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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3/11 23:16

요시나가 후미의 신작이 나왔다!

(근데 일본에선 후미 요시나가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왜 바꿔부르지?)

기이하게도 배경은 일본 막부시대 한 1700년대쯤 되는 것 같은데

'오오쿠'라는 것도 원래 작가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대극 제목이란다.

 

다만 내용은 나오는 쇼군이 여자이고,

쇼군이 거느리는 삼천 궁남이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를 뿐.




처음엔 곰에, 전염병에 사람들을 왕창왕창 죽이길래

당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시츄에이션인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남자 인구를 여자의 1/4로 확 줄이려는 설정.

 

이 설정이 끝나고나서부터의 세상을 묘사하는데,

읽으면서 내내 "쿡쿡"거리는 폭소 한마당이었다.

 

남자들이 얼마 안남았으니

농사도, 전쟁도 모든 집안밖의 일을 여자가 맡게 되었고,

가업도 여자가 이어받고,

혼인제도는 완전 붕괴되어 돈 있는 여자나 혼인, 없는 여자는 유곽에서 남자를 샀다.

 

그 와중에 막부라는 무가(武家)사회 시스템 역시 남녀 역할 교체. 워낙 관료화되어 있어서 교체가 비교적 용이했댄다. ㅋㅋ

 

워낙 일상 속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착착 달라붙는 구어체 묘사에 능한 작가이고,

인생 역전을 맛보는 상상의 나래가 겹쳐 흥미진진.

 

이를 테면, 들어온 혼담에 버티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냉큼 장가를 가야지!"라고 외치거나,

혼인이 싫어 차라리 쇼군이 삼천궁남 거느리는 오오쿠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남자에게 여자 소꿉친구가

"좋은 옷을 입고 호사스런 생활을 하고 싶은 거?"라고 말하는 등의 장면은

역할이 바뀌었다면 충분히 예상되는 대화이다.

특히 오오쿠에 들어간 오노부가 검술이 꽤 훌륭하다는 선배를 이겼을 때,

그 선배가 하는 말,

"하! 너 따위보다 이 몸이 훨씬 훨씬 아름답다구!!"라고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외치는 장면에선 삼천명 중 살아남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 진하게 느껴졌다.

 

요시나가 후미는 이러한 설정을 코믹으로 점철시키지 않는다.

그 시대는 마치 현실인 양 진지하고,

오오쿠는 아름다운 이들의 꿈같은 이상향이 아니라 쇼군의 애정에 목매야 하는 불신과 긴장의 세계이다.

동료와의 대화에서는 힘겨운 남자로써의 삶을 얼핏 이야기한다.

부모가 시켜 몸 팔았던 이야기, 장가들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자 밥도 않주고 결국 쫓겨난 이야기 등.

 

여자들이 이렇게 왠지 유쾌, 상쾌, 통쾌할 것 같은 인생역전 시대극을 마련해줘도

단지 쇼군에게만 감정이입하지 못하는 것은

매 장면마다 묘사되는 힘겨운 남자들의 삶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요시나가 후미가 바라보는 소소한 삶에 대한 통찰은 매우 놀랍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마지막 장이 끝나면 항상 가슴 한켠에 무언가를 남기는 결코 가볍다 볼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

 

수많은 여아가 태중에서 살해당하고 여자의 수가 심각하게 줄어드는 현상을 보고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 여자들 수가 적으면 상대적으로 대우받으며 살지 않을까?'

그런데 이 만화 보니 꽤 긴장된다.

어차피 일부일처제야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 중 하나일 뿐인데

그것으로 세상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제도야 변할 것이 자명한 일.

보호한답시고 집안으로, 유곽으로 꼭꼭 숨기고, 권력에 따라붙는 물건으로 전락하는 건 역시 인간의 삶이 아니다.

노조에 온지 1년 좀 넘는 지금의 교훈, 세상은 쪽수로 승부를~! ㅋㅋ

 

벌써 1권밖에 안되었는데 작가가 어찌나 캐릭터들을 확확 없애는지...

남자들 싸그리 죽인 것도 모자라

검소한 쇼군은 막부에 돈 없다고 오오쿠의 남자들 50명 정도 해고시키고,

꽤 주인공 급일 것 같던 오노부는 벌써 역할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보통 캐릭터 만들면 애착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과감히 없앨 수 있는 것도 바로 작가의 힘?

 

아직 혼인하지 않은 쇼군과 잠자리하는 오오쿠 안의 남자는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일부러 오오쿠의 남자들을 건드리지 않고 마당 쓸거나 방바닥 닦고 있는 하인 건드리는 쪽으로 우회하는 쇼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움.

 

 

*참고로 혹시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쇼군(将軍, しょうぐん)은

일본의 특수한 최고위권력기관인 막부의 수장을 말한다. 세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 せいいたいしょうぐん)의 약자이다. 쇼군은 명목상으로는 천황의 신하로 최고위직 신하에 불과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천황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정치, 행정, 경제를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쇼군직을 세습했기때문에 군주와 같은 위치에 있던 자이다. 당시에는 왕이 두명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나, 실제로는 막부체제가 오랫동안 유지되므로써 천황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일반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쇼군이 왕대접을 받았고, 천황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백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87%BC%EA%B5%B0

 

* 그림출처 : 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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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1 23:16 2006/03/11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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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2/22 23:55

요즘 열나 바쁜데... 그런데... 그래서그런가?

보고싶은 영화가 많다.

 

어제 본 영화 [Time to leave].

