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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 정치양식의 소멸과 정치의 새로운 장소

  • 등록일
    2008/09/10 15:59
  • 수정일
    2008/09/10 15:59

김원 외 지음,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천 권의 책, 2008

 

노동현장이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흉흉한 소문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현장에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소문의 출처나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면서도, 때로는 그럴 줄 알았다고, 또 때로는 아무리 그래도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가 있는데 그럴리는 없다고 말한다. 사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었지 싶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참, 허탈한 절망을 안겨 준 책이다. 김원을 비롯한 '문화연구 시월'의 동인들은 명시적으로 '민주노조 정치양식의 시효소멸'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선언의 타당함을 입증하는 철저하고, 실증적인 연구결과가 바로 이 한 권의 책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들은 이런 심상한 말을 화두처럼 던져 놓고 사람들에게 불콰한 현실을 목도하게 하는가? 이를테면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현실에 대한 우리들, 꼴좌파들의 현장에 대한 로맨스 따위가 아니다. 그런 건 공산당 선언이 곧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고, 중요한 건 현장의 질곡을 '먼저' 똑바로 보라는 게다. 아니, 사실 두 눈 꼭 감고 운동의 대의니 뭐니 지껄인다고 사정이 더 나아지겠는가.

 

이 책에서 이들은 현장, 특히 현대자동차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하긴 현자야말로 (지금은 완전 어중이떠중이 된) 현중과 더불어 남한사회 노동운동의 현황을 콕콕 짚어 주는 바로메타가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현장 조사, 탐문, 인터뷰 등, 사회과학의 기본 소스를 직접 발로 뛰고, 문서를 뒤지면서 탐색한 흔적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선언에 그치는 요란한 논문 무더기가 아니라는 것.

 

책을 덮으면, 현장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가족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주의. 그리고 공장 밖으로 확산되지 못한 '총회민주주의' 의 전락한 모습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완전 절망 구덩이에 독자를 묻어 버리는 애살찬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주문했듯이 현장의 문제를 푸는 것은 바로 현장의 동력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즉 '공장 밖으로' 확산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비정규직, 여성 노동의 문제가 놓여 있다.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는 하루걸이 정치문건이 아닌 이상 독자는 한 번 스스로 곰곰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과연 현재 노동현장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도대체 지금/여기(hic et nunc) 프롤레타리아트란 어떤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프롤레타리아로 호명되는 그곳에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가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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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 등록일
    2008/09/10 15:20
  • 수정일
    2008/09/10 15:20

편집간사로 한철연(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첫출근을 한다. 서교동 조용한 빌딩 3층.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한 4년이 넘은 것 같다. 2003년엔가,  '스피노자 세미나'를 위해 왔었다. 그때는 서교동이 아니라 봉천동이 근거지였다. 시장통 곁에 있어서 꽤나 어수선했는데 이곳으로 옮겨 온 후로는 상당히 학구적(?)인 분위기가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이곳을 드나드는 선생님들, 선배들의 그 분위기는 여전한 것 같다. 내가 처음 좋아했던 그 모습대로 이곳은 사람 냄새 나는 철학을 한다. 아카데미와는 달리 사회적이며, 또한 이념적으로 건강하기도 하다.

 

학문, 그것도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 든다. 특히나 돈에 눈이 뒤집힌 한국 사회에서 철학이라는 돈과는 불원지간의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정신이 상당히 투철(?)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뭐, 독립운동 하듯이 공부한다는 건 아니고.

 

여튼 한철연도 20주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새출발에 내가 있는 거, 뭐 그런 거다. 별 거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2007 한철연 하계 MT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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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기한 청년들, 김수영의 죽음을 '기념'하다.

