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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스타일, 좌파의 간지

  • 등록일
    2009/08/29 01:43
  • 수정일
    2009/08/29 01:43

코코 샤넬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유행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는다." 프랑스 비씨 정부를 후원했고, 거짓말장이에다가 요부였던 이 여인을 별로 좋아 하지는 않지만, 이 말만큼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기사를 보니 조국 교수도 이 비슷한 말을 했더라. 진보는 섹시해야 한다고 ... .  지난 맑스 꼬뮤날레에서 어떤 활동가 후배 한 분이 좌파 선배들이 '간지' 없다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해서 내내 '간지' 토론을 했던 기억도 난다. 

 

간지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 간지 나야지. 그러니까 나름 스타일이 있어야해. 하지만 그게 좌파의 간지, 스타일이라는 게 뭐냐는 거지. 20세기 좌파의 유행이 지났으니, 21세기 유행이 올 것이고, 또 그게 하나의 스타일이란 말이냐? .

 

그런데, 간지나는, 또는 엣지(edge)있는 좌파들이 생겨난다고 해서 혁명이 앞당겨 질 것인가? 세상이  후울쩍 변할 것인가? 하긴 두 대통령의 서거에 울고불고 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명박스런 패거리들에게 표를 몰아 주는 소위 그 '서민'들의 소구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그 '간지'가, 또는 '섹시함'이 필요할 것도 같다. 그치만 그렇게 살면, ... ㄷㄷ 되는 것일까? 폼 나게? 간지 나게? 스타일 챙기면서? 그래, 그건 아닌 거다. 그렇다면 이 따위 천박스런 '간지' 말고 좌파의 스타일이란 건 뭔가, 말이다.

 

머리 아프다. 이건 뭐, 별 해괴한 땅에 그것도 어수선한 명박철에 좌파로 살자니 고민도 이런 걸 하고 자빠져 있어야 하나, 싶다. (하지만 중요할지도 ... 모른다.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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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의 도래-서거국면 이후 MB권력기계 분열증식 톺아보기

  • 등록일
    2009/08/24 15:29
  • 수정일
    2009/08/24 15:29

*이 글은 [대자보]의 '벼리의 느긋하게 세상보기'  란에 실릴 예정인  redbrigade의 원고다.


권력(potestas)은 자율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의 본질은 오히려 ‘기생성’이다. 역사적으로 자율성은 오직 다중(multitude)의 것이었다. 이 자율성으로부터만 권력의 대당(counterpart)인 권능(pouvoir)이 나온다. 권능의 활력은 적극적인 평화주의와 비폭력주의에서부터 폭력투쟁과 파괴의 열정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풍부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권능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운명’ 즉 일의성(univocity)의 평면에 도달할 뿐인데, 그것의 이름은 ‘삶’(Une Vie)(1)이다.
 
하지만 권력은 이 활력에 기생하면서, 운명(Moira)이 삶의 몫(moirai)으로 할당되는 것에 반대하고, 오직 죽은 결정체인 자신의 유기적 부분에 종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권력은 살아 있는 기관들(organs)이 아니라 죽은 조직화(organization)를 더 선호하며, 다종다양한 정치들(politic's')이 아니라 일괴암적인 정치(Politic)를 구축하고 그를 통해 숙주인 다중을 관리, 통제, 훈육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실패한 시도다. 왜냐하면 활력의 본래적 성격이란 죽음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숙주는 관리할 뿐, 관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활력이 과연 ‘살아 있는’(活) ‘권능’(力)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권력이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실행한다는 데 있다. 화석화된 ‘사회계약’(2)을 한 쪽 저울에 올리고, 다중의 혁명적 시도들을 거기에 따라 심판하면서 그것이 마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인 양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도들은 끝내 과부하를 부르고, 폭력(3)의 상황과 배역들을 불러 모으는데 이것이 ‘공안’이며, 경찰과 검찰, 그리고 백색테러다. 주목해 볼 것은 이들이 펼치는 한 무더기의 드라마가 히스테리와 분열증을 산출한다는 것인데, 리비도 경제 차원이 아니라 이제 권력-기계 안에서 이 두 드라마는 각각의 국면을 특징짓는 죄임쇠와 밈쇠의 기능을 떠맡는다. 
 

 

이를테면 MB권력기계를 살펴보자. 촛불 초기에 이 권력은 자기자신 내부에 어떤 억압된 욕망이 있는지 분명히 했는데, 그것은 수구파시즘에 대한 동일시욕망이다. 특히 MB는 박정희 군부에 대한 공공연한 애착을 보이곤 했다. 군부파시즘의 특징상 이 욕망은 다중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통제하고 다중의 일상을 엿보면서(4) 그 생활상 ‘배후’에서 스스로의 거울상(5)을 대면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 동일시와 엿보기의 욕망은 번번히 실패하고 마는데, 왜냐하면 군부파쇼 모델은 이미 잃어버린 대상(lost object)며 다중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죽은 아버지고, 촛불의 배후에는 ‘공포’만이 배회한다. 이 공포에 대처하는 MB권력의 반응, 즉 증상이 바로 candlephobia인 것이다.
 
이 공포는 하나의 질문 주위를 배회하는 데, 그것이 그 유명한 “초는 누가 사준 거야?”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애초에 잘못 제기되었기 때문에 그 해(解)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최근에 MB가 유기농 흙을 갈쿠리로 헤집으며 “여기 미생물이 어디 있어? 안 보이네”라고 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공포에서 비롯된 헛헛한 실언들이 결코 ‘농담’도 ‘풍자’도, 더욱이 ‘아이러니’도 아니라는 것이다. MB권력에게 이 ‘잘못 제기된 질문’은 그대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고, 이에 반해 다중-우리는 그것이 ‘가상’일 뿐임을 안다는 것이다. 이러니 ‘소통’은 꿈도 못 꾸는 것이며, MB는 이에 관해 저항하는 다중이 내내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다중의 ‘아침이슬’ 소리가 쟁쟁하게 퍼지던 그 날 청와대 뒷산에서 MB는 그 실재의 노래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계속 “초는 누가 사준 것일까?”라는 가상의 질문에 대뇌가 짓눌린 채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 기무사도 동원되었다. 따라서 지금도 그 질문은 해결 불가능한 채로 MB권력기계의 폐쇄회로를 떠돌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래서 히스테리는 상실된 대상이나 해가 없는 질문을 욕망하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한다. 이는 권력이 다중을 떠나 감히 ‘자율성’을 표명할 때 극에 달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상태에서 이 상황은 매우 주기적으로 도래한다. 각각의 부르주아 권력기계들은 선거 전과 후에 한 번은 완전한 노예로서의 타율성에 기대어 표를 구걸하고, 또 한 번은 완전히 주인이 되어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MB권력은 이 주기적인 주인-노예 변증법을 극단에 이르기까지 밀어 붙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가상의 권위’ 즉 재현된 권위(represented authority)에서 나온다. 이 권위는 스스로의 대의성을 은폐하고 그것을 자율성으로 왜곡하는데, 이 과정을 더 멀리까지 추동하기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공권력은 억압(repression)을, 거짓말은 왜곡(distortion)을 담당한다. 이것의 표면효과는 분명하다. 포화된 왜곡과 억압 때문에 실재의 표면에 경련이 발생하고 주기적인 발작에 휩싸인다. ‘대운하’는 4대강으로, 광우병 소고기는 원산지 추적제로, 참여정부 권력에 대한 복수는 법치주의로 ... 말이다. 이 계열은 앞으로도 계속 가면을 바꿔 써 가며 반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히스테리 상태에 놓인 MB권력의 신체는 이와 같은 거짓승화(pseudo-sublimation)를 통해 전 사회체에 경련을 운반하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증상 때문에 내파(implosion)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운반된 증상의 충격을 견디는 것은 오로지 숙주-다중일 뿐이다(6). 그러나 충격의 자기정화 능력, 즉 다중의 감수성(perceptibility)도 임계점이 존재한다. 반격이 준비되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은 이것을 간파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다중의 반격을 간파하는 속도가 반격이 시작되는 그 속도보다 열에 아홉은 더 빠르다는 것이다. 성공한 반격은 사회체 전체의 기능을 리셋하고 기생-숙주 관계를 올바르게 복원하면서, 빠르게 공동체화하지만, 그렇지 못한 반격은 곧장 권력의 반혁명을 부르고, 더 거센 억압과 탄압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중은 반격이 임박했고, 그 임박한 사실이 이번 한 번만으로 끝나지 않으며, 줄줄이 반격의 계열이 늘어서 있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한다. ‘인민은 왕이 행차할 때 엎드려 방귀를 뀌지’만 행차가 끝난 뒤에도 그 쪽으로 엉덩이를 까 보이는 법이다.