죽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날,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움직이고, 누군가들과 어떠한 관계를 정리해나갈까?


 

 



젊은 나이에 꽤 잘 나가는 사진작가, 로맹은 암이 퍼져 시한부 3개월을 선고받는다.

의사는 그에게 항암치료를 권하지만 그는 좀 다른 일을 해나간다.

 

끊는 시간

부모와 여동생에겐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거울을 보며 열심히 연습한다. "저 곧 죽는데요."

하지만 그는 가족과의 저녁식사에서 여동생에게 "그러니까 남편이 널 떠나지"라며 독설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동거중인 애인 사샤에게 애정이 식었다며 나가라고 한다.

할머니를 만나러가던 길에 있던 식당의 불임부부가 제안한 정자 기증, 아기는 딱 질색이라며 단번에 거절한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관계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준비하는 듯한 로맹.

그러던 로맹이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알린 존재는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가 묻는다. 왜 나에게는 알렸냐고?

로맹이 답한다. 당신은 나와 똑같으니까.

 

다시 맺는 시간

몸이 조금씩 안좋아지고 구토와 약이 반복되는 어느날, 동생에게서 화해의 편지가 도착한다.

로맹은 핸드폰으로 동생에게 사과하고 동생은 이내 오빠를 용서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만나자는 제안을 일이 바쁘다며 회피한다.

 

오랜만에 연락해서 다시 만난 사샤. 격했던 감정은 이내 차분해졌다.

그날 로맹은 마지막으로 섹스를 부탁했지만 사샤는 거부했다.

로맹은 사샤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대고 잠시 누웠다. 그렇게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사샤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다음엔 바로 불임부부를 찾아가 3명이 아기를 갖기 위해 함께 섹스를 한다.

 

그리고 드디어, 떠날 시간

로맹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유산 상속자를 곧 태어날 아기로 하였다.

그리곤 이불 한장, 물안경 하나를 들고 해변가로 찾아간다.

열심히 수영을 하는 그. 왠지 숨을 쉰다는 것이 굉장히 고귀한 행위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모래사장으로 나와 이불 위에 누운 그는, 그러나 모두가 해변을 떠나고 노을이 지고 해가 지도록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가는 시간, 혼자 죽는 장면.

이런 장면은 왠지 고독하고 서글픈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Time to leave]가 보여준 죽음은 뭔가 색달라 보인다.

 

로맹의 애인 사샤는 이런 말을 했다. "애인이 생긴거지? 너는 혼자서 못살잖아."

그러나 혼자서 살지 못했던 로맹은 오로지 혼자서 죽음을 준비해나간다.

그는 처음에 고독과 서글픔이 배어나는 방식으로 주변의 관계를 끊어갔으나,

이내 끊은 관계들을 아주 조금 회복해나갔다.

마치 그들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충분히 확인시켜주면서도, 결코 자신의 죽음에 몰입하지 않도록 배려하듯.

 

죽음을 준비하면서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가는 로맹.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의 죽음은 외로워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 지는 해를 뒤로 한 그의 모습조차 오히려 편안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시간, 떠남을 준비했던 시간은 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두렵고,

- 인간이란 워낙 혼자 사는 존재라지만 - 특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에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로맹을 보면서 어쩌면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것에 편견이 있었던 건 아닌 지,

과연 나는 죽음을 잘 준비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 사족

음... 그런데 로맹은 왜 아기를 남겨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을까나?

요즘 저출산 얘기를 하도 많이 듣다보니 잠시 '홍보영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ㅋㅋㅋ

 

* 사진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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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2 23:55 2006/02/22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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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12/25 00:01

극장가에선 해리포터와 다가올 '태풍'에게 밀리고,

운동권에선 총파업과 WTO에 밀린

그런 다큐 한편이 있다.(지금쯤이면 있었다인가?)

 

야스쿠니신사에 대한 다큐 한편.

서울에 사는 나는, 결국 시네아트(맞나?)에서 할 때를 놓치고 인천까지 가서야 볼 수 있었다. 일본인이 갖는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생각, 지도자들이 단절시킨 민중의 알 권리,

요즘 황우석을 비롯한 APEC, WTO 등을 다루는 언론의 모습을 보면서 알 권리, 생각할 권리가 조작됨으로써 사람들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 지 깨닫게 된다.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수백만명의 사망자를 낸 소위 '대동아전쟁'.

아시아를 유럽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이 전쟁에 대해 일본인들은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일본은 이 전쟁을 통해 수많은 아시아 민중들을 학살하고, 강간하고, 징병하고, 굴욕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국인은 이희자라는 50대 아줌마.

그녀는 태어난 지 13개월 만에 아버지가 일본군에 징병당했다.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는 재혼하였다.

그녀가 새삼스레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나서게 된 동기는 다소 궁금하지만,

어떻든 수많은 세월이 지나 1995년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찾아나선 그녀는 3년만에 아버지가 중국의 난징에서 죽고, 천황을 위한 전쟁에 위대한 죽음을 맞이한 일본군으로서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진 걸 알게 되었다.

 

또 한명의 주인공인 일본인 후루카와 마사키.

그는 공무원으로 사회운동과의 인연이 나름대로 있는 사람 같다.

우연한 기회에 고베에서 이희자씨를 만난 그는, 그녀의 일본에 대한 엄청난 분노에 놀라고 만다.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낸 고베 지진에 대해 그 당시 희자씨는 안되었지만 받을 만한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후루카와 마사키씨는 희자씨의 아버지 찾기에 상당히 많은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조력자 중 하나가 되었고, 그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감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본 장면 중 하나는 제2의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난징대학살 박물관 장면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내가 영화를 본 다음날인 12월 18일 새벽 MBC에선 난징대학살에 대한 다큐를 방영하고 있다.

