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 해당되는 글 53건
전시만화영화책 - 2008/01/05 00:14

얼마 전 드라마 '뉴하트'를 봤는데,

수술을 받아야할 정신대 할머니가 나왔다.

나이가 들어도, 삶이 고되었어도, 가까운 이들이 많이 남지 않았어도,

하루하루의 삶과 사람들에게 감사해하고,

여전히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그녀.

 

그녀가 화면에 나온 순간 나는 생각했다.

'1시간 후면 사망?'.

 

그래도 드라마 중반 쯤 가니 수술도 잘 된 듯 싶어 잠시 불안감을 삭힐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입원한다면 독방을 쓸만한 한국 최고의 섹시하고 어린 연예인이

할머니의 옆 침대를 꿰차고 할머니와 교감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나의 불안감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화보집 못 찍을까봐 수술 거부하며 '수술 상처난 이후의 삶은 없다'고 외치는 연예인에게 수술의 의지를 불어넣어준 그녀는,

그러나 '정신대'라는 규정된 고통과 '할머니'라는 규정된 산 죽음의 구획을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결국 젊은 의사의 열정을 돋보이기 위해 희생당했다.

 

드라마는 개인이 깨달은 삶의 의지나 존중감이 아닌

사회가 부여한 삶의 가치에 따라 그들의 삶과 죽음을 갈랐고,

의사진의 능력, 사고 시비 안 걸릴 조용한 처리, 진행의 속도감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가 통속적인 사회의 가치 규정에 따라 그녀를 가벼이 내버린 그 순간에 지성은 그녀의 삶'도' 존귀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도덕 교과서인 척은 어느 정도 참겠지만,

기왕 흉내 내려면 진심을, 핵심을 왜곡시키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1/05 00:14 2008/01/05 00:14
TAG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10/29 13:27

아는 이가 극찬을 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스토리도 알려주지 않았다.

동네 방네 벨소리가 영화 속 삽입음악들로 바뀌어가고 있단다.

 

그래서 오랜만에 부푼 기대를 안고 영화관을 찾았다.

 

 

포털을 뒤지다보니 어느 블로거가 '음악 하나는 최고로 잘 만든 것 같다'라고 썼는데,

'음악 하나 잘 만든 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명확한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 '영화 또한 그러했다'고 포괄적 동의를 해주는 건 아니다.

영화적 기법이 딸려서냐고? 그 반대같다.

 

분명 거친 화면, 튈 것 없는 장면들인데, 인공조미료 냄새가 풀풀 난다.

음악이 주인공을, 그들의 감정이입을, 스토리를 다 잡아먹어버린 느낌이다.

음악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감정은 영화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과잉되어 스크린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 했다.

이걸 누구나 흔히 깨닫는 멜로의 한 코드로 감싸 해소하려하니

나중에는 저 어설퍼보이는 화면조차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구나에게 익숙한 향수를 통째로 뒤집어 쓴 느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뮤직비디오 10편 쯤 본 느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10/29 13:27 2007/10/29 13:27
TAG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10/21 14:41

* 밝은집 님의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에 관련된 글

 

한국 현대 사진계 원로, 중견, 신진들의 사진을 총망라해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별로 3섹터로 나뉜 전시의 구획은 3세대간 구분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통해 바라보는 피사체와 카메라에 대한 작가의 위치같기도 하다.

 

희한하게도 실제 피사체와의 물리적 거리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원로에서 신진으로 갈수록

피사체는 사람-자연-사물(또는 투영되는 사회)로,

피사체와의 거리는 다가옴에서 멀어짐으로,

카메라와의 거리는 도구에서 친구로 변하는 느낌이다.

 

 

1.

1880년대 사진이 도입된 이후 1960년대 프로사진가 개념이 정착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는 1세대들의 사진에서는 대체로 피사체 내부까지 꿰뚫어 사진이라는 정지화면에 담아내고자하는 엄청난 욕망이 느껴진다.