 

어쨌든 반혁명의 시기에, 또는 지금과 같은 반촛불의 시기에 권력은 다중의 감수성이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특히 반촛불 상황은 권력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노무현 서거는 권력의 직접적 표적이었던 전직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MB권력의 히스테리가 어디로 운반되는지 알게 해 주었는데, 그것은 노무현으로 상징되었던 다중들 전체다. 이 사건은 집단적 트라우마(collective trauma)가 되었으며, 다중의 신체에 심각한 자상을 입혔고, 하나의 잠재적 공분상태를 MB 집권기 내내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전에 발생한 용산 참사의 파급력은 이 사건을 통해 보다 광범위해지고, 더 긴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상 노무현 노제에는 용산의 희생자들 넋이 뒤따랐던 것이고, 용산 현장에는 노무현의 영정이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뒤이어 발생한 평택 쌍용차 투쟁은 77일간의 옥쇄파업 일정이 영웅적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련의 잠재적 공분에 미미한 힘만을 보탰을 뿐으로 보인다. 그것이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고립’은 쌍차 투쟁 전 기간에 걸쳐 현장을 배회하는 유령과 같았다. 이 고립은 민주노총 집행부와 금속노조가 자초한 측면이 많지만 이것을 더 멀리까지 밀고 나가 그 효력의 수혜자가 된 것은 MB권력이다. 결국 구조조정 후 매각의 수순을 밟을 것이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도 그렇게 ‘고립’을 통과하게 할 것이고, 항복을 받아낼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MB권력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다중-노동계급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쌍용차 투쟁을 대면하면서 MB권력은 반격의 시간보다 한 발 앞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이전의 소고기 사태부터 노무현 서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학습된 것이기도 하다. 학습의 내용은 ‘전염’하기 전에 ‘고립’시키라는 것이다. 쌍용차 싸움에서 권력은 종횡으로 두 개의 선분(노자와 노노)을 현장에 배치함으로써 쌍용차 노동자들 투쟁의 고립을 가속화했으며, 관료화된 노총이 미필적인 방식으로 거들었다. 그러니까 한 발 앞서 고립시키면, 그 뒤는 자동으로 그 고립이 누승화된다는 것. 이 전술은 미디어법 공방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제 보겠지만 이 공방에서 원외로 나가 투쟁력을 놓이려고 했던 민주당은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문제는 이제 이 고립이 전체 다중에 대한 억압과 폭력만으로는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대의 권력의 중추적 강점이자 약점은 앞서도 말했듯이 주기적으로 주인-노예 변증법의 무대(선거)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그 무대가 마련될 시기가 되면 히스테리는 잠잠해진다. 이때 비로소 권력은 주인의 가면을 수치심 없이 벗어 던질 수 있다. 왜냐하면 강제로 노예의 가면을 썼던 다중이 비로소 주인이 되고, 반격의 상황은 유예되기 때문이다. 다중의 취약점은 이런 것이다. 일종의 조삼모사에 대해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 말이다. 권력은 이 취약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읍소하고, 아양 떨며, 매수하고, 약속하며, 간간히 사전에 세금감면이나 복지혜택을 베풀어 줌으로써 이 무대에서 무사히 내려와 다시 주인의 연기를 계속하려고 시도한다. 이 시도는 대체로 성공해 왔다.

 

MB권력이 김대중 서거 이후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이 때문이다. 단순히 노무현과 김대중의 죽음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항일 뿐이다. 이 겉으로 드러나는 ‘죽음의 차별성’조차 오히려 MB권력에게 귀중한 자산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김대중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건 노무현 세력을 고립시키고, 김대중 세력을 차후에 끌어안을 수 있는 매우 경제적인 분할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그래서 매우 성공적이다(7). 어쨌든 촛불 정국 이후 심각한 타격을 받았던 다중의 감수성을 조삼모사식으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거리가 생겼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노무현과 용산의 트라우마는 차라리 훌륭한 수단이 된다. 그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이 정국에서 이 정도의 시혜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일리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시간차’고 ‘속도’가 문제다. 그 둘을 장악하는 자가 전략과 전술에서 앞선다.

 

따라서 MB권력은 김대중 서거 이후 선거를 통한 반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 시간차와 속도를 장악했다. 분자적으로 다중을 앞선 것이다. 다중보다 더 빨리 자신의 전투대형을 풀어헤쳐 버렸으며(서울광장을 내 주었고), 민주당이나 민노당, 진보신당보다 먼저 무주공산의 고지(선거국면과 김대중 서거)를 점령해 버렸다. 셈을 해 보면 이 짧은 시기(노무현 서거에서 김대중 서거, 그 중간에 미디어법 공방) 동안 다중의 감수력이 임계점을 넘어섰고, 이를 먼저 간파한 MB권력이 그 임계점의 천정을 치면서 급속하게 ‘화해’(8) 모드로 돌아선 것인데, 이로써 열 중에 여덟을 MB가 가져갔다는 결과가 나온다. 해결되지 않은 분노로 지친 다중에게 던져진 조삼모사의 사탕은 바로 ‘화해’며, ‘세금감면-복지혜택’이다. 전자가 이념이라면 후자는 실물이다. 전자가 집단지성의 취약지점을 공략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 사회체의 취약지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히스테리는 어디 갔는가? 이 지점에서 MB권력기계의 히스테리는 사회체 전반의 표면에 증상을 운반하기를 그치고, 그 표면에 분열증적인 욕망을 분배한다. 휴식에의 욕구, 똥(화폐)에 대한 집착, 투쟁에 대한 혐오증, 그와 함께 정치혐오, 나아가 소수자(배제된 자들, the excluded: Slavoy Zizek)(9)혐오에 이르기까지, 반정치의 입자들이 사회체의 표면에 서식하면서 분자운동을 규율하고, 법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 권력기계는 죄임쇠를 쓰지 않고, 밈쇠를 활용한다. 점점 더 많은 국면에서 시간과 속도를 장악한다면 밈쇠는 죄임쇠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시의적절하며, 경제적이다. 왜냐하면 죄임쇠는 다중의 반발력에 맞서 기생권력의 운동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야 하지만(10), 밈쇠는 이미 임계점을 치고 내려오는 다중의 운동에 편승하면서 간간이 ‘조절’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 분열증은 그래서 다중에게 최면과 같다. 가상의 최면, 마치 MB권력의 공권력과 부르주아 법치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끼는 그 최면상태는 실로 파시즘으로 가는 샛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분열증에서 비롯되는 망상(delusion)은 배제된 자들에게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권력의 가상은 듬성듬성해서 곳곳에 빈자리가 있으며, 그 빈자리에 창궐하는 것이 바로 이 배제된 자들이고, 프롤레타리아며,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이다.

