큼 피로가 누적되고 있다. 특히 금속노조의 개량성이 투쟁 일정 속에서 드러나면서(☞부활한 금속노조 공생협약은 어떻게 쌍용차 투쟁을 가로막고 있는가?), 옥쇄투쟁이 더욱 고립 분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단사 차원의 투쟁과 장기투쟁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 투쟁이 이처럼 각각의 고원 속에 고립되면서 공명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자본은 더욱 기세등등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세가 진행될수록 전선이 명확해 지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겠다. 이를테면 이명박의 기만적인 민생투어를 찍은 ‘돌발영상’에서 보듯이(☞이명박 “얘기할 수 있으니 살기 좋은 세상”), 또한 쌍차 노동자들의 해고를 기정사실화하고 기만적인 협상에 임한 쌍차 자본가들의 경우에도(☞쌍용차, 노조파괴 공작 사실 드러나), 이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주인인 노동자-민중, 다중을 이미 ‘의식적’으로 ‘적’으로 놓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정세는 수구세력과의 대립각이 고조되면서 적대적 전선이 여기저기서 더욱 뚜렷하게 형성되는 형세라 하겠다. 용산참사 이후 잠잠한 이 적대가 또다시 폭력적으로 관철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적대적 전선 안에서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그 압박감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는 MB악법을 둘러싼 부르주아 국회 공방을 물리적으로 압박하면서(용산 참사 범대위 활동과 더불어), 반MB 전선의 확대를 공론화하고 쌍차 현장 투쟁에 대한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투쟁의 동선이 형성되어야 하겠다. 이에 대한 상세한 조직화 방향과 전략 전술이 시급한 시점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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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교조 시국선언은 또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할 것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서거국면에 폭발된 촛불도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촛불의 잠재성’이란 부르주아 정당이든 시민단체든 노동계급이든 정세판단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고려해야한 변수가 되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이 투쟁은 일단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되었다는 성과 외에, ‘화물연대’와의 합의가 아니라 ‘대한통운 광주 지회’ 이름으로 서명하라는 자본 측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화물연대’의 노조 ‘합법성’에 대한 또 다른 측면에서의 싸움을 유예시킨 모양새를 취하게 되었다(☞화물연대, 파업 5일 만에 교섭 타결).텍스트로 돌아가기
  4. 부산지하철 노조의 중심요구는 ‘반송선 무인화 계획 철회’와 ‘인원 충원’이었다. 현재 업무 복귀를 결정하고 7일 재교섭을 준비하고 있으나 아직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부산지하철 파업 중단).텍스트로 돌아가기
  5. 왜 그러냐 하면 서거정국 바로 전에 ‘뉴 민주당 플랜’이 당내에서 회람되면서 이념을 ‘중도 실용’으로 잡아 가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구상은 사실상 당내 개혁 세력에 대한 사망 선고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서거국면은 민주당 내 개혁세력(PK 영남 개혁 세혁)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형성해 버린 것이다. 이는 이번 정세균 대표의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민주개혁세력의 통합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문호 개방을 위해 노력할 것” ... 민주개혁세력의 통합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문호 개방을 위해 노력할 것"(☞정세균 "민주개혁진영 연대 위해 기득권 포기)텍스트로 돌아가기
  6. 이해찬과 류시민이 보다 적극적으로 여러 차례의 강연을 통해 이반되어 있던 친노세력들을 결집하고, 새로운 친노 인자들(이들은 주로 대학에서 강연했으며, 여러 문화행사들도 대학에서 치루어지고 있다)을 생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고, 다른 한 편, ‘인물론’의 중심에서 한명숙과 문재인이 소극적인 방식(거절과 겸양의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오마이뉴스의 오연호가 발빠르게도 인터뷰를 모아 책을 냈다.(『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오마이뉴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들은 노무현을 한국의 ‘케네디’로 만드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과연 어떻게 결집될 것인가? 현재로서는 내년 선거까지 이들의 동향과 DJ직계 박지원의 움직임을 눈 여겨 봐야 하겠다. 그가 지금 민주당과 이들과의 사이에서 거간 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박지원 "이해찬-유시민, 민주당 합류가 바람직")텍스트로 돌아가기
  7. 민노당의 이런 움직임은 앞서 말했듯이 통일운동 세력에 대한 정권의 각개 격파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당내 NL세력의 세포와도 같은 이 조직들의 와해는 민노당의 이념적, 조직적 하부구조의 와해와 다름 없기 때문에 그만큼 위기감이 증폭된 것이다(☞민노당 "이명박 독재정권 퇴진 위해 싸우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8. 특히 이 토론 자리에 최시중을 비롯한 방통위 관계자들이 나와서 하나같이 실명제와 모욕죄 추진을 강변했다는 것도 알아둬야 겠다(☞외국 발표자들 “인터넷 통제 어리석다”)텍스트로 돌아가기
  9. “좌파적출, 선진문화의 창조?”, 김용언, 씨네 709호 참조.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 외에 대중음악상, 인권영화제 상영 불허나 독립영화제 지원 삭감, 폐기 등의 재정적 방식으로 공격하는 것도 일상화되고 있다. 희망제작소에 대한 지원중단, 환경재단 감사와 지원중단이 대표적이다(☞박원순 “국정원, 불법 민간사찰”). 이에 따라 자발적으로 정권과의 연계를 끊는 사례도 속속 생기는 중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0. 한나라당내 쇄신특위의 활동은 결국 찻잔 속의 폭풍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청와대가 움직이지 않고 박희태의 뒤를 봐주고 있는 상황인데다 당내 주류들이 아직 친이 일색인 이상 이들 쇄신파들의 입지도 좁을 수밖에 없다(☞원희룡 위원장님, 어디서 뭐 하세요?). 결국 이들은 7월 4일 현재 사실상의 활동을 접은 상태다. 쇄신안을 청와대에 전달했다는데, 그걸 어디다 쓸지 모를 일이다(☞원희룡 "불손하고 부적절한 언사 상습범들 인적쇄신해야").텍스트로 돌아가기

전교조-민노당, 엮어보겠다? 애쓴다.

  • 등록일
    2009/07/04 13:33
  • 수정일
    2009/07/04 13:33

20년만의 전교조 압수수색. 이 와중에 주목할만한 게 있다. 검견들이 물어 간 물품들 중에 '정당과의 연관성이 확실한 물품'이라고 저들이 말한 것들이 있다는 게다.

 

이게 뭔가? 물론 교원노조법에 있는 그 '정치활동금지' 조항을 억지로 충족시키려고 하는 꼼수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근데, 퍼뜩 머리속을 스치는 것, 민노당의 최근 정책전당대회다. 거기서 토론 끝에 명바기 패거리를 '독재정권'으로 공식적으로 규정했고, 본격적으로 정권퇴진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저능한 검견들이 침을 질질 흘릴 만한 사안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전교조-민노당 이렇게 엮어 보겠다는 건데 ... 참 애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건 좀 허접한 공안 꼼수다. 사람들이 부화뇌동하지도 않을 것이거니와 빨간색 칠하기는 시효가 지나도 한참 지나지 않았나?


그래도 개들이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고 다니는 통에, 벌써부터 개비린내가 진동한다. 하긴 이 냄새풍기는 걸 목적으로 삼았을 터. 더러워 죽을 지경이다. 떡검이 압수수색하고 국세청이 감사하고 조중동이 짖어 대니 온통 토 쏠리는 일만 벌어진다. 이번엔 전교조 선생들을 물려고 환장이니 ...  아, 한예종도 있구나. 이것들이 벌써 진화해서 멀티까지 한다.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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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프롤레타리아-다중

  • 등록일
    2009/06/22 07:54
  • 수정일
    2009/06/22 07:54

 

* 이번 4회 [맑스꼬뮤날레] 원고. 거의 초고 상태의 따끈따끈한 글. 언제 퇴고할지는 모른다.

 

촛불-프롤레타리아-다중

 

 

1. 촛불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는 선재된 대답과 더불어 하나의 부정이 있다. 대답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날카롭게 도드라져 보이는 이 ‘부정성’을 먼저 밝게 톺아 봐야 하겠다.

 

우리는 어째서 ‘촛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 ‘촛불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것일까? 그것은 일견 너무나 당연하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버지’, ‘어머니’, ‘학생’, ‘소비자’, ‘애국자’, ‘노동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런 ‘사람들’이고 그래서 ‘무엇’이라고 묻는 대신 ‘누구’(Qui)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즉 이 물음에는 나와 집단을 가르는 반성적 매개로서의 ‘지성’보다 반응과 수용(receptivity, 감수성)의 새로운 감성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이 ‘누구’라는 질문 속에는 주체와 대상을 이분화하고 대상을 주체 아래(sub)에 던져 놓는(ject) 폭력적 근대성에 대한 거부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라고 묻는 자(지식인, 학자, 토론자, 발제자)는 에누리 없이 ‘누구’에 대해 답을 준비하는 또 다른 자와 다르지 않다. 언표의 주체와 언표 행위의 주체가 다르지 않은 상황, 해석적 주체와 해석 상황이 겹치는 이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은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해석이 “앞과 뒤로”(réegressif et prospectifs) 연관되는 순환적 관계에 처해 있는 것이다.1

 

촛불은 인위적(artificial)이다. 그것은 자연발생적이라고 볼 수 없다. 촛불은 자연의 일방향으로서의 죽음의 계열을 더 앞으로 추동하거나(그래서 그 반응을 파쇼화하여 내파(impulsion)하거나),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양태를 다기화하여 예측불가능한 춤으로 승화시켰다(축제로서의 집회, 경찰들에게 던져졌던 농담들). 그러므로 촛불은 예술(art)이며 기술(ars)이며 인위적(artificial)이다. 정치가 공적 담론장에서 하나의 예술이라면 촛불은 공적이면서(광장) 동시에 사적인(가정과 개별적 감수성) 담론장에서의 예술적 기예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이 전복했던 그 모든 고전적 또는 근대적 형상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담론장의 분열에 다리를 놓는 작업, 사적 담론장의 노예이길 거부하는 주부들(82 쿡),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수동적 호명기제이기를 거부한 학생들(10대연합)이 광장으로 나왔고, 전통적 집회주체들(전대협 동우회와 시민단체들)이 뒤로 빠지거나, 사적 담론장인 가정에까지 가서 촛불을 밝혔다(재택 촛불, 광우병 반대 현수막). 그러나 먼저 물어 보자. 이것은 정치인가? 그리고 다음 질문이 제출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유령인가? 또한 이것은 프롤레타리아인가? 대답이 부정적일수록 전망은 더 모호한 지점을 향해 열릴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모호한 지대(zone obscure: Deleuze)가 공허하다고 말해서는 절대 안 된다. 거기에는 분명 들끓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강렬한 무언가가 있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느낀다.