 

육명심 [백민-강원도 강릉](1983)

 

 




주명덕 [논산](1971)

 

심지어 극히 거리감을 두고 싶은 피사체에게조차 바라봄의 거리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거리감 개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만병통치가 아닌- 가벼운 두통을 동반할만큼 피사체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하게끔 유도해낸다.

 

황규태 [만병통치](2000)

 

 

 

2.

중견 집단들은 사진전을 안착화시킨 세대이기도 하다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요인도 많겠지만- 사진의 크기가 커지면서 화면 안에 자연이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혹여 사람이 주요 피사체라 하더라도 주변화하거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묻어나는 피사체에 대한 거리는

피사체의 중심이 사람에서 자연으로 옮겨지면서 보다 드넓은 시야를 선사하는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민병현 [SNOWLAND.SL165](2006)

 

배병우 [소나무](1992)

b

 

김아타 [ON-AIR Project 056-1](2004)

 

 

 

3.

중견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가 자연이라면,

신진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는 사회다.

물론 1세대도 인물이 있으니 주변의 사회를 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파생된 공간을 담은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반면, 신진들은 사회 자체가 핵심 피사체로써 사람이나 사물, 간혹 자연이 그 공간안에 배치되어진 느낌이다.

때론 작가가 아닌 카메라가 원하는 대로 찍은 것 아닐까 싶은 사진도 있다. 그만큼 사물을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달라짐을 느끼게 한다.

 

김옥선 [Alex and Eric](2004)

 

 

아래 사진은 너무 작게 축소되어 놓칠 부분이 있는데,

실제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전화박스 바닥에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작은 병정인형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백승우 [Real World II](2006)


 

대체로 감정 투여의 대상을 사람과 자연까지 봐준다 하더라도 사물로 확장시키는 건 이상한 거부감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물과 그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 사회이고,

사회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다보면 사물에 대한 '바라보기'는 당연한 결과치다.

 

확실히 상대를 꿰뚫어 표현하고싶고 관계 맺고 싶은 욕망이 21세기가 된 우리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지금의 시대에 대뇌의 명령을 무시하고 간뇌의 감성을 증폭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조금씩 사회가 할퀴고 간 상처를 품고 있는 일종의 정신병자들이며, 소외라는 현상의 핵심 대상들이다.

따라서 뭣 모르고 상대방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을 풀가동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는 순간이 오면 - 물론 계속 제정신이 아니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상대방이 요구하는 감정의 홍수에 휩쓸려버리게 된다.

실제 요즘은 누구를 만나든 마치 정신과 상담 치료를 원하는 사람마냥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듣는 지를, 관계의 진정성을 잊은 존재들 같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조금씩 감정의 경계선을 긋는다. 

동시에 생존 전략 차원에서 사회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진실,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찾고자 한다.

 

 

* 사진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10/21 14:41 2007/10/21 14:41
TAG ,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10/14 12:16

나의 '서커스'에 대한 인상은 정지화면이다.


누군가 몸을 꺾든, 코끼리의 발을 올리게 하든, 어떠한 묘기를 보여주는 과정 후반에는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잠시간의 정지 장면이 연출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 순간적 적막에 긴장감을 느끼며 '서커스'의 전부 내지는 백미인양 여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커스는 환상적이고 화려한 무대와 사람들이 펼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진에 담아내기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속 서커스는 역동성의 발현이 아니라 흡사 발현된 역동성의 박제, 내지는 동(動)을 품은 정(靜)의 숨겨진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왠지 사라져가는 문화로써의 서커스에 대한 아련함까지 겹쳐지는 감정으로...

 

로나 비트너(Rhona Bitner)가 담은 서커스의 모습은 내가 받은 느낌을 그대로 옮겨준 것 같은 정적인 미의 극치다. 

