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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40호> 장애인의 삶이 나아졌다구요? No! 장애등급제 No! 부양의무제, 장애민중은 투쟁중!

장애인의 삶이 나아졌다구요?
NO! 장애등급제 NO! 부양의무제, 장애민중은 투쟁중!

 

 

 

사용자 삽입 이미지지금 광화문은 투쟁중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장애인과 가난한 민중들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바로 보이는 곳, 정부와 경찰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중들의 시위를 막아서던 바로 그곳 광화문광장 지하에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공동행동]이 무기한 노숙농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21일, 노숙농성장을 확보하고 이제는 농성장에 천막도 치고, 100만인 서명운동과 10만인 엽서쓰기 운동을 진행하면서 제법 안정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소외받은 삶, 쓸쓸한 죽음


이제 장애인들도 좀 살만하지 않냐고, 한국도 복지가 많이 발전하지 않았냐고요? 투쟁을 통해 많은 제도들이 생기기도 하고, 길거리 모양도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처절하기만 합니다.
2년 전 가을 “장애를 가진 내 자식이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목을 맨 어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부양의무자가 없어져야 자식이 기초생활수급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초생활수급권을 박탈당해 자살한 노인들의 사연도 참으로 한맺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해 여름, 어느 요양시설에 살던 노인분이 수십년간 연락도 안되던 자녀의 소득이 포착되었다는 이유로 수급권을 박탈당하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렇게 부양의무제 때문에 죽음에 내몰리는 사건만 해마다 서너건 이상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부양의무제라는 기계장치의 본질입니다. 가난은 국가가 아닌 가족의 책임이라며, 가족이 책임지고 가난한 이를 돌보라는 것이지요.

 

 

차별의 낙인, 빈곤의 사슬


장애인복지는 또 어떨까요? 보편적 권리에 기반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2열종대 선착순 복지’라 할 수 있는데요, 한 줄은 장애등급제고, 또 한 줄은 가구소득 기준입니다.
장애등급제는 장애인의 몸을 신체 기능 손상 정도에 따라 1등급~6등급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장애등급에 따라 복지제도를 결정하는 제도입니다. 정부의 논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예산이 부족하니 효율적 집행을 위해 서비스를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하는 중증장애인에게 우선적으로 복지를 제공하겠다는 겁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폭력적 행정을 은폐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합니다.
장애등급제의 실제 기능을 보지요. 활동지원제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35만명이 넘는데 1급 장애인으로 제한하여 고작 5만명을 대상으로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장애인들이 경제활동의 기회조차 없어 빈곤한 상태로 살아가는데, 1급과 2급장애인으로 제한하여 장애인 중 고작 13%만을 대상으로 장애인연금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장애민중의 이름으로


201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장애인과 가난한 민중들은 또 다시 투쟁의 거리로 나왔습니다. 수많은 요구와 현안문제들이 존재하지만, 장애등급제 폐지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선명하게 내걸고 끝장투쟁에 나선 것입니다. 다른 제도와는 달리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복지제도의 이념과 시스템의 뿌리를 이루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두 가지 악법철폐 없이 다른 장밋빛 복지공약 따위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농성현장에서는 “우리는 고깃덩어리가 아니다, 장애등급제 폐지하라!”, “가난은 가족이 아닌 국가의 책임이다, 부양의무제 폐지하라!” 등의 구호가 쉼없이 들립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가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복지시스템을 지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은 또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람의 몸에 등급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폭력입니다. 여성에 등급이 있을 수 없고, 노인에 등급이 있을 수 없고, 인종에 등급이 있을 수 없고, 성소수자에 등급이 있을 수 없을진대, 유독 장애인에만 몸에 등급을 매겨 관리하겠다는 것은 무슨 발상입니까?
장애인들은 가족주의가 얼마나 보편적 권리를 부정하고, 국가의 책임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소득획득 능력이 없는 이를 국가가 아닌 가족이 부양해야 한다면 장애인은 평생 가족의 짐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족이란 것도,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처럼 태어날 때 하늘이 정한 첫 번째 가족과, 성인이 되어 자신이 정한 두 번째 가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은 평생 하늘이 정한 첫 번째 가족의 품안에서 보호대상으로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장애인의 정체성, 아니 세상에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감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만이
대안입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는 개선할 문제가 아니라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악법입니다. 이러한 악법이 존재하는 한, 보편적 권리도 없고 장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 없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없습니다. 악법을 없애야만 비로소 숨겨졌던 인권이 드러납니다. 애초에 몇 등급의 몸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장애인이 어떤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가의 문제에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가족의 재산과 소득이 얼마냐가 아니라, 누구나 최소한의 생활을 할 권리가 있고 그것을 사회가 보장해야 합니다.
더 이상의 비참한 죽음을 막기 위한 투쟁이며, 장애민중의 인간다운 삶을 지키는 투쟁입니다. 기만적 복지담론을 인권의 담론으로 바꾸는 투쟁입니다. 투쟁을 사수합시다!


 

남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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