 

2. 이것은 정치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들은 ‘정치를 혐오한다’고, 아니면 ‘이제 정치적이 되었다’고. 전자는 정치적 행위의 모든 방면으로 부정성을 실어 나른다. 후자는 최소한 부정성을 거두고 소극적인 수준에서부터 적극적인 수준으로 자신의 감수성을 부르주아 정치와 광장 정치에 개방한다. 이 둘은 이렇게 차이가 나지만 또 한편으로 동일한 구조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라는 데 공통성(communality)이 있다. 그 구조는 부르주아 정치라고 불리워진다. 이들이 혐오하면서 동시에 관심을 가지는(결과적으로 혐오스러운) 정치(Politic)2는 광장의 절규가 아니라 의회의 정치, 다시 말해 대의정치인 것이다. 대의정치의 한계라는 의제는 이런 경우 매우 합당해서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3

 

광장 내부에서도 이 정치에 대한 혐오가 드러났다.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다함께’ 방송차량에 대한 거부, 깃발에 대한 거부. 나중에 드러나지만 중요한 것은 ‘다함께’가 아니라, ‘앞 장 선’ 방송 차량이고 깃발들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광장의 정치‘들’은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전위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여간 ‘대중은 전위를 경외한다’라는 오래된 볼세비키적 경구는 전위에 대한 대중의 오래된 불신을 전위 자신들도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신문(맑스의 [라인신문], 레닌의 [이스크라])이 필요했으며, 여기에 조직적 역량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4

 

그러나 2008-9년 서울의 광장에서는 이 신문들은 방석 역할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전위들이 더 이상 전위일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어떤 전위 인자의 과학적 예측력도 촛불의 형상을 그 명민한 두뇌 안에 그려내지 못했다는 것, 이 기가 막힌 전위의 무능력이 촛불들로 하여금 그들의 퇴장을 명령하게 한 것이다. ‘예측’과 ‘발 빠름’이 없는데 앞서(avan-) 지키는 것(-guard)이 가능한가? 웃음거리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촛불이 켜진 뒤에야 날개짓 했던 올빼미들이 그 둔한 몸을 이끌고 독수리처럼 날려고 했다는 것이 그들이 퇴출된 이유였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5결론적으로 촛불은 부르주아 정치와 더불어 볼세비키 정치도 거부한 것이다

 

3. 문제는 그 다음이다. 부르주아 정치와 전위들이 빠진 자리에 촛불은 어떤 형상을 하고 서 있는가? 프롤레타리아? 정치(politic)? 아니면 온전히 프롤레타리아 정치? 촛불이 프롤레타리아였던 적이 있었던가? 촛불은 대중(mass)인가? 다중(multitude)인가? 우리는 지금 헤묵은 ‘주체론 논쟁’의 영역에 진입하는 중이다.

 

가장 손쉬운 대답은 이것이다. 그래도 시작은 여기서 해야 한다. 첫째, 촛불은 중간계급이다. 둘째, 촛불은 근대적 형상의 민중(people)도 아니고, 경멸적 의미의 군중이나 어중이떠중이(룸펜)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이다. 셋째, 촛불은 진지구적 세계화와 지구제국에 대항하는 다중(multitude)의 한 흐름이다. 그리고 네 번째 대답이 가능하다. 즉 촛불은 맑스의 1848년에 유령처럼 떠돌던 그 공산주의적 주체성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바로 그것이 두 세기를 경과하면서 가면을 바꿔 쓴 누승적 역량이며 그것의 회귀이다.6

 

첫째 대답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촛불은 ‘중간계급 운동’이며 그러한 계급적 한계에 갇혀 있으며, 그 의제가 지속적, 집중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특징이 있다고 말했으며, 지금도 그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촛불의 최초 의제는 ‘교육’이었고 그 다음은 ‘검역주권’(광우병 소고기 수입 금지, “협상무효, 고시철회”)이었으며, 그리고서 “정책 반대”(“명박퇴진”)였으고, 투쟁이 진행될수록 반정부 투쟁적 성격이 전면에 나섰다.7여기 어디에 중간계급적 특징이 있다는 것일까? 참여한 촛불들의 계급적 기반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중간계급’이라는 계급론적 바운더리 내에서는 그 지평이 다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한다. 거기에는 노동계급(전통적인 산업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하여)도 있었으며, 주부와 학생들, 노인들도 있었다. 이런 방향에서 계급론이라는 정치학적 범주를 적용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촛불의 의제가 중간계급적이라는 것인가? 이 방향에서는 의제가 가지고 있는 표면적 모양새에 천착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교육이든 검역주권이든 정책반대든 간에 촛불들의 주장과 요구는 모호하거나 산발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간계급적 요구의 특징인 ‘이권’에 속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리’와 ‘존엄’, ‘생명’에 관한 것이었고, 이러한 가치들을 소외시키는 정책과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이며, 따라서 그것은 ‘해방 투쟁’이다.8

 

계급적 기반도, 의제의 의미도 중간계급적이지 않다면, 전술적 차원에서 촛불이 중간계급적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특히 투쟁 기간 동안 현장을 떠돌던 ‘폭력/비폭력’ 공방은 이러한 성격규정에 결정적인 단서를 던져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사안은 매우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 주장들은 여러 갈래의 계열들을 거느린 담론 상황을 연출한다.

 

일단 어떤 경우에서든 폭력은 안 된다는 주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투쟁이 잠재성 차원에서 도사리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터져 나오지 못한 활력이 출구를 찾아 숨을 몰아쉴 때야말로 폭력의 새파란 본성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활력(puissance)을 검열하는 권력(pouvoir)은 필연적으로 ‘지하의 격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며, 억압된 폭력은 반드시 귀환하기 때문이다(Deleuze, Lacan). 그렇다면 어떤 폭력인가? 여기서 폭력은 해석적 지평의 확산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앞으로 뒤로’ 들고 나야 하는 것이다.

 

권력의 폭력이 경찰력을 통해 대리되는 것과는 달리 촛불의 폭력은 직접적이다. 무엇보다 권력의 폭력은 촛불들의 경제적 잉여가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기생적이며, 결국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숙주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물리적인 강도에 있어서는 권력의 폭력이 월등하다. 여기에서 바로 ‘무장’의 요청이 나온다. “다 알겠다. 하지만 현장에서 그저 맞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냐?”라는 질문은 너무나 선명하고, 절실한 실용적 요청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무장이 이루어지지만, 여기에는 단서가 달린다. ‘자구책’으로서의 폭력, 즉 ‘정당방위’에만 무장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촛불들은 플라스틱 방패를 제작해서 들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보잘 것 없는 무장은 현장에서 전시효과조차 내지 못하는 무용지물임이 곧 밝혀졌다. 여기에 또 한 계열의 문제가 발생한다. 도대체 논의 과정에서 말한 그 자구책이라는 것도 현장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때부터 대오 이탈이 발생하면서 좀 더 전투적인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위 간의 조직적 스펙트럼이 뚜렷이 형성되는데, 이 과정에는 반드시 노선투쟁이 겹친다(대책위와 안티MB, 연석회의, 전대협). 그렇다 하더라도 적극적인 폭력 투쟁이 필연적으로 급진적 부위에서 발생한다는 사고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현장에서의 투석전이나 거점 점거(명동 투석전, 하이서울 페스티발 무대 점거)가 폭력 투쟁 선도 부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투쟁의 물리적 폭력성이 현실화 될수록 대오에 변화가 생긴다. 다시 말해 소극적 부위의 투쟁에 대한 회의가 나타나고, 이들의 이탈이 가시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잠깐 살펴보자. 이러한 대오이탈과정이 과연 비가역적인가?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과연 주체역량의 훼손이나 감소를 증명하는가? 두 질문 모두 ‘아니다’로 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후의 사태들(제2, 제3의 촛불들)이 ‘아니다’라는 대답에 실물적인 근거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쟁의 폭력성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반 상황들의 정련을 통해 투쟁이 잠재성의 차원에서 지속되면서 더욱 더 밀도 있게 성장한다는 것이다.9

 

그런데 나는 이 두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기제가 ‘촛불중간계급론’의 사유를 지탱하는 철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목적론이 그것이다. 이 사고는 고전적인 진보주의의 끈질긴 관성 하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세계는 여러 단계의 사회구성체를 거치면서 그 최후의 부르주아적 형태인 자본주의로 진화하였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주체적 역량의 발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상당한 목적론적 낙관주의가 숨어 있다. 첫째로 세계의 역사적 경로가 필연적인 전진형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노동계급의 주체 역량에 대한 믿음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역사의 전진은 노동계급 투쟁 승리의 역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목적론 패러다임은 물론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철학적으로 살펴보았을 때에도 상당히 협소한 근거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목적론이 도달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천년왕국’이다. 그리고 그 과정 전체는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 가는 선형적 경로와 일정 안에 놓여 진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전망 안에서 목적론은 신학적 메타포를 구사하면서 운동의 원초적 촉발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지속을 단지 물리적 흐름으로 축소시키는 효과를 달성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물리적 과정의 총계의 축적일 뿐 아니라, 비물질적 과정, 즉 관계와 비실체적 항들 간의 조우와 공명을 통해서도 움직여진다고 말할 수 있다.