검은 바탕에서 오로지 서커스를 펼치는 주인공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사진들은 상당히 동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고요와 테잎 늘어진 동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서커스에선 동물들의 역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라 문(Sarah Moon)의 [앵무새]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붉은 바탕과 검은 링에 너무나 그림같은 앵무새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발타자르 부르카르트(Balthasar Burkhard)의 [사자]는 125*197cm의 거대한 화면에 멍하니 입 벌린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인 나머지,

서커스단에 갇힌 속박감, 자유가 박탈된 자의 비존재감,

서커스 자체가 갖는 우울한 느낌 등을 한꺼번에 표현해주는 것 같다.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가 찍은 크리스텐 멕메나미(Kristen Mac Menamy)의 사진들은 이미 과장된 서커스에 대한 이미지를 한번 더 과장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인물과 공이라는 사물의 배치는 과도한 소형화나 대형화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3차원적 공간감을 무너뜨린다.

 

 

올리비에 르뷔파(Olivier Rebufa)의 [조종]은 줄을 잡고 있는 사람과 줄에 매달린 인형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이 주는 인상은 오히려 줄과 무관하게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인형이고, 인간이야말로 위태로운 줄에 매달려 상황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식화된 관계들이 변화 또는 역전되고, 흡사 액자 구조의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위대한 서커스]라는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속으로 생각한 감상 포인트는 '화려함, 역동성, 고독감'정도가 아니었나 싶었다.

확실히 부합하는 작품이 없지 않다.

아련한 과거에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고, 피에로의 고독과 카리스마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히 화려함이나 역동성보다는 정적인 아름다움,

고독감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조나 이중삼중으로 가려진 풍자 등으로 읽히는 것들이 많다.

 

정(靜)에 숨은 동(動)보다 더욱 광대한 열정과 고요함이 만들어가는 느리고 작은 변화.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10/14 12:16 2007/10/14 12:16
TAG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10/03 16:51

* 해멍님의 [전시회 다녀왔다]

민중언론 참세상[참세상 기자들이 추천하는 명절 보내기 비법!] 에 관련된 글.

이 가을, 일민미술관에서 세 작가에게 '미술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봤다.

그중 한명인 전영찬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림의 진화를 시도중.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인 'Inside Out'은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이상해'서 라든가 '당신이 독특해'서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답한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하나하나가 때론 비범하거나 때론 비참한 반전들을 준비하고는,

그 이질감에 대해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면서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속삭인다.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기

 

예를 들면 이런 건데,

[Falling]이란 작품은 침통한 감정으로 빌딩 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두팔을 들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화면이 상하 역전되면서 자살자 이외의 모든 이들을 -화면에선 아래가 된- '하늘'로 떨어뜨린다. 그 모습을 본 자살자는 자신을 자살로 몰아넣은 사회인들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하늘로 떨어졌던 사람들이 -화면 위가 된- 바닥으로 다시 올라오면서 두팔로 걷기 시작한다.

아래인 땅에서 두발로 걷던 모든 이들은 이제 위가 땅이 된 곳에서 두 팔로 걷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는 자 없이 또다시 일상의 쳇바퀴는 돌기 시작한다.

 

[Identity Crisis]에서는 바나나로 원숭이를 약올리면서 폭력을 일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약을 올리려고 아이스크림으로 꼬시는 원숭이가 나온다.

그리고 아이가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못이겨 원숭이를 따라 들어간 동물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모든 동물들을 연기하는 인간의 세계였다.

사실 여기까지면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나 설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여기서 또한번, '원숭이들이 아이를 징벌하려는 순간 밝혀지는 아이의 진실'이라는 반전을 준비한다.