거기엔 [안녕사요나라]에서 이희자씨가 기겁을 하며 봤던 박물관의 모습이,

내 키보다 높은 흙더미 사이엔 빼곡하게 묻힌 뼈들의 단면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한 지역에서 200여명이 넘게 발견된 시체엔 번호표가 붙어있었고, 성인 키의 1/3도 안될 것 같은 작은 시체는 아이들이었다.

중국까지 함께 날아갔던 또다른 영화의 주인공 후루카와 마사키씨는 연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되뇌이고 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야스쿠니 신사 앞 시위.

한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연신 일본어로 야스쿠니신사의 문제점에 대해 지나가던 일본인들에게 외치다가 경비원인지 보수쪽 인물인지 모를 아저씨에게 정통으로 얼굴을 가격당했다. 싸가지...-_-;;;

당연히 모를만한 일, 몰라도 누가 뭐라하지 않을 일에 당당히 나선 그녀의 벌개진 얼굴을 희자씨가 어루만져주었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미안합니다'를 외칠 뿐이다.

 

두 주인공을 번갈아 보여주고 일본 내 야스쿠니신사에 대해 반대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희자씨의 굳은 표정 속에서 그녀의 분노를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조센징은 가라!" 고 외치는 일본 우파들 앞에서 '그런 조센징을 왜 야스쿠니신사에 모셔놓았냐? 내놔라!'라고 외치는 그녀의 말엔 재치를 넘어서 늘상 당하는 폭력들에 단련된 강인함과 분노가 잔뜩 서려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분노가 녹아내리고 강인함 속에 갇혀있던 여린 마음의 벽이 부서지는 그 순간은 그녀와 뜻과 생각을 나누는 일본인들과 어울려 있을 때였다.

그렇게, 이 영화는 희망을 말한다.

 

 

* 여기서 여차저차 끝냈으면 좋겠지만 몇마디 뱀발을 달자면,

이희자씨의 다양한 감정선을 따라가본 것은 매우 좋았지만 후반으로 갈 수록 화면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심지어 보여주는 공간조차 여러번 반복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차라리 공분 또는 슬픔, 전쟁의 처절함을 느끼게 할만한 다양한 정보가 제시되었으면 하는 욕심도 좀 생긴다.

난징을 남경이라고 표현한 것도 차라리 중국인의 발음으로 해주는 것이 맞지 않았나 싶다. 그 '남경대학살'이 '난징대학살'인 거 파악하는데 좀 걸렸다...-_-;;;

 

근데 참 희한하지? '이희자'씨 성함을 적는데, 계속 '김지희'라고 적고 있다.

 

* 안녕사요나라 홈페이지 - http://www.annyongsayonara.net

* 한겨레 리뷰 - 야스쿠니신사의 재조명, <안녕, 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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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5 00:01 2005/12/2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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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10/25 16:37

단 한번의 폭발 굉음도 없고,

테러리즘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영화가 있다.

 

말레이지아의 감독 우밍진(Woo Ming Jin)은 2002년도 발리에서 있었던 폭탄 테러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 영화 [월요일 아침의 천국 / Monday Morning Glory ]을 만들었다고 한다.

감독이 밝히는 이 영화는 '테러리즘이 아닌 테러리스트에 대한 영화'이며,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빈곤하고 실업 상태에 놓인 말레이지아 청년이 선택한 직업에 관한 영화이다.

 

처음엔 낚시터를 운영하는 두 형제가 청년 두 사람을 일터에 채용한 줄 알았는데,

왠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고 서로 심각하게 대화 나누고 하는 폼이 영 심상치 않다.

어느덧 제조된 폭탄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더니 두 청년이 오토바이로 폭탄을 운반하다가 터져버리고, 결국 한 청년 A(이름 까먹었다-_-;;)만 살아남는다.



장면이 바뀌어 그들은 이미 경찰에 붙잡혀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포박된 채 사건 재현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살아남은 한 청년 A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경찰청장 비슷한 사람은 연신 폭탄테러범 생포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사건 재현의 순서에 따라 화면은 과거를 오고가며

실제 낚시터의 두 형제와 그들 조직의 지도자, 청년 A와 새로 채용된 또 하나의 청년이 행했던 폭탄 제조, 테러 장소 물색, 예비 연습 등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간간이 낚시터 두 형제와  지도자가 있을 때는 이번 투쟁의 의의를 언뜻언뜻 언급하고 청년들의 의지를 확인한다.

하지만 청년들끼리 있을 때는 이번 일의 위험성과 이번에 벌 수 있는 돈, 어디에 쓸까에 대한 대화가 오고간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 즈음이 되어 청년 A는 그들이 테러 목표로 정한 미국인이 많이 있을 것 같은 나이트클럽 화장실 변기에 폭탄 가방을 놓고 잠시 세면대에서 얼굴을 씼으면서 심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오려는 순간, 클럽 손님 중 하나가 그에게 가방을 놓고 갔다면서 다시 건네준다.

잠시 후 낚시터 두 형제가 클럽에서 나오고 등뒤로 들리는 폭발음,

그리고 청년 A의 애인이 청년A가 일한다고 데리고 온 적 있는 낚시터에서 물끄러미 물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스친다.