 

정당하게도 촛불은 이러한 조우와 공명의 과정을 증명한다. 촛불에게는 사전모의훈련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목적은 운동이 변해 가면서 함께 변화했으며, 대오의 움직임은 타격지점(청와대)과 거점확보(청계광장, 시청광장, 명동 등)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관계는 물리적으로 정해진 흐름(조직적 질서)을 따라 형성되기 보다, 그때그때마다 휴대폰과 인터넷을 이용하여 형성되었다. 오히려 이런 비물질적 매개들이야말로 투쟁의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였다. 따라서 촛불의 주체역량은 감소하지도 않으며 대오이탈이라는 현상적 모습이 비가역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촛불-주체’라는 형상은 어떤 단일하고 구조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관계성의 역량과 과정의 진퇴 하에서 그것의 동력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계성은 상대방(동지들, 심지어 적들까지) 또는 상대항(투쟁의 도구들, 피켓, 장소들, 구호들)을 소외시키면서 서로를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이라는 거대한 투쟁-기계 안에 동등한 흐름으로 서로를 인정하면서 시작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만이 투쟁은 대오의 양적 팽창과 감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존엄을 유지하면서 영구혁명(또는 지속투쟁)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제2, 제3의 촛불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고전적 목적론이 결코 선취할 수 없는 관점을 투쟁 일정의 도약 가운데에서 촛불 스스로가 현실화시킨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과연 촛불을 그저 중간계급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촛불에는 협소한 중간계급론이 점유하기에는 벅찬 지평이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화석화된 계급론은 이러한 지평을 다 포괄하지 못한다.10

촛불을 중간계급이라는 관점으로 재단하는 폭력을 행사하기보다, ‘프롤레타리아’라는 전통적 개념을 재구성해 보는 것이 더 낫다.11

 

4. 다음으로 두 번째, 도대체 ‘새로운 주체성’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민중이라든지 군중이라는 근대 정치철학적 주체성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는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방면에서 이런 식의 대답은 운동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소극적 규정에 그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촛불을 통해 주체성의 형상에 대해 좀 더 근원적인 비판을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촛불-주체성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주체성의 도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상, 괴물의 도래를 예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초기 산업자본 시기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이 주체성은 스스로 착취의 대상이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착취→임금’이라는 임노동 관계의 기본 일방향(bon sense)을 역전시키면서 ‘임금’에 대해 수동적 자세를 버리고, 사회적 존엄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화폐를 자기 아래에 종속시키기를 원한다. 이들의 요구는 궁극적으로 화폐관계의 폐절을 향할 것이다. 이들은 부르주아 기업과 국가의 자기 구제책으로 번번히 시도되는 인위적 인플레이션과 내핍정책의 양 극단에 내 몰리면서 스스로의 노동가치를 평가절하 당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기업 간 경쟁의 폭력적 분위기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 촛불-주체성은 자신의 몸에 기생하는 국가 권력에다 대고 ‘헌법 1조’를 들이 대며 자신의 제헌적 권능을 확인시키고 이들 기생 권력으로부터 그동안의 모든 영양 공급에 대한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생존재가 이제는 숙주의 관대함을 비웃을 정도로 자신의 존재기반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도 이들은 외생적 판단에 길들여지기보다 스스로 이론을 형성하고, 경험과의 피드백을 통해 철학(공동체주의), 경구(함께 살자, 대한민국), 행동 지침(반MB 전선)을 발명해 낸다. 그 모든 전위적 이론들을 비웃으며 추상의 그물(궁극적으로 지식-권력 기계의 포획망인)을 빠져 나가면서 자신을 시물라크르화한다. 실체 없는 주체, 대상화되어 종속되지 않는 이 주체는 그래서 ‘주체’(subject)가 아니다. hypokeimenon도 ousia도 될 수 없는 이 ‘천민’들, 소피스트들, 반소크라테스, counter-idea, 체계의 전복자들, 히드라 ... 이들은 하나의 명사로 지칭되지 않는다. 다만 인터넷 생중계의 화면 안에 어른거리며, 권력의 심장부에 당도한 괴기한 ‘아침이슬’ 소리, 그 유령일 뿐이다.12

 

다시 한 번 물어 보자. 이들을 ‘촛불-주체’라고 부르는 게 가능한가? ‘주체’라는 그 빈약한 개념의 그릇에 이들을 담아내는 게 가능한가? 맑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을 재정의하고 그것에 변혁의 전망을 담아 냈을 때, 실재로 프롤레타리아가 ‘주체’였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촛불도 마찬가지다. 1848년에 ‘공산주의-유령-프롤레타리아’가 가능했다면, 지금은 ‘X-괴물-촛불’이 가능한 건 아닐까?

 

5. 세 번째 대답에 대해 살펴보자. 촛불을 든 사람, 즉 캔들러(candler)는 다중(multitude)이라고 불리워진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 촛불을 ‘중간계급’이라 칭하는 것보다 정확하다. 왜냐하면 촛불의 특이성과 다중의 특이성이 언제나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13 그러나 촛불은 차라리 민중의 부정적 상으로서 군중에 가까울 때도 많다. 선두에 선 촛불들이 물대포를 맞으며 연좌하고 버틸 때 대부분의 촛불들은 비 맞은 개미떼처럼 물러났다. 선두의 촛불들에 대한 어떤 동지애도 그 순간에는 없었다. 두려움, 동요, 변덕, 이기심 ... 이와 같은 것들이 촛불들에게는 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이 매우 강하다. 여기, 이 지점이 바로 정치‘들’이 실패하는 지점이다. 이때 정치는 예술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적 의미의 ‘정의’로 격하된다. 그 모든 부르주아적 공격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행된다는 것을 기억해 보자. 실패한 정치‘들’은 자신의 예술가적 인격성을 고스란히 부르주아들에게 번제하고, 스스로 대문자 정치 안으로 해소되길 기꺼이 바란다. 외디푸스 감옥에 다시 갇힌 촛불들, 이들에게 ‘프롤레타리아’라는 영광된 이름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14

이들에게 어떤 공통성(communality)이 있는가? 이들은 기껏 세계에 내던져져 불안(Angst)에 떠는 ‘그들’(das Man: Heidegger)일 뿐이다.15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니다. ‘그들’로서의 촛불은 동시에 역사적 프롤레타리아보다 더 위대한 공통성을 향유한다. 앞서 말한 이들의 소통, 공명, 창조성 등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역사적 프롤레타리아에게 이런 공통성의 질감이 존재했던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촛불이 향유하는 공통성은 정보사회 자본주의의 유산이 고스란히 발휘되는 시점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프롤레타리아는 1968년 부터 1990년대의 투쟁순환 국면 동안 비물질적 노동의 성과를 투쟁의 활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16

 

불안과 위대함이 공존하는 촛불은 그래서 ‘어떤 활력’(puissance-aliquid)이며, 그들이 가진 감수성의 필연적 운명에 따라 부침하지만, 또한 그들이 가진 코나투스(conatus)의 운명에 의해 공통성의 기쁨, ‘억누를 수 없는 코뮤니스트의 웃음’(Negri)을 향유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니, 이들은 존재(einai)가 아니다. 이들은 삶의 부정성까지 긍정적으로 포섭하는 운동이며, 이 역동적 운동 속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투쟁의 반환점이기 때문이다. 실체를 거부하는 운동인 이 촛불들은 어떤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다중이라기보다 다중적이며, 프롤레타리아라기보다 프롤레타리아적이며, 신이라기 보다 신적이다.17고귀하며 야만적인 어떤 것, 그것은 ‘촛불’이라기 보다 오히려 정확히 말하면, 촛불-되기이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이 운동은 통합과 전체화의 운동이 아니라, ..., a, b, c, ... 촛불 ... x, y, z ... 이렇게 이어지는 이접 항들의 운동이다.

 

6. 네 번째 대답, 즉 촛불은 맑스의 1848년에 등장한 유령의 누승적 역량이며 그것의 회귀라는 대답을 살펴 보자.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재구성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략 안에서 촛불은 온전한 주체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는 아마 두 번째 대답의 보완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대답에는 그것을 주체성이라는 ‘온전함’을 만족시키지 않는 계획적인 방해가 존재한다. 이 방해는 앞서 살펴 본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촛불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먼저 1848년의 프롤레타리아는 그 실체적 면모가 갖추어지기 전이었다. 맑스는 그것을 호명하고, 그 힘을 ‘불러낸’ 것이지, 자족적인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명명한’ 것이 아니다.18 그렇다면 촛불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이긴(프롤레타리아적이긴) 하지만 진보주의에서 구상하는 그런 방식의 강고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촛불은 다중으로 불리워질 수 있지만, 다중이 아니고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적이다. 촛불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치‘들’의 관계성이며, 주체성의 차원에서 ‘-되기’의 운동일 것이다.

 

7. 100만 촛불, 이 숫자는 촛불의 양적 팽창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 숫자에는 통계적 추정을 넘쳐나는 예측불가능하고, 측정 불가능한 특이점이 존재한다. 그래서 촛불은 멈춰 있거나 과거에 고착되지 않고, 항상 도래하는 것인 바, 이는 불안과 두려움의 분위기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진지를 배회하는 괴물의 모습을 띄고 있기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편에서는 투쟁과 축제의 모습으로 광장을 점거하는 것이다.

 

대문자 정치를 탈주하는 정치‘들’과 주체성의 경계를 비웃으며 계급 간격을 뛰어 넘어 공명하는 ‘-되기’는 때로 ‘정의’(dikaiosyne) 안에서 활력이 선분화되고 벡터가 영점으로 수렴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운동은 진행 중이다. 빛의 속도로 주파하는 이 활력들은 결코 일방향으로 달리지 않으며, 정치적 시공간의 휜 면을 따라 가장 빠른 길을 달린다. 우리는 촛불을 대상화하고 스스로를 주체화할 수 없다. 정치적 시공간의 속도는 그러한 매개 전략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모든 것이 직접적이다. 우리는 촛불을 들고 나가야 하며, 정신력을 투여하면서 정세를 밀어내야 한다. 그 순간에, 광장에서-지금/여기(hic et nunc) 전술이 결정된다. 내 몸의 클리나멘과 저 몸의 클리나멘이 만나 조우하고 교전하는 광장에서 정치‘들’의 관계성이 들끓는다.