  • 등록일
    2008/09/07 15:10
  • 수정일
    2008/09/07 15:10

이 시집을 보면 먼저 의아한 게 눈에 띈다. 그건 부제로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죽은 날을 기리는 건 기념이 아니라 '추모'가 맞다. 하긴 '괴기한 청년'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까지나 해 줄 수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실 김수영은 현대 한국 젊은 시인들, 이른바 68세대(프랑스 68이 아니라 김수영의 몰년인 68)에게 요상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번에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기 실려 있는 어느 시인 말마따나 이 시인들이 "자기가 잘못 놓은 주사에 ... 엄살을 피우"는 게 아니라면 이들 시인들이 김수영에게 진 빚은 일종의 시적 동력으로서의 '고통' 정도가 되겠다. 아니면 시기, 질투? ('질투는 시인의 힘'이지 않은가?)

 

여는 글에서 편집자인 서동욱이 말하고 있다시피 이 시집은 흔한 김수영에 대한 회고조의 객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시인들의 사금파리같은 시편들이 바로 이어진다. 난 최근에 본 시선집이나 동인지 형식의 시집 중에서 이만한 내용을 가진 시집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읽으면서 문득문득 빛나는 시편들이 가슴을 치고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끝내 '혐의'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내가 의심이 너무 많은 탓일까? 그러니까 과연 여기 모여 있는 이 시인들(난 김수영 시인의 사진 아래로 나란히 놓인 서동욱, 김행숙이라는 두 편집자의 '심각한' 아우라를 단박 알아 챘다)이 김수영을 정치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 말이다. 과연 이들이 이 시집을 통해 모인 후, 다시 '자신의 김수영'과 칩거의 동굴에 들어 가서 하늘에 떠 가는 헬기를 보며 서글퍼 할 것인가 말이다. 난 이 혐의를 끝내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며(혹시 문단정치?) 수작하고 있는가?

부디 술 먹은 뒤 적당한 음담패설을 하면서 헤어졌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시인들 각자의 시가 수준 높은 것임에 반해, 여러 군데에서 김수영을 향한 낯 간지러운 찬사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김수영을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여기 쓰여진 몇몇 찬사는 시인이 가져야 할 선배에 대한 자세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이를 테면 무릇 젊은 시인이라는 건 선배 시인들 글에 엿먹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김수영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찬사 몇마디를 쏘고 스스로 멜랑콜리, 자기비하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그 시인들보다 황병승의 포복절도할 패러디가 더 값져 보인다. 그는 김수영의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다"를 "택시 타고 집/택시 타고 집"이라는 두 행의 뒤샹풍 글귀로 마무리 한다. 크크크 재치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 이 시집은 수작들의 모음임에는 틀림 없다.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시가 아니라(시에서 빛나는 구절들은 따로 정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인들이 덧붙인 산문이 감동적인 것이 있었는데, 오은 시인의 '시인론'(제목을 이렇게 붙이지는 않았다, 물론)이 가장 뇌리에 남는다.

 

"다소 서툴더라도 문장 하나를 읽었을 때 누가 썼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시가 있는 반면, 진한 울림을 주더라도 글쓴이의 흔적을 파헤치기 어려운 시도 있다. 전자가 자기 확신과 긍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오랜 기간의 습작 훈련으로 얻어질 수 있는 일종의 스킬이다. 상당수의 시인들은 후자에 천착하면 전자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매 시대마다 잘 쓴 시는 넘쳐 나지만, 글쓴이의 땀내가 느껴지는 시를 찾기는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세련을 제련할 수 있을까. 근사한 어휘를 늘어놓고 펀치라인을 곳곳에 배치한다고 해서 언어를 대하는 물리적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요컨대 떨림은 순간이고 섬광은 찰나다. 이런 점에서 결국 남는 것은 스타일이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신체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고 지문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 마침내 남는 것은 '스타일'이다. 거기에는 땀이 절절히 베여 있고 말이다. 그게 아니면 글도 뭣도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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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빠진 대한민국 ... 차라리 황송하다"

  • 등록일
    2008/09/07 00:50
  • 수정일
    2008/09/07 00:50

김수영이 죽은지 40년이 지났다. 1968년 6월 16일인가가 그의 기일이니까, 얼추 반세기가 지난 셈이다. 대표작인 [거대한 뿌리]에는 빛나는 구절들이 많은데, 그 중 이런 구절이 있는 거다.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차라리 황송하다."  419가 미완으로 끝나고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는데, 그게 유명한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꾸었다"라는 구절이다.