 

히스테리 이후 분열증에 도달하는 것은 이렇게 순간적이다. 그리고 다중이 다시 권력이 쥐고 있는 밈쇠의 조종관을 재전유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계기, 즉 이념(the ideal) 층위와 감각적인 것(the sensible)의 층위에서 이 분열증을 앞서 가야 한다. 다시 말해 분열증의 평면에서 권력보다 더 빨리 나아가는 것 말이다. 그래서 법치화와 규율화의 홈을 교란하고 다시 분자운동을 재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운동의 주체는 누구일까? 이는 반드시 배제된 자들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 권력이 미처 감각하지 못하는 클리나멘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개체화의 발명, 조직들(organs), 정치들(politic's')의 발명이다. 차이(difference)와 미/분화(differen/ciation: Deleuze)(11)에서 앞서가는 것, 곧 “전술과 전략에서 적들을 앞서는 것”(Guattari). - REDBRIGADE

 

[각주]

1) 들뢰즈는 본래 피히테의 것인 이 개념에 니체적인 운명애(amor fati)의 함축을 불어 넣어 일종의 생명철학을 추구했다. ‘일의성’이란 이런 생명과 삶에 대한 절대적 긍정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지평이다.

2) 루소의 것이라기보다 부르주아지의 것, 즉 계약이 아니라 양도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

3) 다중의 순수폭력, 즉 ‘혁명’과 구분되는 퇴행성, 나르시시즘적 폭력

4) 이 방면에서 도청과 사찰은 매우 일상적인 것이다.

5) 그와 유사한 일괴암적인 ‘조직’을 말한다. 이렇게 권력은 어디에서나 자신의 ‘모습’만을 본다.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6) 일부 기생충 내부 기관의 손질, 요직의 교체나 경질 등이 있지만 이것은 기생권력에 어떤 본질적 ‘개편’도 가져오지 못한다.

7) 이 두 죽음의 실제적 ‘차별성’이라는 측면과 반MB라는 ‘동질성’이 진보그룹들의 난감함이다. 둘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딜레마에 봉착한다. 전자를 택하면 ‘연대’가 사라지고, 후자를 택하면 ‘설명력’이 떨어진다.

8) 이는 김대중의 업적으로 MB가 칭송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김대중이 MB권력을 ‘독재’라고 규정한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묻힌다.

9) Slavoy Zizek, 'How to Begin from the Beginning', New Left Review No. 57 참조.

10) 그래서 숙주의 건강을 위협하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기생권력의 한계는 권력을 발휘하면 할수록 자신의 근거인 숙주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그 사실이다. 이것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와 유비적이다.

11) 질 들뢰즈 지음, 김상환 옮김, 『차이와 반복』, 5부 5절 참조. “이는 이념 안의 미분비들의 상태나 잠재적 다양체를 가리키는 동시에 질적이고 외연적인 계열들의 상태 -미분비들이 분화되면서 현실화되는 상태-를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이 맥락에서 들뢰즈의 이 개념을 변주하면, 이념적인 차원에서 ‘화해’의 전술을 앞서가고, 외연적인(감각적인) 차원에서 ‘화폐’의 흐름을 앞서가는 공동체(Commune)를 발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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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윤미래, 천상의 HipHopSoul

  • 등록일
    2009/08/23 15:47
  • 수정일
    2009/08/23 15:47

내가 군대에서 일병 달 때니까 1996년 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네. 저녁에 근무를 마치고 막사에 늘어져서 티비를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Katusa로 용산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5시 퇴근 후엔 그 누구도 생활에 간섭하지 않았어. Everybody don't care의 군대 아닌 군대였던 셈), 뜻밖에 화면에 괜찮은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가. 그 중에 앳되고 좀 통통해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눈에 들어 왔는데, 목소리 호소력이 장난이 아니었어. 알고 보니 걔네들이 그 유명한 'Uptown'이었지.  그 여자아이는 윤미래였고 말이야. 당시엔 티비 나오는 축들을 개무시하면서 나름 언더그라운드 매니아 겉멋에 빠져 있던 때였는데, 그 여자 아이의 목소린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어. 뭐랄까, 목소리의 입자가 풍부하다 못해, 그 입자 하나하나의 뇌관이 모조리 제거된 채 폭발을 기다리는 듯 했달까. 

 

그런데도 그때는 음반을 구입하지 않았어. 왜냐면 티비에 간간이 나오고, 라디오에서도 들을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당시에 난 힙합보다는 Nirvana 음반을 하나 빠짐 없이 모으고 있었고, Marilyn Manson 음반을 내도록 듣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희안한 오기라는 게 있었는데, 뭐냐면, 'Rock 아니면 Classic' 뭐 그런 거였지.   

 

그런 윤미래를 다시 만났지. 이번에도 우연히. 종종 영화를 다운받기 위해 들어가곤 하는 지하세계에서 이 아이의 베스트 앨범(2003)을 발견한거야.  주저 없이 내려받기, 클릭. 앰프의 볼륨을 높이고 플레이 버튼 꾸욱 . 그리고 ... '까무러쳐'  버린거야([G화자] 중). 내 생각에 이 땅에 난다 긴다는 노래꾼들 중 윤미래만큼 완벽한 목소리는 없어. 듣는 사람이 확, 미쳐버린다니까. 이건 뭐, 랩에서 알앤비, 소울, 팝까지 못하는 창법이 없는 거지. 그러면서도 그 특유의 호소력을 유지하는 거야. 그 카리스마라는 게 장난이 아니야. 오체투지하고 들을 수밖에.

 

그런데, 타이거JK와 결혼해서 애기까지 낳아버렸으니  이젠 그 목소리의 끝 간데 없는 도발과 광기는 사그라드는 건가?  제발 그러진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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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에 그동안 사고 싶었던 앨범들을 mp3로 다운 받았어. 이 중에 정식으로 CD를 구입할 만한 것들이 생길 건데 ... . 지금은 Kasabian이 심하게 당긴다는. (왼쪽부터, [The Dead Weather], [Kasabian], [황보령 3집], [Evgeny Kissin]

 

 The Dead Weather vol. 1 Kasabian - West Ryder Pauper Lunatic Asylum황보령 3집 - Shines In The Dark The Essential EVGENY KIS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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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No! 카니발니즘!

  • 등록일
    2009/08/12 00:57
  • 수정일
    2009/08/12 00:57

명바기와 똘마니들이 파시즘이냐 아니냐를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 논쟁이 있는 것 같다. 한 쪽에서는 무자비한 경찰력 남용과 헌정질서 유린을 들어 파시즘이라 하고, 한 쪽(창비와 박노자 같은 분)에서는 아직 파시즘의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으므로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내 생각에도 MB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어디 감히 히틀러나 무쏠리니씩이나 되려고 용을 쓰냔 말이다. 히틀러가 지나가다가 콧방귀 낄 일이다. 그만한 역사를 만들려면 잔인함도 도가 지나쳐야 하고,  경제적인 환난 때문에 살짝 맛이 간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파시스트들도 나름 악행의 규칙 같은 게 있고, 품격(?)이라는 것도 있지 않느냐 이 말이다.

