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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구러 산다, 이게 행복하다.

  • 등록일
    2009/03/26 00:13
  • 수정일
    2009/03/26 00:13

그런 날들이 있었다. 완전히 교만해서는, 주위에 뭐도 안 보이던 시절 말이다. 그 절정이 17살 때였다. 그때 고등학교를 그만 두었고, 나오면서 교지에 글 나부랭이를 날렸는데, 독일어 선생님이 받아서 실어 주셨다. 그 내용이란 게 지금도 생각난다. 니체를 인용하면서, 이 교육이 얼마나 X같은지를 나름 설파(?)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퇴했다. 검정고시로 일찍 졸업했고, 두류시립도서관 문학실과 인문학실을 전전하며, 황금같은 10대의 마지막을 보냈다.

 

지금도 난 생각한다. 그때 그 시절, 정말 책을 무진장 읽던 시절. 하루에 두 세권, 줄창 읽었다. 그러다 코피도 흘리고. 그때 내 친구들은 수학정석과 성문영어를 보며 코피를 흘렸을 게다. 난 그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다가 코피를 흘렸다. ... 그 코피 자국 남은 책이 아직 서가에 있다. 그걸 펼쳐 들 때마다, 웬 걸, 섬득하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게 다 열병 같은 거다. 나, 지금은 한 가지 바램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손도손 사는거, 철학은 잠시 버려두고, 나 쓰고 싶은 글 쓰고, 나 읽고 싶은 글 읽고, 그 사람 쓰고 싶은 글 쓰고, 그 글을 내가 보고 ... 햇살이 가득한 거실에서 ... 방 하나에 거실이 훤히 넓은 곳에서 ... 살고 싶은 거다. 철학자? 난 뭐, 그런거 모른다. 그게 뭐 대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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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그러나

  • 등록일
    2009/03/23 22:59
  • 수정일
    2009/03/23 22:59

[지옥의 묵시록]을 안 봤으면, 이 책이 이만큼의 리얼리티라도 주었을라나 모르겠다. 하여간 고전이다. 게다가 난 기껏 번역서를 훓었을 뿐이니 ... 함구.

 

 

 

 

 


 


조셉 콘래드 지음,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민음사, 2008.

 

[7]쌍돛대 유람선 <넬리>호의 돛은 펄럭이지 않았고 배는 닻을 내린 채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멎었다.

 

[16]이 불미로운 행위를 대속(代贖)해 주는 것은 이념밖에 없어요. 그 행위 이면에 숨은 이념이지. 감상적인 구실이 아니라 이념이라야 해. 그리고 이 이념에 대한 사심 없는 믿음이 있어야지. 이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무엇이거든 ... [말로]

 

[61]거짓말 속에는 죽음의 색깔이 감돌고 도 인간 필멸의 냄새도 풍기는 게 아닌가. 바로 거짓말의 이런 속성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증오하고 혐오하는 바이며 내가 잊어버리고 싶은 바이기도 하다네.

 

[105]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고 팔다리를 움직이거나 근육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죽어버렸지. 오직 마지막 순간에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은 어떤 신호에 응답하듯이 그리고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은 어떤 속삭임에 응답하듯이 몹시 상을 찌뿌리기만 했어. 그 찌뿌림은 죽음에 임하고 있는 그의 검은 얼굴에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둡고 위압적이며 위협적인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지. 그 캐묻는 듯하던 눈초리 속의 빛은 순식간에 멍한 유리빛으로 퇴색하고 말았어.

 

[109]그네들, 여인들 말이네, 그들은 내 이야기와 관련이 없고 또 마땅히 관련이 없어야 하네. 우리는 여인들이 작기네 자신의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머물러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그래야만 우리의 세계가 좀더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129]숲은 하나의 가면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닫혀 있는 감옥의 문처럼 무겁기만 했으며, 무언가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거나 무언가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거나 또 [130]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는 침묵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어.

 

[146]그건 어떤 뚜렷한 육체적 위험과도 관련 없는 순수히 추상적인 공포였어. 그 공포의 감정을 그토록 압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글쎄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받은 도덕적 충격 때문이었어. 마치 전적으로 괴물 같은 무엇이 생각을 괴롭히고 영혼을 짓누르며 별안간 내게 들이닥치고 있는 듯했어.

