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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캄보디아_2006 - 2006/11/20 23:51

[인생의 절정기]

 

사암으로 만들어진 사원, 죽은 병사, 패잔병을 위로하기 위한 사원.

탑이 총 54개인데 힌두교에서 신의 숫자로 일컬어지는 9의 다양한 응용 속에서 나온 거라고.

 

이를 테면 54를 2로 나누면 27 인데, 27은 9의 배수이자 '2 + 7 = 9' 이도 하다.

54에 2를 곱하면 108이 되는데, '1 + 0 + 8 = 9' 이다.

 

사원은 탑모양을 무너지지 않고 유지시키기 위해

설계가 끝나면 쌓기 전 탑 모양과 그대로 지하를 파서 홍토석으로 채워넣는다고 한다.

캄보디아는 화강암 다음으로 홍토석(라테라이트)이 많이 난다는 데,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단단한 돌이었나 보다.

 

가장 높이 솟은 중앙탑은 불가의 수미산을 뜻한단다.



탑의 위쪽은 온통 사면불인데, 대승불교와 신왕사상이 결합한 작품이다.

이 사원 역시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건데, 원래 자야바르만 7세는 신분이 낮은 터라 성행하고 있던 힌두교의 계급사상을 누르기 위해 일부러 평등 사상을 강조하는 대승불교를 도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왕까지 평등해지는 건 싫었는지, 원래 횡행하던 사상을 깨기 힘들었는지,

'왕은 신'이라고 여기는 신왕사상을 그대로 살려, 사면불의 얼굴은 모두 왕 자신의 실제 모습이다.


 

바깥 벽의 부조에는 왕과 사람들의 생활상이 담겨 있는데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아래단에 전장터로 나가는 무리들이 보이는데,

문관 -> 화교상 -> 무관 -> 일반인들의 모습이 차례로 보인다.

 

문관은 싸우러가는 건 아니고 무관들을 격려하기 위한 행렬 참가


 

7세기 이후 중국에서 화교들이 들어와 차, 탕재, 실크, 마사지 등을 들여왔다는데, 부조의 옷차림만 봐도 중국인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건 무관의 모습. 캄보디아는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남자건 여자건 상의는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의 행렬이 나올 무렵, 무관인 남편에게 자라를 챙겨주는 부인의 모습이 정말 현실감있다.ㅋㅋ


 

아래는 왼쪽 마지막 부분에 있던 학교의 모습이라는 데, 위의 1,2층은 학교이고, 3층은 술먹고 노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3층의 술먹고 노는 사람은 화교라고... 나름 인종 차별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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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0 23:51 2006/11/2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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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캄보디아_2006 - 2006/11/19 14:29

[인생의 절정기]

 

캄보디아에 가봤더니 사원이 한두개가 아니더라.

이 나라의 역사를 보니 사원이 단순히 사원이라 아니라 도시여서 한 왕이 즉위하면 대부분 사원을 짓는데 그 사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살다가 왕이 죽으면 사원 어딘가에 묻는다고 한다. 

그리고 새로 왕이 세워지면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또는 종교가 달라서 새로운 사원을 새로운 곳에 짓기도 하고,

있던 사원에 이것저것 증축하기도 하고...

캄보디아는 힌두교, 불교, 도교 등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었는데 사원마다 종교들의 특성이 배어있다.

 

타프롬 사원은 자야바르만 7세라고 사원 엄청 많이 지은 왕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헌사하는 사원이었다.

일명 '나무사원'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나무 자체가 사원과 합체된 듯한 모습이 기이하다. 

무심하게 자라난 나무로 인해 사원이 파괴된 듯 싶지만, 반대로 오랜 기간 지나고 나니 오히려 나무가 사원을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느낌이다.

덕분에 복원 없이 - 사실은 나무 때문에 복원을 못해서 - 원래 건축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조만간 복원공사가 시작될 예정이라고.

 





사원 입구에서부터 울창한 밀림의 모습이 간직되어 있다.

 

 

 

나무와 완전히 하나가 된 모습


 

특히 이 나무에서는 사람, 코끼리, 뱀, 악어의 모습이 각자 나무의 줄기를 따라 승천하려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캄보디아인들은 자신들을 뱀족의 후예라고 생각하나보다. 모계사회에서 왕도 무조건 뱀족의 딸과 혼인을 해야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머리가 7개 달린 나가상은 신화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도심 곳곳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원을 무너뜨리는 나무 옆에 있는 나가상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타프롬사원에는 '공명의 방'이라는 곳이 있다. 왕의 어머니의 사리를 모셔놓은 사리탑인데, 왕이 이곳에서 어머니 잃은 마음을 담아 가슴을 치면 반경 7km 사람들에게까지 울렸다고. 그러다가 손뼉을 치면 울리지 않게 된다.