 

 

우밍진 감독은 처음엔 폭발 장면을 넣어볼까 고민을 했다가 예산도 없고 오히려 극을 이끌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을 듯 싶어서 폭발 장면 전혀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폭탄을 실고 가는 오토바이에서 한 명의 사망자가 나올 때에도 일어난 당시의 폭발은 자르고 그 이후 길가에 내팽겨쳐진 청년 A와 얼굴에 붕대를 덕지덕지 붙인 청년 A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도 테러리즘보다는 테러리스트에게 초점을 맞춰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지를 잘 드러낸 방식같다.

 

한편 이 영화는 내가 알고 있던 테러리스트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깼다. 간혹 중동에서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주부들을 대상으로 자살폭탄테러를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마음으로 와닿지는 않았는데, 실제 생활고와 실업을 맞이하면서 직업처럼 선택하는 청년 A를 보니 그야말로 '실감이 난다'.

 

부가적으로 말레이지아 경찰이 테러리스트를 다루는 관행일지도 모르는 행위에 대해서도 언뜻 엿볼 수 있었다.

테러범으로 붙잡힌 낚시터 두 형제와 폭탄제조자, 지도자 등은 이번 테러의 정당성에 대해 끊임없이 역설한다. 그 와중에 경찰은 지도자를 풀어주고, 다음 날 지도자는 강가의 사체로 발견된다. 언론에 '도주'라고 표현된 이번 사건 이후로 낚시터 두 형제는 테러에 대해 자신들의 죄로 규정짓는 기자회견을 갖게 된다.

 

그냥 일반인과 하등 다를 것 없는 테러리스트의 삶과 생각에 대한 고찰.

테러리스트에게 테러는 이념의 실현, 체제의 저항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내지는 누군가에게는 - 타인과 자신의 목숨을 담보했음에도 불구하고 - 밥벌이의 수단이요, 삶의 한 꼭지이다.

 

왠지 자본주의와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테러리즘이

자본주의 사회의 빈곤과 실업의 심화를 통해서 

목숨조차도 걸고 흥정할 만큼 나락으로 떨어진 현실을 통해서

기존과는 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모순의 도출로써 작동하고 있는 듯 하다.

체제의 저항이었을 테러는 체제의 모순을 통해 점차 체제 내에 속한 일상의 하나로 재생산되고 있다.

 

* 사진출처 : PIFF (http://www.pif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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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5 16:37 2005/10/25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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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10/03 02:17

그러고보니 서극의 영화는 꽤 본 것 같다.

일단 [황비홍] 시리즈는 다 봤을테고, [요수도시], [청사], [금옥만당], [칼(刀)], [촉산전] 등...

헉, 명절 때 TV의 압력으로 [넉오프]와 [더블팀]도 봤다.-_-;;

 

내가 본 영화중에서...

무협을 좋아하는 지라 현대물은 별로지만 [금옥만당]은 재미있게 본 듯...

그런데 황비홍 시리즈와 청사, 금옥만당은 아무리 봐도 소품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현대물 빼고 소품 느낌 빼면 남은 영화들이 [칼(刀)]과 [촉산전], 그리고 이번에 본 [칠검]인데...

 

걔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칼(刀)].




 

원래 이연걸과 견자단에 비해 조문탁의 무술은 기계적일 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느낌이었다.

( 그래봤자 다 이소룡 kids 고, 연기 자체는 별 평가 못 받을 지라도 무술만은 (--)b )

 

그런데 [칼]만은 틀렸다.

그의 외팔도, 거대한 칼도, 무술도 이때만큼 수려하고 가슴 아팠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에 스토리도 분명 감성적이고 탄탄했다. 

이 모든 건 감독 서극의 힘이었다고 본다.

 

 

 

그러다가 [촉산전]이 나왔는데, 무술만 부족할 뿐 나머지 모든 것이 오버였다.

이 당시 서극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보려고 한 것 같다.

이연걸이나 과거 이소룡, 성룡등의 무술로 넓혀진 스크린의 시계를

CG로 보다 획기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지평을 열기에 정이건은 역부족이었다.

넘쳐나는 CG속에 홍금보조차 가려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서극은 스크린 속의 인물들에게도 미련이 남아있어 매우 엉성한 영화가 되었다.

 


 

그러다가 [칠검]이 나왔는데, 이연걸도 무술 안하겠다고 나온 마당에 이제 무협계엔 견자단 밖에 안 남았다!

서극과 견자단이라... 이 정도면 [칼]을 꿈꿔도 되지 않을까?

우선 [칠검]에는 CG가 사라졌다.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검이 7개나 되었다.

이렇게 검이 많아지면 제1검에 완전 초점 맞춰주셔야 한다.

(황비홍에서도 주변 훌륭한 제자 많으나 언제나 주인공은 황비홍일 뿐이다.)

그런데 [칠검]의 (무술) 주인공 자리는 견자단과 여명 사이에서 줄타기가 심하다.

여명이 축소하기엔 나름대로 무게가 있는 캐릭터라도, 무협인데 과감히 조연에 충실했어야 주연, 조연 모두 부각되었을 것이다.

검이 7개나 되니 서생 차림(여명) 1명 정도야 멋지게 봐줄 수 있지만, 

투톱으로 세우고 싶었으면 둘을 적당히 라이벌로 만들던가 했어야지.

하지만 견자단과 여명... 기본적으로 너무 멀다.

 

단 하나 건진 장면, 견자단과 적이 1m 남짓되는 공간에서 칼부림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머지는 자꾸 끊기고 마무리가 이상한 느낌이다.