 

오늘, 김수영을 거의 10여년 만에 우연찮게 다시 대하고서, 난 그가 비평계에 던졌던 또 하나의 화두를 생각해 본다. "풍자냐, 자살이냐"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먹튀가 이 좆같은 시절의 대한민국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풍자'라는 게 필요한 거다. 최소한 청와대 아저씨 "좆대강이나 빠"(김수영)는 누구누구같은 주구가 되지 않으려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오늘 너무나 '황송'했다. 서울역 앞, 고공 농성 중인 KTX 승무원들을 지키고 서 있던 바퀴벌레떼들을 보고도 너무나 황송했고, 국정원법, 통비법 개악하고, 테러라고는 없는 나라에 테러방지법을 만든다고 너무나 숭고한 개지랄을 떠는 모습을 보고도 너무나 황송했으며, 9일날 지멋대로 '대화'하겠다고 발광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너무나, 눈부시게 황송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 몇 년은 더 황송할 일이 날마다, 일신우일신, 켜켜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참으로 황송했다. 나는 인왕산 쪽을 향해 오체투지하며 외친다. "황공무지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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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외

  • 등록일
    2008/09/04 18:14
  • 수정일
    2008/09/04 18:14

지금 들고 다니면서, 짬짬이 읽고 있는 책은 이것,

 

 

도서관에 도착하면 으례 그러듯이 새로 들어온 책서가를 살핀다. 이때의 마음이란 뭐랄까 ... 조마조마하다. 좋은 책이 나오면, 그래서 조마조마 ... 안 나오면 그런대로 조마조마 ... 아니나 다를까 오늘 한 권, 아니 두 권이 들어와 있다. 이것,

 

 

이럴 경우에는 잠깐의 망설임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왜냐면, 현재 읽고 있는 책과 그 책 다음에 읽을 책 목록이 이미 잡혀 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책은 그러니까, 계획에는 없는 '사건'인 셈이다. 사건은 재미나게 받아 들이자, 는게 평소 생각이니까, 덥석 집어 들고 대출대로 가는 것도, 당연하지만, 사람이다 보니 걱정도 된다. 아니, 전공도 아닌데 ... 뭐하러, 라고 분명 말하는 축들도 있을 것이고, 내 생각에도 이건 뭐, 그리 전공이나 논문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기번이 아닌가! 이걸 영문으로 읽어도 시원찮을 판에 고맙게도 전공자분들께서 번역까지 해 주셨는데, 덥석 받아 먹지 않으면 바보가 아니겠는가! 하여, 난 [소크라테스 이전 ... ]을 잠시 걷어 치우고, 기번을 택하기로 한다. 하여간 내 머리 속에는 세 권의 책이 있다. 위의 두 책과 아래 책.

 

 

아니, 한 권 더 있구나.

 

 

 

이건 둘 다, kalavinkaa와 함께 읽는 책 목록에 있다.  [거대한 뿌리여, 괴기한 청년들이여], 이 책에는 심상스런 혐의 같은 것이 있긴 하다. 김수영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일단의 젊은 시인들이 모이긴 했는데, 이게 또 해괴한 문단 정치 세력이 되지 않을까, 라는 혐의 말이다. 난 그런 걸 너무 많이 봐왔다. 하여간 김수영이 그러한 정치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순정한(?) 시선으로 시들을 읽었으면 한다. 훑어 봤을 때, 한 구절 생각 나는 게 있는데, 그건 황병승이 김수영의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었다'라는 구절을 '택시타고 집/ 택시타고 집'이라고 완전, 골계스럽게 바꾼 거다. 한참을 그녀와 웃었다. 그 외에 서동욱 선생의 시도 괜찮았다(이 사람은 날 가르쳤던 사람이라 '시인'이라고 하기 뭐하다).