촛불 시대의 레닌은 외치지 않고 노래한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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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신, 도플 갱어, 그리고 카프카의 애벌레. 거울 속의 나... 이들은 모두 촛불의 표현적 등가물이다. 분명한 것은 거울 속의 나와 현실의 나가 같지 않은 것처럼, 이 표현적 등가물들이 내용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언급한 부분은 Ricoeur에 의해 강조된 하이데거라 할 수 있다. Paul Ricoeur, Le Conflit des Interpréetations-Essais d'hermeneutique(Paris: Seuil), 1969 p, 27, Heidegger, M., Sein und Zeit(Frankfurt am Main: Klostermann),1977, p.11 참조. 따라서 이 주체에게 해석은 곧 삶이며, 삶은 해석에 의해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이 정치는 대문자 정치, Politic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적 의미의 이 정치는 ‘정의’(dikaiosyne) 즉, 제 사회 계급 간 역관계와 역능을 직업과 신분이라는 실용적 선분으로 나누거나 조절하는 제왕적 계급이나 존재의 책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광장의 절규는 이 책략을 훨씬 상회한다. 오히려 책략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정치에 대한 경멸이 그토록 생동감에 넘칠 것이다. 내 생각에 광장의 절규는 ‘공개된 음모’를 자신의 전술로 내세운다. 아고라와 각종 촛불 사이트에 게시된 전략, 전술들은 공공연하지만 부르주아들을 대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들만을 대상으로 말한다. 하지만 보안은 지켜지지 않으며, 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정작 광장에서는 이 전략 전술들이 모두 발휘되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이 전술들이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보안 사항을 공공연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된 전술들 중 하나라도 먹혀들면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경찰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었다. ‘전술은 많을수록 좋다. 그럴수록 저들은 더 혼란스럽다. 우리는 광장에서 어떤 전술이 먹혀들지 결정할 것이다.’ 이런 전략-전술에 기반한 정치는 대문자 정치를 삭제(Politic)하고 다수의 소문자 정치에 투여하는 어떤 정치'들'(politic's')이라고 할 수 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3. 촛불에 투여된 이 부정성, 즉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의 폐기에 대해 히스테리칼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최장집 등)에게 이 사태는 ‘위기’로 비춰졌다. 이들의 눈에는 한나라당이든 촛불이든 이 측면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이들이 바라는 것은 촛불의 의제를 민주당과 민노당 등 제 의회 세력이 받아 안고 문서화하여 부르주아 정치 일정 안에서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관점은 번번히 좌절할 것이고 실제로 좌절해 왔다.텍스트로 돌아가기
  4. 결국 맑스는 아카데미를 떠나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며, 현실 정치 일정 가운데에서 비로소 대중은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레닌의 경우에도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기 전에 그의 권위는 러시아 노농 대중들에게 익숙한 것이 되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5.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어떤 필자들은 촛불의 한계가 조직된 전위의 부재에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백승욱, 이택광 등, 『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9 참조). 좀 더 많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에서 추상적 논리나 이념이 개입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촛불 초기에 퇴출되었던 깃발들이 서서히 촛불로 복귀한 시점을 살펴봐야 한다. 이 시점은 두 가지로 나눠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촛불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 즉 깃발들이 불가항력적으로 촛불의 전위가 아니라 후위가 되었을 때, 그리고 둘째, 촛불이 저점으로 향해 갈 때, 즉 양적 열세 속에서 활력의 감수성을 전투적으로 북돋워야할 시점이다. 깃발이나 전위적 요소들의 역할을 재고하는 것은 이런 방식의 배치 안에서 가능하다.텍스트로 돌아가기
  6. 가능한 대답들에는 제시된 네 가지의 절충안도 가능하다. 이렇게 대답들이 엇갈리는 이유는 이론적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촛불이 일구어내는 실재적 상황이 그만큼 복잡다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부언하자면, 이러한 투쟁의제들이 ‘반신자유주의’라는 전지구적 의제로 수렴되지 않았다는 것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섣부르다고 보인다. 그보다는 촛불 의제들의 신자유주의적 함축을 살피고, 그것을 거리의 구호로 정련해 내는 작업에 어떤 역량 투여가 필요할 것인가를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7. 나는 이런 촛불 의제의 진화가 어떤 전위적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전위의 인식론적 선점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경찰과 대리전을 치르는 동안, 촛불들은 그 싸움이 결코 하나의 의제에 결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안다. 투쟁이 양적으로 커질수록(의제의 전염) 질적 측면의 강렬도는 증가하며 그 역의 과정도 되풀이된다. 현실적 투쟁이 소극화되는 단계에서도 이 질적 강렬도는 잠재적 단계에서 꾸준히 유지된다. 제2의 촛불(용산), 제 3의 촛불(노무현 서거)은 이 잠재성의 차원이 없다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투쟁 상황에서 문제제기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은 촛불 자신의 감수성이 극대화되면서 지성의 활력이 촉발되는 대자적 자기 구성(self-constitution)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위의 인식론적 선점이란 이 자기 구성 과정의 미미한 한 계기일 뿐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8. 여기서 성과를 따져서는 곤란하다. 성과에 대한 평가는 전술론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9. 투쟁이 잠재적 차원에서 더욱 큰 밀도로 성장하는 과정을 우리는 폭력/비폭력 논쟁의 자연스런 해소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애초부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문제는 어쨌든 ‘폭력의 정련’이며, 그것이 다기한 방식으로 현실화되는 참신한 아이디어들이다. 즉 전술의 개발과 그것의 발휘인 것이다. 현실폭력은 그 와중에 촛불의 활력이 드러나는 한 계기일 뿐이다. 분명히 밝히지만 난 투쟁의 현실폭력을 반대하지 않는다. 정치가 예술이라고 하는 의미는, 특히 프롤레타리아 정치가 예술이라는 그 의미는 폭력의 강도 그리고 그 조절과 무관하지 않다. 때로는 비폭력 무저항이 한 무더기의 테러리즘 전시효과보다 더 큰 투쟁의 전진을 보장할 수 있으며, 때로는 거점 확보를 위한 폭투가 절실할 때가 있는 법이다. 이 판단의 정련, 이 결단의 시기, 그때 네차예프가 아니라 마키아벨리가 필요하다. 즉 주관주의보다 객관주의가, 정념이나 신념보다 사태에 대한 금욕적시선이.텍스트로 돌아가기
  10. 맑스의 계급론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힌다. 여기서 말하는 화석화된 계급론이란 오히려 산업사회 초기 단계의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교조적 계급론을 가리킨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1. 이에 관한 논의는 조금 뒤에 이어진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여기에 ‘촛불 민족주의’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이 문제는 초기 촛불, 다시 말해 2002년 월드컵을 배경으로 등장한 효순-미선 촛불에서부터 문제가 되었던 사안이다. 하지만 난 ‘민족주의’의 문제가 촛불의 활력에 떠도는 암적 욕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 욕망은 오히려 우파 민족주의나 파시즘에 대한 차단막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촛불이 민주주의와 반세계화에 대한 삶의 욕망을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 없다. 왜냐하면 촛불들 자체는 이 민족주의에 대해 취사선택의 지혜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시판 댓글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민족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지향을 방해할 때 발생한다. 이때 민족주의는 매우 위험한 방식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 앞서 제시한 ‘촛불 중간계급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이러한 민족주의의 부정적 방향에 착안한 경우도 많다.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는 매우 정당하다. 하지만 이것을 촛불 전체의 이념적 방향을 설정하는 것으로 활용해서는 곤란하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3. 다중(multitude)에 대한 개념-철학적 정당화는 스피노자에게 있다. 『야만적 별종』,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윤수종 옮김, 푸른숲, 참조.텍스트로 돌아가기
  14. 그러나 이 말이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부정성도 없는 완전한 주체성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이런 계급 신격화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관점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5. 나는 촛불의 이러한 형상을 탈신화화 효과에서 살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즉 어떤 시대에서든지 프롤레타리아는 마냥 선하지 않다. 그들은 사악하며, 오히려 더 사악할수록 부르주아지들에게 두려운 존재다. 이제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역사적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런 탈신화화 작업이 전무했다. 하지만 최근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공, 1970』, 김원 지음,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김원 외 지음, 참조.텍스트로 돌아가기
  16. 『제국 기계 비판』, 조정환 지음, 갈무리, 2005, pp. 521-3 참조.텍스트로 돌아가기
  17.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Deus)이라는 명사를 쓰기보다 ‘신적’이라는 형용사를 많이 쓰면서 모든 고귀한 것들(사랑, 우정, 영웅들의 힘 등등)에 신적이라는 규정을 붙였다. 따라서 신은 영원히 계속되는 규정이지 완결된 함축이 아니다. 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희랍철학 입문』 참조.텍스트로 돌아가기
  18.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프롤레타리아는 채 계급적 면모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또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에도 하나의 위기 국면을 통과할 때마다, 또 새로운 투자처나 자본화의 대상이 나타날 때마다 본원적 축적이 반복된다. 교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자본주의 발전이 단순하고 선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삶과 죽음은 조약돌이다

  • 등록일
    2009/06/21 23:18
  • 수정일
    2009/06/21 23:18

 

* 광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영화를 봤다. 옆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말 신파적으로) 내내 울었다.

 

 

[굿 바이](타키타 요지로, 2009, 일본)

[굿 바이](타키타 요지로, 2009, 일본)

 

 

삶과 죽음은 조약돌이었다. 물론 그 경계에는 문이 있는데, 아주 헐거운 경첩이 달려 있어서 조금만 흔들어도 빠진다. 역시 시간의 경첩은 언제나 빠질 수 있는 것이다([햄릿]). 다시 한 번 확인하자면 삶과 죽음은 조약돌이다. 그 단단한 미물 안에 다 들어 있었다.

 

떠도는 조약돌, 아들에서 아들로,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 그래서 그것은 결코 우리가 잡고 있다고 해서 완전히 포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망각하고 있다고 해서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 분)는 미카(히로스에 료코 분)에게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한 번도 의논하지 않았다. 그건 부성으로부터 배반당한 기억 때문이다. 하긴 이 방면에서 착하기만 한 미카의 모습은 페미니즘 측면에서는 영 마뜩찮다(내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기에 참 다행이다. 영화를 마음의 삐걱거림 없이 볼 수 있었으니). 

 

다시 떠도는 조약돌, 모든 사람이 그 조약돌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피붙이 같은 존재도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자주 잊어 버린다. 그래서 서로 섭섭하다. 다이고도 미카도 그렇다.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다. 조약돌의 크기는 서로 다르다. 어떤 것은 웃음 때문에, 고인의 얼굴 여기 저기 남긴 립스틱 자국 때문에 부풀어 있고, 어떤 것은 무서운 표정으로 으르거나, 운다. 또 어떤 것은 남자로 태어나 여자가 되기를 욕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결 같은 것은 그것들이 모두 한갖 조약돌이라는 거다. 