 

[176]내가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앞바다는 강둑 같은 시커먼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곳까지 나 있는 그 고요한 물길은 찌뿌린 하늘 아래서 음침하게 흐르면서 어떤 엄청난 암흑의 핵심 속으로 통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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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안의 문성근, 영화 [실종]

  • 등록일
    2009/03/23 20:25
  • 수정일
    2009/03/23 20:25

 

 

 

영화평을 제대로 써 보려고 한 20분 궁싯댔는데, 글이 몽땅 날아가 버렸다. 젠장.

 

하여간 문성근이 오랜 일탈 이후, 스크린에 복귀한 것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인다. 감각 있는 감독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던 것 같다.

 

역시 이 영화의 압권은 현아(전세홍 분)의 생니를 무시무시한 뻰치로 몽창몽창 뽑는 장면인데, 사실 난 이 장면부터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정말, 스릴러의 문법을 철저히 지킨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분쇄기 장면이다. 현아를 산 채로 갈아 버린다. 히유 ~ 정말 지금도 끔찍해서 소름이 돋는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분쇄기 앞에서 판곤(문성근 분)이 하는 말이다.  "이거 통 채로 갈기는 처음인데 ,,, 기계가 괜찮을라나 ..."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영, 아니올시다, 이다. 이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이 보길도 대학생 살해 사건이란 건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굳이 실화에 기반했다는 것을 밝힐 필요가 있었는가? 멀뚱멀뚱 여대생 둘을 보던 그 어부 아저씨 연기도 영 꽝, 이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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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괴물의 탄생

  • 등록일
    2009/03/21 14:49
  • 수정일
    2009/03/21 14:49

*[대자보]에 실린 redbrigade의 글이다.

 

공무원, 괴물의 탄생

 

필자가 아주 흥미롭게 본 영화가 있는데, [언더월드](렌 와이즈만, 2003)가 그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지하세계에 사는 두 종족이 나온다. 각각 뱀파이어와 라이칸이라고 불리우는 이들 종족은 적대관계에 있긴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만큼 일치한다. 그건 인간들을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감독의 눈에는 짐승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상, 그게 '언더월드'인 셈이다. 짐승이니 영혼이 있을리 없다. 그러고 보니 이 정권이 국민들에게 보여준 그 모든 주옥같은 쇼들 중 하나가 떠 오른다.

 

인수위 시절 이명박 정권은 국정홍보처를 정리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듯 했다. 이에 맞서 전 국정홍보처장은 처절한 발언을 했는데, 그게 바로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거다. ‘천민 자본주의’와 더불어 막스 베버 선생의 유명한 개념 중 하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기 위해 영혼 또는 정신, 즉 누우스(nous)를 기준으로 삼았다.

 

하여간 전 처장은 홍보처의 존폐를 막기 위해 애를 쓴 게다. 그 와중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으니, 진짜 영혼을 판 셈이다. ‘불행한 의식’(Hegel), 철학자였던 그 분은 이 개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정말 코메디는 그 이후다. 국정홍보처는 문체부 산하로 개편되었고, 날이 갈수록 그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심지어 인터넷 토론 사이트인 ‘아고라’를 감독(?)하려고 시도한다. 홍보를 하겠다는 건지 차력을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건이 줄줄이 터진다. 촛불이 청와대 앞마당까지 일렁이더니, 용산에서는 ‘잘 한다, 잘 한다’ 했던 모범생 하나가 전교학생회장 취임을 앞두고 사고를 쳤다. 그러더니 질질 짠다.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웬 불이 화왕산까지 번졌다. 휴전 중인 앞 마을 녀석들도 방해다. 미사일을 쏜다, 그런다. 양키들도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알아서 하란다. 진퇴양난이다. 결정적으로 온 나라에 돈이 씨가 말랐다. 대신 있는 놈들은 더 많이 번다. 없는 사람들한테 베풀라고 세금 털어 주었더니, 제 불알 밑에 우겨 넣고는 꺼낼 생각을 안 한다. 왜 돈을 노동하는 이들에게 안 쓰냐고 으르면 오히려 줘 놓고 웬 생색이냐, 이미 우리 돈이다, 란다. 무능의 극치다.

 

이래서 공무원들이 더 영혼을 빼 놓을 수밖에 없다. 정신줄을 놓은 게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것은 아닌 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꿰차고 있으니 연봉에 걸맞는 짓을 해야 하는데, 서슬 퍼런 마왕은 회의에서조차 자기 말하기만 바쁘다고 한다. 그러니 비위 맞추다 시간 다 간다. 직언은 엄두도 못 낸다.

