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4/10

2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10/04
    05. 쉼터에서의 대화
    자일리톨
  2. 2004/10/04
    04. AAPP사무실에서
    자일리톨
  3. 2004/10/04
    "나 결혼해..."(2)
    자일리톨
  4. 2004/10/03
    03. 부찌와 만나다
    자일리톨
  5. 2004/10/03
    02. 메솟으로(2)
    자일리톨
  6. 2004/10/03
    01. 출발하기까지
    자일리톨

05. 쉼터에서의 대화

부찌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부찌가 쉼터에 가서 좀 쉬라고 하며 오토바이로 바래다 주었고 난 3시간의 꿀맛같은 낮잠을 즐겼다.

 

일어나서 거실로 나오니 태툰이라는 아저씨가 혼자서 TV를 보고 있다. 그는 학생시절 지하학생조직의 지도부로 일하다 투옥되었고, 수감기간 중 계속된 고문으로 허리의 주운동신경 하나가 끊어져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우리는 어눌한 영어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의 가족사와 그가 한 활동, 수감기간에 겪은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 뭐냐고 묻는다.

 

- 니가 지지하는 정당이 뭐냐?

+ 응, 민주노동당이야

- 아~ 나도 그거 안다. 김대중씨가 리더 아냐? (democratic이라는 말을 듣고 오해한 듯)

+ 아니, 그건 자유주의자가 주축을 이룬 다른 당이고, 내가 지지하는 당은 이번에 국회의원이 새로 10명 나온 노동자를 위한 당이야.

- 그래? 한국에는 당이 많군. 김영삼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은 어때?

+ 그가 7-80년대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건 맞지만, 그 이후 그는 노동자와 학생들을 탄압하고 권력을 남용했어. 심지어 그 아들은 여러군데서 뇌물받아 먹다 걸려서 지금 감옥에 있지

- 그래? 어쩌다 그 사람이 그렇게 됐어?

+ 뭐.. 나도 잘 모르겠지만, 원래 권력이라는 것의 속성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 아닐까?

- 그래... 근데 노동자를 위한 당이라... 니 정치적 색채가 뭐냐?

+ 나? 흠........ democratic socialist

- socialist???

 

그가 큰 소리를 지르더니만 이내 똥씹은 표정이 된다. 그래, 난 버마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사회주의자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해 왔던가. 48년 버마가 독립한 이후 버마체제의 근간은 사회주의였다. 또한 이후 쿠데타 세력은 북한과 같은 폐쇄적인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하며 그것을 "버마식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봉건적 통치체제일 뿐 사회주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마의 재야인사들을 감옥에 쳐넣고 고문했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호명했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현재 버마의 재야세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경멸에 가까운 뉘앙스를 지니는 것 같다. 테툰씨의 반응에 놀란 나는 just like the french and german이라는 수식어를 애써 갖다붙였다. 그러자 몇 분후 나는 그와 대화를 재개할 수 있었다. 아...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독재는 짜증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04. AAPP사무실에서

AAPP사무실에는 토요일의 이른 시간임에도 상근자들이 나와 일하고 있었다. 부찌가 나에게 상근자 하나하나를 소개시켜준다. 기가 막힌 건, 소개내용이 이름과 수감된 기간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XXX인데, OOO감옥에 △△△년간 있었지"라니... 4-5년 정도의 수감기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버마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대표적인 정치범 사진들, 현재 약 1500명 정도의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버마의 감옥들의 위치를 표시해 놓은 지도, 그 수가 엄청나다]

 

[버마의 학생운동 지도자 민코나잉의 사진, 여기서 만난 대다수의 정치범들은 88년 민코나잉과 함께 일한 경험이 있다]

 

[부찌집의 앞마당, 뜨거운 햇볕을 막기 위해 보통 이곳 사람들은 마당에 차양을 친다]

 