그런데...

진짜 이 안에서 가슴을 쳤더니 울린다! 7km 까지는 몰라도 어떻든, 심장 박동이 점점 공명한다 (O.O)! 

지금은 구멍만 남았지만 보이는 구멍마다 보석들이 박혀있었다는데, 해가 진 저녁 달빛이 비추고 있을 때 이 방 가운데 서있다면 그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자야바르만 7세는 불교를 들여왔기 때문에 특히 사원 내 여신상은 관능미보다는 온화하고 절제된 미소로 상징되는 불교스러운 절제미가 돋보인다.

물론 왕 죽고나서는 힌두사원이 되었다고...



 

캄보디아 가이드가 아래의 두 여신상이 타프롬사원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주었다.^^


 

 

중간 중간에 보이는 조각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확실히 캄보디아 사람과 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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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9 14:29 2006/11/19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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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캄보디아_2006 - 2006/11/18 15:33

[인생의 탄생기]

 

3000여개의 섬이 있다는 베트남의 하롱베이.

섬이 섬으로 가려져 수평선이 안보일 지경이다.

 

'용이 내려온 만'이라는 뜻의 하롱베이는

마치 용이 꼬리를 내려치며 만든 물보라 하나하나가 섬이 된 듯 하다.

그 웅장하면서도 압도하지 않는 고요함이 마음의 평온을 안겨준다.

 

태어나기 전 원래의 품으로 돌아간 듯,

내 안 문화와 자연의 균형을 맞추려는 듯,

문명의 더러운 때를 벗으려는 듯,

깎아지른 절벽도, 나무도, 풀도, 물도, 물고기도, 새도, 하늘도 무척이나 그리운 친구와 같이 함께 하고 싶다.

자연의 도리를 모르는, 또는 망각한 내가 답답했다.




스치는 섬들 사이로 수상가옥이 눈에 띈다. 이들은 평생 물위에서 기거를 한다고.


 

 


 

 


 

베트남엔 석회암이 많단다.

하롱베이의 섬들 중에도 석회동굴이 많은데, 그중 가장 크다는 sung sot 에 들렀다.

'용이 승천한다'는 의미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지상에 내려온 용이 기거하던 장소란다.

사냥꾼 때문에 다시 승천했다고 하던데, 그 용을 너무나 사랑해서 함께 하늘로 올라가려다 실패한 이무기 모양의 돌도 있고, 용의 승천하는 모습이나 거북이, 개구리 등 그야말로 돌과 물이 만들어낸 100% 자연산 조각품들이 곳곳에 숨어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동굴 사이즈를 보라!

정말 용이나 고대인이 살던 지하도시라 해도 믿을 판이다. 뭔가 스토리가 없기엔 너무 거대하다.

불현듯 '반지의제왕'에 필적할만한 초대형 판타지 스토리와 촬영세트일 것 같다는 생각에

동굴에 얽힌 전설이 점점 궁금해지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석회동굴 천장과 좀 다르다고 느꼈을 텐데, 이 동굴이 이미 죽은 동굴이라 천장이 둥글둥글하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벽화로 새긴 듯한 느낌.


 

태앙 빛이 쏟아지는 듯한 저 곳으로 용이 날라갔다고...


 

 

이 모습은 용이 나갔다는 동굴 출구에서 동굴 안쪽을 바라본 모습.


 

 

관광객이 많아서 그런 지 식당과 침실까지 구비된 선박들이 많이 떠있다. 역시 프랑스 점령지의 역사가 있어서 유럽풍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참고로 베트남의 집이든 배든 색깔이 원색은 아닌데 꽤 강렬한 파스텔들이라 자칫 미관을 헤칠 듯 보이지만 워낙 자연이 풍성하게 함께 하고 있어 전혀 위화감이 없고 멋들어졌다는 느낌 뿐이다.


 

 

DAO TITOP(영어 아님)라는 해안이 있는데, 호치민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러시아 우주비행사의 이름이다. 그가 베트남에 왔을 때 호치민이 직접 가이드를 했다는데, 이 해변을 보고 너무 아름답다며 극찬을 했다고..