 

언제는 미국산 소를 국민들에게 먹이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말했던 물질이, 이제는 “먹어 봤어, 안 먹어 봤으면 말을 말어!”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런 웃기는 행실을 고발한 티비 프로그램을 고소했다. 서커스가 아닐 수 없다. 경찰이 어디 천한 용역 따위와 어울려 공권력을 함께 집행하느냐고 했다가, 이후에 증거가 나오자 망신을 당하고, ‘메일’이라고 말했다가, 그건 ‘편지’의 영어 표현이라고 하고, 포복절도하게도 그게 ‘영어실력’ 나부랭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이건 패닉 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혼 없는 공무원’은 현재진형형이다. 나는 이들의 지겨운 코메디를 더 이상 웃으면서 볼만한 느긋함도 없고,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너무 어이가 없을 뿐이다. 그러니 이들이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얄궂은 말을 했든 멀뚱멀뚱할 뿐이다. 믿을 만 하지도 않고, 또 믿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저들이 그렇게 약속했던) 돈도 안 되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저 말 듣고 돈이라도 나왔다면, 아, 그랬다면. 최근 대박을 치고 있는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가사를 인용하자면, 선지자가 가리키는 대로 "물을 찾아 죽을둥 살둥 왔지만, 아무 것도 없잖아"다. 선지자인지 사기꾼인지 그래도 주식 투자하란다. 멀뚱멀뚱할 뿐이다.

 

이렇게 4년을 견뎌야 하는가? 멀뚱멀뚱한 채로? 그래서 되겠는가?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일곱 명이나 죽었는데도 그것을 '자폭 테러'라고 규정하는 이 공무원들. 물론 이들이 전체 공무원들 중의 소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소수가 다수의 '영혼 있는 공무원'들을 억압하고 지도하려고 한다면 사태가 심각한 것이다. 소위 고위 공무원들이 더 이상 누우스를 자기 규정체로 삼지 않는다는 건 곧 짐승들이 인간을 상대로 명령을 내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2009년 봄, 언더월드 코리아에서는 인면수심의 짐승들이 활개친다. 이건, 뭐, 동물원인지 나라인지 구분이 안 된다.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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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도래

  • 등록일
    2009/03/21 14:43
  • 수정일
    2009/03/21 14:43

 

*[프레시안]에 실린 redbrigade의 글이다.

 

유령의 도래

-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자본주의의 종말>, 동녘 2008.

 

맑스의 유령

1848년이다. 맑스의 ‘유령’이 전유럽을 배회하던 때가 말이다. 그 유령은 장대한 문체로 『공산당 선언』의 맨 앞 구절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는데, 바로 ‘공산주의’라고 불려졌다. 당시에는 “교향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들이 이 유령을 퇴치하고자 ‘신성동맹’을 맺었다고 한다.

 

2009년이다. 맑스의 유령은 어디 있을까? 그 당시, 유령은 저들의 총칼에 대항하는 무기가 비록 맨주먹과 창과 낫이었을지라도 대륙을 뒤흔드는 소요와 혁명의 함성을 만들어냈다. 이제, 그런 대륙을 흔드는 함성이 없다. 그렇다고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다. 숨어 있는 위력이야말로 더 섬뜩한 법이다. 잠재적인 혁명이 더 불안한 법이다. 왜냐하면 지배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잠재성은 마치 영원한 형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케인즈(J. M. Keynes)가 그의 저서에서 ‘노동’을 무시무시한 변수로 취급한 이래로 지배자들의 입장에서 그것은 영원한 형벌의 다른 이름이다. 하기야 노동의 입장에서 형벌이란 오히려 지속되는 축제, 항상 도래하는 축제일뿐이지만 말이다. 여기서 가장 살벌한 테제 하나가 제출될 수 있다. 유령의 도래는 곧 자본의 종말이라는 것, 도래와 종말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 그것이 끔찍하거나, 즐겁거나, 소란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속으로 들끓으며 비등점을 향해 가기 때문이라는 것, 잠재성이 곧 현실적이라는 것 말이다.

