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는 친구에게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6/05/29 03:24
며칠 전에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투표할 거냐고.
 
그런건 안한다고, 나는 다른 계획이 있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그건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없고 무책임한 행동'이라면서 핀잔을 주었다.
그 친구는 찍을 사람이 없더라도 투표는 하라고 조언해주었다.
 
나는 투표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지배자들을 싹 쓸어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지배자의 이름만 바꾸는 행동에는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국가기관의 하수인들에게 내 신분증을 까보이고 싶지도 않지만 그따위 거짓 민주주의 권리 행사를 통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 호출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내가 국민이 된다는 것은 이 사회의 수 많은 비국민(非國民) 구성원들을 배제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수자들에게, 비국민 구성원들에게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십수년을 일하고도 여전히 시퍼런 강제추방의 폭력적 단속에 떨어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단 한 명이라도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나는 이 땅의 국민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가락이 잘리고, 팔이 잘리는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미등록이라는 신분적 제한 때문에, 윽박지르며 임금체불을 일삼는 자본가 돼지들에게 조리있게 항의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이 남아있는 한, 현대판 노예제도인 산업연수생 제도와 고용허가제가 완전히 철폐되고, 원하는 모든 이주노동자들이 합법화되어 노동비자가 발급될 때까지, 그리고 사람을 불법체류자로 만들어 무제한 노동착취를 하고 본국으로 강제추방해버리는 이 악랄하고도 차별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그대로 존재하는 한 내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주민등록증을 불태우고 자치를 선언한 팽성의 주민들이 황새울 논밭에서 단 한 명의 군인과 경찰들도 보지 않으며 그저 파릇파릇 성큼성큼 돋아나는 푸른 식물들과 함께 평화롭게 농사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이 땅에서 국민이라는 치욕스런 이름을 얻지 않을 것이다.  
 
그날 나는 투표를 하느니 친구들과 6월 4일 대추리 평화집회 준비에 몰두할 것이며, 팽성의 주민들과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을 당하지 않도록 민중의 힘을 모으기 위한 실천행동을 펼칠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촛불을 들 것이고, 노래를 부를 것이며, 목이 아프도록 외칠 것이다.
 
그날 내가 원하는 세상과 비슷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친구들에게도 한 마디 하고 싶다.
투표 용지가 6장이라고 하니까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게 표를 던지고, 남은 용지에는 미리 필기구를 가져가 다음과 같은 구호들을 크게 적어주었으면 한다.
 
"모든 군대와 경찰은 평택을 떠나라!"
"새만금 방조제 당장 걷어내라!"
"비정규직을 철폐하라!"
"노동비자 쟁취하자!"
"중증 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인 제도 당장 도입하라!"
"한미 FTA 즉각 중단하라!"
"이건희와 최연희를 구속하라!"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
"또는 당신이 외치고 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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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03:24 2006/05/29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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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2 : Comments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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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2006/05/31 11:13 DELETE

    Subject: 투표를 하자

    | 투표하는 친구에게 - 나이키? 아나키! 이런 정도의 이유가 아니거든 얼렁 가서 도장 콱 찍고들 오자. 잘 모르겠으면 그냥 4번으로 죽 밀고 와도 괜찮다. 어차피 안 될 사람을 왜 찍냐고? 투표가
  2. Tracked from 2006/05/31 13:39 DELETE

    Subject: 투표 거부에서 투덜거림만을 보는 당신에게.

    새벽길 님의 글 "투표를 거부한다는 당신에게" 에 대한 관련글 나는 이번 선거를 보이콧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아는 분이 후보로 나와서 그 분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
  1. stego 2006/05/29 06:37 Modify/Delete Reply

    좋은 생각이야. 난 아마 경기도지사투표만 할거같아. 나머지는 구호를 적어넣어야겠다

  2. pace 2006/05/29 09:58 Modify/Delete Reply

    그거 걸리면 선거법위반이라니 살짝 잘 해야할 것이야 ㅎㅎ

  3. isang 2006/05/29 12:32 Modify/Delete Reply

    세상이 그렇게 낭만적인게 아니잖아요 ㅜㅜ

  4. anisang 2006/05/29 15:54 Modify/Delete Reply

    세상은 충분히 낭만적으로 될수있어요 ^^;

  5. 김디온 2006/05/29 18:52 Modify/Delete Reply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당신의 정치적 판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론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내 고민을 솔직히 말하고자 한 것이었소.
    핀잔을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느꼈다니... 당혹. 혹은 유감..