모래사장이 30~40미터 정도 되는데 주변 풍경이 정말 훌륭(-.-)b

특히 424계단을 올라 높이 90미터 위의 팔각정 전망대에 오르면 주변을 두르고 있는 끝없는 섬들의 모습이 한눈에는 다 안 들어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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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8 15:33 2006/11/18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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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캄보디아_2006 - 2006/11/06 21:16

올해 내내 앙코르와트를 보겠다고 노래했었는데, 결국 뜻을 이루었다.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 적당한 패키지 상품에 만족했고,
휴가기간도 짧으면서 그 와중에 여러 나라 구경해보겠다고 베트남+캄보디아 4박 6일을 선택했다.

다녀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캄보디아 유적은 나중에 일주일정도 잡고 도보로 쭉 돌아다녀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복병인 베트남이 끼면서 뭔가 예상치 못한 줄거리가 있는 여행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여행에서 순서대로 감상하게 된 베트남의 하롱베이 -> 캄보디아의 사원들 ->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고요하면서도 거대한 태초의 자연미 -> 인간 고도의 창조력과 삶이 진하게 묻어나는 화려한 인공미 -> 수많은 죽음 앞에 목도되는 경건함과 인간 잔혹성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고,

이는 인생의 탄생기 -> 절정기 -> 마감기를 한바퀴 돌아보고 온 것 같은 진한 감동을 주었다.

일단 이건 다음 기회에...

 

이 모든 곳을 돌기 전, 베트남에 도착하고나서 가장 먼저 관광가본 곳이 호치민 광장과 살던 곳이다.

 

처음 들어선 호치민 광장은 그저 탁 트인 공간만 전부인 것 같은 삭막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본인은 죽으면 재를 나무에 뿌려달라고 했던가?

하여간 그런 비스꾸므리한 말을 했다던데 후대에서 괜히 시체 가지고 썩지 않도록 하고 전시하는 모양새가 장난쳐놓은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저 석기둥 잔뜩 세워진 곳이 호치민의 묘인데, 지금은 시신이 러시아에 가있다고...





그러나 그 황막한 광장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딱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 엄청난 크기로 나부끼는 베트남 깃발이다.

새빨간 바탕의 노란 별 모양은 뜨거운 열대 지역의 태양빛을 잔뜩 머금고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는 느낌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빨강은 '혁명의 피와 조국의 정신', 별의 5개 모서리는 '노동자·농민·지식인·청년·군인의 단결'을 상징한다고 한다.

 

광장에 대한 실망감을 품고 있던 찰나, 광장의 뒷편, 호치민의 살았다던 곳을 구경하러 꺾어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왠걸~!

앞은 그렇게 아스팔트 빼곡히 발라놓아 삭막하더니만 뒷쪽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의 존재를 압도해왔을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들이 쭉쭉 뻗어있다.

 

그 사이로 안어울릴 것 같은 샛노란 색의 궁전이 은근히 어울림을 뽐내며 서있다.

원래 호치민더러 저기 살라고 했는데, 너무 크고 화려하다며 '정원사의 집'을 주면 거기서 살겠다고 했단다. 그 다음부터는 외국의 국빈 숙소로 탈바꿈했다고.


 

중간중간 나무들이 꽤 장관인데, 이 나무는 2개의 나무가 서로 얼키고 설켜 함께 자라고 있는 모습이다.

 

노란 궁전의 더 뒷편으로 걸어가다보면 단층집이 몇개 나오는데, 호수 근처에 있는 저 집은 호치민의 집무실이었다고 한다.

베트남은 집 색깔이 원색적인 것 같으면서도 매우 자연과 조화롭고 아름답다.

아니다.

나무가 많아서 그런건가?

자연이 그 울창함으로 제대로 감싸안아주고 있는 것일까?


 

호치민 집무실의 책상과 그 위에 붙어있는 마르크스, 레닌의 초상.

 

호수를 끼고 집무실 맞은 편에는 바로 호치민이 살았다던 그 집이 보인다.


 

아까 그 노란 궁전 대신 살았다는 집. 이 집도 왠지 정원사 대신 살 사람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할만큼 정취가 만만치 않은 걸.(편견인감? 그냥 이 동네 정원사는 이렇게? ) 계단을 올라가면 정확히 양분하여 침실과 서재가 있다. 정말 멋드러진 곳이다.


 

 

호수 주변에는 망고나무가 작은 밭에 심어놓듯 정갈하게 심어져있다.