 

어리석은 지배계급은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사실 지배계급이 자본에 대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자본이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을 때조차, 이 무식한 지배계급은 상황판단이 전혀 서지 않는다. 다만 두려워할 뿐이고, 대책이 없고, 땅만 판다. 거기 겁에 질린 타조처럼 머리를 묻으려고? 대중들의 봉기에 잔뜩 겁을 집어 먹은 채로, 한 쪽으로는 눈치를 살피고, 다른 쪽으로는 경찰들을 집결시킨다. 하던 짓이 그 짓이기 때문에 ‘몽둥이와 삽질’ 외에 다른 게 생각나지 않는다. 야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야비함은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유령의 도래, 그 외적 조건

그래서 ‘자본주의의 종말’은 ‘유령의 도래’다. 엘마 알트파터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야만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야만은 미래의 주축이 될 것인데, 이 야만이란 ‘분명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야만’이라는 것은 오래된 진실이다. 자본의 초기 축적은 온간 탈취와 토지에 대한 강제 귀속, 유랑민들에 대한 학살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초기조건은 항상 반복된다. 지금도 그렇다. 멕시코 싸빠띠스따 원주민 부대에서부터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선 곳, 이곳 용산에 이르기까지 종말을 유예하기 위한 강박적인 반복이 있고 거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이러한 지옥도가 펼쳐져 왔다는 것을 한번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종말’이란 얼마나 당위에 가까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정글의 법칙이며, 따라서 짐승의 조건일 뿐이다.

 

그렇다면 종말 너머의 유령은 어떤 조건 하에서 도래할 것인가? 알트파터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을 인용함으로써 유령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브로델이 말하는 바는 매우 명백하다. 순진한 낙관론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자체모순’에 의해 붕괴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뒤에 또 밝히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외인(外因)’이 단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의식화인 것만은 아니다. 대안이라는 것이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가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서글프게도 이 방면에서 만큼은 레닌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다면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대안들과 외부 원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알트파터는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내부모순 외에 외적 요인들로 에너지 고갈과 그로 인한 환경파괴를 든다. 자본주의란 유럽합리주의와 함께 화석연료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그 본래의 철학적 의미를 폐절하고 효율과 이윤획득 가능성이라는 논리로 정제되기 위해서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낳은 결과는 명백하다. 합리주의, 다시 말해 이성중심주의란 인간 내부의 모순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해야 하며 그를 통해 질서 잡힌 사유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타락한 합리주의는 이러한 사유체계를 통해 모순을 피지배자의 자율적-내면적 훈육체계로, 생체적 메커니즘으로 바꾸어놓는다. 그것은 질서 속에 안주하며, 그것을 강박적으로 강요한다. 질서를 넘어서는 모든 혁명과 소요는 이제 단죄되어야 하는 ‘괴물’이 되었다. 이제 이성은 경제적 효율성에 봉사하고, ‘성장’이라는 최고 목표를 향해 가는 것만을 허용할 뿐이다. 마침내 차가운 이성이 탄생한다. 사실 이 차가운 이성이야말로 ‘괴물’에 다름 아니다.

 