오전에는 부찌가 주관하는 영어수업을 참관했다. 부찌는 버마 특유의 악센트가 심함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참 능숙했다. 그가 영어를 배운 이력은 독특한데, 함께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중 영어가 능숙한 동료로부터 영어를 배웠으며 2주에 15분간 허용되는 가족과의 면회시간에 가족에게 부탁하여 영어교과서 종이로 음식물을 포장하여 감방에 반입한 후 거기에 나온 예문을 모두 암기하고 그 종이를 먹어버렸다 한다. 정치범들에게는 어떤 책이나 신문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 배운 영어는 현재 그가 활동하는데 있어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는 세계 각국 정부나 국제기구와 쉴 새 없이 버마의 상황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고 있으며, 버마에 대한 선택적 경제제제조치(버마산 티크와 보석류에 대한 target sanction)를 EU에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른 정치범들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조그만 행운조차 허용되지 못했다. 때문에 AAPP의 쉼터에 머무는 동안 함께 생활했던 다른 정치범들은 내게 그들의 수감기간까지만 말할 수 있을 뿐 여타의 상황에 대해서는 표현하지 못했다. 내가 내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그들끼리 토론을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야말로 격론이 벌어지곤 했다. 저렇게 똑똑하고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미소만 주고 받는 현실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지...

 

따라서 이곳 메솟으로 넘어온 정치범들을 모아 부찌는 토,일요일 두차례 영어강습을 하고 있다. 메솟에 도착한 첫 날 난 이 수업을 참관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들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수업분위기는 매우 진지했다. 이날의 수업교재는 동티모르의 정치지도자 구스마오와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동티모르가 독립하기 전 인도네시아 정부의 간섭과 외교적 방해공작으로 인접국가로의 방문조차 허용되지 않던 상황을 구스마오가 어떻게 극복했는가가 주요 내용이었다. 아마도 부찌는 영어강습과 정치학습을 병행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동티모르 정치지도자들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 자신들의 모습을 등치시켜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부찌의 관점과 정치적 의도에 대해 난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가 40이 넘은 정치범들이 형형한 눈빛으로 모여 앉아 영어를 배우는 모습은 내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실의 그늘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고양이,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일어났는데 보기와는 다르게 성질이 못됐다.-_-a]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나 결혼해..."

근 2개월간 아무런 연락이 없던 친구녀석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잘 지냈냐는 인사말에 이어 녀석이 했던 말은 "나 결혼해.."였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농담이지?"라고 물어도 녀석은 계속 "정말이야. 나 결혼해"라고 대답한다. "정말로" 녀석은 결혼을 하는 것이다.

녀석은 모 사회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신부가 될 사람도 내가 몇 번 마주쳤던 그곳의 상근자다.

녀석이 과거 내게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었던 것도 아닌데, 그가 던진 말이 내게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군대가는 건 생각지도 않고 있을 때 친구가 내게 했던 "나 군대가"라는 말처럼...

그 친구가 멀리 외국으로 떠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내 마음이 심란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근 10일간 놓았던 일들 때문에 싱숭생숭 하던 차에 녀석은 내게 "한방"을 먹인 것이다. 일이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03. 부찌와 만나다

1시간 정도 기다린 후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부찌에게 전화를 했다. 생각했던 것하고 그의 실제 목소리는 영 딴판이다. 지금 갈테니 한 1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하릴 없이 또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오토바이를 타고 도착했다.(이곳의 주요 이동수단은 오토바이다. 심지어 택시까지도) 그는 사진에서 보던 모습보다 훨씬 피곤하고 수척해 보였다.

 

[부찌의 모습]

 

부찌는 1964년 버마의 양곤에서 태어나 양곤대학을 다니던 1988년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2차례 8년여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3번째 투옥을 피해 국경을 넘은 그는 1999년 이후부터 AAPP(Assistance Association for Political Prisoners in burma)라는 단체의 공동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단체는 버마 국내외의 정치범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히 이곳 메솟지역으로 들어온 전 정치범들에게 3개월간의 숙소와 식량 등을 제공한다. 버마의 정치범들은 장기간 옥고와 고문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태국이라는 이국땅에서 혼자 살아가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특히 태국어와 버마어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심지어 문자마저도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언어문제는 버마의 정치범들이 메솟에서 활동하는 데 많은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부찌가 AAPP사무실로 가기전 아침을 먹고 가자며 티샵(teashop)으로 가잖다. 그의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렸다. 메솟은 생각보다 훨씬 작은 소읍이다. 하지만 시장에 가까이 가자 엄청난 사람들과 오토바이들이 힘차게 질주하는 모습은 역동적이었다.