 

[꽃집에서]는  다시 읽는다. 아마 18살 때 우중충한 누런 표지로 나왔던 최초의 민음 세계 시인선으로 봤을 것이다. 그때도 이런 시인이 있나 싶었다. 유쾌한 저항! 그게 뭔지 그때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 저항이란게 무슨 독립운동 하듯이 비장한 것만이 아니라, 사랑을 하듯 달콤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 

 

하여간 이건 뭐, 정독할 도서목록도 아니고, 들고 다니면서 설렁설렁 읽을거리다. 읽을 때마다 서평을 쓰고 싶지만, 이상한 게 어떤 책은 '악평'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아래와 같은 책.

 

  

 

악평을 쓸 것 같은 느낌으로 보기 시작해서, 악평조차 못 쓸 정도로 날 망가뜨린 책이다. 서사구조는 물론이고, 함축성도 없고, 문체도 심심한데다가 뭐하러 저런 소재를 장편에 이르기까지 써갈겨 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책이다. 거 참. 뭐하러 저런 글나부랭이에 5천만원 씩이나 들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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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가 시작되었다

  • 등록일
    2008/09/04 15:18
  • 수정일
    2008/09/04 15:18

학생들이 강의실에 빼곡이 앉아 있다. 이 과목은 내가 토론 강의를 맡고 있다. 지금은 정규 강의 시간. 두 번째 시간이건만, 50분 밖에 안 되는 수업 시간이건만, 교수님 사설이 너무 길다. 벌써 20분이 지났다.

 

이 강의는 학생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진작시키고, 그것의 '유용성'을 확인하면서, 소위 '리더쉽'을 함양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이 대학의 특성화 사업으로 채택되었고, 교수진의 말에 의하면 타 대학이 벤치마킹할 정도로 훌륭한 강의로 정평이 났다.

 

그러나 과연 인문학이라는 것이 '유용성'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난 결코 그렇지 않다, 고 말하고 싶다. 주자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아닌가? 그것이 용처에 관계 없이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정해진 해답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 문제 자체를 심화시키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히 '무용지물'이다.

 

강의 교수의 말을 짐짓, 거부하면서 토론 강의를 이 생각으로 이끌어 가기로 생각해 본다. 하긴 지금껏 한 2년간 그렇게 해 왔지 않은가?

 

강의가 시작되었다. 이번주 주제는 '서구중심주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모 교수의 멍청한 얘기 하나(오렌지? 어륀쥐? 파동?)로 강의가 시작된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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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비관과 또 한 번의 낙관

  • 등록일
    2008/09/01 23:16
  • 수정일
    2008/09/01 23:16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복음 16:23)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일원인 전종훈 신부가 마지막 미사를 하고 1년 간 정들었던 수락산 성당을 떠나면서 인용한 성경구절이다. 의례적인 미사집전 외에 다른 강론이 없었기에 이 성경말씀은 더 가슴을 절절히 치고 갔다.

 

성경이 저렇게 말하고, 또 한 사람의 사제로서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목숨보다 소중한 신앙이었기에, 신부님이 저 말을 인용하면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 건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또 저 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회와 당당함 말이다. 신의 뜻에 대한 참회, 그렇지만 또 다시 사람의 일을 돌볼 수밖에 없는 진실된 사제의 길에 대한 당당함. 이 성경 말씀을 들었던 신도들은 아마 잠깐의 혼란을 거두고, 이런 위대한 모순 앞에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래서 저 성경 구절은 '그렇다 하더라도 주여, 저는 사람 사는 세상,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나이다. 그리하여 제가 천국에 가지는 못할 지언정 그 모든 가난하고 버림 받은 사람들을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겠나이다'라는 뜻으로 읽힌다. 2차대전 당시 나치에 저항했던 본 회퍼는 고난의 시기에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 목사들을 향해 이렇게 얘기 했다. "유태인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를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신앙은 참된 땅에서만 '신'의 이름을 올곶게 부를 수 있는 법이고, 착난의 땅에서는 고통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전종훈 신부,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에 나는 오늘 하나의 낙관, 시대를 그저 절망만 할 수는 없는 그런 희망에 찬 낙관을 발견하고 잠시 넋 놓고 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명박, 그는 아주 큰 비관이다. 그 큰 비관의 덩어리, 암세포와도 같이 전이되는 죽음의 덩어리가 한국 사회 한 켠에서 기생하고 있다 할지라도, 전종훈 신부 같은 분은 그러한 막대한 비관을 잠재우는 평화라는 이름, 정의라는 이름, 참신앙이라는 이름의 온 희망이고, 온 낙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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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것들