 

MB를 봐라. 어디 그런 규칙이나 격이라는 게 있는지 말이다. 하는 말마다 구라고, 하는 짓마다 천박하지 않는가? 이건 뭐 이념도 없고, 사리분별보다 자기 이권이 앞서니, 아무리 지 나름대로 '착한 일'을 한다고 설레발 쳐도 일거수 일투족이 다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엔 파시즘이 아니라, 잔인한 괴물의 카니발리즘에 가깝다는 거다. 무식하니 용감하다는 수준은 이미 넘어 섰고, 사람들을 먹이감 다루듯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다루듯이 하는 걸 보면, 식인풍습이 아니고 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파시즘은 발뒤꿈치도 못 따라 가는 거고, 원시 종족적인 카니발리즘이 더 어울린다는 거다. 거기 죽어 나가는 대한민국 문명인만 불쌍할 뿐이다. 이건 너무 착해 빠진 게 흠인 문명인들이라, 당해도 당하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앞으로도 한 몇 년, 아니 한 10년 제 몸을 이 괴물에게 갖다 바쳐야 할 것 같아서 온통 끔찍할 뿐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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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주의 환상 유감

  • 등록일
    2009/08/08 16:24
  • 수정일
    2009/08/08 16:24

미디어법이 표류중이고, 쌍차투쟁이 패배하고, 촛불도 다시 일어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공분이 없을 리는 없다. 활동가들은 특히나 이 공분이 내면으로 타오른다는 것을 잘 아는 것 같다. 그리고 다중이 이제 '선거'로 심판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 것인가? 공분이 내면으로 타오른다는 것까지만 맞다. 그러나 선거가 과연 저들을 '심판' 씩이나 할 수 있는 기제가 되는가? 지금까지 어땠는지 잘 톺아보기 바란다. 언제 우리가 선거 따위로 독재를 심판하거나 혁명에 나선 적이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선거라는 것을 우리만 하는 것인가? 선거권이 프롤레타리아, 다중들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다. 저들도 선거를 한다. 오히려 선거에 더 적극적이지 않은가? 철저한 계급투표를 통해 지금껏 승리를 구가해 온 쪽은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지 않은가? 열 번 선거했다면 아홉 번은 저들이 열매를 따 갔다는 것을 벌써 잊은 것인가?

 

정세를 보자. 난 최시중 일당과 한나라당이 '선거'를 몰라서, 그게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니라고 본다. 저들도 충분히 그 시기가 온다는 것을 안다. 다만 저들은 그 선거가 닥쳐 오면 이런저런 패를 꺼내 들고 사람들을 다시 현혹시킬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난 저들이 꺼내들 패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보는 편이다. 왜냐하면 선거가 오기 전까지 온갖 악행들을 폭력을 동원해서 대중들에게 행사해 왔기 때문에 조삼모사에 취약한 대중들에게 사탕 하나면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간접세 인하라든지, 통신료 인하 따위 말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그러한 '특혜'가 결코 애초부터 특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간접세는 이미 올린 것을 깍아 주는 것이고, 통신료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지 않은가? 조삼모사, 눈 감고 아웅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 주위에는 이를 모르는 '어르신'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또 하나. 지방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남았다. 저들은 잘 안다. 이 선거에서만큼은 박근혜와 딴날당이 승산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멍청한' 대중들은 소고기부터 용산, 그리고 평택에 이르는 처참한 만행들을 박근혜가 나서준다면 용서해, 아니 잊어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실 난 이런 꼼수가 MB나 이상득이 최시중이의 머리 속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까지 돌아 보기에는 그들의 머리가 너무 썩었다. 이들은 그냥 밀어 붙이는거다. 그게 다다. 이 꼼수의 로드맵은 주로 딴나라당과 청와대 참모진들의 짱돌 속에서 열나게 돌아 가고 있을 것이다. 권력의 허수아비 밑에서 달콤한 열매를 캐 먹고 있는게 바로 저들이고, 그 태평성대가 세세년년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저들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선거에 대한 환상을 버리기 바란다. 백날 해봐야 도로아미타불일 것이니 말이다. 혹여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 같은 좌파정권이 요상간에  들어설 수 있다고 야무진 꿈을 꾼다면 얼른 일어나서 세수하고 출근이나 하기 바랄 뿐이다. 그리고 둘러보기 바란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 이 땅에서 지금 필요한게 선거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최소한 활동가들,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는 물질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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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패배, 이제 현자, 기아 차례다!!

  • 등록일
    2009/08/07 00:28
  • 수정일
    2009/08/07 00:28

협상안을 본다. 참으로 어이가 없다. 70여일 간의 옥쇄투쟁의 결과가 겨우 이것인가? 주먹밥을 먹고, 최루액에 몸을 흠씬 적시면서, 씻지도 못하고, 발이 썩어가는걸 지켜 보기만 했던 그 고통의 댓가가 이것인가?

 

그렇게 노동자들은 견디지 못할 고통 속에서 패배하고 만 것이다. 난 쌍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곁에 있지 못했던 족속들, 특히 '연대, 연대' 입만 열면 외치던 대공장 노동자들과 그 집행부들, 그들이 너무나 좆같다. 난 지금 이순간만큼은 쌍차 경영진도, 먹튀 상하이차도 욕하고 싶지 않다. 그 짐승들이야 제 본능대로 했을 뿐이다. 제 계급의 욕망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러나 투쟁이 거셀 때 집행부 사퇴를 한 현자노조와 제대로 된 총파업조차 조직하지 못한 금속노조, 민주노총. 난 이들이 도대체 노동운동의 '상집'이라고 불리워질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 이번 쌍차 투쟁은 현민주 노동운동 전체의 지도력이 시험받는 자리였다고 말이다. 얼마 안 있으면 민노총 위원장 직선이 실시된다. 이대로  그게 진행 되면 이 나라 민주노동운동은 개량주의와 기회주의에 아작이 날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나 뿐일까? 도대체 한국 사회 노동계급이 그 '계급'이라는 이름에 값하고 있는가? 부끄럽기 그지 없다. 밥그릇 챙긴다고 욕하는게 아니다. 노동자가 제 밥그릇 챙기는 게 결국 투쟁이고, 그게 정치가 되는 게 신자유주의 아닌가? 제대로 제 밥그릇 챙기라는 거다. 지금 쌍차 투쟁이 강 건너 불일 줄 아는가? 정신 차리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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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 등록일
    2009/08/03 23:00
  • 수정일
    2009/08/03 23:00

 

독서노트를 정리하고, 영어판으로 미심쩍은 구절들이나 중요한 구절들을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 버렸다. 그동안 새로 해야  할 일도 쌓였고 ... .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쓸 시기도 지난 것 같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바우만의 '공포'라는 것이 대체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해결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닐 것인데, 책을 덮고서도 그 기분 나쁘고  끈적한 페시미즘의 촉감이 계속 느껴지는 건 상당히섬뜩하다는 것만 말해 두고 싶다. 

 

세상이 악몽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책에서까지 그걸 전후좌우로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은 거다. 하지만 실존적 문제의식을 이끌고 가는 사유의 힘에는 박수를 짝짝짝!! 

 

Zygmunt Bauman, Liquid Fear, 한규진 옮김, 산책자, 2009

 

서론 - 공포는 어디에서 와 어떻게 움직이는가

 

1.죽음의 공포

2.악과 공포

3.통제 불가능한 것과 공포

4.글로벌 공포

5.유동적 공포

 

감정적 결론 - 공포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인가

 

원주와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11]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12]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는 않는 공포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공포’란 곧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13]‘파생적 공포’란 계속해서 마음을 구획하는 프레임으로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느끼는 감각이라고 보면 된다. 말하자면 불안의 감각 -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언제 어디서 뭐가 덮칠지 모르다는 느낌 - , 취약함의 감각 - 위험이 닥쳤을 때, 막을 방법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것 같은 느김. 여기서 취약함이란 실제 위협의 크기나 성격보다는 자신의 방어 수단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 이랄까. 그런 불안과 취약함의 감각을 세계관 속에 짜 넣고 만 사람이라면, 실제 위협이 없을 때[14]조차, 위험에 직접 맞닥뜨렸을 때에나 보일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파생적 공포’는 자가 발전하는 공포다.

 

[15]더 무서운 사실은 공포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공포는 어디서나 새어든다.