 

[Identity Crisis]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는 고양이와 쥐가 조금만 움직여도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질 쪽배 안에서 감격의 포옹을 통해 배의 전복을 막을 중도(中道)를 찾아간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고양이의 먹이사냥은 약자와 강자 사이의 중도란 결코 평등한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과연 고양이와 쥐가 가장 행복했던 그날의 그 순간은 언제였을지, 남은 고양이는 내내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Show]라는 작품에서는 몰래카메라로 촬영된 장면을 보는 아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그 엄마를 지켜보는 아빠, 그리고 그 아빠를 도청하고 있는 정부기관, 그들을 내려다보는 외계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화면에 잡힌다. 이를 통해 관음증에 사로잡힌 건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라는 사실이 조망된다.

 

 

5천만 또는 전세계인 모두 '나는 극히 정상'이라고 외치고 속으로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시대,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덕분에 우린 겉으로는 원숭이를 약올리던 아이가 쓰고 있던 가면을 쓰거나, 서로의 관음증을 숨기기 급급하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예외없이 누구나 소외되고 갑갑함을 느낀다.

구조에 어긋나는 것들에 자꾸 '이상하다'는 딱지를 붙이면서, 딱지가 많아질수록 격리, 거세시켜버리는 것은 세상이고 사회일 뿐이다.

격리와 거세의 두려움으로 사람을 호령하는 세상에 우리의 딱지를!

 

 

* 그림 출처 : 일민미술관(http://www.ilmin.or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10/03 16:51 2007/10/03 16:51
TAG , ,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09/29 14:48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9세기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할 때까지,

아니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한 이후에도,

유클리드가 정리해놓은 기하학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이론적 발현체였고,

수학이라는 학문을 공리계의 핵심으로 배치시켜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그러했던 만큼 

알고보면 인간 사고의 결정체라든가 직관에 의거했다기보다 오히려 경험치의 발현이었고, 그 경험이 결코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이란

세계관의 붕괴, 대재앙 그 자체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적이고 변화와 흐름 자체에 집중하는 동양의 철학에 비해

정적이고 고정된 물체 자체에 집중하는 서양의 철학의 모든 특성을 부여받은 듯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깨어버리고 싶은 실체없는 거대한 '틀'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 [유클리드의 산책]은 르네 마그리트의 1955년 작품명이기도 하는데,

당시 마그리드는 유클리드의 평행선법칙을 원근법으로 가볍게 어겨주는 예술가적 표현으로, 규정된 상황과 세상의 체계에 대한 논리의 돌파을 보여주었다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기라도 하려는 듯 경계나 한계를 넘어서기나 hybrid, 기존 논리로 구분된 영역간의 관계나 교류에 대해 모색해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손정은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은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 제목이라고 한다.

작가는 시집의 시구를 하얀 종이들에 분절하여 적어놓았는데, 관객이 무작위로 종이 하나를 뽑아든 순간 이미 그 시들은 더이상 시인의 그것이 아닌 관객만의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된다.

마치 진보블로그의 모든 글을 탐독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특정 블로거의 특정 포스트를 접하면서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 개인은 해당 포스트를 접했을 때나 블로그글 모두를 읽었을 때와는 분명 다른 개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전시회 설명글에도 있었지만 저 종이 하나하나가 마치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를 나타내는 듯 하다. 종이 하나를 집었을 때 머리 속을 퍼져나갈 오만가지 생각들이 마치 클릭하면 링크 따라 만날 수 있는 마구 펼쳐질 세상을 의미하기라도 하듯이.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 9]는 한국의 버려진 현수막을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지의 현지인들에게 자율적으로 활용하도록 건네고, 일정 기간 경과 후 쓰임새를 관찰한 것이다.