화석연료란 이 괴물의 거의 유일한 먹잇감이다. 맹렬한 식욕 때문에 생태계와 환경이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이는 결국 괴물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된다. 자신의 무덤을 파는 건 비단 자본만이 아니다. 알트파터는, 만약 여기에 대안이 있다면 ‘재생가능에너지’가 되리라고 말한다. 즉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란 ‘재생가능한 에너지 체제’, 이 에너지 체제에 적합한 ‘사회형태’ 그리고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의 삼위일체가 갖춰질 때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화석에너지’, ‘합리주의’라는 타락한 삼위일체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유령의 도래, 그 내적 조건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들이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 내적 요인은 무엇인가? 알트파터는 이를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라고 정리한다. 사회적 가치가 더 이상 시장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가 차가운 이성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이 ‘성장’이라는 목표에 정향되었을 때 모든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의식은 괴물의 먹잇감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식의 경제를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알트파터는 이 이념이 이미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긴 2008년에 이르러 월가가 나자빠지고, 은행들이 파산하면서 이 낡은 이념이 임종을 고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소위 ‘순수한 시장논리’라는 것은 개나 줘야할 처지가 되었다. 알트파터는 그러한 논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본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속 빈 논리를 학자들이 대중들에게 유포한다는 것이다. 알트파터가 말하는 ‘학자들’ 속에는 분명 밀턴 프리드만을 비롯한 시카고학파 이데올로그들이 속해 있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시장, 또는 자본은 반드시 ‘자폐증적’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는 글로벌화된 자폐증이다. 사회적 가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 자본은 금융자본이 되면서 그 자폐적 특성이 극대화된다. 눈에 보이는 게 돈밖에 없는 노름꾼처럼 매 순간순간의 배팅에서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배팅의 순간순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노름꾼 자신의 욕망에서 기인한다. 도대체가 그 욕망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욕망에 따라가기 위해서는 배팅의 액수를 높여야 하는데, 깔린 판돈이 이 욕망에 따라 가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제 합리적인 이성이 계산을 포기한 지점에 폭력과 탈취, 다시 말해 초기축적의 반복이 다시 생겨나는 것이다. 포드주의의 종말이란 다른 게 아니다. 네그리라면 이를 ‘가치론의 붕괴’라고 말했을 것인데, 알트파터는 이를 친절하게 풀이해 준다. 즉 실물자본이 추동하는 잉여가치 창출이 금융자본의 수익률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지점, 실물자본의 불행한 회계사가 손익분기점 위로 치솟는 이자율을 공포에 질린 채로 바라보아야 하는 그 지점에서 합리적 경제 정책은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에 국가폭력과 탈취가 횡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강대국, 특히 미국과 같은 나라의 군사력은 정치나 지역 방위 체제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경제논리(최대 이윤 달성)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기서 과연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이 부시의 같잖은 종교적 신념이나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보다 더 추잡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인지 물어 볼 수 있다. 거기에 오바마는 다를 것인가? 사실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짐승의 논리인 신자유주의가 인간 오바마의 의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정이 이런데, 7%씩이나 경제성장을 이루겠다고 사기를 쳐 대고 대통령이 된 자와 이 경제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애초에 그 사기라는 것이 현실이 되기엔 요원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그 대통령은 아예 신자유주의 짐승과 하나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짐승과 인간이 다른 점을 말하자면, 인간은 동족의 죽음에 애도를 표할 수 있는 입과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양심이 있고 짐승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와 유리된 자본, 윤리적 양심과 유리된 권력은 이래서 일란성 쌍둥이다.

 

지속가능한 혁명을 위해

타락한 삼위일체가 자본주의의 내외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여는 위력은 이제 노동과 재생가능에너지 그리고 코뮤니즘적 경제체제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 유령의 도래가 평화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혁명이란 비둘기걸음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성난 맹수처럼 덤벼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용한 혁명, 그리고 폭력적 변화라는 테제는 대립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알트파터가 홀러웨이를 비판하면서 말하듯이 ‘권력’을 잡지 못하는 혁명이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굳이 권력에 집착하는 혁명도 끝내 파산할 뿐이다. 알트파터가 보기에 권력을 위한 정치혁명이 한 쪽에 있다면, 그 다른 쪽에 화석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 재생가능에너지 사회체제의 도래가 있다. 오히려 후자가 더 힘들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 자본주의는 초기의 산업자본주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화석에너지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자본은 이를 하루 이틀 만에 쉽게 포기할 수 없다. 심지어 민중혁명의 당사자들조차 그럴 수 없다. 결국 우리가 이 공멸의 욕망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지 않는다면, 그 뇌관이 터지는 날에 또 다른 지배계급이 똑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똑같은 에너지체제를 유지하려할 것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규율이 내면화된 다중(multitude)들은 또 다시 죽음의 사이클을 반복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실패’의 원인을 단지 금융자본의 투기욕망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금융자본이 애초에 폐기해버렸던 그 가치, 즉 ‘사회적 가치’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에는 ‘자연’이라는 매우 중요한 존재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명심하자.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체의 존재조건이라는 것이다. 화석에너지의 무분별한 사용은 이 존재조건에 대한 침해이므로, 결국은 인간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폭력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알트파터의 말대로, 먼저 경제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만 보지 말고, ‘원료과 에너지 변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그 어떤 체제도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복수는 반드시 회귀한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재촉한 이 복수가 또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연대적 경제(코뮤니즘)와 함께 자연을 지속가능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현대 혁명의 필수적인 조건인 동시에 그 혁명을 또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필수 조건이 된다. 영구혁명이란 정치에 있지 않고 생태에 있는 것이다. 정치 혁명의 성과는 나날이 이어지는 생태 혁명의 엔진이 없으면 채 한 세기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추론할 수 있다.