 

삶과 죽음, 참 일상적이다. 그 놀랄만한 집착과 그 갑작스런 패악질에 있어서 그건 너무나 평범하다. 우리는 그 평범한 진리 안에 산다. 눈물은 그런 의미다. 억울하니까. 빌어먹을 삶과 죽음 때문에 우린 이렇게 괴롭다. 조약돌 따윈 던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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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반동의 무간지옥-[바더 마인호프 콤플렉스], 2008

  • 등록일
    2009/06/15 17:13
  • 수정일
    2009/06/15 17:13

 

"Protest ist, wenn ich sage, das und das paßt mir nicht. Widerstand ist, wenn ich dafür sorge, daß das, was mir nicht paßt, nicht länger geschieht."-Ulrike Meinhof
["어떤 것이 나를 흔쾌하지 않게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반대'라고 한다. [하지만] '저항'이라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나에게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확신할 때를 일컫는다."-울리케 마인호프]

 

흔히들 말하듯이 혁명이 굳이 반혁명을 부르는 것은 아닐 지도 모른다. 오히려 끈질기게 살아 남은 혁명 인자들의 요인암살과 거점 폭파, 납치 등등이 뒤따르는 게 올바른 수순일수도 있다. 하지만 반혁명의 도래는, 사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테러리즘은 반혁명을 단지 유예시키고, 그 이후 반동들의 더욱 큰 폭압의 횡행을 예기한다.

 

6-70년의 유럽은 그런 상황이었다. 혁명, 그리고 테러리즘, 몰아치는 반동. RAF는 혁명과 반동의 간극을 메우는 사령탑과 같은 존재들이었을 게다. 따라서 그 시대야말로 실로 무간지옥이었으며, RAF 전사들은 그 지옥을 떠도는 굶주린 천사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두절미, 정말 솔직해지자면, 이 영화의 미쟝센을 감상하는 동안 온 몸이 찌릿찌릿했다고 해야 하겠다. 프롤레타리아를 조롱하던 부르주아에 대한 테러와 암살, 언론사 폭파, 두려움에 떠는 저들 ...  도대체 우리의 '저항'이라는 것이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데 그토록 소심해질 필요가 있는 것일까? 결국 종말을 예상하고, 청산가리 캡슐을 포켓에 넣어 두는 심정으로 혁명 운동에 종사하는 것은 단지 철지난 볼셰비키식 지하운동일 뿐인가? 인터넷을 넘나들며, 현란하게 마우스를 움직이며, 정보전에서 이기는 것만이 21세기 이후 혁명운동의 기본일 것인가?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운동이 무기를 들었을 때에도 그것을 분연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기를 들지 않았을 때조차, 그것을 감히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가 자주 인용했던 당통의 말을 되새기자면 그렇다. "대담하게, 더 대담하게, 더욱 대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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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의 재림-한스 요나스, [물질, 정신,창조]

  • 등록일
    2009/06/14 19:50
  • 수정일
    2009/06/14 19:50

한스 요나스 지음, 철학과 현실사, 2007독일어 판을 좀 참고하고 글을 써 볼까 싶었는데, 독일어 판이 절판이란다. 아쉬운 대로 읽은 걸 정리해 본다.

 

한스 요나스라고 하면 우선 형이상학적 물음에서 시작하여 과학철학으로 그리고 생명윤리로 여러 번의 전회를 거듭한 철학자로 기억된다. 이에 걸맞게 그는 이 말년의 저작에서 아주 단호한 어조로 윤리학과 형이상학의 복권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강조의 조건으로 과학적 성과(진화론)를 참조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이 가지고 있는 문제틀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독교 철학자로서 그가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형이상학의 복권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결국 구원을 요청하는 것은 '신'이다.

 

사실상 한스 요나스가 주장하는 '복권'은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 잊혀진 것을 발굴하는 작업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데카르트가 플라톤 이래 형이상학의 유구한 명성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폄훼한 이래로 오랫동안 일종의 '존재론적 망각'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요나스 혼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가다머가 그렇게 파악했으며, 그 전에 칸트는 형이상학을 인간의 선천적인 '소질'이라고까지 했다(칸트는 결과적으로 형이상학의 신학적  고갱이를 비워버렸고, 결과적으로 그것의 내밀한 효과를 반감시켰지만).

 

내 생각에 요나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적 물음이 기반하는 형이상학이란 반드시 급진적(radical)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즉 뿌리까지 파고 들어서 '과학'이 감히 도달하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캐 묻는 것'(Socrates),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 물음은 더 이상 '~ 은 무엇인가'가 되기 보다, '어떻게, 왜, 누가'라는 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은 '존재 자체'에 대한 관념론이 아니라 '존재자 그것들'(aliquid)에 대한 유물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 문제는 idea가 아니라 singularity라는 것.   

 


 


한스 요나스 지음, 김종국, 소병철 옮김,『물질, 정신, 창조』, 철학과 현실사, 2007.

 

역자서문_ 아우슈비츠로 빅뱅 읽기: 한스 요나스의 <물질, 정신, 창조>

머리말

 

1 우주기원론적 로고스? 근본 물질 속에 어떤 "정보"가 깃들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없는 이유

2 로고스에 대한 대안: 자연선택에 의해 무질서로부터 질서가 생성되다

3 주관성이라는 수수께끼

4 주관성이라는 데이터는 우주론적 현상에 무엇을 보태주는가?

5 정신의 초월적인 자유

6 정신이라는 데이터는 우주론적 현상에 무엇을 보태주는가? 서구 형이상학의 논변들

7 이후에 진행될 숙고의 추측적인 성격

8 정신의 제일원인에 대한 물음: 정신의 제일원인은 정신보다 못한 것이었을 수 있는가?

9 신인동형론에 대한 반론

10 물질과 정신의 단순한 무모순성: 진화의 현상 앞에서 무능함을 드러내는 데카르트의 이원론

11 물질과 정신의 완전한 일치: 정신의 우주적인 희소성 앞에서 무능함을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심신 병행론

12 교정된 우주론적 현상에 따라 새롭게 제기된 우주기원론적 물음

13 근원적인 정신의 자기 소외로서의 세계의 시작: 헤겔 변증법의 진실과 거짓

14 모든 성공 형이상학의 약점: 창조에 있어서의 신적 모험에 대한 오해

15 대안적인 우주기원론적 추측: 우주의 자율성과 그 기회를 위하여 신이 힘을 포기하다

16 우리가 신을 도와야만 한다: 에티 힐레줌의 증언

17 철학은 사변적이어도 좋은가?

18 다른 곳에 또 하나의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역자해석_ 기술공학시대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요구하는가?

 

[28]따라서 우리는 우주론적 현상을 다룸에 있어 밖으로부터 안으로 나아가는 셈인데, 이는 존재사적으로는 더 이른 것으로부터 더 나중의 것으로, 양적으로는 가장 흔한 것으로부터 더 나중의 것으로, 양적으로는 가장 흔한 것으로부터 가장 드문 것으로, 구조상으로는 가장 단순한 것으로부터 가장 복잡한 것으로, 추론 상으로는 봄(Sehen)으로부터 지각(Fühlen)을 거쳐 사유(Denken)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가장 내밀하고 가장 드물고 가장 늦게 발생한 것으로부터, 물질보다도 먼저 존재하고 있었던 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우주론적 현상으로부터 우주기원론적 추측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29]추측은 이성의 소관이긴 하지만 이성을 구속하는 힘을 가질 수는 없다. 우리는 만유의 시원에 관한 사변에서 추측 이상의 어떤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

 

[32]가령 생성하는 물질 속에 태초부터 이미 깃들어 있던 우주론적 ‘로고스’와 같은 일체의 예정된 프로그램과 계획에 관한 가설은 발전에 대한 설명 모델로서 타당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정보란 축적되는 것인데, 대폭발은 어떤 것을 축적할 시간적 여유를 아직 갖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발생적으로만이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정보의 개념, 즉 이미 현존하는 로고스의 개념은 타당하지 않다. 개개의 경우에 안정적인 분절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든지 간에 이 개개의 경우는 오직 자기 자신을 반복하고 자신의 차원을 유지하며 세계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넓힐 수 있을 뿐,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는 행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 행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다가와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하는 어떤 초월적인 요인이 필요하다.

 

[35]질서는 무질서보다 더 성공적이다. 처음에는 무법칙적이고 불규칙한 것, 그 어떤 보존 법칙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임의의 다수성 속에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머지않아 소멸하고 규칙적인 것에 자리를 내주어 결국엔 규칙적인 것만이 남게 된다. (또다시 ‘동어반복’이지만) 단명한 것은 바로 그것의 단명 때문에 장수하는 것에 길을 내주게 되며, 이후 장수하는 것이 점점 더 확산되고 공고해질 때 그 속에서 아무런 입지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영속적인 프로톤이 형성되고 확산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중력과 역학이 지배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또한 수소 원자로부터 원소 주기율표와 (아름다운 결정(結晶)들의 세계를 포함한) 화학의 세계가, 요컨대 물질의 왕국이 출현했다. 더 나아가 최초의 광선으로부터 전자기 에너지의 양자 구조도 형성되었다... . 한마디로 말해서 입자와 네 가지 힘들(등 등), 보존법칙 및 이와 결부된 엄격한 인과성 그 자체와 그것의 우주적인 우세는 모두 발전과 선택의 산물이다.

 

[37](원주)자연 내의 평형은 절대적으로 안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에서만(rebus sic stantibus) 유효한 어떤 것이다. 따라서 ‘순환’의 현상 역시 - 그것이 스스로의 영속성과 끊임없이 갱신되는 삶의 사이클을 통해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위안을 준다고 해도 - 그 자체로는 시간적이고 무상하며 장기적으로는 쇠락의 과정에 내맡겨져 있다. 그러한 현상은 과거에 진화의 과정에서 규칙적인 인과성이 태초의 혼돈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덕에 나타났지만, 그러한 인과성은 그때부터 부단히 마모되어 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주의 무상함에 우리가 놀랄 필요가 없다. 우리와 신적인 관찰자의 관점에서 볼 때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우주적 모험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바로 그것(즉 생명 - 역자)이 출현할 수 있었던 기회는 바로 그와 같은 크고 넓은 마디들의 - 우리에게는 영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 사이사이에 있었다.

