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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20호>장애인들의 점거투쟁, 정지의 미학 잘못된 것이라면 멈추게 하라!

 

장애인들의 점거투쟁,

정지의 미학 잘못된 것이라면 멈추게 하라!

우리 사회는 한 사람의 ‘장애인’에 대해 불쌍하고, 학대받는 이미지를 수없이 그려왔고,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 저항하지 않는 온순한 사람의 이미지를 주입하고 강요해왔다.

 

소위 ‘착한 장애인’이라는 개인의 이미지와는 달리, ‘장애인단체’의 그것은 정반대로 묘사되기 일쑤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소소하기 짝이 없는 이권을 위해 기꺼이 가스통에 불을 붙이기도 하는 무서운 ‘막장 집단’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장애인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길거리 모양과 법제도 뿐 아니라 장애인을 둘러싼 신화들도 하나 둘씩 깨어졌다. 이제 장애인운동은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당당한 장애인’, ‘저항하는 장애인’을 재생산하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들에 맞선 최선의 투쟁방식은 ‘점거’였다. 자신이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고 만들어진 거리와 건물과 버스와 열차가 버젓이 대중교통이라는 이름으로 작동되고 있기에, 장애인들은 지하철 선로에 내려가 열차를 멈추는 투쟁을 하였다.
 

학교가 장애를 가진 학생에 대해 입학을 거부하고 전학을 강요하고 차별하고 있기에, 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전국의 교육청을 점거하고 농성투쟁을 했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은 평생 가족의 짐이 되어 살다가 가정이 무너지거나 시설로 보내지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장애인들은 휠체어에서 내려 한강다리를 점거하고 기어서 건넜다.
 

인권개념도 없는 자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장애인차별을 운운할 때, 장애인들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했고, 장애인의 몸에 등급을 매겨 복지서비스를 판정하려 할 때 장애인들은 장애등급심사센터를 점거했다.
 

장애인운동 역시 수없는 집회와 천막과 노숙과 몸싸움과 비명과 눈물로 이어져왔다. 투쟁이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천막을 치는 것이라면, ‘점거투쟁’은 결판을 보기 위한 결사투쟁의 의미가 클 것이다. 장애인들의 점거투쟁은 어떤 말이나 이론보다 분명한 선언이다.
 

정부의 알량한 가짜복지를 거부하며 장애인들이 점거를 하는 것은 “우리 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는 선언이다. 장애인들이 버스를 점거하고 선로를 점거하는 것은 우리를 묶어놓고 당신들만 이동할 권리는 없다는 선언이다.
 

영화 ‘도가니’의 열풍으로 그동안 장애인의 권리를 외면하고 짓밟아왔던 이들조차 장애인생활시설에서의 인권유린과 성범죄를 중단시키기 위한 대책을 앞 다투어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장애인이 살아갈 수 없어서 사회로부터 격리 수용되는 ‘시설보호’ 구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한평생을 죄 없이 감옥 같고 군대 같고 병원 같은 곳에서 살도록 강요하는 세상! 멈춰져야 할 것은 몇 가지의 범죄사건 뿐이 아니다. 장애인을 배제하는 이 세상을 멈추어야 한다.

 

남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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