 

지성의 비관주의

1848년의 유령은 스스로에게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붙였고, 맨 마지막에 이렇게 외쳤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그러니까 그때 유령을 부르는 주술사는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는 막 성장하는 계급이었으며, 실체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유령을 부르는 맑스의 언어와 더불어 그 언어가 지칭하는 공산주의와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알트파터는 현대 자본주의 내에서 성장하는 이들 프롤레타리아를 ‘목소리’로 지칭한다. 홀러웨이가 ‘절규’라는 다소 비관적인 톤으로 지칭한 것을 말이다. 확실한 것은 알트파터나 홀러웨이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를 더 이상 맑스가 그렸던 방식으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맑스의 ‘지금/여기’와 알트파터의 ‘지금/여기’는 다르기 때문이다. 맑스의 계급과 마찬가지로 알트파터의 계급도 막 성장하고 있으며,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뭐라고 했던가? 가장 강력한 위력은 잠재적인 것이다. 레닌이 다시 산다면 이 잠재성의 동력을 뭐라고 했을까? 분명 러시아 혁명 때와는 달리 말했을 것이다.

 

알트파터의 지성은 매우 비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타락한 자본주의 내부에 살면서 지성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비관주의라면 그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타락한 정권 내부에 사는 기분은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 대중의 역량에 기생하면서도, 그 대중을 탄압하는 권력은 결국 제 무덤을 파게 될 것이다. 유령을 부를 것이다.

 

야만의 자본주의에 비열한 권력, 2009년 봄 현재 한국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지옥도의 살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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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사랑도 다시

  • 등록일
    2009/03/10 15:44
  • 수정일
    2009/03/10 15:44

따뜻하다. 두꺼운 외투를 벗고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집을 나섰다. 미열이 있고, 약간의 두통. 그래도 상쾌하다. 슈베르트 현악 4중주를 듣다가 슬쩍 웃는다. 현들의 간지럼.

 

주말, 2번 광주를 갔다. 그녀를 만났다.  3개월이 마치 30년처럼 나나 그녀나 나이를 훌쩍 먹은 것 같았다. 얼마나 울었던 것일까? 그녀는 앙상한 겨울나무처럼 떨며 내 품에 안겼다.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라고 작게 속삭였다.

 

너무 살이 빠져서 딱딱한 의자에 앉으면 엉덩이 뼈가 아프다고 말하는 그녀, 생각하고만 있어도 눈물이 난다. 난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쁜 인간이지 않은가? 나란 물질은.

 

그녀의 일기장 한 쪽에 쓴 글귀를 보고 그만 울컥 눈물이 났다. "그는 돌아 올거야. 반드시 돌아 올거야"

 

사랑하는 사람. 당신만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뭉클하다. 다시는,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다시는 아프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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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한 하루하루

  • 등록일
    2009/02/26 16:51
  • 수정일
    2009/02/26 16:51

지금 제정신이냐고 묻는다면 난, 단번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결혼 준비 막판에 파혼을 맞았는데 고작 3개월 지났다고 충격이 가신다면 가히 강심장, 아니 냉혈한이라고 할 만할 것이다. 다행히 난 그런 놈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용히 생활을 찾아 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줄창 피워대던 담배를 (다시) 끊었고, 술은 다시 마신다(딱히 안 마실 이유가 없더라. 내가 술 마시고 누굴 때리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번에 한철연 선생님들이 촛불벌금 100만원을 기금으로 내 주신 게 큰 힘이 된 것 같다. 돈도 그렇지만,  그 분들이 날 생각하는 마음이 날 더 짠하게 만들었다. 사실 한 여자만 보고 9년을 살았는데 동료나 동지들의 정을 느낄 여유가 있었겠는가. 연애가 떠난 그 공허한 자리에 이 분들의 정이 살포시 들어 찬다.  고맙다. 다시 한번.

 

연애가 끝나고 지금까지를 돌아 본다. 내 방으로 왔고, 한 2주 끊임없이 술을 퍼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 와중에 그녀가 부친 택배가 도착했다. 내 짐들이다. 그 짐들을 보고 정신 차린 것 같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그럼 다시 시작해야지, 죽지 않을거면 그 수밖에 더 있나, 라고 생각했던 게 그 때였었다. 학원일을 다시 하고, 한철연에 나가고, 때로 버스 안에서 울고, 온통 연애의 흔적 뿐인 이 서울 바닥에서 거리를 지나치다가 또 울고, 속으로 욕하고, 망상에 시달리다가 서서히 돌아 온 거다. 여기에 말이다.