호치민은 호수에서 고기 잡아먹고, 망고 가꾸고 따먹는 게 취미생활이었다고 한다.


 

베트남은 나무를 절대 함부로 베지 않는다고 한다. 그 덕에 도로 확장도 하지 않고 교통 체증이 심해지고 있다고. 이대로 개방정책이 가속화되면 과연 이 아름다운 정책이 잘 유지되려는 지 모르겠지만, 화장실 가운데 우뚝 솟은 나무가 멋지기만 하다.


 

 

기둥 하나 위에 세워진 절이라 하여 '일주사'. 둘러싸인 연못의 연꽃과 어우러져 운치가 장난이 아니다(O.O)b

 

일주사 올라가는 계단 난간에 붙어있는 이 녀석. 정체는 알수 없으나 정말 귀엽다.

 

 

이번 패키지에 함께 동행했던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호치민처럼 한 평생 목적과 사명에 충실한 활동가는 과연 무슨 재미로, 무슨 행복으로 살았을까 궁금했다고.

특히 호치민은 사생활이 무지 깔끔했나보다.

남녀 통틀어 나도는 연인 얘기도 없고 결혼도 안했고, 크게 알려진 놀이문화도 없고, 도박을 즐겼을 리도 없고... (사실 별로 자료 찾은 게 없어서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이대로의 사실만 보자면 그야말로 일 중독에 빠진 전형적인 활동가의 모습 아니겠느냐고?

 

그런데 살던 곳을 보며 깨달았다고...

 

'즐길 거 다 즐기며 제대로 살았구만!

활동가들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데!'

 

나도 적극 동감!

 

그곳에 가면

망고 나무 가꾸고 호수에 잉어 키우면서,

생선찜 요리와 과일을 즐기면서,

나무와 호수와 열매와 생선이라는 자연들을 벗 삼을 줄 알았던 여유로운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은 그저 일 뿐인 것 같은데, 희한하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면 그 일 속에 사람이 묻어난다.

사람 마음이 조급하면 조급한 모양새로,

사람 마음 품이 넓직하면 일도 크게 품은 모양새로 나온다.

 

특히 사람 별로 없는 운동 진영에서 활동가들이 하는 일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기왕이면 좀 더 넉넉하고 여유롭고, 거칠 것 없는 소통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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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6 21:16 2006/11/06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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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2/01 20:18

.광개토대왕시기의 고구려

(아래의 내용은 호태왕비에 수록된 것임)

 

- 남만주 지역에 고구려 건국 100년전부터 중원의 지방정원인 현도군과 요동군 존재.

현도군은 한무제때 조선 동북부와 동만주를 지배. 그 뒤 고구려 판도내에 귀속되면서 혈전.

요동군은 중원 정권의 한개 변방 군현. 고구려에 의해 현도군이 무순으로 쫓기자 요동군이 부분을 현도군에 주고 고구려에 대항(400여년간).

5호 16국시대 모용선비 쳐들어와 미천왕 무덤 유물 도굴당하고 봉호라는 신하호칭 받는 치욕받음.

광개토대왕때 모용선비가 신성과 남소성 침략하자 숙군성 공격하고 요하벌 진출. 이후 북연과 중원들과 화친.

장수왕도 안정 고수. 이후 남방진출 도모

 

- 내몽골 동부 선비족은 거란, 고막해 ->8개부로 발전.

광개토대왕시기 392년 친히 거란 정벌. 포로 500여명. 소수림왕시기의 고구려 포로 10,000여명 귀환.

8개부중 비려가 계속 침략. 395년 다시 정벌.

당시 고구려군은 중국의 富山, 負山 거쳐 염수까지 들어가 무순 이남지방의 비려 3개 부락 600~700영 점령.

그 뒤 거란은 오늘의 대릉하 동쪽에 정착.

 

- 동부여는 고구려와 같은 족속. 초기 강성. 3대 대무신왕에 패해 고구려 부속국으로 전락. 훗날 중원과 연맹해 고구려 견제.

태조왕태 현도, 요동 등의 군현 및 고구려와 대적. 242년 관구검 침입시 위를 도움.

광개토대왕 말년 고구려는 동명왕 때부터 부여가 속국임을 운운하며 410년 국도 함락. 494년 완전 통합.

 

- 311년 고구려의 낙랑군(평양벌) 점유와 백제의 대방군(한강벌) 점유로 국경 접한 고구려 백제 100년간 혈전. 고국원왕때 백제가 평양성까지 침입.