게다가 첫 장면부터 유혈낭자, 잔인참혹극...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이건 과잉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너무나 단순 희망 만발한 얼빵 결말과의 댓구도 영 맞지 않는다.

 

[칼]에서 느낀 서극은 무술 장면을 통해 사람을, 감성을 불어넣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촉산전 찍으면서 많이 멀어졌다.(그래도 갈때까지 간 것 같진 않았다. 그저 새로운 실험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곤 [칠검]으로 돌아오려나 싶었는데 아직 덜 왔다. 어정쩡하다. 아니, 사실 좀 불안하다. 과연 서극은 [칼]로 돌아가거나, 새로운 [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칠검]에서 사라진 스토리와 화면의 일관성이, 왠지 안어울렸던 유혈낭자가 마음에 걸린다.

 

* 사족 - 이연걸이 무술에서 은퇴했다. 이제 [영웅]의 기원 scene 같은 건 다시 못보는 건가? T.T 누가 견자단과 이연걸 한번만 더 붙여줘~~!

* 사진출처 : 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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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3 02:17 2005/10/03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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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9/22 01:23

아시는 분은 아실 지 모르겠으나, 나는 전혀 모르던 사실.

글쎄 아시는 분은 아실 만한 움베르토 에코가 동화를 3편이나 썼단다.

동화책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에는 움베르토 에코가 쓴 '폭탄과 장군',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 '뉴 행성의 난쟁이들'이 수록되어 있다.

 



[폭탄과 장군]

 

첫장을 폈다.

"옛날에 아토모라는 원자가 있었습니다."

네? 원자라고요?

'원자라니? ATOM 말이냐?'

 

2장을 넘겼다.

"...원자가 모이면 분자가 되고,...엄마도 원자로 만들어졌고..."

아뿔사~ 그 '원자'가 맞다!

 

매 장을 넘길 때마다 그 장에서 느끼거나 알거나 생각해야 할 것들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이를 테면 원자가 모든 물질의 근원인 거,

아토모라는 원자가 속해 있는 폭탄이 터지면 어떻게 될지,

권력자와 자본가가 만나면 어떤 음모를 꾸미는 지,

폭탄이 없는 게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깨달음,

막판에 권선징악까지^^;;

(물론 이렇게까지 어렵게 쓰건 아닙니다요)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

 

이 동화는 미국, 러시아, 중국인들이 서로 우주인을 화성으로 보내면서 의사소통 부재, 서로간 불신을 겪다가, 고독감과 '마마'라는 단어의 공유를 통해 이해를 확보하는 내용이다.

물론 이들이 만난 화성인은 공격적 외모로 인해 처음엔 불신을 가졌으나, 마찬가지로 소소한 행동으로 인해 서로간의 이해가 가능해진다.

 

나름대로 독특하게 본 내용은 지구인이 우주로 우주인을 보낸 이유.

우주인들은 매우매우 위험했지만 행성을 여행하고 별을 정복하고 싶어했다.

why?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지구가 좁아졌기 때문.^^

꿈과 희망과 호기심에 가득찬 기존의 우주 여행 동화와 마구마구 비교되는 대목이다.

 

 

[뉴 행성의 난쟁이들]

 

제일 재미있게 본 동화인데, 환경문제, 권력문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동화를 보니 움베르토 에코는 '오래된 미래'를 꿈꾸나 싶은 생각이 든다.

 

지구의 한 힘있는 황제가 신대륙 발견을 꿈꾼다. 하지만 지구엔 더이상 신대륙이 없다.

그래서 우주로 신하를 내보내봤다.

그러다가 '뉴'라는 행성을 발견하고 문명을 전해주려 한다.

하지만 뉴 행성의 거주인 난쟁이들은 초대형 망원경으로 지구를 봤으나 영~ 탐탁치 않다.

매연으로 아예 안보이고, 빠르게 가려고 차를 개발했다면서 도로가 꽝꽝 막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래서 오히려 뉴 행성의 난쟁이들이 제안한다. '우리가 지구를 발견한 걸로 하자'고...

 

이 동화는 첫줄부터 재치가 넘친다.

"옛날에 힘 있는 황제가 지구에 살았습니다.

혹시 지금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동의 (-.-)/

 

 

[다 보고나니]

 

움베르토 에코의 동화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나 그 사실의 함의를 기반으로 깔고 그 위에 자신의 가치관을 창작의 내용에 섞어 보여준다.

예를 들어 원자가 뭔지를 설명할 때나 미국, 러시아, 중국 우주인 등등은 그의 현실 기반적 모습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한편 권력자와 자본가가 모여 폭탄 투하 계획을 짜거나 지구인의 우주 진출 계획에 숨겨진 야망, 인간 문명의 모순 등은 벌어진 현상에 대한 가치 해석을 동반하고 있다.

 

이 동화책은 이러한 모양새 하나 하나를 살펴나가면서

소소한 표현에 섞인 의미가 주는 잔 재미와 씁쓸함을 독해해나가는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인지 난 3편 모두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그러나 나(我)나 움베르토 에코를 너무 믿으면 안된다.

아이들은 냉정하다.

초등학생 2명의 자식을 가진 한 엄마가 애한테 이 책 사줬더니, 좀 보다가 재미없다고 던졌단다.^^

 

사실 뜻 맞는 어른끼리 공유하는 동화책과 아동,어른이 공히 나눌 수 있는 동화책은 백지 한장 차이조차 안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어떻든 세상은 가끔 공평하다지 않던가?