 

[메솟의 AAPP사무실 근처모습]

 

 

내가 아침을 먹었던 티샵은 버마인이 운영하는 식당으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버마인들에게 사랑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의 주인은 무슬림이라 TV에서나 보았던 서남아시아 스타일의 음식을 팔았다. 밀가루 떡을 화덕에 넣어 굽고 걸쭉한 국물을 끓이고 들어오는 손님도 많고 하여간 부산스럽다. 처음 먹어보는 이 곳 음식은 그 냄새나 맛이 내 입맛과는 잘 맞지 않는다. 밤새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달려왔기에 혀도 깔깔하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부찌가 큰 보온병의 차를 따라 내게 준다. 이곳 사람들에게 홍차는 거의 일상인 것 같다.(그들은 이 차를 그린티라고 불렀다) 부찌가 카운터에 손짓을 하자 담배 세 개비를 플라스틱컵에 담아온다. 느끼한 음식을 먹고 따뜻한 차에 묵직한 맛의 담배 한대라.. 맘에 들었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내가 묵을 게스트하우스로 갔다.(이곳은 메솟으로 넘어온 정치범들에게 3개월간의 쉼터로 쓰이는 곳이다) 이른 시간이라 거의 다 자고 있었지만, 일어나 있는 몇몇 멤버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수많은 사람들 중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 서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미소만 지으며 뻘쭘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묵을 방에 배낭을 던져두고 AAPP사무실로 갔다.

 

[내가 묵었던 AAPP의 쉼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02. 메솟으로

9월 24일 금요일 저녁 8시경 방콕 돈 므앙 공항에 내렸다. 예정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고 입국심사도 일사천리로 끝나서 시간에 여유가 있다. 택시 승강장으로 가서 택시기사에게 "North Bus Terminal"이라고 했더니 못 알아 듣는다.(내 발음이 그렇게 후지나?-_-a) 태국말로 “콘 쏫 머칫 썽”하니 그제서야 “아~오케오케”한다.

 

택시를 타고 바라본 방콕의 거리풍경은 참 을씨년스럽다. 매연으로 그을린 서울의 청계천 일대를 보는 것 같다. 터미널 앞에서 U턴을 하다가 교통경찰에게 잡혔다. 기사가 뭐라뭐라 얘기하더니 20바트(600원)짜리 지폐를 슬며시 건넨다. 그걸로 끝이었다. 태국경찰의 부패가 심하다더니 책에만 있는 내용은 아닌갑다.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뭐라뭐라 한참을 떠는다. “Maesot, I wanna go to Maesot"이라고 하니 매표소로 데려다 준다.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표 파는 아주머니가 태국말로 묻는데, 난 그저 ”the last bus to maesot, tonight"만 말했다. 아주머니가 두 번 세 번 오늘밤 맞냐, 마지막 차 맞냐, 메솟가는 거 맞냐라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그러더니 모니터 화면을 내게로 돌려서 가격과 시간을 확인하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맞다고 하자 표를 끊어주면서 승강장 번호까지 손수써서 저 뒤로 돌아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르쳐준다. 아주머니가 너무 친절히 잘 대해주길래 “당신은 너무 친절하다. 너무 고맙다”라고 큰 소리를 지르니 아주머니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태국을 가리켜 ‘미소의 나라’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버스 기다리는 데 여유가 있어 화장실에 갔는데 3바트(90원)을 내란다. 뭐 화장실 갈 때 돈 내는 거야 유럽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이고 화장실을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최소한의 비용이 드는 것이야 이해가 가지만 그럼 그 돈마저 못 내는 노숙자들은 오줌도 싸지 말라는 것인지 갑갑했다. 더군다나 여기는 버스터미널이라는 공공장소지 않은가.