 

[37]왜 세계는 그러한 가장 일반적인 영속적 질서와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생성된 대우주와 화학 세계의 구성물들에 그냥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다윈의 대답은 맹목적인 우연과 개별 사례 속에서 기존의 구성물들에 새로운 특징들(구조적인 요인들)을 부여할 수 있을 만큼[38]의 무질서가 항상 충분히 남아 있었으며, 생존 기준이 오직 확률로만 표시되는 진화의 선택 과정에는 주사위 던지기에 비할 만한, 순간의 우연이 가로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찾으려고 했던 ‘초월적인 요인’이다. 그것은 선행하는 정보, 로고스, 계획, 지향 등의 개입이 없이 새로운 것과 고차원적인 것으로 인도한다. 이 과정은 이미 ‘정보’화되어 버린 기존 질서가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무질서 - 이것은 기존 질서에 부가적인 정보로서 강요된다 - 에 감염됨으로써 일어난다.

 

[41]생명의 영역, 즉 유기체의 내부에 주관성이 등장한 것은 하나의 경험적인 사태이다. 물질계의 특정한 화학적-형태학적 질서로부터 전체 유기체의 왕국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물질 그 자체의 외적인 속성들 - 이는 이를테면 물질의 ‘기하학’이라 할 수 있는데 …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차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 부족한 부분을 나중에 보완하는 식으로 그러한 경험적 데이터에 덧붙여질 수도 없다. 우리는 결코 공간량과 지각의 합계를 낼 수 없다. 양자의 명백한 병렬적 공존에도 불구하고 ‘연장’과 ‘의식’을 하나의 동질적인 장 이론으로 통합할 수 있는 공통분모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단순한 병렬을 넘어 상호 의존과 상호 작용 속에서 공존한다. 더욱이 양자는 철두철미 ‘물질’ 속에서 공존한다.

 

[43]영혼과 정신의 생명, 즉 ‘의식’ 그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44]- 즉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생성되어 - 존재하는 뇌수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 즉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 결정된 과정들의 무력한 부수현상으로 보는 일면적인 유물론적 선택지도 근거가 박약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러한 일원론적 ‘부수현상설’은 이원론적으로 피안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자기모순을 안고 있으며, 엄격한 철학적 논변에 의해 반박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수수께끼에 대한 일원론적 해결책을 모색해 볼 만하다. 왜냐하면 동물과 인간의 내면에서 싹튼 주관성의 목소리가 언젠가 말 없는 물질의 소용돌이 위로 떠 올랐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여전히 물질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면성의 생성에 의해 발언권을 얻은 것은 바로 세계 물질 자체이다. 세계물질의 존재를 결산하는 과정에서 세계 물질의 가장 경이로운 성과를 세계 물질로부터 박탈해선 안 된다. 따라서 일원론적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리학(Physik)의 외적인 계량 가능성을 넘어 ‘물질’의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교정하고 보완하는 일이다. 물리학의 계량 가능성은 물질의 추상일 뿐이다. 요컨[45]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세계 물질의 메타-물리학(Meta-Physik)[형이상학]이다.

 

[48]주관성과 같이 전혀 무차별적이지 않은 것이 전적으로 무차별적이고 중립적인 것에서 생겨났으리라는 것, 따라서 이러한 주관성의 출현 자체는 완전히 중립적인 우연이어서 그것의 발생을 조장하는 그 어떤 종류의 선호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생각이다. 차라리 그러한 선호가 물질의 태내에 존재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 따라서 물질에는 비록 계획(우리는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이에 대한 가설을 부인해 왔다)은 없었지만, 아마도 계획에 대한 동경과 같은 어떤 것, 이를테면 우주적인 우연의 기회를 포착하여 그것을 계속 [49]관철시키는 하나의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한에서 ‘우주기원론적 로고스’ - 이것이 근본 물질에 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우리는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 보다는 ‘우주기원론적 에로스’가 더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사태의 대부분은 여전히 우연에 맡겨져 있다. 예컨대 지구처럼 생명에 특별히 유리한 조건을 갖춘 행성이 우주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정말로 있을 법하지 않은 희한한 우연이었다.

 

[50]생명은 자기목적이다. 다시 말해 생명은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을 원하며 추구하는 목적이다. 목적성은 자기 자신을 열렬히 긍정한다는 점에서 무차별적으로 무목적적인 것보다 무한히 우월하다. … 이는 곧 물질이 태초부터 잠재적으로 주관성이었음을 의미한다. 비록 그러한 잠재성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영거의 시간과 희한한 행운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정도의 ‘목적론’을 끌어낼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생명의 증언 뿐이다. / 지금까지 우리가 제시한 논변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목적성 - 목표를 향한 노력 - 이 특정한 자연적 존재, 특히 생명체 내부에 주관적인 의식으로서 명백하게 나타나고 거기에서 또한 객관적이고 인과적인 작용을 일으킨다면, 목적성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산출한 자연에 완전히 낯선 것일 리가 없다. 다시 말해 목적성은 그 자체가 ‘자연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자연적으로 제약된 것이며,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51]따라서 목적인은 - 더 나아가서는 가치들과 가치의 차이들도 - (반드시 중립적이지만은 않은 - 세계 인과성 개념의 한 요소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세계 인과성은 목적인과 함께 주어진 성향인 동시에 작용인들의 결정 구조에 목적인이 개입하는 것을 허용하는 개방성이다. 생명 현상이 우리의 사유에 시사하는 바는 이렇게 심대하다. … 이와 같은 목적론적 잠재력이 그러한 외[52]적 조건들의 실현에, 따라서 유기체와 뇌수의 진화에 이미 관여했는지(만약 그랬다면 어디까지 관여했는지), 아니면 그러나 조건들이 독자적인 발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어쩌면 이미 그런 조건들에 대한 ‘동경’이 인과적으로 작용하면서 질료적으로 제공된 최초의 기회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점차 (즉 그러한 기회들의 축적을 통해 지수적인 방식으로) 그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나는 - 에로스 개념을 허용하는 순간에 이미 암시했던 것처럼 - 이것을 믿는다.

 

[56]인간의 도덕적인 자유 … 그것은 모든 자유 중에서 가장 초월적이고 가장 위태로운 자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단념(Sich-Versagen)의 자유이자 자발적으로 선택된 무감각(Taubhiet)의 자유이며, 더 나아가서는 극단적인 악 - 이것은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최고선의 가상으로 위장하고 나타날 수도 있다 -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에 관한 지식, 즉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은 또한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들을 선택할 때마다 동인으로서 관여함에 틀림없는 ‘에로스’는 - 심지어는 인간의 경우에서와 같이 고도로 시각화된 에로스조차도 - 행위를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아직 이것만으로는 스스로가 참된 목표를 [57]찾아내어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증할 수 없다. … 도덕적 자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지적 자유의 또 한 측면을 추가해야만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유의 능력, 자신의 주체인 ‘자아’를 주제화할 수 있는 능력, 요컨대 반성의 자유이다. 이 반성의 자유 안에서 사유의 세 가지 자유[pp53-4 참조,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는 자유, 감각적인 소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 초월의 자유]는 함께 작용한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자유가 … 오직 인간, 즉 정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

 

[59]타자를 향한 일차적인 의욕은 주어진 경우에 운이 좋으면 만족될 수 있지만, 반성적으로 함께 의욕된 것, 즉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자아의 관심은 항상 만족되지 않은 채 자기 회의로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러한 자기 관심은 세 번째로 언급한 사유의 자유 - 즉 무한하고 영원하며 무제약적인 것으로 상승할 수 있는 자유 - 의 규범에 스스로를 종속시킨다. 둘째, 선을 행할 수 자유는 동시에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며, 악은 천의 얼굴을 하고 선에 대한 모든 의욕 속에 숨어 있다. 초월적인 [60]척도에 의거한 자기 구속은 관심 그 자체를 무한하고 무제약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 영원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무상하고 유한한 객체의 덧없고 제한된 선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무한하고 무제약적인 것 역시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따라서 이제 관심은 동시에 자기 자신이 된 주체, 즉 해방된 주체의 무한한 교활함에, 즉 모든 자유 의지의 어쩔 수 없는 이중성에 내맡겨진다. … 자기 관심 및 자기 시험인 동시에 자기 도취이기도 한 반성 그 자체는 이러한 이중성을 본질적으로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다. 과도한 죄책감에 몸을 떨며 영혼의 심연 속을 헤매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율스런 이야기들은 바로 그러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최고선을 향한 사랑에 불타며 자기 탐구의 고통으로 [61]괴로워한다.

 

[62]먼저 우리는 순수한 내면성을 대변하는 관념론적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첨삭된(expurgiert) 외면성을 대변하는 유물론적 물리학자들 또한 쉽게 망각하곤 하는 한 가지 사실 - 이 사실은 겉보기엔 ‘역설’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인 것의 현존 그 자체가 세계 내의 객관적인 사태이며(이를 부정할 수 잇는 것은 오직 유아론뿐이다), 따라서 인간적인 현상 역시 우주론의 소관사라는 사실이다.

 

[69]내면성과 관심과 목적에 대한 의욕을 가진 생명은 세계 물질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은 세계 물질의 본질에 전적으로 낯선 것일 리가 없다. 또한 생명이 세계 물질의 본질에 낯선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계 물질의 시원에도 낯선 것이 아닐 것이다(여기에서부터 논변은 우주기원론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대폭발 속에서 형성되고 있던 물질에는 이미 주관성의 가능성, 즉 우주적이고 외적인 실현의 기회를 기다리는 잠재적인 내면성의 차원이 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앞으로 우리는 내면성의 자기실현을 위한 물리적 조건들이 전개되는 데 있어 그러한 ‘기다림’, 즉 ‘동경’이 관여했다고 추측할 것이다. 이처럼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우주의 역사에서는 기계적인 우연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도 하나의 은밀한 목적론이 관철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런 경향을 추동하는 ‘의지’의 계기가 태초의 근원 그 자체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우주기원론적으로 추측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추측들이 내재적인 자연철학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었[70]다. 태초의 ‘보는’ 지성, 즉 궁극적으로 초래될 것에 대한 영원한 예견은 가정될 필요가 없다. 무의식적인 경향만으로도 생명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족하다. 우리의 사유가 생명 현상을 실마리로 하여 도달하게 되는 범심론은 그 자체로는 아직 신학이 아니다. 요컨대 존재론적으로 무한한 중요성을 지닌 생명의 증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존재를 알리는 내재성의 목소리인 것이다.

