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연대했을까
-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순회상영회에 관한 단상
2006. 10. 11. 나루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이하 ‘불타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나는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이면을 담은 기록이자 연대 그 자체이기를 희망했다. 이 때 연대는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또는 현장)과 카메라를 든 사람들의 연대이자, 지금까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영상작업을 해온 연출자들의 연대이면서, 그 결과물을 보는 관객들과의 연대이기도 하다. 현장이 다양할수록, 연출자들의 이력이 다양할수록, 상영하는 공간과 관객층이 다양할수록 더 좋다. 그래야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배급방식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기를 바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아우르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을 찾아가 만나고 싶었다. 작업을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우리는 과연 제대로 연대했을까. 배급에 관한 구체적인 평가는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 배급팀에서 준비했으리라 믿고 그동안 진행한 상영회 중 내가 참석했던 총13회의 상영회를 돌아보며 앞으로 조금 더 고민해야할 점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 배급에 대한 연출자들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2005년 12월 19일 이후 3월까지 이어진 기획 모임 당시 연출자들은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나 ‘공격적인(?) 배급’에 동의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이 촬영하기로 한 현장으로 흩어지면서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배급에까지 마음을 쓸 여력이 없었다. 연출자들에게는 ‘이 영화를 과연 5월안에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단편들은 완성된다 하더라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점이 가장 큰 숙제가 되었다.
5.18에서 6.10까지라는 의미심장한 상영 일정을 모토로 전국 각지의 상영 주체들을 조직해야했던 한독협 배급팀에서 이 영화의 배급에 관한 모든 업무를 떠안아야 했던 것이 미안하고 아쉽다. 그런데 총연출자였던 이마리오 감독 외에 다른 연출자들이 전혀 협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시간과 인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원주에서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 주요 도시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상영회가 조직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그간 꾸준히 상영네트워크의 토대를 구축해온 한독협 배급위원회의 노력이 맺은 결실일 것이다. 아직 영화가 완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결과물을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각 상영주체들이 보도자료를 통해 확인한 정보만으로도 상영회를 준비하고 평균 30명 이상의 관객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 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확인하는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2. 더 많은 관객과 보다 활기찬 상영회를 함께 만들기 위해 사전작업이 필요하다.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여러 영화제의 경우, 주최 측은 홈페이지와 관련기사 등을 통해 상영작들에 관한 정보를 미리 관객에게 공개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관객들은 그 영화의 제작진과 줄거리, 기획의도 등을 찾아볼 수 있고 연출자가 소속한 단체나 제작사의 홈페이지를 방문해서 보다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상영작 선정에 참여했던 프로그래머들이 그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견해를 가지고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기 때문에 감독과 관객의 소통에도 도움이 된다.
<불타는...>의 경우 공식블로그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연출자들이 소통하는 공간이라는 역할이 더 강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미리 영화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는 어려웠다. 그 대신 관객들이 자유롭게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제작, 공개했던 웹페이지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다. 영화제에서 놓친 독립영화를 특정 기간에 특정사이트로 접근해야 감상할 수 있었던 한시적 온라인 상영회를 넘어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이 영화를 다운로드해서 감상할 수 있고 자발적인 소규모 상영회를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운로드'용 웹페이지의 애초 의도였지만 다운로드를 했던 관객들 대부분이 활용이나 감상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 우리의 의도가 어느 정도나 공유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피드백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원인을 찾아 적절하게 대응한다면, 그래서 공식상영 이전에 웹페이지를 제작해서 영화관련 정보도 미리 전달하고 관객들과도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마당이 된다면, 앞으로 다른 프로젝트 작업에서는 보다 빠르고 광범위한 배급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불타는...>을 상영한 곳에서 이루어진 관객과의 대화는 대부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감동과 공감을 이끌어냈으나 가끔 매끄럽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상영장비를 당일날 대여받는 경우, 상영 도중에 비디오나 사운드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상영 시작시간이 연기되기도 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진행자가 영화에 대해 부적절한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고, 진행자가 관객의 입장에서 곤란한 질문을 던져 서로 어색한 상황이 빚어지기도 했다. 장비의 문제는 상영회를 시작하기 전에 한 시간 정도 점검할 시간을 가지면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지만, 상영작품을 소개하고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한 준비는 상영회를 기획하는 그 순간부터 상영회 직전까지 보다 치밀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불타는...>은 문제제기를 하는 영화이지 결론을 내리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영화는 아니다. 