결과물은 사진에 담겨져 있으나 아래의 붉은 천은 작가가 입수한 모양이다. 꽤나 훌륭한 차양으로 변신한 모습 속에서 형태, 문양 등의 문화적 hybrid 를 체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기와지붕 위에 이슬람문자 프린트가 있다면 보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이중근의 [super nature]는 위에서 바라보면 벌집 모양일 것 같은 공간 내부에 밀림의 사진과 산수화를 오버랩시킨 작품이다. 2미터가 넘을 것 같은 병풍들에 둘러쳐져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보는 지점은 한 곳인데도 여러가지 풍경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박소연의 [Story Telling and Listening Series]는 특정 공간과 소품의 세팅과 주제(story)를 동참하는 관객들에게 부여하여 참여자들끼리 말하기와 듣기를 통한 정서 교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비춘 모습은 [어머니와 딸의 장소]라는 주제를 주고 '움'으로 끝나는 한글단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단어에 맞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다소 작위적, 또는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세팅과 행동규칙들이 때론 생각의 정돈과 집중을 유도하여 감정의 풍요를 유도할 수 있다.

 

김현숙의 [플라모델]시리즈들의 조각들은 매난국죽같은 전통적 코드를 현대의 기성품 생산문화(ㅋㅋ)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진짜 조립해보고 싶다.

 

조덕현의 [in/finite 1Channel Projection]은 풍경을 찍은 영상과 거울을 통해 -사실은 한정되어 있으나- 무한한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 원래 작품을 만들 때 고고학적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잘 섞는다는 작가가 택한 풍경도 가야금의 명인으로 알려진 우륵이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신화의 장소이기도 한 거창군의 한 마을을 담고 있다.


 

 

윤영석의 [표본실A]는 복제양 둘리 성공에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가 인간복제에 대한 공포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 계산된 수치들과 칩 모양의 돌기들이 생명에 대한 인간의 통제 욕구를 반영하는 듯 하다.

 

 

좀 약올리는 것 같지만, 이 전시... 9월 30일에 끝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9/29 14:48 2007/09/29 14:48
TAG ,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09/07 12:49

* 민중언론 참세상[팔레스타인의 양심, 나지 알 알리 展] 에 관련된 글.

 

사는 사람들에겐 팔레스타인이라 불리지만,

먼나라 사람들일수록 이스라엘이라 알고 있는 곳.

 

9미터의 돌벽에 둘러쌓여 도망도 못치고,

옆마을과 물건 사고파는 것도 안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히브리어로 40일이내에 나가라는 통보 편지 받으면 아무 말 못하고 나가야 하고,

하루 아침에 살던 집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열받는 마음에 닿지 않을 곳에서 돌이라도 던질라치면 반드시 닿을 총알로 보답하고,

매일 수시 검문과 이유없는 폭행, 구속이 이루어지는 곳.


 

 



그 곳의 풍경을 뒷짐 진 한 아이가 무력하듯, 또는 관조하듯 바라보고 있다.

'한달라'(맛이 쓴 열매의 이름,'쓰라림'을 뜻함)라 불리는 이 아이는

살던 땅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쫓겨났던 11살의 작가 자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아이는 때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데 지쳤는지,

살던 땅 그대로 두고 9미터 높이의 돌벽을 쌓고 외부와의 무역도 차단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UN이 이스라엘에게 '점령지에서 철수하라'는 결의안 242호를 채택할 때조차

미국의 단단한 비호 속에 무너지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돌벽을 바라보기도 한다.

 

 

어느날 그 아이는

82년 레바논 침공 당시 사브라, 샤틸라 난민촌에서 자행된 대학살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영원한 관찰자일 것 같은 그의 뒷짐은 약간의 변화를 맞이한다.

 

때론

 

예수와 함께 돌을 던지기도 하고

 

이스라엘에게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행동에 동참하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생존, 정치의 문제 이외에도 민족 이데올로기, 문화적 배타성, 종교의 문제점까지도 신랄한 비판의 잣대를 들이댄 나지 알 알리는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표적이기도 했단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때는 뭔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것들의 배치 정도로만 인식했었는데,

운 좋게 평화운동가 미니의 팔레스타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만화에 표현된 표상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오랜동안 살아오던 땅에서 유럽제국주의의 거짓 약속과 이스라엘의 폭압적 정책으로 쫓겨나면서도,

전세계로부터 - 내지는 몇몇 언론에 의해 - 이름 대신 '테러리스트'라는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명칭을 부여받은 자들.