 

10시 30분에 메솟행 버스에 올랐다. VIP버스라는데 좌석도 넓고 등받이가 거의 180도 뒤로 제껴지는게 8시간의 버스여행이 그리 불편할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덮고 잘 얇은 담요며 생수 한병, 빵 2개까지 제공된다. 훌륭하다.

 

태국의 고속도로는 말이 고속도로지 남한의 국도와 다를 바 없다. 도로가 도로변의 집들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오토바이도 다니고 심지어 무단횡단도 가능하다. 가는 도중 3군데의 휴게소에서 쉬었는데 우리의 시골 버스터미널 같은 곳이다. 말도 안 통하고 뭘 먹을지도 모르겠고 답답했다. 내가 탄 심야의 버스는 근 5시간을 평지만 내달렸다. 5시간 동안의 평지라... 태국은 확실히 자연의 축복을 받은 나라다.

 

새벽 5시 30분에 메솟에 도착했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을 일찍 도착한 것이어서 사방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러대의 오토바이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같이 내린 승객들은 하나둘씩 마중나온 친지들 혹은 오토바이 택시기사들의 차에 실려 어디론가 흩어지는데 그 넓고 어두컴컴한 공터에 나 혼자만 남았다. 아니, 세상 모르게 퍼져 자는 삐쩍 마른 개 5마리와 손님을 싣지 못해 계속 기다리게 된 6명의 기사와 나 뿐이었다. 사방이 어두운 새벽 5시 반에 부찌에게 전화를 거는 건 예의가 아니라 싶어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시간이 왜 이리도 긴지 애꿋은 담배만 축냈다. 버마와 태국의 국경도시 메솟은 모든 것이 적막하고 평온해 보였다. 최소한 그때까지는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01. 출발하기까지

이번 여행은 확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늘상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나와는 가진 생각들이 너무나 달랐고 난 숨이 막혔다. 그 때부터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던 것 같은데, TV에서 우연히 버마의 상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인터넷을 통해 만원계라는 조그만 모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시아에 있는 여러 활동가들에게 계원들이 월 1만원씩 송금하는 것이 주활동인만큼 특별히 직접적으로 뛰는 것도 아니고, 그리 큰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가입을 한 때에는 우리가 지원하는 활동가 부찌(Bo Kyi)가 성공회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직후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계원들은 그 일 때문에 실로 놀랄만한 열성으로 추가계비를 거두고 직장에 휴가까지 내어가며 부찌를 안내하는 일을 자원했다. 때문에 그 사업이 끝난 후 계원들은 진이 다 빠져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계원들의 관심과 열성을 다시 환기시킨다는 차원에서 계원들끼리 부찌가 활동하고 있는 메솟을 방문해 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번 추석을 D-Day로 잡았던 거다.

 

나로서는 해외여행의 경험이 전무해서인지 호기심이 일기도 했고, 내 첫 해외여행이 단순히 즐기는 여행이 아니라 뭔가 의미있는 것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같이 가기로 했던 2명의 계원 중 휴가일정이 바뀐 1명이 먼저 메솟을 방문하게 되었고, 또 다른 한명은 사정상 휴가를 아예 못 가게 되어버려 나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나는 여름휴가를 추석연휴에 붙여 사용하게 해 달라고 팀장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여서 그냥 예정대로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버마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강렬한 활동에의 욕구마자 없던 내가 추석에 혼자 태국여행을 가게 된 전말이다. 가기 전 한참을 망설였다. 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하냐는 걱정에서부터, 돈도 없는데 내 인생에 무슨 해외여행이냐 그냥 편하게 집에서 쉬자는 현실과의 타협까지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가기 전 부찌에게 e-mail을 보냈는데, 그는 너무나도 간단히 “환영한다. 빨리 와라” 이랬다. -_-;; 그러니 더 아니갈 수 없지 않은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