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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만남

  • 등록일
    2005/03/31 13:57
  • 수정일
    2005/03/31 13:57
도종환 시인의 편지에서 퍼날라옴. 참 여유없이 산다는 것을 도종환 시인의 글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그러나 난 도종환 시인과 같은 자리는 되도록 피하고 싶다. 나의 무르익지 않은 존심인지... 고집인지 모르나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양보하기 싫은 일 그리고 궂이 만나 서로 불쾌하고 어색한 자리는 피하고 싶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저자가 만할 것처럼... 과거 그를 기억하기 위해... 나약함이기도 하다. ---------------------- 오랜만에 반가운 전화를 받는다. 만나자는 약속도 흔쾌하게 정해진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과 약간의 들뜬 기분으로 약속장소를 찾아간다. 그런데 가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오늘 이 반가운 만남이 즐겁고 유쾌한 자리가 되고 끝날 때도 유익한 만남이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이었다. 학교동기를 만났다. 반가웠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옛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렵고 까다로운 선생님 밑에서 고생한 이야기가 제일 즐거웠다.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러다가 요즘 하는 일,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 갔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이야기에 대한 의견이 서로 달랐다. 흉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도 서로 달랐다.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비슷했지만 그런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의견은 같지 않았다. 자연히 가정교육, 학교교육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고 경쟁을 중심으로 한 사회 시스템과 거기서 낙오하면서 소외감과 적개심과 콤플렉스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게 만드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와 경쟁 없는 세상은 없는 게 아니냐는 현실론을 중심으로 각각 자기 주장을 내세웠다. 경쟁이 심하고 환경이 어렵다고 꼭 나쁜 사람으로 자라는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고 친구는 이야기하였다. 그 말도 맞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훌륭하게 성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잘못된 구조 속에서 더 나쁘게 자라고 있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쪽은 파병을 반대하고 한쪽은 국가의 미래와 이익을 위해서 찬성한다는 이야기로 발전하여 서로 주장이 강하게 엇갈리더니 마침내는 정치와 정치지도자에 대한 평가에 이르면서는 서로 세계관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씁쓸해지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다시 웃으면서 술을 권하기도 하고 몇 번이나 화제를 다시 돌려보려고 하였지만 조금 이야기를 하다보면 다시 첨예하게 대립될 수밖에 없는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주장으로 옮겨가 있곤 하였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처해 있는 환경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서 생각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술을 많이 마실 형편이 못되었지만 친구는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우리는 자리를 끝내고 일어섰다. 악수를 하고 또 만나자고 말은 하였지만 헤어져 돌아오는 밤길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오면서도 아까 친구가 한 말에 대해 이러이러한 사례를 더 들어가며 반박을 했어야 하는데 그 말을 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친구가 한 말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 자꾸 떠올라 불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밤이 지나고 다음 날이 되자 후회의 마음이 밀려왔다. 작은 것을 가지고 밀리지 않고 지지 않으려고 하다 큰 걸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말을 조금 덜 하고 더 많이 들을 수는 없었을까. 친구의 말이 틀리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 나와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내 말에 대해 공격을 한다고 생각하여 경색되지 말고 좀 더 유연한 자세로 대할 수는 없었을까. 상기된 얼굴, 따질 듯한 표정으로 말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친구도 얼굴이 굳어졌던 건 아닐까. 친구가 계속해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많은 말을 하게 된 것은 혹시 내가 한 말 중에 나도 모르게 친구의 자존심을 강하게 건드린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톨스토이의 책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종종 분노에 사로잡혀 그것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분노 속에 일종의 남자다움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단단히 혼내주겠다, 등등.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분노는 나약함의 증거이지 힘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화를 많이 낸다는 것은 나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감이 있으면 분노하지 않는다. 강한 자일수록 여유가 있다. 분노한다는 것은 속에 있는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행동이라는 것이다. 몰론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야 하고 분노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크게 언성을 높이고 분노할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도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건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노약자나 여자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중에는 강한 자의 폭력에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살아온 소심하고 나약한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어지는 톨스토이의 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만 정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거나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 화가 나 있을 때는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린 것 같다. 나의 분노는 정당하고 다른 사람의 분노는 어이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 분노만 정당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게 분노한 상태에서의 생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마음의 평정을 잃은 상태에서 하는 생각과 판단은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정신적 여유를 잃어버릴수록 이성적인 판단이 설 자리는 줄어든다. 격앙된 상태에서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 하는 생각이 앞서기도 한다. 그리고 화가 났다고 해서 상대방이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새겨두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옛 친구와의 만남, 가족들끼리의 나들이, 애인과의 데이트, 동료들과의 회식 모임, 내일도 우리에겐 그런 자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남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남이 끝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즐겁고 다시 만나고 싶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남의 자리도 그리고 그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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