다양한 소재와 연출자들의 개성이 영화 안에서 서로 충돌하기에 각 단편들마다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어떤 점이 불편하고 무엇이 마음을 움직이는지 더 예민하게 듣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굳이 <불타는...>이 아니더라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은 중요하다. 거기에는 늘 ‘독립다큐멘터리’ 혹은 ‘독립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 반드시 있다. 그 자리가 한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문화를 접하는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보람있는 시간이 되기 위해서 감독은 물론이고 상영주체나 진행자가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고민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어떤 점을 강조하고 무엇부터 소개할 것인지 상영회에 참석할 감독과 사전연락을 취해 확인하거나 보도자료를 숙독해서 진행방향과 질문내용들을 미리 준비한 경우, 망서리던 관객들까지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면서 전체 분위기가 고조되는 곳이 있었기에 이후 더 많은 상영회가 계속 기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해 상영회 며칠 전부터 그 지역 온라인 매체와 관련 단체들의 홈페이지에 예고편 동영상을 올리거나 기사 작성도 마다하지 않고, 시내 곳곳을 누비며 포스터를 붙였으며, 보도자료를 인쇄해서 모든 관객들에게 배포하는 등 열악한 상황에서도 연출자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까지 최선을 다해 준비하셨던 많은 상영주체들께 감사드린다. 특히 100인의 상영준비위원이 마련한 울산 상영회는 여러모로 의미있는 자리였다. 그들의 세심한 준비과정과 당시 주최측이 관객을 대상으로 작성, 수집한 설문결과 등을 정리해서 상영네트워크에서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영화에 담긴 현장과 주인공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만나야 했다
이 영화의 상영료를 지역 상황에 따라 책정하고 그것을 모아서 투쟁기금으로 전달하자는 의견에 모든 연출자가 동의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대추리와 서울역의 KTX 노동자 농성장, 기륭전자, 새만금 등에 투쟁기금을 전달한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카메라로 연대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집회에 참석해서 기금을 전달하고 지지를 표현하는 것은 조금 어색하고 소극적인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기륭전자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그들과 함께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쉽다. 단편을 부분적으로 상영하더라도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서로 격려하는 기회를 가지기를 바랬지만 상영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거나 현장에서 영화를 볼 의지가 있었는데도 중간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할 주체가 없어서 무산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가 포착한 장면과 당사자들의 현재 모습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 간극의 실체는 촬영대상이었던 현장의 당사자들이 직접 확인해야할 것이다. 미처 담지 못한 것, 더 열심히 말해야하는 것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할 필요도 있고 연출자들이 그곳에서 느끼고 얻은 것을 당사자들에게 직접 전달해야할 필요도 있다. 그렇게 만나서 서로 조금이라도 힘을 얻고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다음에는 꼭 생기기를 바란다.
4. 속편, 혹은 또 다른 프로젝트에 대한 희망
<불타는...>이라는 독립영화의 신생아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은 이 영화를 본 어느 지역의 영상활동가들이 더 실험적이고 더 재미있는 프로젝트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나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이렇게 문제제기만 던지고 끝나면 안되지 않나, 속편은 누가 만드나, 속편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냐고. 그 때 마다 내가 했던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 당신이 누군가를 설득해서 같이 속편을 만든다면 이 영화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정말 뿌듯할 것 같습니다. 미흡한 부분을 다른 영화로 채워주세요.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면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라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목숨을 걸고 고독하게 공들여 작업하는 독립영화도 필요하고, 어느날 느닷없이 낯선 사람들이 모여 딱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후다닥 펼쳐놓는 이런 영화도 필요하다. 굳이 영화운동의 역사나 80년대 독립영화의 전통같은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거창한 뿌리를 의식하지 않아도, 모두를 압도하는 확고한 철학과 미학을 들이밀지 못하더라도, 화면에 담긴 변하지 않는 세상과 여전히 거칠고 흔들리는 카메라와 기술적 단점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쉬워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이런 작업을 서울에서만 하지 말고 어디선가 또 다른 사람들이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다양한 경험과 새로운 시도가 각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공유되기를, <불타는...> 이후 <대추리 전쟁> 과 <쇼킹 패밀리>를 통해서 다시 한번 조직력을 확인한 상영네트워크가 독립영화 배급의 허브일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독립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직접 생산하는 주체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카메라를 들고 다가갔던 현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이야기하고, 영화에 등장했던 주인공이 상영회에 참석해서 현장을 직접 이야기하며, 카메라 앞에서 울고 웃던 사람들이 스스로 카메라를 잡게 되거나 객석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던 한 사람이 멋진 영화를 들고 나타났을 때 우리가 <불타는...>을 통해 시도하고자 했던 ‘연대’는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참여한 상영회
5월 15일 미디액트를 시작으로 부산대학교,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원주 다큐멘터리 모임 나무, 인천 향촌만수동 철거대책위, 서울아트시네마(서울독립영화제 순회상영회), 성남 문화의 집, 카페 빵, 인하대, 대추리 투쟁기금 전달, 수원 다산인권센터, 울산 근로복지회관, KTX 승무원 투쟁기금 전달, 기륭전자 투쟁기금 전달, 서울 신촌상영회(사춘기회복 프로젝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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