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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다녀와서-

<수련회 다녀와서 연맹 상조회 게시판에  쓴 글>

 


출근길

비가 온다


대전,

비 오지 않았다


손수건 펼쳐

머리에 얹고


속절없이

비를 맞는다


연맹 사무처장 신세같다.


#1.

7월 13일, 수련회를 하루 앞둔 날 오후, 사무실에 앉아서 수련회 자료집을 미리 검토하다가 끄적거린 낙서입니다. 제목을 '독백'이라고 붙였습니다. 대전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서울역에 내리니 비가 오더라, 우산이 준비되지 않은 나는 그냥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뭐, 이렇게 뻔한 얘기를 왜 썼냐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데, 조직운영에 대한 평가와 개선방안을 놓고 끙끙거리던 나로서는 조직운영을 논하기에 앞서 사무처장으로서의 자아비판이 더 크고 절실한 화두였던 터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무시하고 길을 떠난 여행객의 이미지가 어쩌면 내 지난 6개월의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은 꼭 생뚱맞기만 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2.

세상을 바꿀만한 전망과 철학이 빈곤하고 역량 또한 보잘것 없는 내가 연맹 사무처장으로 나선 이유를 지금 구태여 떠올릴 이유는 없다고 하더라도, 지난 6개월은 반성하고 또 반성할 일로 가득합니다. 일처리는 꼼꼼하지도 철저하지도 않고, 동지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늘 부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10년 전쯤에 내가 가졌던 장점이라는 게 있었다면 밤새워 일에 매달리던 열정과 사람들에 대한 끝없는 관심, 그리고 무엇이든 일을 만들고 조직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그랬기에 노동조합의 간부로 일할 수 있었겠지요), 위원장이며 본부장이며 당의 지구당 위원장이며, 이른바 감투라는 것들을 자꾸 쓰게 되면서, 하나의 주제에 깊이 천착하기보다는 무수한 현안들에 대한 얕은 이해와 임기응변으로 세월을 먹어치웠고, 시나브로 열정도 패기도 끈기도 집념도 모두 사그라진 느낌입니다.


#3.

연맹의 사무처장이 된 이상 '최종결재권자'로서만 지냈던 과거의 습관들은 모두 지워버려야 했습니다. 정말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고 그것들을 내 새롭고도 건강한 습관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 먼길을 오고가면서 피곤하다는 이유, 등등을 혼자서 줏어섬기며, 위원장에게 의존하고 임원들에게 기대고 사무처 동지들에게 짐을 떠넘기면서 6개월을 보냈습니다. 특히나, 임원과 임원, 임원과 사무처, 부서와 부서, 사무처와 사무처, 중앙과 지역 사이에서 소통과 갈등 조정 역할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한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4.

하루 이상 외박이 예정된 길을 나설 때 책꽂이에서 옛날 책을 꺼내드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황지우의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가 그것이었습니다. 99년 5월 3일 과기노조 임익성 동지(과기노조 그만두고 7월 18일부터 원자력연구소에 재입사합니다)의 결혼식에 참가하러 제주도로 가는 길에 샀던 책입니다. 오며 가며 몇번씩 읽고는 여러 군데 밑줄을 쳐 놓았는데, 그 중에 다음 대목이 아주 선연하게 망막에 와 멈췄습니다. 내가 수련회 프로그램 진행하다가 한번 소리내어 읽었던 구절입니다.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사람에 대한 평가와 비판이라는 것이 '모두가 다 알더라도 정작 당사자만 모르는 것(불구)'을 정직하게 말해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곧 동지애요, 올바른 비판이며, 사람을 바꾸는 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99년에 밑줄칠 때에도 약간은 그런 생각을 했을텐데, 이번처럼 절절하게 느끼지 못했던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것'을 그 사람들이 꼭 얘기해주어야만 자신의 한계와 문제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관성화되지 않고 진지하게 되풀이하는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갖고 있는 '불구'를 인식할 수 있고, 그것은 곧 그 '불구'를 이겨낼 수 있는 계기요 힘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다른 동지들의 장점을 하나씩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다 보면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5.