 

컴퓨터를 새로 구입했고, 티비도 사 놨으며, 오디오도 장만했다. 음악이 많이 도움이 된다. 지금 틀어 놓은 음악은 로스트로포비치. cd도 여러 장 샀다.

 

방송대 첨삭을 하고, 또 원고를 쓴다. 삶이 나른하게 지나간다. 그러나 비상하다. 이 시기가 지나면 세상이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올 것 같다. 그럴 것이다.

 

ps. 비상한 일상을 함께 사는 내 책과 음반들이다. 이제 이것들이 내 애인이다.

   

랑시에르 ... 요 몇 주는 랑시에르 주간으로 정했다. 물론 내 맘이다.

 

그리고 사랑스런 음반들..., 로스트로포비치와 아르헤리치

 

로스트로포비치 콜렉션은 cd가 여섯 장이나 된다. 그리고 두 장의 모던 락 앨범, 루시드 폴과 언니네 이발관.

 

 

 

잘 먹고, 잘 살고, 잘 듣고, 잘 본다.

 

참, 최근 본 영화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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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벌금 100만원

  • 등록일
    2009/02/21 01:29
  • 수정일
    2009/02/21 01:29

일주일 전에 검찰청에서 날아온 비보다. 100만원이더라. 니미럴!

 

그때 조서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난 출근해야 할 몸이었을 뿐이고, 월급 못타면 누구 하나 날 감당할 사람 없었을 뿐이고. 씨벌.

 

혼자서 지랄 발광하다가 노량진 경찰서에서 수갑찬 채로 하루를 있었다.

 

그게 100만원이란다. 개새끼들.

 

그런데 난 정말 운이 좋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많다.

 

오늘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기금을 조성하셨댄다. 너무나 고마워서 울었다.

 

그 형의 말이 또 너무 감동이다.

 

"선생님들이 빚을 진 기분으로 기금을 거두었다. 다들 당신들의 일처럼 생각하시더라."

 

너무 고맙다.

 

너무 고맙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철연. 진보철학의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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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전세자금대출? 개뿔!

  • 등록일
    2008/10/31 15:51
  • 수정일
    2008/10/31 15:51

참 장가 가기 힘들다. 근 6개월 여 '원천징수영수증' 때문에 학원 원장과 실랑이에, 은행 왔다 갔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했다. 천신만고라는 말은 이럴 때 쓴다. 그 종이 쪼가리 한 장을 받아 들고 보니 참, 어이가 없더라. 이건 뭐, 그저 세무사 도장 하나 꽝, 찍힌 A4용지일 뿐이잖아. 이게 사람 하나를 지옥으로도 천국으로도 보낸다. 젠장.

 

그런데 이건 또 뭐냐.  은행 대출 담당 차장이란 자가 주택공사에 접속해서 알아 보더니, 스윽 웃는다. 왜 웃지? 라고 할 찰나, 옆구리에 시퍼런 칼이 들어 온다. "대출액이 안 나오네요." 신용등급이 9등급 이하인 것이다. 또 여기 저기 전화한다. 아뿔사, 학자금 대출 연체 몇 번 한 게 있구나. 더런 놈들. 그걸 꼬투리 잡은 거다. 

 

그런데 더 희안한 것은 내 신용 등급이 이 지경이 된 이유를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언제 회복되는 지도 지들이 알 수 없다는 거다. 이건 뭔 해괴한 짓인지. 어째서 신용등급 당사자가 등급 조정의 이유와 원인을 파악할 수 없다는 건가? 순간 휙 지나가는 생각, 이것들이 알아서 기라는 거군, 언제 신용등급 내려가서 피해볼 지 알 수 없으니,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고, 국가기관과 통신사, 금융기관 눈치 보면서 연체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며 살아라, 이 말이지 않은가. 살 떨리는 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내 나이 아래로 학자금 대출 연체 한 번 안한 인간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또 얼마전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새파란 사회 초년생의 얼굴도 떠오른다. 대출 받을 생각에 매우 들떠 있었는데 ... . 은행 가서 신용등급 뜨면 그야말로 새파랗게 질리겠군, 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생각에 이것들이 결국 이런 식으로 진을 빼고서, 포기하게 만들거나, 대출 불가 판정을 내리거나, 그도 안되면, 대출한도를 턱도 없이 낮추는 식이겠다, 싶은 거다. 똥물에 튀겨 죽일 놈들.

