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노래가

나의 화분 2005/12/02 02:58
김남주 시인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1994년에 그가 죽었다는 비보가 어느날 밤 울려퍼졌고, 다급하게 그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 행사는 서울에 있는 경기대학교에서 열렸었는데, 지금 피자매연대와 전쟁없는세상 그리고 평화인권연대가 함께 들어가 살고 있는 아랫집이 바로 그 부근이다.
친구를 따라 그날 밤 서울 경기대학교에 올랐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의 시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의 시를 마음으로 이해하기엔 내가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길거리는 여전히 지랄탄, 최루탄과 화염병, 쇠파이프와 백골단이 난무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내 문화적 감수성은 뭔가 세련된 것을 원했던 것 같다.
 
얼마 전 미니의 블로그에서 김남주의 시 '시의 요람 시의 무덤'을 읽게 되었다.
깜짝 놀랐다.
20년 전에 쓰여진 그 시가 지금 내 생각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날그날의 투쟁이, 치열한 나의 삶이 내 음악의 요람이라는 것을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었다.
안락한 삶이야말로 내 음악의 무덤이 되리라는 것을 난 깊이깊이 체득하고 있었다.
내 간절한 염원을 사람들과 함께 이뤄내기 위해 나는 자연스럽게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노래들이 튀어 나왔다.
 
내가 집회에 가는 것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많은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서다.
미디어에 의해 편집되고 윤색된 단편들이 아니라 살아 꿈틀거리면서 불끈 튀어올라 펑하고 터질 것만 같은 이름 없는 풀뿌리 민중들의 생생한 소리를 내 두 귀로 직접 듣고, 그들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내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어서 나는 집회에 간다.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각인된 절규와 함성은 노래가 되어 흘러나오는 것이다.
 
저항이 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면서 노래는 내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산을 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모으고, 노래를 부르며 함께 일어나 마침내 노래를 부르며 새세상을 만들어가는 꿈을 내가 꾸고 있다면, 이미 시인 김남주는 20년 전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나의 시가
 
- 김남주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나는 또한 바라지 않는다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나의 시가
한과 슬픔의 넋두리로
설움 깊은 사람 더욱 서럽게 하는 것을
 
나는 바란다 총검의 그늘에 가위눌린
한낮의 태양 아래서 나의 시가
탄압의 눈을 피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기를
미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배부른 자들의 도구가 되어 혹사당하는 이들의 손에 건네져
깊은 밤 노동의 피곤한 눈들에서 빛나기를
한 자 한 자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들이 나의 시구를 소리내어 읽을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그들의 목젖까지 차올라
각성의 눈물로 흐르기도 하고
누르지 못할 노여움이 그들의 가슴에서 터져
싸움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기를
 
나는 또한 바라 마지 않는다 나의 시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 노래가 되고
캄캄한 밤의 귓가에서 밝아지기를
사이사이 이랑 사이 고랑을 타고
쟁기질하는 농부의 들녘에서 울려퍼지기를
때로는 나의 시가 탄광의 굴속에 묻혀 있다가
때로는 나의 시가 공장의 굴뚝에 숨어 있다가
때를 만나면 이제야 굴욕의 침묵을 깨고
들고일어서는 봉기의 창끝이 되기를.
 
 
시인의 일
 
- 김남주


수천의 시민을 학살하여
양키의 이익을 지켜주고
그 대가로 세자 책봉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장군인 너의 일이라면

총칼 들이대 민중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 위에 다시
쉴새없이 꾸며지는 음모의 소굴
복마전을 짓는 것이 너의 일이라면

홀랑 까진 마빡 위에 자르르 기름기가 흐르고
그 위에 학살과 저주의 낙인이 찍힌 채
양키의 부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이
반역자인 너의 일이라면

그리하여 이 강토를 더럽히고
그리하여 이 겨레를 욕보이고
그리하여 이 나라를 망신시키는 것이
패륜아인 너의 일이라면

이 자가 약탈한 전리품을 놓고
나도 한몫 끼고 너도 한몫 끼기 위해
똥파리처럼 몰려드는 것이
정상배들인 너희들의 일이라면

이 자와 한패가 되는 것만이
기왕의 재산을 지킬 수 있고
계속해서 민중의 피를 빨아 거대한 부를 쌓아올리는 것이
재벌인 너희들의 일이라면

이 자의 권력을 지켜주는 폭력기구가 되어
감시하고 체포하고 연행하고 감금하고
조사하고 구타하고 고문하고 치사하는 것이
검찰관인 너희들의 일이라면

민중의 피를 빠는 빨대가 되어
이 자의 자금을 조달하여 관리해주는 것이
이 자와 결탁한 재벌들의 재산을 늘려주는 것이
관리인 너희들의 일이라면

이 자가 만든 국회에서
이 자가 만든 법정에서
이 자가 만든 감옥에서
이 자의 모든 짓이
타당하고 온당하고 지당하고 정당하다고
부당하지 않다고
대변해주고, 합법화해주고, 감싸주는 것이
의원인 너희들의, 판관인 너희들의, 간수인 너희들의 일이라면
시인인 나의 일은?
이 자가 저질러놓은 범죄
그 하나하나를 파헤쳐
만인에게 만인에게 만인에게 고하고
민중들을 일깨워
일어나 단결케 하여
자유의
신성한
유혈의
전투에
나아가자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북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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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2 02:58 2005/12/02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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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ject: 김남주에 대한 기억

    돕헤드님의 [나는 나의 노래가] 에 관련된 글.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었다. 원래 집 좀 산다고 잘난 척 하는 아이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잘났는데, 부모잘만나
  1. stego 2005/12/04 19:32 Modify/Delete Reply

    어설프게 세상에 불만만 가득했던 고등학생때 김남주를 만난건, 이후에 내가 운동을 하게되는데 결정적인 계기였던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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