가감 없이 지켜보는 한달라를 역시 지켜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짐을 금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 알 알리가 본질적으로 놓칠 수 없었던 '희망'은 그의 그림 속 꽃을 통해, 서서히 뒷짐을 풀기 시작한 한달라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특히 인상깊었던 작품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돌을 던지는 모습.

종교에 대해서 정말 무식한 내가 몇개월 전 터키에 갔을 때

이슬람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알라였고, 예수는 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였다.

그러니 예수가 못박힌 손으로 돌을 던지는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겠지만, 이슬람교에 대해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면 엄청난 패러디쯤으로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그림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상황을

단순히 종교 문제로, 정치 문제로, 외교 문제로, 내지는 그저 서로 싫은 사람들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느끼게 한다.

 

그저 모두들 사람답게 살 생각만 하면 안될까?

* 사진출처 : 평화박물관(http://www.peacemuseum.or.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9/07 12:49 2007/09/07 12:49
TAG ,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07/22 12:51

 

세상의 눈과 귀가 된 미디어 자극적인 소재만을 쫓아가는 사이,
우리들의 사는 세상엔 전쟁, 살인, 강간, 빈곤 등
인간 내부의 잔인함만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인간성 상실의 현실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과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자연스러운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오랜만에 들고 나온 그의 소설 [파피용]에서 주인공들이 선택한 인류 희망의 쟁취 방식은 바로 '탈출'이다.

 



과학자 이브가 발명한 빛으로 가는 우주선 모형, 그가 발견한 20조 킬로미터 너머 인간이 살만한 환경의 행성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에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이 몰락해가는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재벌 맥 나마라, 항해사 엘리자베트, 기획및 관리자 사틴, 환경 및 심리 전문가 아드리앵 등은
20조 킬로미터 떨어진 행성까지 14만4천여명을 태우고 1000년에 걸쳐 항해할 우주선을 만들어 마지막 희망의 전달을 시작한다.
우주선 안엔 중력과 인공태양을 만들어지고 노아의 방주마냥 동물, 식물 등 모든 필요한 생물체와 냉동 수정란이 담겨졌다.

 

처음엔 좋았다.
그들은 이미 각종 폭력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정치가, 공권력, 종교인, 군인 등을 배제시켰고
농부, 요리사, 대장장이, 건축가, 장인, 예술가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선발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연 친화적 소재로 원하는 곳에 집을 지었고, 협동노동을 하였고 그렇게 행복한 듯 했다.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히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졌다.
그러나 불현듯 발생한 첫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파피용호는 인류가 몇천, 몇만년을 걸쳐 겪었던
공권력과 왕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창출, 비노동, 환경의 생존을 위한 반란, 전쟁 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결국 1000년이 조금 넘어 행성에 도착할 즈음엔 단 6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중 행성에 착륙할 수 있었던 건 단 2명.
또 수정란으로 부화시킨 뱀에 물려 1명 사망.

 

혼자 남은 아드리앵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잇지 못했다는 좌절과 외로움의 세월을 보내다가 문득 수정란 중 인간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수정 시 필요한 골수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수정란을 부화시킨다.
그렇게 태어난 에야에게 아드리앵은 자신도 잘 모르는 선대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에야는 난청 끼가 있는 지라
아드리앵을 '아담'이라 부르고,
우주선 만들었던 '이브'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오래전 소형 우주선으로 탈출했던 사틴을 '사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생각해낸 인류 생존에 대한 단 한가지 놀라운 추측이다.

 

이것은 우주의 의지일지는 모르나

이대로라면 인간은 영원히 진보를 모르고 쳇바퀴만 돌리고 있는 다람쥐일 뿐이다.