  • 등록일
    2008/08/29 15:16
  • 수정일
    2008/08/29 15:16

오세철 교수의 [사노련]이 국보법 위반으로 경찰에 의해 고발되고, 세상은 또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다행히 영장이 기각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어렵게 되었다. 나라가 이상하게 돌아 가고 있던 그 순간에 난 스스로의 작은 내면에 갇혀서 자책에 자책을 거듭했었다. 문제는 항상 그렇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 말이다.

 

이명박의 대한민국은 점점 그 인간의 기본적인 이성과 감각을 거꾸로 되돌리고 있고, 난 요상스럽게도 나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든다. 무감각해 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점점 그러한 무감각을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잘못 돌아 가는 것일까? 엄살을 부리는 버릇이 여전해서일까? 아니면 사유가 충분히 익기 전에 어떤 것을 포기하는 나쁜 버릇 때문일까?

 

가장 작은 것부터 해 나가보자. 평생 지켜야 할 것이 어디 수도 없이 많겠는가? 그건 몇 가지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원칙이 되는 것이고, 또 습관이 되는 것이고, 삶이 되는 거다.

 

그녀와 보건소를 들렀다. 둘 다 담배를 끊어 보기로 한다. 금연 실천에 대해 한 시간여 보건소 직원의 말을 듣는 동안 그 다 아는 상식들이 참으로 중요하게 다가 오는 건 어째서였을까? 타르가 폐에 '아스팔트'를 깔아 버린다는 그 직원의 말에 그녀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하긴 "깔아 버린다"고 했으니... .

 

여행도 계획한다. 둘이서 담배값 아낀 돈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다. 한 달을 모으면 꽤 많은 돈이다. 술을 최소한도로 줄이고(아마 거의 마시지 않는다는게 맞을 것이다),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것을 한다는 건 우리 둘의 가장 작고, 기본적인 일을 지켜 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더 이상 둘이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해결하고, 슬픔이나 절망이 찾아 오는 걸 막기로 한다. 항상 그렇듯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건 참으로 어리석다.

 

이수역 앞 'Tom n Toms'에서 쓴다. 오후 3시 20분. 시간은 흔한 절망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그 조건에서만 우리는 최소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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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 실망하다

  • 등록일
    2008/08/26 17:29
  • 수정일
    2008/08/26 17:29

 

실존적인 고민 따위는 없는 줄 알았다. 그런 건 사춘기의 몽상 정도? 내가 누군가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몽상이 귀환한다. 그리고 묻는 거다. '너는 대체 누구야?'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끌어 당기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토록 페시미즘으로 몰아 넣는 것일까? 내가 오늘 할 일을 못했다는 것,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켰다는 것, 내 '가족'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그 흔한 '절망'으로 몰아 넣는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삶은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특히 내 삶은 항상 위기의 징후였지 않은가? 나를 불안으로 몰고 가는 그것의 정체, 난 그것이 궁금하다.

 

난, 참으로, 잘못 살고 있는 것일까?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경험을 하고, 또 그토록 불행을 많이 겪었음에도 난 이 가장 허접한 질문에조차 답을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난 그리운 사람이 없구나. 그래서 그토록 그리움을 찾아 다녔구나!)

