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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도종환] 깊이 들여다보기

  • 등록일
    2005/04/01 10:03
  • 수정일
    2005/04/01 10:03
아침에 방을 쓰는데 벌레 한 마리가 쪼르르 기어갑니다. 호박씨만한 크기의 벌레는 수많은 다리를 바쁘게 움직이며 연분홍빛 몸을 끌고 갑니다. 겨우내 어디 흙벽속이나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연못에도 작은 물벌레들이 물에 잠긴 팽나무 잎 사이를 오르내리는 게 보입니다. 겨울에 가뭄이 심해 바닥까지 물이 말라 있거나 얼음이 두껍게 얼어 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디서 목숨을 유지하고 살았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가마솥 아궁이 옆에 풀 한 포기가 손바닥 만하게 초록 잎을 내밀고 있고 오랜만에 멧비둘기 울음소리도 들리고 쇠딱다구리가 작은 부리로 나무둥치를 쪼는 소리도 들립니다. 방안에서 겨울을 난 우리는 잘 모르지만 한데서 겨울을 난 것들은 서로 무슨 신호를 주고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풀들이 주도하는지 새들이 나팔수 노릇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자기들끼리는 밖으로 나와 돌아다닐 때가 되었는지 아닌지를 서로 서로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귀와 눈과 코와 피부로는 감지가 되지 않는 어떤 소리와 온도와 빛이 있어 그걸 알고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나 봅니다. 나는 오늘 아침 그것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천지에 봄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새나 벌레 한 마리의 목숨도 하찮은 것이 아님을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때가 바로 봄입니다. 새롭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 가상하고 신비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 작은 것들도 이렇게 온전한 생명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온통 죽음과 적막뿐이던 잿빛 대지 아래서 다시 살아나고 목숨을 이어가며 몸 전체로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내 생명과 꽃다지의 생명이 다르지 않고 내 존재와 고라니의 존재가 큰 차이가 없음을 알게 합니다. 짐승도 벌레도 다 하루치의 자기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고단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가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고 여럿 속에서 소외될까봐 두려워하며 더불어 사는 방법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배웁니다. 목마름과 허기와 사랑을 알고 기다리는 법을 압니다. 청화스님은 “천지는 나와 더불어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내 생명이나 자연 만물의 생명이 다 하나의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일체중생 개유불성.”입니다. 모든 목숨 있는 것들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등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불성으로 묶여 있다는 동일성을 자각하고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몸과 똑같이 생각하고 큰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천지만물을 보라는 것입니다. 내 뼈가 꺾일 때 아프면 나무도 그렇게 아픔을 느낄 것이고 산짐승이 덫에 걸려 죽어갈 때 내 목숨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처럼 아파하는 것, 그것이 동체대비의 마음입니다. 내 몸이 겪는 통증을 짐승도 똑같이 느끼고 내가 갖는 두려움과 환희를 풀과 나무와 산과 물도 똑같이 느낀다고 생각할 줄 알게 되면 하찮아 보이는 미물도 함부로 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큰 스님들처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천지만물이 다 부처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생명을 가진 것들은 어떤 것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생각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찮아 보이는 것들이 비로소 소중하게 보이는 시기를 거쳐 인간의 인간다운 영역은 넓혀져 왔습니다. 어린이가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대접을 받아온 것이 언제부터였습니까. 채 백 년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이라고 부르는 말조차 없었습니다. 몇 해를 키워본 다음에야 호적에 이름을 올렸고 질병과 굶주림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 아이는 키워서 남에게 주어버리는 존재처럼 취급당했고 자라서도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주어진 것이 얼마나 됩니까. 해월 최시형 선생이 사인여천(事人如天), 어린이든 여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사람 대하기를 하늘 같이 하라고 말하는 것이 반역의 사상을 퍼뜨리는 일로 매도당하던 것이 불과 백 몇 십 년 전입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를 한 단계씩 거치며 비로소 세상이 인간다운 모습으로 조금씩 변해왔습니다. 흑인들이 그렇게 노예에서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대우받았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가진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자연에 대해서도 이제 똑같이 동체대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때 많은 저항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예와 천민과 여성과 흑인과 장애인들도 똑같이 인간다운 권리와 인격을 가진 존재로 대해야 한다고 말할 때 당대 사회도 그 요구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였고 힘으로 억누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을 거쳤고 그것을 인정한 것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도 맞는 길이었음을 인류의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내 속에도 자리하고 계시고 내 이웃의 가슴 속에도 계십니다. 좋은 옷을 입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만이 내 이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만의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어부와 막노동꾼과 손가락질 받는 자와 병든 자와 소경과 앉은뱅이 같은 장애인들과 창녀의 예수님이기도 하셨습니다. 백인들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유색인의 예수님이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고 사람답게 대하는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오른편에 앉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사람과 자연만물과 미물들까지도 평등하게 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아주 조금씩 잎을 내밀고 눈을 틔우고 대지를 푸른빛으로 바꾸어 가는 뭇 생명들의 움직임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자비의 마음을 갖게 하는 계절이 봄입니다. 조용히 움트는 버들개지를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겸허해지는 계절이 봄입니다. 영문학자 박혜영 교수는 2004년 ‘올해의 평화상’을 받은 인도의 여성 작가 아룬다티 로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왜 우리가 다른 존재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존재이건 일단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우리와 연결된 그 고리를 쉽게 잘라내지 못할 것이다. 가령 맑은 강물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 물 속에 시멘트를 쏟을 수 없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두고두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내지 못할 것이다. 또 죽어가는 동물의 눈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결코 덫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를 처음 사랑했을 때의 그 착한 설렘을 기억하고 있다면 결코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것은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일이며 사랑과 동체대비의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내 앞에 있는 것들을 타자로 대하지 않고 나와 똑같은 생명이라는 동일성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한 발짝만 걸어 나가면 우리는 이제 막 눈뜨기 시작하는 생명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들로 봄의 대지는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오래오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는데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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