    국가에서 강요하는 방식을 거부하는 방법으로 정치적 표현을 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나 역시 깊이 공감하고 있어.
    일종의 불복종일 수 있고.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정치적으로 의미가 없고 무책임하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어떤 정치적 실험, 혹은 실천이
    그 존재가 다른 행위(예를 들어 정치적 무관심)와 구별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지.
    그리고 새로운 방식, 혹은 실천이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때,
    당신의 바람대로 현실적 조건들이 만들어지는,
    그런 힘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외에도,
    나는 기본적으로 투표를 할 생각인데,
    집회를 할 때, 집회신고가 잘 받아들여지는 구청이 있는가하면
    그러지 않은 곳도 있다는 데에서,
    작은 지역구의 선거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야, 넘 구태의연하게 들리겠지만.

    '비국민'에 대한 논리는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고, 그것이 낭만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
    다만 그것이 '비국민'에 대한 소외를 개인적 신념을 표현하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적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할 뿐.

    따라서 찍을 사람이 없더라도 투표를 하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오해인 것 같다.
    네가 말하는 구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해나갈 수 있어보이는 후보와 당을 찾고,
    그에 투표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였지.
    찾지 못한다면? 그야, 나 역시 투표를 할 수 없겠지.

    이 문제는 특히 돕을 겨냥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고,
    지금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의 선거에 대한 환멸과
    실천 방식에 대한 논쟁이 실제로 분분한 바에 따라
    진지하게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이야.
    부디 오해를 거두어주시오.

  6. 2006/05/29 21:11 Modify/Delete Reply

    stego/ 내가 만약 경기도에 산다면 나도 김용한에게는 한 표 던질 생각이야. 내가 사는 곳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표를 찍을 만한 사람이 없다.
    pace/ 걸리긴 왜 걸리냐? 비밀투표소에서 몰래 쓰고 나오면 되지.ㅋㅋ
    김디온/ 네 글 잘 읽었어. 네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냐. 너와의 대화를 언급하면서 네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너가 그 짧은 대화에서 화두를 던졌기 때문에 그것을 화두로 삼아서 내 글을 풀어나갔던 것이지. 나는 선거에 대한 환멸 같은 것은 없어.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어올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기 때문이야. 민중에게 의미있는 변화는 민중이 스스로 투쟁할 때만 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선거날이든 무슨 날이든 그저 항상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실천들을 할 뿐이야.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후보에게 투표를 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에 의미를 보탤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2002년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에게 투표를 했는데, 그런 의미였거든.

  7. kdlpsd 2006/05/30 09:16 Modify/Delete Reply

    답답하네요

    이라크파병을 반대하고 평택미군기지를 반대하고 불안전노동(비정규직)을 반대하면서 그와 같이 행동하는 정당(민주노동당,희망사회당이건간에)에 투표를 하지 않겠다구요?

    그럼 님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방조하는거 밖에는 안됩니다

  8. stego 2006/05/30 13:39 Modify/Delete Reply

    은평구에도 초록정치풀뿌리네트워크 후보 구의원으로 출마하는거 같던데... 한 번 알아봐

  9. 2006/05/30 14:58 Modify/Delete Reply

    kdlpsd/정당의 행동을 지지하고 그 실천에 함께 하는 것과 그 정당에 투표를 하는 것은 다른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stego/ 모두 뒤져봤는데, 우리 동네에는 초록정치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

  10. foodggochoo 2006/05/30 21:11 Modify/Delete Reply

    트랙백 대신 블로그주소를 링크합니다. 대문 하나보고 물어물어 와보니 여기서 논쟁이 시작된 모양이네요.
    그런데 당신은 아나키스트인 모양이군요.

  11. 검은사슴 2006/06/05 23:49 Modify/Delete Reply

    투표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는 만큼 투표를 하지 않을 권리와 자유가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세상을 바꾸기 위한것이 투표만 있는게 아니니까. 투표를 할수 없어 답답했지만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이 방조하거나 모두들 아나키스트라는 말은 이상하다. 물론 방조하거나 아나키스트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나키스트가 잘못됐다거나 이상하다는 말은 아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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