 

[17]다른 모든 인간 공생의 형태가 그렇듯, 우리의 유동적 근대사회 역시 삶을 공포와 더불어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한 고안물이다. 달리 말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무장해제하고 항복시킬 수 있는 듯한 고안물이자, 그런 공포를 낳는 위험이란 효과적으로 예장되기만 한다면 사회질서를 뒤흔들 수 없다며, 아니면 뒤흔들 수 없어야 한[18]다며 공포에 침묵을 명령하는 고안물이다.

 

[23]우리는 이처럼 방심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다가왔고,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게 된 위험에 임해서도 교묘하게 옆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낸다. 그 존재를 받아들이되, ‘리스크’라고 여기는 것이다. / … [24]우리는 또한 ‘예상 밖’의 결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치밀한 계산을 했으나 그래도 예상을 뛰어넘는 뜻밖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면서. … 리스크란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 또는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 위험이다. 계산 가능한 위험을 리스크라고 한다. 일단 그렇게 규정되고 나면, 리스크는 확실함 - 가깝게도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 보다 겨우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 된다. … [25]하지만 위험에서 리스크로 주의를 돌리는 일은 종종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안전한 행동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했던 것으로. … [26]정신 없이 리스크를 계산하며 매우 무시무시한 걱정거리를 옆으로 밀어버리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따라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재난에서 주의를 돌릴 수 있다. … 덕분에 우리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며, 악몽이나 불면증을 저만치 떨어뜨려 둔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더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 위험이 덜 현실적으로 되지도 않는다.

 

[35]‘타이타닉 신드롬’은 문명의 ‘종잇장처럼 얇은 외피’를 뚫고 ‘문명화된 삶의 기본 요소들’ - ‘문명화’, 곧 ‘조직화’된 삶의 요소다. 즉 정규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균형이 잡혀 있고, 일정한 행동 방식을 지시하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 이 여지없이 제거된 무의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혼자만의 추락, 또는 여럿이 함께 하는 추락이겠지만, 어떤 경우에든 ‘삶의 기본 요소들’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믿을 만한 의지처가 존재하는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49]오늘날의 <빅브라더>는 그 이름을 따온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처럼 사람들을 안에 가둬두고 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을 밖으로 쫓아내고, 쫓아낸 사람은 쫓아낼 만하며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강조한다.

 

[55]모든 교훈담은 공포의 증폭을 통해 효과를 낸다. 하지만 고전 교훈담이 구원을 포함했다면 - 공포에는 결국 해결책이 뒤따르며, 공포를 유발하는 위협을 피할 방법이 있고, 따라서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결말로 이어진다 - 우리 시대의 ‘교훈담’은 잔인무도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구원의 약속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57]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어떤 다른 성질과도 비교가 안 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성질을 침묵하게 하는 성질. 우리가 겪어서 아는, 또는 들어서 아는 모든 사건은 과거가 있듯 미래도 있다. 죽음만이 예외다. 모든 사건은 하나의 약속을 포함한다. … 죽음만이 예외다. 죽음에는 단지 하나의 문장만 따라붙는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59]모든 인간의 문화란, 죽음에 대한 의식 속에서도 삶을 활기 있게 하도록 고안된 교묘한 장치로 해독될 수 있다.

 

[60]메멘토 모리 - memento mori - ,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주장에 따라붙곤 한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의 임박성이 주는 효과를 억제하고자, 그것에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인식을 주려 애쓴 증거다. 그런 주장이 귀에 들어오고, 그 주장에 몰입하고, 믿어버리고 나면,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잊으려 애쓸 - 언제나 잊을 수 없게 마련이지만 - 필요가 없어진다.

 

[75]약해진 독이 언제 어디서나 넘치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는 차라리 압도적인 박력으로 닥쳐들지 않는다. 그 소름끼치는 악몽으로 사람의 혼을 짓누르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는 너무도 평범한 것이 되어, 삶을 마비시킬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 그러므로 죽음의 평범성은 죽음의 해체와 손잡고 나타난다. 죽음의 해체는 죽음의 평범화를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죽음의 순전하고 궁극적인 공포와 맞서는 일을 피하려는 희망에서 비롯된 해체 과정이 하나의 저항 불가능한 도전을 다수의 평범하고 근본적으로 해결 가능한 과제들로 바꾼다면,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를 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희망에 따른 평범화 과정은 그런 맞섬 자체를 흔해빠지고 거의 매일처럼 일어나는 일로 바꾸어 버린다. 평범화는 죽음을 일시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본질적으로 삶과는 맞닿을 수 없는 죽음을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 엮어 넣음으로서. 인생을 끊임없는 죽음의 예행연습으로 바꿈으로써, 그리고 그처럼 죽음을 친숙하게 해, 누구나 ‘종말’에 익숙해지고, ‘절대적인 피안’으로서의 죽음이, 완전하고 완벽한 불가사의로서의 죽음의 의미가 희석되기를 꾀함으로써.

 

[77]그러므로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죽음, ‘그대’의 죽음, ‘3인칭’이 아닌 ‘2인칭’의 소멸, 내게 가깝고 내가 아끼는 사람의 상실, 나의 삶과 한데 얽혀 있는 사람의 영원한 부재만이 ‘특별한 철학적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런 죽음은 내게 죽음의 종말성을, 회복 불가능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86]우리는 ‘죽음의 임박함을 인식하고 살아가기’라는 상황에서 활기차게 살기 위한 세 가지 전략을 대략 훑어보았다. 첫 번째는 유한한 삶과 영원 사이에 다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죽음을 모든 끝의 끝으로 보는 대신, 새로운 시작 - 영원한 삶의 - 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전략은 주의를 - 또한 고민을 - 죽음 자체 -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사건인 -에서 돌리고, 대신 죽음의 구체적인 ‘원인’들 - 무력화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 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은유적 예행연습’을 통해 ‘절대적[87]이고’ ‘궁극적이며’ ‘회복 불가능하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종말성, 그 소름끼치는 진실을 희석시키는 것이었다.

 

[89]공적인 이미지에 뿌리내리고 나면, 기표는 그 원래 기의에서 분리되어 유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유동하는 기표는 은유적, 또는 환유적으로 무한히 다양한 기의들과 접속할 수 있다. /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특별한 기표, 즉 ‘죽음’은 이런 식으로 독특하고 기이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이유는 우선 그것은 이중으로 체현된다. 죽음의 임박성은 삶을 원초적 공포로 찌들게 한다. ...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삶의 촉진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삶에 거대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 그리고 동시에 그 삶의 의미를 빼앗아간다. 그 놀라운 잠재력은 질서를 재편성하고 무너뜨리기를 꾀하는 모든 세력들이 노린다. 따라서 그것은 온갖 목적[90]을 위해 활용되고 조작된다.

 

[95]공포와 악은 샴쌍둥이다. 어느 하나와 만난다면 다른 하나와도 만나게 된다. 아니면, 이 둘은 하나의 경험을 두 가지로 부르는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느끼는 것에 이름 붙인 것이다. 하나는 ‘저기 저곳’, 즉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며, 다른 하나는 ‘여기 이곳’, 즉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악이며, 우리가 악하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96]이 때문에 그토록 많은 철학자들이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단지 사실을 천명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것은 바로 ‘원초적 사실’로서, ‘악은 존재한다’이다. ... 이해 가능한 세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악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불거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설명자 - explanans, 설명을 해 주는 것 -를 찾으려는 절망적인 노력 끝에 악이라는 관념에 기대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 대상 - emplanandum, 설명을 필요로 하는 대상 - 의 위치에 두[97]려면 인간 이성은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103]“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자연을 인간과 분리하는 것이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부였다면, 리스본과 아우슈비츠 사이의 거리는 그것을 얼마나 떨어트려 두기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 리스본이 전통적인 변신론이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면, 아우슈비츠는 그 변신론을 대신한 것도 하나같이 절망적임을 확인시켜 주었다.”(니먼, Neiman)

 

[109]인간이 만든 악은 이제 과거의 자연적 악 - 두 악은 선후배-동반자-선대와 후대 관계다 - 만큼이나 예측을 불허한다. ... 인간이 만든 악은 자연재해와 다를 것 없이 움직인다. 근대정신은 자연재해를 정복하겠노라 선언했고, 그렇게 했으며, 지[110]금도 하고, 앞으로도 하리라 하고 있건만.