광개토대왕 즉위후 첫해(391) 13개 백제성과 관미성(백제의 북침거점) 함락.

5개성 찾은 백제는 394, 395년 고구려 침입. 396년 고구려는 백제 정벌 단행. 한강 건너 서울까지. 백제는 항복후 1,000명 포로, 베 천필, 58개성, 700여 촌 바침.

황해 남, 경기 북, 서해안이 고구려에 복속됨. 광개토대왕은 백제왕의 아우와 10여명의 대신 데리고 개선.

397년 백제는 왜와 손잡고 398년 한산 북쪽까지 군사 출동. 다음해 신라 공격.

고구려는 신라의 군병 요청에 4000년인 해 50,000 보병과 기병 파견, 신라 구함. 신라는 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찾아가 감사.

404년 백, 왜 연합이 대방지구까지 침입. 적의 허리를 끊는 광개토대왕의 전술로 왜 침은 끝남.

407년 백제 정벌.



.위 기록은 호태왕비에 수록됨

 

- 그러나 중국고서적과 삼국사기사이에 어긋난 점이 있다. 신빙성은 크지만 글자 마모가 심해 해석 논쟁이 끊임없음.

국내성 지역은 청조부터 200년간 봉금지역. 청 말 봉금령 해제되면서 호태왕비 발견됨.

처음엔 이끼로 인해 몇자만 탁본. 초기 쌍구본 탁본 -> 석회탁본 : 학술상 글자 모양 논쟁 조성됨. 의도적 역사 왜곡 논쟁 야기(석회로 글자변조).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가 일본이 왜곡한 왜, 도, 해, 파(矮, 渡, 海, 破) 자를 폭로.

기타 나라에선 "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백제, 왜, 신라를 파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고 해석.

이 밖에 20년대 초 화재, 관리 부실, 글자체 뒤섞임으로 해석 어려움.

 

 

.호태왕비는 태왕릉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인가?

 

장군총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이 없다. 규모 어울림. 태왕릉과 비 사이엔 다름 무덤들이 있다.

묘비석 안치 습관이 광개토대왕부터 무덤위로 바뀌었다는 것이 태왕릉비에 나옴.

태왕릉은 서향, 비는 동남향.

태왕릉의 비라는 주장 근거

- 비와 묘 사이 무덤은 고구려 이후 후세의 것. 비와 장군묘 사이엔 큰 개울이 흐름.

무덤이 무너질까봐 비는 평지에 세운 것이다.

방향은 시대적 차이(묘는 광개토대왕 시기, 비는 장수왕 시기)로써 관념이 교체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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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0:18 2005/02/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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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30 19:50

* 오랜만에 1997 중국여행 글 재개...

고구려 문화에 대한 글은 아마도 [고구려 문화유적 산책] (1996,김삼,재단업인 대륙연구소) 내용을 축약해서 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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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集安)

 

 - 고구려 유리왕 22년(서기 3년)부터 장수왕 15년(서기 427)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 

고구려의 전기부터 중기,말기 초반까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중국 길림성 남부에 위치한 행정구역상 길림성 통화시에 소속.

집안은 통구 분지에 위치하였으며 통구분지는 압록강 중류 일대에 위치한 폭이 좁고 길며 비교적 큰 평원이다.

동서 길이 10km 남북 폭은 약 5km이다. 노령산맥에서 발원하는 통구하는 북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른다. 동쪽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을 마주하는 집안시는 지리적으로 오랜 동안의 수도로서 입지조건을 완벽히 갖춘 지역이다.

12,000여개의 고분군과 국내성, 환도산성,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이 있다.칠개정자관액등이 수상통로 통제초소였다.

 

 



. 국내성(황성옛터)

 

- 원래 졸본(요녕성 부근)에 도읍했던 고구려는 주변 세력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자원이 풍부한 내지로 천도.

성터 북쪽은 노령산맥, 남쪽은 압록강이 있는 충적평야, 북으로 5.2km의 환도산성이 있음.

짐승과 야생수곡이 풍부. 수렵경제 발달. 강수량 많고 기온 높음.

통구하와 압록강 합쳐지는 지점으로, 물고기 많고 수상운송 편리.

장수왕의 평양천도전까지 약 425년간.

국내성은 장방형으로, 동벽이 554.7m, 서벽이 664.6m, 남벽이 751.6m, 북벽이 715.2m, 총둘레 2686m.

평지에 있음.