 

은행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대출계 차장 뒤로 근로자 전세 자금 대출 한도가 6천만원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보인다. 6000만원? 그거 누구 입에 들어 가는 돈인가? 뻔하지 않겠는가? 은행에 썩혀 놓았다가 있는 놈들 빚잔치에나 처들어 갈 것인저. 좆같은 자본주의 세상이다.  (너무 자주 하고, 자주 들어서 식상한 욕이지만 지금, 참, 적기다)

 

뱀발: 그나저나 더런 놈들한테 이자 줄 날을 꼬박꼬박 지켜야 하다니 ... 속이 벌써부터 울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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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외마디같이 차갑고 무감각한&quot; 시

  • 등록일
    2008/10/30 15:41
  • 수정일
    2008/10/30 15:41

그런 한 편의 시. 나도 그런 시를 원했고, 지금도 그렇다. 섬뜩하고, 너무나 냉엄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한 그런 시, 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승의 '할!' 소리와 도 같고, 노동현장의 쇳조각 저미는 소리와도 같고, 또 그러므로 세상의 가장 낮은 것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 시.

 

독서 이력을 훑어 보다 보면 그런 류, 생면부지지만 글을 보면 연애라고나 할만한 그런 감정이 솟구치는 비슷한 유전자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내 기억에 그 두근거림은 열 여섯이 되던 해 겨울에 보았던 로트레아몽이 처음이었고, 랭보와 블레이크가 다음이다. 지겹기만 했던 수업시간에 교과서을 가리고 보았던 프로이트도 그 중 하나였지 싶다. 대학을 와서는 두근거림을 넘어 본격적으로 연애모드로 들어 가서는 폐인이 되었는데, 여기 가장 기여를 한 시인은 단연 기형도다. 희안하게도 김수영보다는 기형도가 좋았고, 당시에 선배들이 즐겨 권하던 박노해와 김남주는 가슴 벅차게 열정을 충동질하기는 했지만 남는 서정이 부족했다(여기서부터 먹물이었던 거다. 나는).

 

언젠가 아는 선생님이 술자리에서 그러시더라. "자네는 실존적 인간형인가? 사회적 인간형인가?" 옆에 앉아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다른 선배는 선뜻 "실존적입니다"라고 답하고는 머쓱해 했지만 난 대답을 찾기가 매우 곤란했다. 그건 아마 외로 남은 내 '혁명적 낭만주의' 쯤 되는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끝내 먹물이 먹물이길 거부하는 건 이런 자존심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게다. 참, 불행한 의식이다.

 

하여간 이번에 새로 시집을 낸 허연 시인도 내겐 가슴 두근거리는, 아니 폐인모드에 한 후원한 글쟁이에 속한다. 제목에 쓴 말은 이 시인이 최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첫번째 시집([불온한 검은 피])를 읽었을 때, 단박에 알아 챈 건 이 시인이 가지는 그런 실존적인 엄정함이었다.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스스로를 해부하는 그것. 후설(Husserl)이 현상을 기술하는 데 철학적 엄밀함이란 무기를 들었다면, 허연은 자신의 페시미즘과 허무주의를 낱낱이 해부하기 위해 문학적 엄밀함이라는 매스를 휘두른다. 그거 참, 맞는 말이다. '휘두른다'는 거. 어찌나 휘둘러 대는지 한 세상 전체가 호러무비 세트장이다.

 

그런 그가 두 번째 시집을 냈다. 한 8년 만인 것 같다. 생겨 먹은 뽄새는 아래와 같다.

 

 

풍기는 가오(?)가 ... 글과 마찬가지로 좋은 편은 아니다. 그리고 말하는 뽄새도 나긋나긋하지 않다. 첫번째 시집을 '세상의 옆구리에 칼을 질러 넣는 기분'으로 썼고, 이번 시집은 '내 옆구리에 칼을 질러 넣는 기분'으로 썼다고 한다. 새로 나온 시집은 위와 같다. 여러 말 할 필요 있나. 저 무시무시한 얼골에 퍼진 언어들을 직접 대면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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