 

[111]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작용했다. 그런 특권을 안전히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준칙이 적용되거나 제시되어 그들과 다른 류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데 쓰일 경우 - 그런 사람들이 무능하다거나 무가치하다거나 하는 관념을 [112]빌미로, 그 밖에 편리하게 써먹을 수는 있지만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논쟁을 허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를 끌어다 붙이며, - 근대적 이성은 별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지 않다. ... 지금껏 근대적 이성은 보편성보다 특권을 위해 봉사해 왔다. 어떤 보편성에 대한 꿈이 아[113]니라,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 그리고 차지한 우위를 지키려는 목표가 근대적 이성을 발휘케 하는 주된 동기였으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욕망과 목표에 이끌린 것이었다.

 

[114]그러나 더 큰 공포, 진정한 메타 공포meta-horror, 다른 모든 공포를 키워내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공포는, 하나의 깨달음에 있다. 그 깨달음이란 내가 이런 문장을 쓰는 동안이나 독자들이 이런 문장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한결같이 마음 한구석에서 이러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때 우리는 악이 계속 모습을 숨기는 한편 ‘끓어 오르고 팽배해지도록’ 허용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다. 그런 악의 가능성을 반박하고,, 단지 허풍일 뿐이라고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또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증언한 심리학자들의 보고서에서 찾아낸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계속 모른 체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여섯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를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그중 한 사람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뒤의 내 정신 상태보다는 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의 전체적인 정신상태, 아내, 자식, 부모, 형제, 친구들에 대한 태도가 ‘정상일 뿐 아니라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고 밝혔다. 또한 최고법정이 항소심을 마칠 때까지 옥중의 아이히만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목사가 모두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아이히만이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했다.”

 

[119]유동적 근대를 살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갈망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오히려 불안만 양산하고 있지만 말이다. 의심을 거둘 수 없고, 상대가 혹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넓은 친구와 동지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해한다. ... [120]그리고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 하는데, 그것은 결국 리스크를 더욱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의 바구니로는 안심이 안 되기 때문에, 새 바구니가 보일 때마다 달걀을 나눠 담으려 애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파트너쉽보다 ‘네트워크’에 더 많은 희망을 얻는데, 네트워크에서는 ‘나는 당신에게 충실하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고 받을 전화번호가 언제나 몇 개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적인 결핍을 양적으로 보충하려고 한다. ... 그러나 그런 안전 추구책의 성과를 되짚어 보면 좌절된 희망과 꺽여버린 기대가 즐비하게 떨어져 있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길에 보이기로는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인간관계다.

 

[130]‘근대성’이란 오로지 계속적이고, 전면적이며, 강압적인 근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끝없이 새롭고 끝없이 연장되는 우회로 - 종종 지름길로 위장된다 -를 뚫는 일을 줄여 말한 것이다.

 

[132]모두가 카트리나가 오고 있음을 알았고, 대피소로 피하기에 충분한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었고, 달아날 수 있었을 시간을 활용할 수도 없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잡아탈 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온 가족이 트럭에 올라 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갈 수 있었[133]을까? 모텔도 숙박료가 필요하고, 그런 돈을 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잘 사는 사람들은 더 쉽게 집을 버리고, 재물을 포기하고, 살아남기 위해 도망칠 수 있었다. 그들의 재산은 보험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카트리나는 그들의 생명은 위협했어도 재산은 위협할 수 없었다. 반면 비행기 표 값이나 숙박료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재산은, 비록 얼마 안 되는 재산이었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아무도 그 손실을 보상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손실은 영영 회복 못할 손실이었고, 그중에는 그들이 평생 한 푼 두 푼 모은 예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 카트리나는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자연재해는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136]자연의 맹목적인 변덕스러움에 맞서 인간을 보호한다는 것이 근대 문명이 내놓은 핵심 공약이었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를 근대에 실천할 때 자연을 덜 맹목적이고 덜 변덕스럽게 하는 일은 핵심이 아니었다. 대신 그 효과를 선택적으로 배분하는 일이 핵심이었다. 자연재해의 파괴력을 무력화해보려는 근대의 노력은 법질서 유지와 [137]경제발전의 패턴으로 이어졌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는 사람들을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unwertes Leben으로 나누었다. 그 결과, 공포 또한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어떤 이유의 공포라도 말이다.

 

[147]관료제의 이념형에 접근하려는 조직의 행동은 그 구성원들에게 아직 남아 있는 도덕적 양심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 관료제는 그 과제의 집행자들에게서 집행 결과와 반향에 관한 책임을 면제하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그것은 ‘…을 위한 책임’을 효과적으로 ‘…에 대한 책임’으로 바꿔버린다. 말하자면, 어떤 행동이 그 대상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을 상급자, 명령권자에 대한 책임으로 바꿔버린다. ... 따라서 모든 관료들은 아닐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명령의 기원을 모호하게, ‘저기 위에서’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를 낸다. 첫째 - 한나 아렌트의 멋진 문구를 떠올려 보자 -, 책임의 ‘부동’(浮動)이다. 책임의 소재를 정확히 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며 단지 실제적인 목적에서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는 결론으로 몰리게 된다. 둘째, 이들 관료들이 따라야 할 명령은 절대적이고 저항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신의 명령’에 비해 결코 덜 강력하지 않다.

 

[150]소비 시장을 통해서는, 이른바 ‘기술 페티시즘’이 도덕 관련 결정을 적당한 상품의 선택으로 번역해버린다. 모든 도덕 관련 충동이 상품처럼 출하될 수 있다는 듯. 모든 윤리적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는 듯. 아니면 최소한 저 생명과학, 생명공학, 의약학 산업의 힘을 빌려 단순화되고 간소화될 수 있다는 듯. ‘윤리를 잠재우기’는 고요한 양심과 도덕적 눈멃이라는 상품들과 한데 묶여 패키지로 판매된다. / 도덕적 조건의 모호성과 도덕적 선택의 이중성에 임해 공포는 진정되지않는다. 반대로 정면대결을 피하고 기술적 과정에 집중한 결과 - 그런 과정은 도덕 행위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과정이며, 통제는커녕 개입조차 할 수 없는 과정이다 - 확대되고 만다. ‘윤리의 수면제’를 손에 넣는 값은 윤리 문제에 대한 통제권을 ‘거대한 미지’의 영역엘 넘기는 것이다. 미지의 영역에서는 인간의 예측능력과 반격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재난이 만들어지고 있다.

 

[152]한편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이따금 도덕적 고려와 충동에 따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당장 무엇을 쓸 수 있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 우리 행동의 기동자(機動者, spiritus movens)로서, 원인(cause) 대신 의도(intention)가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 50년 전, 인간을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보는 근대적 관점에 근거한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열렬히 추종했던 슈츠(Alfred Schütz)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알려진 “... 때문에(because) 행동한다”는 도식을 자기기만이라고 파악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목적 추구적인 인간은 “... 하기 위해(in order to) 행동한다”라고 고쳐야만 정확할 것이라고 [153]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정반대의 명령이 통용된다. 목적이란 윤리적 의미가 있는 목적이란, 갈수록 우리의 행동을 소급해 추인(ex post facto)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165]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행동의 효과가 너무 빠르게 확산되면서 정규화된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버리고,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버린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취약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계산 불가능한 확률로 일어나는 위험이다. 그것은 ‘리스크’ 개념이 보통 지시하는 현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원칙적으로 계산 불가능한 위험은 원칙적으로 불규칙한 조건에서 발생한다.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사건의 반복성이 낮으며, 어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이 법칙이 되는 세상에서 그것은 불확실성의 다른 이름이다.