 

그야말로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권력욕, 소유욕에 대해 거대한 두려움을 품게 된다.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비결은 개미와 같은 공동체 사회의 구현일 것이라고...

그러나 행복의 기준같은 거, 사람마다 다른 게 당연하지 않을까?

쥐와 같이 각개격파의 이기주의만이 행복이라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모른다.

희한한 건 쥐나 개미 양쪽 집단 모두 같은 비율의 높은 생존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베르베르는 질문하고 있다.

개미처럼 살건지 쥐처럼 살건지...

물론 개미처럼 살거라고 말하길 바라면서...

 

그러면서 살포시 마지막 주문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이 베르베르의 마지막 외침이기는 하나
과연 가능한 것인지는 우리의 가슴 속에 대고 물어야 할 일이다.

 

* 사족 - 이번 소설은 베르베르의 이전 작품에 비해 극히 소품적 성격의 글이다.

그래서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살짝 실망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개미]만큼 풀었어도 좋았을 법 한데,

더이상 글 쓰기 싫었는지 몇 페이지로 순식간에 정리를 해버렸다.

담긴 아이디어는 참신하나 상당히 아쉬운 작품.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7/22 12:51 2007/07/22 12:51
TAG ,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07/09 14:57

사람은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곧 만들어질 추억에서조차
차곡차곡 쌓인 추억을 소급하여 이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때론 곧 만들어질 추억이 이미 쌓여있던 추억 때문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추억들은 가지고 있는 개인에게 빛바랜 사진마냥 아련하고 간직하고픈 그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억은 기억과 다르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 돌이켜 생각할만한 무엇이다.

 

그렇기에 이 애니 속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추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하다.


 



그들이 사는 도시 타카라마치에서는,
동네 양아치가 자경대마냥 마을을 지킨답시고 설치고,
열 세네살밖에 안되었을 법한 옆 동네 싸움꾼들은 이 도시를 접수하기 위해 들르고,
그런 아이들을 쇠파이프로 작살내는 쿠로 역시 10대이면서 거리에서 살고 있고,
야쿠자는 마약을 파는,
도시 전체가 조잡한 캐릭터시장처럼 생긴 곳,

사는 이들이 스스로 시궁창같다고 칭하는 곳이다.

 

 

온통 좁은 통로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낙서, 양아치와 야쿠자가 폼잡고 다니는 이곳에도 재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해외 자본까지 들여와 마을을 싹 정리하고 거대한 놀이동산이 만들어질 계획.

 

누군가는 그저 빠져나갈 궁리만 할 것 같은 도시지만 그래도 '어린이의 꿈'이 될 놀이동산이 되버린다면,

야쿠자인 생쥐는 동네 남자 아이들이 '남자가 되기 위해(진짜 남자가 되나?)' 들르는 포르노 극장이 그리워질 것 같고,

피보는 걸 좋아하는 쿠로는 11살짜리 시로와의 생활이 온통 깨져버릴 것만 같다.

 

 

쿠로는 '내 마을을 지키겠다'고 단언도 해보지만,

그동안 상대하던 동네 양아치도, 몇동네 접수해왔던 야쿠자도 아닌,

해외에서 공수되어온 '프로'를 상대하면서 실질적인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시로를 지키는 것'만이 인생의 의미의 전부였던 쿠로는 시로의 안전을 위해 시로를 어른의 세계 - 여기서는 경찰서-로 보낸다.

 

인물들의 결말은 생각외로 식상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심하게 튀지 못하도록 하는 마음의 나사같은 존재인 시로를 잃은 쿠로는 폭주의 폭주를 거듭,

해외에서 날라온 프로는 커녕 마을 통째를 피바다로 만들어도 별 무리 없을 정도로 끝없는 어둠의 구원의 속삭임에 빠져들어간다.

그러나 11살에 숫자도 잘 못 세고 쿠로가 없었으면 그 도시에서 하루도 못되어 시체가 되었을 시로는 다시 한번 쿠로의 마음 속에 들어가 나사를 조인다.