남벽 서쪽은 3~4m 높이로 잘 보존. 동벽은 2~3m 높이로 파손 심함, 가옥이 쌓여있음. 북벽은 밑부분만 곧게 뻗어있다. 성곽은 동북쪽만 둥글고 나머지는 직각.

전국시대 유물도 발견(고구려 이전에 이미 토성 존재). 이는 고구려의 전신이라는 주장과 한사군의 고구려현 치소라는 주장이 대립중. 유물이 BC 1000년 것이므로(한사군 설치 전) 첫번째 설이 신뢰 감.

고구려 10대 산상왕 때 환도산성을 국도로 정하나 요동 침입. 다시 국내성으로 국도 옮긴 후 고국원왕시 재축조. 또한 후기 태조왕조, 1921년 초기 만주국시기에 재축성.

북벽만 순수 고구려 성곽. 층계식 축조는 고구려식. 크고 육중한 돌로 쌓고 작은 돌로 가공. 축성법. 장방형 석조. 안쪽으로 4m 자연석을 규칙적으로 쌓고 외벽 결구가 치밀. 성벽속에서 동기, 철기, 도자기 조각 발굴. 석재가 불균일하여 위아래 다름.

원래 4방 6개 문 있었는 데 국공전쟁때 소멸. 집안시 주도로인 승리로는 동쪽 집문문과 서쪽 안무문 연결 통로.

길이 8~10m, 너비 6~8m의 치들은 서로간 50~80m 거리 둠(화살 명중거리 계산한 설계). 42개나 있다(높은 방어력).

요동 공손도, 위 관구검(247), 모용선비 진공(342)에 함락.

이후 시대엔 낙랑, 현도, 요동(한반도 북부), 신라, 백제, 왜(남부) 제패하고 부여도 병합, 말갈도 복속시키는 번영 누림. 이러한 고구려 번영설은 일제 사관(만주국의 합리화 위한) 에 의한 과장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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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도와 압록강

 

- 남도, 북도(육로), 압록강(수로)은 국내성의 3통로. 고구려의 혈맥이자 침입경로.

통화->집안까지 버스길은 북로 그대로 사용. 북로는 완만한 반면 남로는 험난.

모용황이 342년 남로로 침입하여 환도산성 함락됨. 고국원왕때이던 이때 북도에서 고구려군 승리(관마산성). 혼강 ~ 국내성 은 90km, 관마산성 ~ 환도산성 53km.

압록강은 동북 -> 서남으로 흘러가는데, 봉오리가 험해져 물살 세짐. 이후 강면 넓어져 유유.

배는 외차하 일대에 정박, 사람들은 달구지로 물건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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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

 

-  국내성터 동으로 4km된 우산 남쪽 기슭에 위치.

대지 한가운데 정방형. 방단계단식 석실묘.

2번째로 크며,  장군묘의 5배 크기. 파괴 심함.

첫계단 기단은 6겹 석조로 쌓음. 석조는 2m, 매 계단은 장방형 석조.

위의 석조를 안보다 들여 쌓고 밀리지 않도록 홈과 턱을 쪼아 맞물림. 7층 높이(지금은 소실).

제일 꼭대기 설치된 묘실은 한 변 길이가 2.8 m 인 정방형. 무너져 내려 공간 거의 없음.

묘실내 돌판은 5.4m * 4.2m (이 돌판은 총 13.5m 높이에 있다.)

외장력 방지 위해 화강암 거석 버텼으나 실패(20개 중 7개 소실).

왕릉 남쪽 180m 에 제단으로 추측되는 8각기등 받침과 주춧돌 있음.

[태왕릉이여 산악처럼 견고하라]라고 무늬기와에 쓰여있음

광개토대왕 == 19대 담덕왕 ==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 영락태왕.

호태왕비문 유적을 통해 광개토대왕 무덤임이 증명(태왕 명칭은 광개토대왕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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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  피라미드 모양. 방단계제식 석실묘. 화강암. 토구자산 빠져나오면 보임.

12.4m 높이. 무덤바닥 한변 31.5m. 밑면적 960제곱m, 위면적 270제곱m,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석실묘. 1100여개 석조 사용. 석재량은 6000세제곱m.

이전 무덤이 내부에 강바닥 자갈을 깔은 반면 겉벽이라도 석조로 구성. 묘실은 3층계단에 설치. 무덤길은 5층 계단 가운데 축조.

정방형 묘실. 외장력 고려해 묘실 작아짐. 내벽은 6층 석조로 쌓음. 천정과 어기는 모서리에 각기 큰 석조로 대들보 만들어 1층 겹침 형태로 천정돌과 만남. 천정은 거대한 석판(50톤, 60여 평방제곱m).