 

[166]우리의 객관적 책임의 범위와 실제 책임을 수용, 가정, 실천하는 범위 사이의 간격은 지금 줄기는커녕 늘어나는 추세다. 후자가 전자의 범위를 포괄할 수 없는 주된 이유는, 뒤피의 말처럼, 종래는 규범적 책임 이론이 ‘의도’와 ‘동기’에 크게 의존함으로써 자기 규제적 의미가 컸는데, 그런 관점은 오늘날의 전 지구적인 상호[167]의존성 환경에서는 문제에 대처하기 부절절한 데가 있다. ... 고의적인 개인행동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부유한 나라의 이기적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웰빙에만 전념하며 다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갈수록 줄어들고, 갈수록 변명이 안 된다.

 

[168]유동적 근대의 모자이크 - 만화경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우리의 행동 수단과 자원이 성장할수록, 그리하여 더 먼 시, 공간까지 뻗어나갈 수 있게 될수록, 우리의 공포도 성장한다. 그런 수단과 자원이 우리가 보는 악을, 또한 아직 볼 수 없지만 결국 나타나고야 말 악을 대처하는 데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술 수준을 갖춘 세대는 불안과 무력감에 최고로 시달리는 세대이기도 하다. ... 우리는 [169]“분명 유례없이 안전한 세상에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객관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례없이 위협을, 불안을, 공포를 느끼며 살고, 패닉에 빠지기 쉬우며, 안보와 관련된 것이면 뭐든지 민감하게 반응한다.

 

[171]그들은 잘라버릴 지휘선이랄 게 없었다. 제거한다면 하급자들이 혼란과 무력감에 빠질 고위층도 없었다. / 마크 데너의 의견으로는, “알카에다는 이제 알카에다주의가 되었다.”

 

[177]오늘날 테러리즘의 성격을 볼 때, 무엇보다도 그것이 ‘부정적 세계화’의 환경에서 진행됨을 볼 때,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개념부터가 자체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영토를 침공하고 점령하던 시대에 고안되고 개발된 현대 무기 체계는 영토를 초월하고, 근본적으로 종잡을 수 없으며, 기동력이 탁월한 표적을 포착, 타격, 파괴하는 일에는 도무지 부적합하다. 그런 표적은 소수의 분대이든지 심지어 단 한 사람으로, 숨기기 쉬운 무기로 가볍게 무장하고 다닌다. 그들은 다른 테러 행위를 하러 이동하는 중에 포착하기가 극히 어렵고, 목표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사라져 버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단서도 거의 남기지 않는다.

 

[181]폭력대응은 테러가 꽃피는 토양에 거름을 줄 따름이며, 사회, 정치적 이슈의 근본적 해결책 시행을 방해하는 역할만 한다. 테러리즘이 쇠퇴하고 소멸되려면 그 사회, 정치적 뿌리가 근절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련의 보복성 군사작전보다, 심지어 일련의 전면적인 경찰 행동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 테러와의 현실적인 전쟁은 이미 반쯤 파괴된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의 도시와 마을들을 더욱 철저히 파괴하는 식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가난한 나라들의 빚을 탕감하고, 부유한 나라의 시장을 가난한 나라의 주요 상품에 개방하고, 지금 취학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 1억 1천 5백만 명의 아동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후원하는 일, 그리고 이와 비슷한 행동들을 고안하고, 결의하고, 실행하는 일이 진정한 테러와의 전쟁 전법이다.

 

[202]악순환이다. 테러리즘이 위협은 또 다른 테러리즘을 부르고, 점[203]점 더 큰 테러로 몸집을 불려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테러리즘은 그 자체의 의도된 충격으로, 그러한 행동의 계획과 모의에 대한 염려로 그런 효과를 산출한다. 테러에 떠는 사람들이야말로 테러리스트들의 가장 믿을만한 동맹자라고 - 비록 자의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 부를 만하다.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 안전에 대한 욕망’은 언제고 누군가에게 교활하고 기민하게 악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이제 산발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해 보이는 테러 행위 때문에 한껏 부추겨지고 있으니, 결국에는 그 욕망이야말로 테러가 추진력을 얻는 기본 자신임이 밝혀질 것이다.

 

[205]국민국가라는 기계, 영토 주권을 지키도록, 또 내부자와 외부자를 뚜렷이 구분하도록 발명되고 훈련된 기계는 지구의 ‘인터넷 지구촌화’라는 예상 못한 상황에 부딪쳤다. 날이 갈수록, 테러 행위가 거듭될수록, 국가에서 운영하는 법질서 관련 기구들은 새로운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정통의, 존중되던 그리[206]고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이고 믿을 만해 보였던 여러 범주와 특질들이 무색해지고 있다.

 

[208]부정적 세계화의 힘 앞에 강제로 열린 사회에서 새어 나오는 권력과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멀리,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21세기에 우리가 마주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문제점은 바로 권력과 정치가 다시 만나도록 해야 한다는, 실로 거대한 도전이다. 이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이번 세기의 최대 과제 중 하나가 되리라. 그리고 그것을 성공한다면 그만큼 대단한 위업도 없으리라. / 국민국가라는 집 안에서 헤어졌던 파트너를 재결합시키는 것은 그런 도전에 대한 가능한 대응책 중 가장 가망이 없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세계화된 세계에서, 모든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 다른 모든 문제의 접근 기회와 방식을 제어하는, ‘메타 문제들’ - 은 세계적이며, 세계적인 문제인 이상 지역적인 해결책은 부정된다. /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전 지구적으로 강화된 문제에는 지역[209]적 해결책이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권력과 정치의 재결합이 이루어지려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야 가능하리라.

 

[216]사람들 사이의 악의와 적대에 대해서는 불안 해소의 약속이 단지 완전히 지켜지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약속 달성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니 심지어 전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었다고 의견이 일치한다. ... 이런 식의 드라마에는 반드시 악당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 악당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보았듯, 잔인하거나 이기적이면서 우리에게 냉정하고 우리를 싫어하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다른 인간들, 전문가의 견해에서든 일반인의 믿음에서든, 자연의 장난이나 신체상의 특이한 이상 등까지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다른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진다.

 

[218]“위험에 대한 공포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공포가 얼마나 커지느냐, 무엇으로 변하느냐가 중요하다.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벽 뒤에 숨고, 경호원을 고용하고, 방탄차량을 몰고 다닐 때, 가스총과 권총을 휴대하고 권법 수련을 하게 될 때 변화한다. … 문제는 이런 행동들이 뭔가 질서가 무너져 있다는 의식을 강화하며, 따라서 그런 행동을 계속 양산한다는 데 있다”(David Althe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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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그거 돈이나 돼?

  • 등록일
    2009/08/03 13:22
  • 수정일
    2009/08/03 13:22

인권계의 듣보잡(현병철)이 위원장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ICC의장직을 돼지오줌통인양 차버리고 있다. 그런데 사실 답답해 할 사람들은 우리 밖에 없을 것 같다. 명박이와 그 졸개들이 무슨 인권씩이나 고민했겠는가 말이다. 인권 그거 돈이나 되나?-이러고 있을 거라고 내가 장담한다.