쿠로의 마음 속 어둠은 언젠가 너를 구원하겠다며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 둘은 도시를 벗어난다.

 

결국 쿠로는 도시를 지키지도, 이기지도 못했다.

동네 거지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울 때가 아냐. 풀이 죽을 새도 없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 마을에게 죽임 당하고 말아."

 

도시가 변한 것을 모른 건 쿠로 뿐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도시는 지켜져야 할 무엇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이야말로 도시로부터 지켜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도시에 대한 추억 역시

혹여 도시로부터 주어진 상처는 아닌지 고민해보게 되는 영화.

 

"함무라비가 세운 바빌로니아 시대때부터 도시란 건 차가웠다고요."

"바빌로니아를 세운 건 네부카드네자르 2세야"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도시의 추억....

 

 

* 사진출처 : 네이버무비(http://www.naver.com) +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7/09 14:57 2007/07/09 14:57
TAG , , ,
전시만화영화책 - 2007/07/07 13:41

이 책엔 단편소설이 있지만 소설책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산문도 있지만 산문집이라 규정할 순 없다.

사진도 있고, 콘탁스 G1 카메라 리뷰도 있고, 여행 기록도 있고, 심지어 음악 14곡이 수록된 음악CD도 붙어있지만,

사진집이라 하기엔, 카메라 설명집이라 하기엔, 여행책이라 하기엔 빈 구석이 너무 많다.

그런 책, 김영하가 쓴 [여행자]는 그런 책이다.

서점 어느 구석에 쳐박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아마도 비소설 부분에 꽂혀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르 구분 불가능의 책.




어느날 라디오를 듣다가 작가 김영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름지기 글쟁이는 글로 말하는 법.

그러나 그는 동료들도 인정하는 대단한 수다쟁이같다.

실제로 라디오 속 그는 나이 40이 넘었지만

마치 10대의 감성을 가진 50대 아줌마처럼 떠들고 있었다.

언젠가 미니 콘서트장에서 본 김수철이 생각났다.

이런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점잖빼고 살고 있어 속의 끓는 피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골머리 썩히는 겉만 어른된 자들의 특권이다.

언제나 구름위를 걷는 듯한 그들이야말로 '차분'의 진정한 깊이를 알고 있을 지도...

 

김영하의 [여행자]는 모두 8편이 나올 예정이라는 데, 그 첫번째 여행지는 바로 하이델베르크다.

위에서 적은 바와 같이 이 책은 단편소설에 여행기, 사진, 카메라 리뷰 등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그는 글쟁이이다. 그것도 책을 아주 많이 읽은 글쟁이.

그가 흡수한 글만큼이나 이 책은 그 모든 것이 나름의 감성의 지도를 따로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무언가 쓸데없는 복합과 모순에 빠질 틈조차 주지 않게 만든 깔끔한 책이다.

사실 이 점은 가장 좋은 점이긴 하지만 다소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왠지 '소설을 읽는 듯 했는데, 어느새 자기 여행기가 되더니 짧은 사진집이 되었다가 소설로 돌아왔다가...' 뭐 이런 보기좋은 환타지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진에 중점이 가있는듯한데 소설이 더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든 재미있고 좋고 쉬운 책이다.

음악을 들으며 읽다보면, 누구나 쉽게 '차분', '관조', '평온'이 일관되게 느껴진다.

나도 어딘가 여행을 다녀오면 이렇게 테마를 가지고 한권씩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죽음'을 생각한 것 같다.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도시', 그가 본 하이델베르크다.

그 죽음은 따사로운 햇빛이 비치는 야외 카페에 조용히 앉아 책 한권을 읽고 있는 것만큼 차분하고 고요해보인다.

죽음을 생각하기에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착각할지도 모를 만큼.

 

* 사진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7/07 13:41 2007/07/07 13:41
TAG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