관대 2. 유골, 유물 도굴당함. 묘실은 서남향이고 4각은 방위선상 위치.

일출, 일몰 볼 수 있다. 무덤 꼭대기 윗면은 흙으로 다져짐. 변두리 석조 윗면에 일정간격으로 20여개 구멍(기둥박은 흔적). 남벽 (묘문)은 도굴 당시 깨져 바윗돌 형태로 잔존. 묘 동남쪽 20m 에 묘에 고인 물 나오는 함동 있음.

고구려는 일찍부터 무덤을 만드는 풍속 있어 평양 천도한 장수왕 묘로 추정됨. 산상왕 묘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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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단계제석실묘

 

-  정밀가공석조로 기초석 계단 다지고 그 안에 낙석을 같은 높이로 채움.

외관 웅장. 피라미드 모양으로 2~7층까지 쌓음.

4세기 중 출현하여 1세기동안 유행. 4세기 들어 토묘로 교체(평양천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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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

 

-  집안시 동쪽으로 4km거리인 우산기슭 구릉지대 위치. 남으론 압록강, 동으로 용산기슭에 의지해 통구평야 한가운데 위치.

묘역시설이 소멸되어 태왕릉과 별개로 보임.

37톤. 방주형 옹근 통돌 손질. 1775자 새김. 높이 6.39m, 밑부분 너비 1.34 ~ 1.97m. 꼭대기 너비가 1~1.6m.

화강암. 장수왕이 광개토왕 위해 세움.

비의 내용 : 고구려 건국신화, 광개토대왕의 위엄과 영토 확장의 공로, 비석과 능묘 지키는 수면인연호의 내력과 직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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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30 19:50 2005/01/3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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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08 09:21

20:10 부터 기차 정류장안의 의자들에 일렬로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팀은 줄을 너무 잘 지킨다. 이 많은 사람이 때거지로 다니는데도 1명의 낙오도 없다니... 오랜만의 줄서기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씻지도 못하고 21:20 열차 탑승.

이 열차를 타고 통화에 가는데 다음날 새벽 5시 반까지...

 

열차안에 들어올때와 침대칸에 런닝셔츠바람의 사람들이 우리를 원숭이 보듯 쳐다봤을때,

우리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 열차는 침대차로, 침대가 세로로 3칸이나 된다.
하지만 외관상으로 느껴지는 거부감과는 달리 3층 침대에 올랐을때 아이처럼 들뜬 마음은 나만의 기분은 아니었나보다. 모두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이야기한다.


열차 1량의 모양

 

맨 위층인 3층에 올라가면 바로 발 밑으로 중형 선풍기가 135도 가 넘는 각도로 돌고 있다.
정체불명의 한국아저씨가 간간히 중국인들과 바디랭귀지로 이야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함께 여행중인 언니는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은데, 3층에서 내려갈 엄두가 안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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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8 09:21 2005/01/0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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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08 09:13

13:45 북경-> 심양 비행기로 출발, 15:00에 도착했다.
신락유적박물관에 갔다.

신석기 문화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 모든 한자 지식으로 해석한 결과- 원까지의 유물이 있었다. 나는 주로 글씨를 사진으로 찍었다. (*주: 당시 서예 배우고 있었음...)



다음 간 곳은 북릉공원. 원래 이름은 소릉. 18:00까지 있었다.
공원 입구로 들어가면 양쪽에 잔디와 사람들을 지나 큰 호수와 다리가 있다. 서울랜드+올림픽 공원 온 기분이다.
문의 가장 안에 북릉이 있는데 무덤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라 문에, 성벽에, 묘비 모시는 기와집에, 릉을 둘러싼 본성까지 있다.


비 크기는 가히 광개토왕비와 자웅을 겨룰 수준. 릉도 무지 큰데 아직 내부는 볼 수 없다. 시멘트를 잔뜩 발라놨더라...-_-;;

무덤 꼭대기엔 나무가 있는데 그 위에 까마귀가 앉은 걸 보고 명당 자리라고 추정했다고 한다.
릉으로 들어가는 무덤 문 바로 맞은 편엔 제를 올릴 때 쓸 제기가 있고 그 위 기와에는 철로 된 고리와 막대같이 생긴 걸이가 양쪽에 한개씩 있다. 거기에 사람 잡는 괴물을 가둬놨었단다.