 

[72]미래에 정신의 물리적 담지자가 될 뇌는 태아 단계에서 유전자의 독점적인 물리화학적 감독 - 이는 태아의 몸속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물질의 배치를 말한다 - 하에 형성된다. 유전자의 이러한 감독은 생성 과정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때 유전자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며, 유전자의 작용 역시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그것은 전적으로 정신없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원주]어쨌든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되는 것은 정신 그 자체가 아니라 미래의 정신의 잠재적인 담지자이다. 정신은 신생아와 그에게 말을 건네는 주변의 어른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는 정신적 주체들과의 의사소통 - 이것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수용적이지만 나중에는 뚜렷이 상호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 으로부터 비로소, 그리고 오직 그것으로부터만 생성된다. 신생아에게 말을 건네는 언어적 환경이 없다면 인간이라는 이름의 어린 짐승은 설령 신체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한다 하더라도 결코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는 이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학습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신 또한 기존의 정신으로부터 학습될 수 있는 어떤 것임을 의미한다. 유전적으로 준비된 뇌수의 도구적 속성을 이용하는 새로운 정신은 오직 기존의 정신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생긴다. … [73]따라서 모든 개별적 개체발생에 있어서 현실적인 정신은 자신의 생성을 위해 이미 그때그때의 현실적인 정신을 전제한다.

 

[74]이 정신은 동시에 그런 종류의 인식, 즉 사실에 관한 인식을 토대로 그 자신이 현존하며 사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보편적인 물질, 즉 뇌 안에 모아져서 조직된 물질적 요인들의 덕택임을 알고 있다. 따라서 정신은 물리학이 그에게 가르쳐주는 온갖 속성들 외에도 정신의 가능성, 즉 - 특수한 조건들이 주어지면 - 정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소질이 저 정신에 낯선 물질에 부여되어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83]물질은 단순히 정신과 양립 가능하다는 가설 - 이것은 창조에 관한 하나의 최소 가정이었다 - 하에서는 사실상 정신이라는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전술한 대안, 즉 신의 세계 통치 - 늘 새로이 세계의 진로에 개입하는 일반 섭리(providentia generalis)와 특수 섭리(providentia specialis) - 에 관한 보완적 가정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만, 우리는 이 가정을 거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법적인 면에서 설명의 원리로는 아무런 쓸모도 [84]없고 심지어는 설명의 이념 그 자체를 파괴할 뿐 만 아니라 우리의 자연과학과 역사과학의 너무 많은 부분이 이론적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그것과 직접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제일원인은 정신의 운명을 일일이 직접 관리하는 대신 근본 물질을 시간 속에 풀어 놓을 당시에 단순하고 중립적인 정신과의 양립 가능성이나 정신의 공존에 대한 단순한 관용 이상의 어떤 것을 그 물질에다 부여했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외부와 내면 사이에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이 설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가정되어야만 한다.

 

[88]우리는 이 두 가지의 우주론적 인식, 즉 세계의 시원에 관한 인식과 정신은 우주 안에서 뒤늦게 발생한 희귀한 것이라는 인식을 우주기원론적인 물음에 반영해야만 한다.

 

[93]우리는 … 이성의 장엄한 행보를 운운하기보다는 차라리 한심스럽게 낭비해 버린 엄청난 비용을 애석해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정신이 출현한 것은 요행히도 상황들이 최적으로 부합하는 우주적인 우연의 유희 덕택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성의 장엄한 행보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 [94]우리는 -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그리고 알건 모르건 간에 - 언제가지나 실수를 모르는, 세계 정신의 선택받은 집행자인가! 차라리 입을 다물라! 아유슈비츠의 치옥을 - 가령 그것이 반정립에 의한 종합을 이루기 위해서 요구되는, 그리고 유익한 구원의 조치였다는 식으로 - 전능한 신의 섭리나 교묘한 변증법적 필연성에 전가할 수는 없다. … 지금 신성은 우리로 인하여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로부터, 더 나아가서는 신의 얼굴로부터 또다시 오명을 씻어내야만 하다. 여기에서 나에게 이성의 간지를 운운하지 말라!

 

[96]따라서 “보아라, 좋지 않으냐?”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하지 않으면서도 존재의 본성에 대한 생명과 정신의 증언을 경시하지 않는 형이상학은 세계의 파란만장한 진로와 관련하여 맹목적인 것, 무계획적인 것, 우연적인 것, 예상할 수 없는 것, 극도로 위험한 것의 여지를, 요컨대 정신을 지닌 제일원인이 창조와 더불어 감행했던 거대한 모험의 여지를 남겨두어야만 한다.

 

[99]오직 시공간적으로 거대한 우주만이 신적인 힘의 개입이 없이 단순한 확률의 지배에 따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정신이 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것이, 그리고 유한성 안에서의 정신이 자기 시험이 창조주의 의도였다면, 창조주는 거대한 우주를 창조한 후 유한한 것의 진로를 유한한 것 그 자체에 맡겨 [100]두었음에 틀림없다.

 

[101]이제 우주론적인 현상을 매개로 우리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우리의 우주기원론적 가설로부터 - 즉 생성의 흐름 속에서 정신이 원래부터 의욕되었다는 점과 그렇게 의욕하던 근본정신이 유한한 정신들의 예측 불가능한 자아성(Selbstheit)을 위해 힘을 포기했다는 점이 연결됨으로써 - 다음의 결론이 도출된다: 신적인 모험의 운명은 우리의 변덕스러운 손에, 우주의 한구석인 이 지구에 달려 있으며, 바로 우리의 어깨 위에 그에 대한 책임이 지워져 있다. 신은 아마도 인간이 자신의 일을 망쳐 놓을까 봐 몹시 불안해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창조의 의도를 실현태인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도리어 창조의 의도를 우리 멋대로 좌절시킬 수도 있으며 또한 그럴 힘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래선 안 되는가? … [102]이제 문제는 ‘존재’다. 우리는 존재를 보아야만 하며, 존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우리가 보는 것에는 생명과 정신이라는 증거가 포함되는데, 이는 가치중립적이고 목표중립적인 자연에 관한 이론에 반하는 증거들이다. 우리가 듣는 것은 우리가 본 선(善)의 부름, 즉 그 선에 내재하는 존재에의 요구(Anspruch auf Existenz)이다. 보고 들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기를 승인하라는 선의 명령의 수탁자가 되며, 따라서 선에 대한 의무의 주체가 된다.

 

[108]근대사상의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거의 공식적인 신조의 위치에까지 오른 금령들로서, 하나는 증명할 수 없는 것에서는 손을 떼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의 특별한 경우인) 다른 하나는 논리적으로 존재에서 당위로, 사실에서 가치로 통하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형이상학에 대한 금지이고, 후자는 가치와 도덕적 구속력과 윤리는 단순히 주관적인 것일 뿐이라는 도그마이다. 이와 같은 금지들에 대하여 철학자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찬동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새삼스럽게 놀랄 [109]필요는 없다. 그것은 철학이 모방하고 싶어 했던 자연과학의 성공 앞에서 철학 스스로가 굴복해 버린 저간의 사정을 반영한다. … 자연과학은 그 대상으로부터 목적과 의미 요소와 주관성 등을 제거하고 모든 대상을 시공간 안에서 양적인 측정이 가능한 것으로 환원한다. 이는 존재론적으로는 그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지만, 지식의 수확량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방법론적으로는 대단히 유용한 허구이다. / 데카르트를 계승한 철학은 이와 유사하게, 말하자면 똑같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시의 대상에 첨삭을 가함으로써 응수했는데,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주관적 관념론 - 특히 선험적인 종류의 주관적 관념론에서는 독일인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 의 순수 의식이라는 찌꺼기 자아(Rumpf-Ich)이다. 후설(Edmund Husserl)의 순수 의식은 비록 ‘생활세계’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이때의 생활세계는 오직 순수 의식에 ‘대하여’ 주어진 것으로서만, 순수 의식 내에서 스스로를 구성하거나 혹은 아예 순수 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순수 [110}의식 그 자체는 생활세계의 일부가 아니며, 생활세계와 무슨 의존적인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체 역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체험된 것, 즉 ‘현상(Phänomen)’으로서만 나타날 뿐이다.

 

[111]전체에 관한 사유는 철학의 본분이다. 그러나 철학은 정밀과학에 압도되어 (데카르트를 시작으로) ‘확실성’을 지식의 주된 목표로까지 격상하면서 고귀하지만 정밀하지 않은 원래의 본분을 내팽개치고 마치 하나의 개별과학처럼 전체의 절반에만 안주해 왔다. …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119]이제 요점과 결론을 언급할 때가 되었다. 우주 안에 다른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과연 있을까? 그러한 지식으로 인해 우리의 책임이 조금이라도 달라질까?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가 중대한 책무를 방기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곳에서 더 선한 손에 의해 계속 이행되기를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책무가 오직 우리에게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몫의 책무를 볼모로 하여 더 많은 모험을 감행해도 좋은가? 아니다! 우리가 지배하는 이곳, 우리의 힘이 미치는 유일한 영역인 이곳에서 정신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가에 대해 오직 우리만이 책임이 있으며,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를 저 가상의 지성들은 그들의 영역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책임을 갖는다. 그 어[120]떤 정신도 다른 정신이 져야 할 책임의 일부를 덜어줄 수는 없으며, 다른 정신이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을 도와줄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를 도울 수 없고,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주의 이 한 모퉁이에서, 우리가 불길한 힘을 갖게 된 바로 이 순간에, 신의 사태가 저울판 위에서 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곳에서야 신의 사태가 성공했든 위태로워졌든 구출되었든 결정적으로 실패했든 간에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랴? 후일 우주 어딘가에서 수신된 우리의 신호가 사망신고여선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몹시 할 일이 많다. 우리의 지구를 위하여 진력하자. 외계에 그 무엇이 존재하든지 간에 우리의 운명과 창조라는 모험 - 이 모험은 바로 이곳과 결부되어 있으며 보호할 수도 있고 배반할 수도 있다 - 의 운명은 바로 이곳에서 결정된다. 마치 우주에는 사실상 우리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러한 가정하에서 우리의 운명과 창조라는 모험의 운명을 걱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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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혁명의 시간?