움베르토 에코에게 존 버닝햄이나 앤서니 브라운을 기대하면 안되쥐.

하지만 확실히 새로운 동화글의 모습을 본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만족.

 

[사족1]

내가 출판사였다면 3권 엮어서 내지 않았다, 다 따로따로 냈지.

보육노동자 입장에 초점을 맞춰서 볼때,

대략 책 구독 대상이 유아 ~ 초등학생이라 치고

책 내용이 위와 같으면 어른과의 상호작용을 염두에 둘 것 같다.

 

3권 엮고 크기를 작게(지금 나온 모양새가 이렇다) 하면,

보육시설에선 사용하기 힘드니까 보호자들의 개별 구매방식으로 가게 되고, 아동의 흥미에 따라 개별 아동으로 구매된다. 그러면 첫눈의 호감에 엄청난 신경을 쓰는 반면, 보호자가 이 동화책의 의미를 이해하고 아동과 적절한 상호작용을 모색할 지 여부를 확신할 순 없게 된다.

 

하지만 낱개로 만들고 책 크기를 키우면 시설의 교사가 선택하는 영역 범위로 들어올 가능성이 있고(책은 일단 크고 튼튼해야 어린이집 교사가 눈길 준다.), 이는 해당 교사의 책에 대한 이해를 담보하는 동시에 아동과의 적절한 상호작용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앗, 근데 이렇게 하면 초딩에겐 접근성 떨어지는 건가? 모르겠당.)

 

사실 존 버닝햄이나 앤서니 브라운 책은 유명하지만, 그 '유명하다, 훌륭하다'라는 평가 안에는 교사의 선택과 아동과의 상호작용이 큰 상관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사족2]

근데 삽화, 죽인다.

에우제니오 카르미라는 사람이 그렸다는데, 정말 이렇게 다양한 소재와 상징적 표현으로 내용 이해를 배가시키는 그림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주의~!

아동의 시각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말했죠? 냉정하다고..ㅋㅋ

 

* 사진출처 : 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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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2 01:23 2005/09/22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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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8/28 02:03

무위님의 [펭귄 - 위대한 모험] 에 관련된 글.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뜯어고칠 수 있다면, 성우 빼고 나레이션도 빼고
찰리 채플린 영화식으로 화면 중간중간 간단한 설명 깔아주고 끝내고 싶다.
물론 펭귄들의 소리와 근사한 배경음악은 필수~!

 

어디서 읽은 바로는
영화감독 자신이 성우를 꼭 썼으면 했다고 하고 프랑스판 역시 성우가 나온댄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동물의 의인화에 반대하여 실제 나레이션만 넣다고 한다.
감독의 의도는 대략 알 것도 같은데 동의는 안되고, 매우 미안하지만 차라리 미국판 구해보고 싶다 -.-#



인간의 음성들을 제외하고 화면만 평하자면 그야말로 장관.
내 평생 영하 40도의 남극과 살을 애는듯한 겨울바람, 한번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황제 펭귄과 오로라를 체험하지 못할 것이며,
펭귄들이 물 속에서 얼마나 멋진 새처럼 날아다니는 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할 것이며,
그들이 새로운 생명을 위해 자신에게 닥쳐오는 생명의 위협을 몇 고비나 넘기는지 지켜보지 못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지 못했더라면
같은 하늘 아래 그다지도 지독하게 아름다운 곳이 존재함을, 펭귄의 아름다움을, 그들이 함께 뭉쳐 이루어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이 영화의 컨셉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어느덧 스며들어 있는 인간 중심의 사고, 편협한 정상가족 개념에 대한 집착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4살이 넘으면 짝짓기를 위해 추위와 천적을 피해 얼음이 단단히 어는 오모크까지 한참을 걷는다.
그리고 짝짓고 알 낳고 품고, 수컷에게 알 넘겨주고, 암컷은 먹이 구하러 가고, 수컷은 자기들끼리 몸을 촘촘히 붙여 바람을 막고, 암컷이 돌아올 때쯤 새끼 펭귄이 나오면 먹이 주고, 수컷은 또 떠나고...
이 사이에 칼날같은 겨울 바람이, 물표범이, 새가 시시때때로 그들을 위협하고 목숨을 앗아간다.

 

그들은 이 모든 과정을 함께 한다. 뭍에서 걸을 때도, 짝짓기할 때도, 추위를 막을 때도, 바다에서 먹이를 구하고 새를 쫓을 때도 그들은 언제나 무리지어있다.
늦가을에 만나 초여름에 모두 뿔뿔이 헤어질 때까지 그들은 거대한 공동체 그 자체이다.
함께 모여 무언가 헤쳐나가는 모습, 감격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들의 1부1처제에 주목하고 아빠, 엄마, 아기 펭귄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옆집 아저씨 펭귄이 없었다면 과연 추위에 살아남았을까?
앞집 아줌마 펭귄이 없었다면 아빠,엄마가 모두 먹이 구하러 간 아기 펭귄은 새의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실제 새끼가 적당히 자라 각자 제 갈 길 떠나는 걸로 위대한 한 단락을 마친 펭귄들의 모습에 (매우 폭력적인) 정상가족 개념을 각인시키고 가족애를 환기시키는 것은 감정이입을 완전! 방해하신다.
왠지 위대한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잣대로 재다가 뭔가 제대로 된 모습을 못 보게 된 꼴이라고나 할까?

