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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28호>억울해서라도 못 나간다.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가겠다.

[포레시아 송기웅 지회장 인터뷰] 억울해서라도 못 나간다.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가겠다.

 

투쟁 1000일이다. 투쟁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나 소회는 어떠한가?

가장 어려웠던 점은 2009년 5월 26일 정리해고 이후 조합원이 1~2명씩 떠나가는 것이 가슴이 아팠다. 지노위, 중노위, 행정1심에서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나면서 낙담하고, 상당히 힘들었다. 특히 정리해고 후 생활고에 어려움을 겪는 부분을 노동조합에서 어떻게 해줄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버티는 조합원들과 지역의 연대가 지금까지 올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1000일 하다보니 날짜가 훌쩍 지나갔다. 중소사업장이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것도 있지만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가겠다.

 

2심에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얻었다. 어떤가?

당시에 2011년 7월 21일 선고 당시에 농성 중이었는데 장투기금도 다 끝난 상태였다. 농성장에 9명이 있었고, 나머지는 생계투쟁 중이었다. 사실 1심에서 져서 질 것이라 각오하고 있었다. 그래서 판결 보다도 이후의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오히려 조합원들이 힘을 주더라. “지회장 신경쓰지 마라. 억울해서라도 못 나간다.” 이렇게 말해주는 농성동지들이 힘을 많이 주었다. 회사가 어렵지 않다는 것 우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법원은 그런 것을 안 보더라. 그런데 2심에서 이를 인정하여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 동안의 현장의 탄압은 어떠했는가?

현장의 탄압은 2심 판결 이전까지 다양했다. 작업하다보면 고장도 나는데 이를 손해배상 청구하고, 빨갱이라고 잔업에서 배제시키고, 심지어 한국노총 조합원 50명이 침 뱉고, 노동조합 조끼를 찢고. 정년 1년 남은 조합원도 있는데 30대들이 쌍욕하고, 현장사무실에서 아무 일도 안 시키기고 하루종일 가만히 세워놓고, 여러 가지가 있다. 체육대회가 기억이 난다. 체육대회에서 조합원들만 시멘트 바닥에서 식당 밥 먹으라고 하고 특근 시간에서 배제시키고, 물도 줄서서 먹으라고 하고, 체육복도 다른 사람들은 메이커 체육복 주고, 조합원들한테는 시장표를 주더라. 생일 선물 같은 것도 차이가 있더라. 공장이전해서 시하에서 장안으로 왔는데 고용보장 문제, 출퇴근 문제가 있었다. 우리 조합원만 통근버스에서 배제시키더라. 그래도 2년 동안 버티니 더 이상 없더라. 결국 버티니가 멈추더라. 고소고발 해서 다 조사받게 하고, 벌금 다 받았다. 인권위에도 다 고발하고. 2심 승소 이후에는 잠잠하다. 잔업도 사측에서 화해안을 내놓고, 손해배상도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리해고 이후에도 현장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중노위 지고 경기 파업에서 출입을 합의해서 들어갔는데 정문을 다 막더라. 뛰어넘어서 조합사무실을 점거했다. 그랬더니 음식, 전기, 화장실 다 끊고, 계속 싸우다 끌려나왔다. 조합원들간에 계속 회의를 같이 했다. 콘테이너 설치하고 회의하고, 점심시간 때도 이야기하고, 조합의 투쟁일정 보고하고 현장탄압에 대해서 같이 대응하고, 생계 나갔던 분들도 1달에 1번씩 모임을 가지고, 장투기금도 납부하고, 생계도 순환적으로 로테이션해서 실시했다. 거기서 많이 쌓인 것 같다. 현장은 노동강도가 1.5배 이상 강화되었다. 특근에 잔업에 월차도 못 쓰는 상황이다. 현장 불만이 많이 쌓여 있다.

 

전국에 동지들에게 한 말씀?

정리해고 되었을 당시를 기억해보면 부당하다, 열심히 일했는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그래서 지금까지 같이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동지들을 믿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 속상한 일도 많았지만 오히려 모르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억울하니까, 회사하는 것 보니까 악에 바치더라. 시화에서 장안으로 이전하며, 회사 전망 있다, 더 잘 나갈거다 그렇게 말했던 이들이 이전하자마자 정리해고라니. 함께하는 동지들과 끝까지 함께 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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