  • 등록일
    2009/06/09 00:36
  • 수정일
    2009/06/09 00:36

 

역사를 이룰 것인가? 이 시점에서 묻는다. 한국사회 노동계급이 과연, 이 인간 이하인 이명박 정권을 끝장낼 것인가? 다른 어떤 세력도 아닌 노동자 계급이 말이다.  다시 한 번 묻는다. 그리고 희망을 가져 본다

 

화물연대 총파업이 이틀 앞이다. 그리고 그 전에 범국민 대회고, 쌍차 노조는 옥쇄파업 중이다. 말 그대로 '노동자-민중' 전체의 의식적인 총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게다.

 

기대해 본다. 이런 정세, 이런 순간에 무슨 긴 글을 쓰고, 또 무슨 긴 분석이 필요하겠는가? 숨 죽이고, 가슴을 쓸며 기다려 본다. 하나의 사건, 그 영원성의 시간이 현실화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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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노빠, 요란한 좌파, 교활한 명빠

  • 등록일
    2009/06/01 09:25
  • 수정일
    2009/06/01 09:25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좌파 내에서 말들이 많다. 진보블로그만 살펴 보아도 노제 있기 전부터 이 '대중의 광기'(?)에 대한 우려들이 솔솔 피어나더니, 이제는 아주 용기들이 백배해서 죽은 노무현  까기에 열심이다.

 

일단 드는 생각은 뭐하러, 저렇게 열심이 죽은 좆 붙잡고, 이리저리 후려 치는 걸까, 라는 거다. 약발도 안 먹힐 텐데,말이다. 약발이 먹힐려면 산 좆들, 그러니까 박연차나, 천신일이, 그리고 당연히 명박이와 그 개들(검찰과 경찰)을 까대야 하지 않겠나? 하긴 그럴려면 죽은 노무현의 약발이 필요한데 어떤 좌파들은 이 약발이 상당히 거북한 게 틀림 없다.

 

하긴 내 경우에도, 대한문 앞에까지 가서 줄 서 있긴 했지만, 분향은 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고, 영결식은 땡땡이 치고 저녁나절에 나가서 전경들하고 눈싸움했긴 했었다. 사실 나를 비롯해서 이 좌파란 물질들은 대개 스스로 하고 있는 짓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반성하기 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내는지,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에 더 관심이 많다.

 

문제는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 똑똑한 짱돌들을  이리저리 굴리며 사태 파악을 해 봐야 결국엔 ":그래서 어쩔려고? 넌 뭐 할건데?"라고 물으면 답이 없다는 거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아, 씨바 난 몰라, 너나 노제 가!"라든지 "용산에 한 번 더 갈래"라는 식이다. 그런데 웬 걸? 사실 용산 범대위 분들이 노제에 간 걸?

 

이 꼴같잖게 복잡하고 좌파스런 짱돌 안을 살펴 보면 이렇다. 그러니까 이 느닷없는 '노무현 정국'이야말로 '대중의 공분'이 흘러 나오는 원류임을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스스로도 이 상황이 명박이 패거리들에게 충분히 겁을 주고 있다는 것을 매우 생쾌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듯 행동하는 것이다. 빌어먹을 습성들이다.

 

이런 습성들에 이름을 붙이자면 뭐라해야 하나? 깡통주의? 하는 거 없이 요란하니까? 아니면 자가당착? 뭐 여튼.  이 빌어먹을 좌파 꼴통 습성들이란 게, 결국, 무능했던 노빠들의 과거나 들추어 내고, "그래서 놈현이는 추모해 줄 필요가 없다"는 둥, "노제? 거긴 왜 가냐? 병신"이라는 둥 하는 거다. 

 

그런데 까 놓고 보면, 이렇게 말하는 물질이 추모 안 하고, 노제 안 가는 이유도 딱히 뾰족하지 않다는 거다. 들먹이는 말들을 들어 보면, 대개 두 가지 정도로 나눠 지는데, 첫째는 "놈현이 그 새끼 평택을 조지고, 농민들 노동자들 죽였다",  또는 "권력을 쥐어 줘도 제대로 개혁도 못한 새끼 뭐하러?"라는 거(업적론적 사고)고, 둘째로는 "그 시간에 용산에 한 번 더 간다"는 식이다. 그러면 나 그런다. "그래라." 왜냐하면, 얘들이 정세에 끼칠 영향력이 지들이 그토록 하찮게 여기는 노무현이 죽음보다 더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노무현이 죽음에다 대고 "구역질 난다"고 한 지만원이나, 이 '광기스런' 노무현 정국의 롤러코스터 위에서 곧 토할 것 같은 좌파들이나 한 끝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능한 노빠들이 되살아 오는 것도 역겹고, 그보다 더 무능한데, 또 어이 없게도 그보다 더 요란스런 좌파란 물질들이 초연한 척, 노무현이 죽음과 노제를 구정물 대하듯 하는 건 더 역겹다. 이 와중에 명박이 패거리들은 뭐 할까? 당연히 서로들 싸우게 내버려 두고 지 갈 길 가고 있는 중이다.

 

뱀발: 한 가지 부언하자면, 이 요란한 좌파들이 대개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대중'과 '좌파인 나'를 매번 구분한다는 거다. 왜냐하면 "난 다 알고 있는데, 대중들은 모르니까" 명박스런 사고구조와 다른 게 없다. 누가 그랬더라. 좌파란 매우 자주 파시즘의 거울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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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욕심을 버려라

  • 등록일
    2009/05/27 09:20
  • 수정일
    2009/05/27 09:20

이명박 대통령, 욕심을 버려라

 

추모 물결이 끝이 없다. 그를 좋아했건, 미워했건, 또는 애써 무시하고 살았건 간에 사람들은 출근길에, 퇴근길에, 혼자 또는 가족을 이끌고 대한문 앞으로, 또 봉하마을로 다리품을 팔아 간다. 정성이다.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 자에 애절함을, 분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념도 아니다. 시쳇말로 니편 내편 가르는 것도 소용없다. 그게 다 무슨 헛수작이란 말인가. 지금까지의 모든 정치는 이 죽음 앞에서 그저 허방일 뿐이다.

 

그런데도 술수를, 꼼수를 부린다. 온다고 했다가, 장례위원회 결정에 따른다고 했다가, 꼬붕들을 시켜 상가집 분위기가 어떤지 간이나 본다. 시청광장은 안된다고 했다가, 노제일 경우 적극 검토하겠단다. 불 붙은 가스통을 휘두르던 듣보잡 물질들은 되지만, 추모 시민들은 안 된단다. 추모하고 고인을 기억하고, 반성해야할 자가 시청 광장과 청계 광장에다 자기 개들을 풀어 놓고, 낮잠을 자게 하거나, 오가는 선량한 이웃들을 위협한다. 광장도 안 되고, 촛불도 안 되고, 결국 추모는 폭력 시위라는 거다.

 

비겁하다. 치졸하다. 자기가 저질러 놓고 그걸 가리기 위해 애먼 사람들을 불법으로 몬다. 얼씨구나, 노망 난 청와대 옆 김씨와 조씨가 나선다. 치료를 요하는 두 노친네가 엉뚱하게 멀쩡한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건 서거가 아니라, 자살이야”, “죽은 게 어디 우리 이명박이 때문인가? 다 자업자득이야.”

 

분하다. 힘이 없다. 저 입들, 더러운 입들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그런다. 정서장애로 치료를 받아야 하거나, 하루속히 죽어야 할 사람들이 대명천지에 골프장으로 어디로 나돌아 다니는데, 고인은 “원망하지 마라”고 등을 다독인다. 서러워 고인을 뿌리친다. 눈물을 훔치며,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디 이게 당신이 원하던 나라였냐고, 어디 이런 인간들이 지도층이며, 석학이며, 대통령이냐고, 따진다. 사실은 당신도 살아생전 이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바라지 않았냐고, 왜 그러냐고, 왜 그리 말하냐고, 떼를 쓰며.

 

생겨나고, 살아 온 게 다른 모든 사람들 마음이 이 죽음 앞에서만은 오롯이 하나 같은데, 죄를 빌어야 할 놈이 꼼수를 부린다. 북쪽이 핵실험을 했다고, 그러니 상을 치우라고, 추모를 걷어 치우라고, 곧 전쟁난다고 그런다. PSI도 전면 참여란다. 잘못을 빌어도 시원찮을 놈들이 오히려, 턱을 요렇게 받치고, 고개를 외로 돌리며, 다리를 탈탈 털며, 사시눈을 해 가지고, 우리를 으른다. 협박한다. 어이가 없는 짓거리, 씨알도 안 먹힐 짓거리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게 누군데, 누구를 협박하는 건가?

 

이제 그만해라. 제발이다. 이제 고만 죽여라.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나? 권력보다 고향 마을 산천의 공기가 더 좋아 “아 기분 좋다”하지 않았나? 그걸 보고도, 그 말을 듣고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엄연한 ‘정치보복’이었고, 삼척동자도 헤아릴 만한 ‘사법 살인’이지 않나? 그 책임자가 어디 검찰총수 뿐인가? 아귀 같은 입으로 매일매일 고인의 명예를 할퀴고, 피를 빨아 자신의 배를 불린 언론들과 거기에 한 입이라도 더 대고 고인의 살을 뜯어 먹은 부라퀴들이 얼마나 많은가? 벌써 몇몇 인사들은 애달픈 마음에 비판의 칼을 거꾸로 놓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고인을 마음으로 추모하고 용서를 비는데, 그들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그들보다 연륜도 많다고 떠벌린 인간이 어찌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가?

 

욕심을 버려라. 그 가당찮은 권력욕을, 그 어쭙잖은 공명심을. 그 때문에 이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노동자가 죽고, 기어이 전직 대통령이 죽었다. 부엉이 바위 아래, 고인이 선혈을 쏟아 내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때, 바로 그때 고인과 함께 있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어라. 피를 토해내는 가여운 입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뚫린 귀로 들어라.

 

용서를 빌어라. 그리고 추모를 원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의 ‘원망’을 안고, 품어라. 고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반민주적인 일정을 일소하고, 반민주적인 행정적, 사법적 수작들을 거두어라. 꼼수를 거두어라. 부끄럽다. 부끄럽다. 고인 앞에서 더 이상 ‘괴물’이 되지 마라.

 

잘 들어라.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 - written by REDBRIGADE

* [대자보]에 실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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