오히려 이렇게 된 걸 저 물질들은 더 반길 것이다.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국가주의 아래에 포획해 놓고, 이리저리 희롱하면서 자기 입맛대로 포지션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권위의 권위를 이렇게 더럽히는 저 변태 새끼들이 더 좆같은 이유는 그 권위라는 것이 그간의 형식적 민주주의 구축 과정에서  다중의 정치참여를 통해 천신만고 끝에 겨우 제대로 되어 가고 있던 싹이었다는 데 있다. 어린아이 같은 이 땅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것, 이게 저 개새끼들이 더 좆같은 이유다.


그리고 국가기구화되고 일정한 권력(권위와는 다르다)을 가지고 있는 인권위를 날로 처먹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그 권력이라는 것도 다중들의 각종 정치를 통해 겨우 이루어 놓은 것인데 말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고생고생 키워 놓은 기초권력들을 저 물질들이 재전유하는 반동적 과정이 앞으로 우리 눈 앞에서 더 많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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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그거 이겨 뭐하게?

  • 등록일
    2009/07/26 16:57
  • 수정일
    2009/07/26 16:57

최시중이 말하길, 미디어법에 대한 헌재의 판단과는 상관 없이 사업을 추진하겠다, 시장점유율을 측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 란다.

 

사람들은 이제 인내심을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냉소할 힘조차 없다. 촛불을 들고 나서는 것도 힘겨워한다. 단숨에 저들의 권력을 뒤집어 보고 싶다는 생각, 은 마음 한 자락 어딘가에서만, 소용돌이칠 뿐이다.

 

이쯤해서 한국사회 수구기득권세력의 심중을 헤아려볼 만하다. 이들이 저렇게 일을 급하게 처리하는 걸 보고 있자면, '선거'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다음 선거에서 지더라도 다시 집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대로 지금 자신들이 틀을 짜 놓은 수구적 틀거리 내에서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미디어법, 금산분리법, 사이버모욕죄, 방송법 등을 개정해 놓으면 야당이 집권하고서도 이 달콤한 권력의 양분들에 길들여질 것이라는 예상 말이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다음 대권까지 차지하는 것이 목표지만 이차적으로 전사회적 틀 자체를 수구기득권의 '호구'로 전락시켜 놓는 것이 먼 전망을 봤을 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저들을 알고 있다. 베를루스코니를 저들도 잘 알 것이고, 루퍼트 머독이 지켜주는 미국의 보수 애국주의 세력을 저들은 너무도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김대중과 노무현 시절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 한다고 뼈속 깊이 깨닫고 있으며 노무현 서거 국면을 통과하면서 (다중들은 민주주의를 생각했겠지만) 그 생각이 더 절실했을 것이다.

 

저들의 짱돌 안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한국사회의 (형식) 민주적 구조(인적, 제도적, 절차적 구조)를 수구기득권 구조로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다. 이게 더 장기적이고 그래서 그렇게 서두는 것이며, 선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물론 선거에 이미 그 구조가 작동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상존한다. 이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는 온건수구세력들이 이들 안에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다)

 

그럼 우리 쪽은?  저들이 저렇게 수를 세고 있다면, 분명 진보주의자들이 선거에서 비판적 지지와 후보 통합 전술을 구사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것도 말이다. 저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 이번엔 이기겠지. 그럼 다음은? 박근혜가 되면 금상첨화고, 민주당에서 되더라도 문제 없어. 이미 모든 권력(경제와 정보와 제도에서)은 우리가 쥐고 있으니 말이야. 대통령? 그런 건 너희나 해 먹으라고, 우린 더 우월한 권력을 가질 테니 말이야"

 

이 순간 두 마디의 말이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권력이 이기나  신문이 이기나 한 번 해 보자고!"(어느 언론사주가 김영삼에게 했다는 말)

"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 갔습니다"(고 노무현)

 

그래서 난 지금쯤 모든 걸 작파하고,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선거에 희망을 가지는 축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선거? 그거 이겨서 뭐하려고? 막 내리고 징 칠라고? 두 눈 뜨고 지금 나라 꼬라지를 봐! 젠장, 지금 당장 엎어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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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논쟁 그리고 [Il DIvo](2008)

  • 등록일
    2009/07/26 15:54
  • 수정일
    2009/07/26 15:54

금요일 새벽, 광주에 왔다. 비가 추적추적 왔었는데, 지금은 제법 날씨가 훤하다. 지금 여기는 전남대 예대 뒤 카페 [케냐]. 집에서(물론 그녀 집이다. 이제는 그냥 '집'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일 디보](Il Divo, 파올로 소렌티노, 2008)를 마저 보고 나왔다. (어제 밤은 너무 피곤해 눈을 금뻑거리며 중간 정도 보다가 잠이 들었었다). 정치 누와르 영화, 뭐 그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걸로는 부족하다. 이건 작품이 꽤나 수승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장르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복합성(compication)이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그리고 (몰랐는데) 최근, 조정환 선생의 [미네르바의 촛불](2009)을 두고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율평론] 사이트에 잘 들어 가 보지 못했는데, 오늘 들어가보니 인터페이스 가득 논쟁글들이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아주 잘 정리된 채로 말이다. (맛난 음식 앞에서 침을 삼키듯, 꿀꺽, 했다는 ...) 어제 영화를 보기 전에 그 글들을 프린트해서 읽었는데,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금도 그 프린트 뭉치를 옆에 놓고 있다.다 읽어 봐야 되겠지만, 잠깐 인상비평 하자면, 둘 다 상대를 잘못 고른듯 하다는 것(한 사람은 너무 성마르고 또 한 사람은 너무 능하다) , 정도가 문득 떠오른다. 촛불에 대한 내 생각을 음미(examine)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긴 한데, 내가 이 논쟁에 끼었다면, 아마 상당부분 조정환 선생 편에 기울었을 것이라고 고백해야 하겠다. 이택광 선생의 '촛불중간계급론'은 논의구조가 너무 단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장의 흐름을 개념화하기에는 '계급'과 '중간'이라는 말의 전통적 함의가 너무 강하다. 게다가 이택광 선생은 이 개념에 어떤 '실체성'마저 부여하고 있다. 이래서는 이 개념의 함축에 대한 증거와 논변을 가져다 대기 위해 정력을 낭비해야 하고(라캉, 랑시에르), 그렇게 되면 결국 이 논변은 권위에 기댄 논변이 되거나, 관전하는 측에서 보기에는 '변명'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이택광 선생 자신도 인정했다시피, 조정환 선생의 내공이 그러한 '권위'에 고개를 끄덕일만 하지도 않아 보이고 말이다. 

뭐, 하여간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조정환 선생 쪽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것. 

 

이런 저런 일상을 쓰려고 했는데, 또 책 얘기나 하고 말았다. 끙 ~ 이놈에 먹물근성이라니...

 

카페 창문 너머 다세대 주택 지붕으로 잠자리들이 설렁설렁 날아 다닌다. 사람들이 카페 안에서 수런거린다. 설렁설렁, 수런수런 ... 평화롭다. 조금 있으면 그녀가 올 것이고, 난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다. 내가 앉았던 자리엔 다른 사람이 와 앉을 것이고, 그렇게 관계는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모든 우연이 모여 운명이 되는 것처럼, 이 모든 평화로움이 내겐 기도의 순간처럼 오롯하다. 감사한다. 그 모든 관계들에게 말이다.  

 

그러고 보니 [Il Divo]에서 이탈리아 수상 안드레아티에게 어느 지식인이 했던 질문이 생각난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그것은 신의 뜻이라고 봅니까?" 영화에서의 맥락과는 좀 다르지만, 내게 그렇게 물었다면, 그건 운명(fati)이야, 라고 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벤냐민의 '신학' 속의 그 신은 중간계급이 아니라 촛불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신의 정체는 니체의 신, 즉 디오니소스 또는 거대한 주사위, 하나의 삶(Une Vie)인 것이고? 아, 갑자기 머리가 깨질것 같다. 큼... 옴마니반메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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