지난 6개월동안 동지들에게 많은 것을 빚졌습니다(그것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일일이 열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도 많이 성장했으리라 믿습니다만, 아직은 멀었습니다. 그러나 임기 2년의 1/4이 벌써 지났고, 더 이상 태생적이거나 외생적인 내 한계만 둘러대며 내가 잘하지 못한 일을 무마할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크고 작은 실수들을 연맹 초년생이라는 이유로 너그럽게 넘길 일도 아닙니다. 끝내 내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더 애쓰고 더 힘껏 살겠습니다. 사무처장으로서의 역할을 더 잘해서 얻는 기쁨이 수련회에서 동지들이 먹을 음식들을 장만하는 즐거움 못지 않게 크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6.

임기를 시작하기 직전 어떤 모임에서 내가 여러 동지들에게 했던 말을 간추려서 메모해둔 것이 생각이 나서 여기에 덧붙입니다. 아무래도, 나의 '불구'를 가리켜 충고하라고 동지들을 다그치기보다는 내가 보고 느끼는 동지들의 '불구'에 대해 먼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가장 신경쓰는 것은 소통의 문제이다.

임원과 임원, 임원과 사무처, 사무처와 사무처 사이에서

서로간의 원활한 소통을 돕고 일을 적절하게 나누는 것이

사무처장의 몫이다.


과기노조 위원장 노릇을 하면서 참 많이 얘기했던 것 같다.

언제든지 조직에 대해 나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충고해 달라고. 그러나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내 생각을 솔직하고 충분하게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남들한테 비판만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문제였다.

도대체 저 놈의 속내를 알아야

내 맘도 털어놓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냥, 내 맘 열고 있으니 니 맘을 드러내라, 이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먼저 말하자.

그래야 소통이 활발해지고 호흡을 맞출 수 있다.

나도 좀 더 열심히 노력하겠다. 도와 주라."


#7.

"아무리 후한 점수를 주어도

자기 평가에서 낙제점을 면할 길 없어

반성문을 굴비처럼 엮어서는

먼 길 떠납니다.

가서

신랄하게 혼나고

자아비판도 혹독하게 하고

혼나고도 신이 나서

폴짝 폴짝 뛰면서 돌아오렵니다.

아직 올해의 절반은 남아 있으니까요."


수련회 가는 날 아침에 남긴 글의 일부입니다. 동지들 저마다 느끼고 생각한 것은 제가끔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마음으로 가고 왔습니다. 좀 더 신랄하고 혹독한 비판은 손동신 동지의 말처럼 평소의 생활 속에서 틈틈이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서로가 일에만 치여서 살다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내가 살고 투쟁하는 이유와 의미를 놓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습니다. 뜬금없이, 오래 전에 사람들 앞에서 분위기 잡겠다고 써먹었던 노래와 율동 하나 생각나네요. 개구리 한마리가/ 장독 위에서/ 폴짝폴짝 뛰다가/ 넘어졌어요/ 머리가 깨져서/ 잉잉 울다가/ 엄마한테 달려 갔어요/ (헤이 헤이) / 엄마 하는 말/ 장독 위에서/ 폴짝폴짝 뛰니까 머리가 깨지지- ^-------^


#사족

1) 사진 한장 올려놓고 자려 했는데, 사설이 평소 말하는 것 이상으로 길고 두서가 없네요. 어쩝니까, 이런 것도 내 '불구'(이 단어는 좀 불편한 느낌을 주는데, 여러번 썼네요, 상징으로 이해해 주시겠지요?)의 하나라면 '드러내 놓고 씹히기'를 반복해야 고쳐지지 않겠어요?^.^;;

2) 이렇게 떠들어대고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또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이냐, 하는 생각에 글을 올리는 것이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헤헤-

3) 2박 3일 동안 함께 하신 분들, 먼길 오고 가신 동지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 얼굴도 포함된 마지막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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