 

 

 고등학교를 그만 두고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있을 때, 난 니체와 더불어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했다. 이 그림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도박과 술, 파산과 자살을 오가며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썼다. 이 모습. 난 세계문학 전집 도스토옙스키 편 맨 앞장에 있었던 이 그림을 사랑했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제부시킨의 두 모습이 함께 어려 있는 이 모습을 말이다. 이 그림은 '절망'을 표현한다. 그렇지 않은가?

 

뱀발: 사우나에서 몸무게를 잰다. 정확히 78.8을 가리켰다. 믿기지 않아 다시 잰다. 마찬가지다. 85에서 78까지 왔다. 더 야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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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타임머신

  • 등록일
    2008/08/26 17:00
  • 수정일
    2008/08/26 17:00
학원 앞 식당에 도착한 시간, 6시 20분. 오징어 덮밥을 시켜 놓고, 이 식당의 유일한 신문인 [국민일보]를 펼쳐 든다(조중동이 아니라 그나마 ...). 수업 시작 전의 평화로운 시간이다. 느긋하게 밥을 먹고 수업 준비를 하면 된다. 그러나 왠 걸. 포복절도할 장면이 생기고야 만다. 난 순간 귀를 의심한다. 신문에 고개를 쳐 박고, 되도록 오늘 있을 명바기의 ‘강제 올림픽 선수 퍼레이드’를 보지 않기로 했는데, 그 노래가 들리고야 만 것이다. 아, 난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는 바로 ‘To the Victory’. 이럴 수가! 이건 ... 제발... (아니기를, 그러나) 이건.... 내가 지우고 싶었던 88년도의 그 노래? 제목만큼이나 숭고한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 . 난 믿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았다. 기어이 말이다. 흰 옷을 입은 할머니 가수는 80년대 카바레 춤을, 할아버지 가수는 동그란 썬그라스를 끼고 깡패춤을 추는 거시어따!! 기어이 말이다. 바로 그룹 ‘Koreana’!!!! 두. 둥. 난 단전으로부터 올라오는 웃음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리고 외치고 싶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퇴행’인가! 전두환, 노태우 때나 듣던 그들의 목소리, 그 (불쌍한? 권력에 찌든) 율동, 그 패션(정말 그때 그 시절, 패션이어따. 88때도 저 옷이어따), 그 노래를 다시 듣다니 말이다. 난 갑자기 명바기한테 오체투지 하고 싶어졌다. 정말 위대한 지도자가 아닌가? 이토록 포복절도할 웃음을 국민들에게 안겨 주다니 말이다. 당신은 정말 ... 정말 ... 종교적이야 ~~~ 선지자 이사야를 태극기 뒤집듯이 뒤집어 놓은 것 같아 ~~
이걸 어째야 할까. 태극기를 들고 앞서며 찡그리다가 웃다가 하는 박태환 선수와 목발을 짚은 저 선수. 어째서 병원에 있지 않고 저기 저러고 있는 거지? 명바기는 어디 있을까? 고생시켰으면 최소한 나와야지. 이건 뭐 지가 얼차려 시켜 놓고 변소에 짱 박혀서, 뽀글이 처먹고, 담배 피우는 군대 고참이다.
참으로 위대한 국가주의 올림픽 퍼레이드. 미친 놈 널뛰기는 물론 명바기 차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난 갑자기 궁금해 진다. 이런 경우는 세계, 어떤 경우가 있었을까? 혹시, 폴 포트나, 뭐 그런 경우가 있지 않을까?
밥을 먹다 말고 나온다. 그리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제 올림픽 끝. 났구나. 마침표 꽝! 아니, 폭탄 펑!
 
뱀발: 정말 난 가끔 스스로의 이데올로기 성향이 의심스럽다. 가장 많이 공부한 것은 맑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 매우, 아주 매우, 아나키즘, 그것도 극렬한 아나키즘의 ‘증상’(그러니까 정신이 아니라, 책하곤 상관없이 ‘신체적인’)을 느낀다. 이런 경우 말이다. Blue House 만쉐!!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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