북릉공원 전경

 

저녁식사후에 사거리로 나와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건물의 배치나 높이가 마치 언젠가 가 본 일산 신도시와 비슷했다. 비록 낡아보이고 촌스럽지만 왠지 친근한 기분. 사람들 옷차림에선 세련된 여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마치 여러 연대기가 공존하고 있는 기분. 하긴 한국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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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8 09:13 2005/01/0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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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_1997 - 2005/01/03 22:06

천안문으로 가는 지하도는 평평하고 시원해 걷기에 좋았다.
루를 오를때 요금이 있다더니 받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牛門을 들어가면서 55元짜리 티켓을 받았다.
(국내외인 요금차별이 평등화되어 국내인표는 오르고 국외인표는 싸졌다.)


티켓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차례로 있는 사진이 들어있다.


보화전



태화전

 

중국에서는 태화전과 같이 기와가 많이 휘고 처마 거의 끝에 봉황을 탄 사람 형상이 많을수록 높은 급의 殿으로 친다.
태화전에는 11개의 봉황과 사람이 있다(제일 많다).


태화전 : 황제 즉위, 황후 즉위
중화전 : 태화전으로 나오기 전 황제가 쉬는 곳.
보화전 : 사신 접대 파티와 과거시험 장소.

 

자금성은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이고 가운데 큰 길이 있다. 이 길은 황제만이 걸을 수 있으며, 예외는 황후가 즉위할 때와 장원급제자가 화관 쓰고 들어올 때의 2가지 경우 뿐이다.

중국의 궁, 전은 매우 규모가 크고 복잡하다. 무늬가 매우 자잘하지만 규모가 넓어 결코 조잡해보이지 않는다.

 


용무늬가 특히 많은데, 표정들이 각양각색에 너무 귀엽다.
일본만화의 경우 소재만 본뜬 줄 알았더니 얼굴 형태도 그대로 모방한 듯 하다.

궁을 지키기 위한 사자상도 많은데, 외조에 있는 사자상들은 앞발을 들고 뒤는 앉은 꼿꼿한 자세에 머리가 곱슬이다.

 

내정으로 들어가면 사자도 다양하다.

 


특히 마지막 어화원의 사자는 머리가 하늘로 뻗쳤다.

 

황제를 위해 화산에 있던 돌(구멍 많고 구멍끼리 통함)로 쌓고 정자를 세운 곳도 있다. 그 밑의 돌사자는 선반을 받치고 있어 매우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그 정자에서 황제가 술을 밑으로 떨어뜨리면 구멍을 따라 나온단다. 굉장히 멋있다.

 

자금성을 다 돌아보고나서 점심 먹으러 식당 도착. 오리구이, 음~ 맛있어.

12:10에 공항으로 가는 버스 탑승. 또 연희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금성에 (정원 빼고) 나무가 없는 이유?'

첫번째, 나무를 심으면 궁전의 위상이 사라진단다.

두번째, (떠드느라고 못들었음...-_-;;;)

세번째, 자금성은 정방형(口). 그런데 그 안에 木을 쓰면, 곤경에 처할, 갇힐 곤(困)자.

황제가 스스로 만든 궁에 갇힐 순 없잖아?

 

자금성 바닥은 돌이 빽빽히 깔려 있는데, 황제가 누군가 굴을 파 쳐들어올까봐 바닥돌 틈새를 모래로 채웠단다. 그 중 하나만 돌을 빼도 전체가 와르르 무너진데. 그런데 어떻게 깔았나는 떠드느라 또 못들음...-_-;;

 

버스안에서 밖을 보니 옥수수밭이 쫘~악. 역시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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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3 22:06 2005/01/0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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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여행 - 2005/01/02 22:30

음... 정말 어쩌다 여행이었죠. 너무 가기 싫었고, 오가는 길에 멀미 엄청 했으며, 해돋이 말고는 별 일정이 없어 연신 먹기만 한 이상한 여행...

그래도 해돋이 만큼은 잘 본 것 같아요.


 

소원을 비는 나무예요.

 

공연도 했었는데 딴 건 별로 재미없었고, 이 북 공연은 아주 재미있던데요.

 

오랜만에 보는 폭죽놀이도 멋졌고...



 

 

그러나 메인이벤트는 역시 해돋이였죠.




 

해 뜨기전 무리가 지고 있답니다.

 

 


반쯤 뜬 해

 

구름에 살짝 걸친 해

 

이제 다 뜬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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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2 22:30 2005/01/0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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