 

기간동안 펭귄이 보여준 모습은

그저 삶을 치열하게 살아나가는 존재들의 위대함이며,
그야말로 '모험'이라 불리울 만한 거대한 노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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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28 02:03 2005/08/28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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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7/18 00:30

처음엔,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본 직 후의 솔직한 나의 심정은 바로 권태로움이었다.

영화의 주제로써의 '권태'가 아닌 나의 느낌으로써의 '권태'였다.

 

17세의 풋풋한 아름다움을 가진 누드모델과 40대의 이혼한 철학 교수라니..

배우들이 사용하는 프랑스어가 앞으로의 스토리의 전개를 알려주는 듯 하다.



역시나 40대 교수 마르땅은 '책을 쓴다'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활동을 통해 일상의 권태를 날리고 변화를 꿈꿔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소녀, 세실리아.

그녀는 만날때마다 섹스만 하고, 대화를 해봐도 별로 관심있는 것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뭘하고 지내는 지조차 별 관심이 없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다.

처음엔 몇 번 자고 헤어질 생각이었지만 결국 끊어내지 못하게 된 건 마르땅.

뒤를 밟고, 지켜보고, 추궁하고, 결국 원하는(?) 답을 듣게 된다.

세실리아는 다른 애인도 사귀고 있었고, 얼떨결에 들키긴 했지만 마르땅과 헤어질 생각도 없다. 이런 관계가 못마땅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마르땅.

영화가 끝날 무렵, 그는 심기일전을 다짐하지만, 그게 그녀를 단념하겠다는 소리인지 죽을때까지 그녀를 붙들 것이라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다.

 

한참 섹스를 즐기고 다른 사물에 별 관심없어 보이는 나이인 세실리아는 그저 그 나이스러운 매우 평범해보이는 캐릭터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그녀를 쫓아다니는 마르땅은 비현실적이지만 어쩐지 유럽의 권태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인물이 아닌가 싶었다.

 

왠지 프랑스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보았을 법한 설정과 내용 전개.

그래서 나는 매우 권태롭게 보았고,

다만 마르땅의 너무나 진지하여 매우 코믹스러운 연기만이 업그레이드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 좀 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르땅은 교수인 주제에 가르침에 대한 기쁨도 잊어가고 있고, 6개월 전엔가는 부인과 이혼했다. 일단 책도 써보려고 시도는 해본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보면 그는 어느새 40 평생을 살면서 단 1분 1초도 권태로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련해놓은 삶의 공간인 가정과 학교가 모두 무료해진 그 때를 참을 수 없게 된 그는 책쓰기라는 인생의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침 바로 그 당시 그때의 그에게 그런 방식은 맞지 않았고, 우연히 만난 세실리아가 바로 새로운 변화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그는 이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하고자 노력한다.

즉, 세실리아를 소유하고 독점한다는 마무리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만만치 않다.

그녀에게 일상은 원래 권태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뭣할 만큼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오늘 누구와 만나, 어디서 식사를 하고, 무슨 구경을 했는 지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옆에서 마르땅이 추궁할 때만 겨우 기억이 날 정도다.

그녀에게 일상의 권태로움은 그다지 처참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며,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득 마르땅이 필연적으로 세실리아가 필요했던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난 그저 마르땅이 변화가 필요한 그 시점에 때마침 세실리아가 끼어들어왔던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르땅에게 있어서  책쓰기나 세실리아는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만약 그 당시 책쓰기에 필(feel)이 꽂혔다면 탈고하기 전까지는 권태로울 일이 없었겠지.

다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건대 책쓰기와 세실리아가 다른 점이 있다면

세실리아는 마르땅이 알고 있는 연애나 사랑의 방식에 맞춰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이기 때문에,

마르땅은 이번 변화의 필요성에 있어서 시작점을 가지긴 했으나 종착점을 얻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르땅 입장에서도 그다지 나쁜 상황만은 아니지 않나 싶다.

어떻든 마르땅은 변화가 필요했는데 뭔가 변화의 필요성이 완료되면 결국 또다른 변화의 필요성이 도래하게 된다.

변화의 필요성이 완료되는 시점, 종착점, 권태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실리아가 마르땅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어떠했을까? (심지어 청혼도 했다.)

결국 몇개월, 몇년 후에 마르땅은 또다른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되지 않을까?

 

 

나이가 들면 삶에 대해 점점 달관하게 된다던데 잘 모르겠다.

나도 왠지 마르땅처럼 어느새 한 순간도 권태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잠시 고민된다.

물론 권태로움을 참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고 그닥 나쁜 일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을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는 데는 참~ 도움이 되지 않을 듯 싶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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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8 00:30 2005/07/1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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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5/01/08 14:30

엄마와 아들 둘, 할아버지와 가정부...

이게 바로 야마다 집안의 구성원이다.

[날 울리지마] 그림.와타루 카즈키 / 원작 사토스미 타카구치



둘째아들 라이타.

 

곧 명문중 재학이 확실시 되는 100점 천재 초등 5년생.

야마다집안의 모든 이목과 기대와 희망과 사랑은 라이타의 것이다.

시험성적 좋다는 이유로 선물받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등교하면

물론, 이녀석... 공부는 잘하는데,

대체로 잔디밭에서 담배 피기, 한놈 찍어 왕따시키기, 치매 걸린 할아버지 머리 때리기, 엄마 살살 구슬려 선물 받기 등이 주요 취미생활이다.

하지만 인생은 어려운 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엄마의 우대와 기대, 버젓한 친구하나 없이 범생으로 있어야 하는 현실...

