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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0호> 카이스트 학생은 왜 죽었을까?

 

카이스트 학생은 왜 죽었을까?

경쟁과 서열이 만든 지옥, 희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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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학생들이 잇달아 자살을 하고, 교수마저 자살을 하면서 ‘카이스트사태’가 연일 회자되고 있다. 상위 1% 중 1%의 소위 명문대학의 학생들의 죽음에서 동정과 시기의 감정이 교차된다.
 
동정의 정서는 이렇다. 오죽하면 그 잘난 학생들이 죽겠냐는 것이다. 2006년 서남표총장이 취임한 후 그동안 무상으로 교육받던 학생들에게 성적에 따라 등록금을 차등적으로 부과하는 ‘징벌적 등록금제’는 카이스트의 학생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경쟁과 서열은 지독한 일상이 되었고, 그 액수도 2010년 기준 1575만원으로 전국에서 가장 고액이라고 하고, 해마다 30%에 가까운 학생들이 ‘징벌적 등록금’을 냈다고 하니 그 스트레스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시기 또는 탐탁지 않은 시선도 있다. 명문대 학생이 죽으니 난리라는 것이다. 하기사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지난 몇 년간 등록금마련부담과 생활고를 비관하여 자살한 대학생의 수가 무려 매년 300명에 이른다. 한편에서는 오히려 고등학교까지 경쟁에서 승리하였던 그들이 처음 패배를 맛보았다고 죽는 것은 나약한 것이고, 그만한 환경에 놓이지 않은 학생들도 무던하게 산다고 비아냥된다.
 
동정의 시각에서 “징벌적 등록금제”가 폐지된다면, 아니 냉소의 시각에서 더 어려운 학생들도 생각해서 굳건히 살라고 충고하면 학생들은 죽지 않을까? 카이스트를 포함하여 학생들의 죽음은 세상과의 모든 연을 놓을 만큼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이유 뿐 아니라, 당장 버틴다 해도, 결국 경쟁과 서열을 강제하는 구조를 벗어날 대안이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문대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극한의 경쟁에 생존해야 하는 한국사회 청년의 처지이다. 분노와 절망이 저항으로 표출되지 않고 포기로 매듭지어지는 것은 개인의 나약함에 있지 않다. 기성세대는 386세대의 패기를 청년에게 웅변한기도 한다. 그러나 20년 전 청년들이 유독 강해서가 아니라, 청년에게 나아갈 새로운 시대의 희망이 존재했으며, 그러한 사회운동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임을 잊으면 안 된다. 개인의 영달을 향한 끝없는 고군분투는 반드시 낙오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잠시 뒤쳐져도, 또는 못 쫓아가도 살만할 세상, 그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그 누구보다도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몫이다.
 
김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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