특유의 자만감으로 모든 것을 묻어버리려 하지만

살아가면서 100점 머리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그의 앞에 속출한다.

 

그래도 답답한 세상속에 꽤 운이 좋은 편이다.

"라이타, 싫으면 관둬도 돼. 내가 전례를 만들어 놨으니까".

낙제생주제에 꽤 멋진 생각을 많이 하는 형이 멋져보여서 싫어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

'형이 먼저 실패해줘서 감사해. 형, 고생한다.'

 

큰아들 토키오

 

한때 신동이었으나 인생 하루 아침에 바뀐사건은 다름 아닌 명문중 진학 실패.

현재는 다니는 고등학교 캡장노릇중인 주먹쟁이.

아침에 일어나면 엄마에게 "낙오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저 그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매번 결석, 스스로 왕따 당하던 그는 결국 자신이 얼마나 인형과 같던 존재였는지 깨닫는다.

 

이 녀석도 꽤 운이 좋은 편이라, 다행히도 곁에 함께 있어줄 친구가 있다.

"널 좋아하는 애도 있을지 모르잖아?"

그리고는 주먹의 세계로 이끌어가버렸다...-_-;;;

하나더, 더욱 다행인건 그는 여전히

엄마의 사랑이 그립고, 동생이 귀엽고, 할아버지가 눈에 밟히고, 가정부에게 잘해주려는 사람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엄마

 

좀 그렇게 안해줬으면 좋으련만 이 엄마, 진짜 자신이 꼴린대로 말하고, 살아버린다.

큰아들에게 서슴없이 "낙오자"라 부르는 이 왕싸가지 엄마.

작은아들에게 끊임없이 성적 향상을 위한 피드백을 아끼지 않는 엄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지만, 그래서 참 싸가지 없지만, 당췌 미워할 수가 없다.

 

큰아들이 중학교 어느날 가출메모 남겨놓고 나갔다가, 처음으로 진짜 주먹 쓰고 얼굴 망가져 들어온 날.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한 끝에 한가지 사실을 득도했다.

'애들이란건 각자 달라. 어차피 부모자식은 부딪치며 추억을 만들어가야해'

그리고는 과감히(!) 큰 아들에게

"나에게 원망을 들으면 너도 공격해와. 알았지?" 라며 공격권을 허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들에게 맞을까봐 팔로 얼굴을 막는 그녀.

나름대로 큰 일 치룬 토키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들어가 잘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들일 만한 노력이란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무관심.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사라지면 그때야말로 진짜 모든 것이 끝난다.

 

이 만화,

뭔가 대단한 엄마를, 뭔가 대단한 아들들을 기대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그저 서로에게 관심과 뭐라 단정짓기 어려운 오묘한 반응들을 보일 뿐이다.

적당히 서로가 마음에 품은 상대방의 이상적 모습도 있고,

어느 정도는 좀 포기도 해주고,

예상치 못한 모습에 감격이나 황당도 했다가

나름대로 나설때는 좀 나서도 주는 모습들...

 

사람이 사람에게 들일 만한 노력은 다양하겠지만,

중도를 찾는 것도 어렵겠지만,

야마다 집안 정도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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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8 14:30 2005/01/0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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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4/12/08 22:46

Luna님의 [[초강력추천만화]내 마음속의 자전거] 를 읽다가

문득 '내가 최근에 본 재미있는 만화가 뭐였더라?' 생각해보게 되었다.

 

음... 아마도...

[서양골동양과자점]으로 유명한

요시나가 후미의 [플라워 오브 라이프] 1편이었던 것 같다.

 



요시나가 후미의 작품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건,

다소 불편한 과거의 사연이 있는 인물들과

그들의 사소하지만 이벤트같고 활력이 느껴지는 일상과

이 모든 것을 책이라는 2차원 공간에 담아내는 솜씨좋은 작자의 구성 때문이다.

 

[플라워오브라이프]에도 나를 만화책으로 이끄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온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백혈병을 앓고 고등학교도 1년도 꿇어들어갔으나 여전히 씩씩한 녀석,

백혈병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

동생을 부려먹는 듯 보이나 실은 많이 챙겨주는 누나,

누구에게나 편안함으로 감동을 주지만 뚱뚱해서 약간 스트레스 받는 녀석,

만화 매니아에 남다른 사고방식으로 타인의 이상한 주목(?)을 받는 녀석,

불륜인 주제에 아이들에 대한 시선은 괜찮은 것 같아보이는 교사들...

 

1권밖에 못봤지만 마지막권까지 이어질 느낌을 알고 있다.

아마도 요시나가 후미가 만든 인물들은  

여러 소소한 일들을 겪게 될 거고,

자기중심으로 하던 생각의 폭에 타인이 끼어들게 될 거고,

그로 인해 사람을 보고, 알고, 이해하게 될 것이며,

왠만하면 다들 행복해질 거다.

 

하지만 이 만화는 결코 온정적인 눈길이나 해피엔딩을 위한 장면 연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들이 겪게 될 소소한 일상에는 가슴 아프거나 기분 나쁜 경험들도 많이 포함될테지만,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사회에 대한 인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람이 사람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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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그래도 영어 제목으로 뽑은 한글판이라니, 그건 맘에 안드네.

* 마지마의 고시엔 고분을 둘러싼 엽기적인 사고 체계와 대응방식은 새삼 작자의 섬세한 일상 인식의 폭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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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8 22:46 2004/12/08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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