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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시대의 '프라이버시'

  • 등록일
    2005/04/26 23:52
  • 수정일
    2005/04/26 23:52
파놉티콘 시대의 '프라이버시' 홍성욱,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 정병진 기자 naz77@hanmail.net ⓒ2002 정병진 얼마 전 핸드폰에 난데없이 무슨 음악편지가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이게 무슨 인사인가싶어 확인해봤더니, 광고의 배경음악인 듯한 소리만 계속 흘러나올 뿐이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보낸 편지 같지 않아서 도중에 그냥 끊어버렸는데, 나중에 신문을 읽다가 이게 수신자를 속이려 교묘하게 발송된 상업용 스팸메일이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수신자를 속여 유료음악을 듣게 한 뒤 돈을 뜯어내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심히 불쾌했다. 그런데 이런 스팸메일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려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게 우리네 실정이다. 이러한 때에 정보화 시대의 사생활 침해와 감시문제를 짚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리라. '파놉티콘'은 본래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이 제안한 원형감옥으로 '모든 것을 다 본다(Pan: all+Opticon: seeing/vison)'는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파놉티콘은 시선의 비대칭성을 핵심구조로 하는데, 간수는 모든 죄수를 볼 수 있으나 죄수은 간수를 볼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이 시선의 비대칭성은 죄수로 하여금 자신이 늘 감시당한다는 환영을 갖게 하여 마침내 감시를 스스로 내면화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이뤄지는 감옥이 바로 파놉티콘인 것이다. 벤담은 이러한 파놉티콘 원형감옥 프로젝트를 실현하여 그 운영자가 되고 싶어 무려 20년에 걸쳐 온갖 노력을 다했다고 전한다. 대단한 집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파놉티콘이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공장에도 이용될 수 있다면서 그 훌륭한 쓰임새와 가치에 대해 열심히 선전했으나 정부는 끝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놉티콘은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감시와 처벌>를 통해 새롭게 부각되었다. 푸코는 이 책에서 파놉티콘을 영혼의 규율을 가능케 하는 '감시의 원리'를 체화한 권력의 기술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규율 권력은 감옥에 한정되지 않고 모세관처럼 사회 전 분야에 파급되어 우리를 통제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푸코가 주목했던 것은 만인이 한 사람의 권력자를 우러러보던 근대 이전의 '스펙터클의 사회'가 파놉티콘의 등장으로 한 사람이 만인을 주시하는 시선을 가진 근대적인 '감시(규율) 사회'로 변화되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서양의 과학과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진리의 메타포로 간주되던 시선을 권력의 기제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과 학교의 파놉티콘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감옥과 공장, 학교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 푸코의 인식과는 달리,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에 의해 행정 권력의 두 가지 감시 유형이 있음이 지적되었다. 하나는 정부가 행정·경찰·군사적 목적을 위해 개개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감옥에서처럼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직접 감시하는 유형이다. 이는 눈으로 보는 감시가 전부가 아니라 작업을 기계로 대체하고, 탈숙련화하고, 작업에 대한 실시간의 정보를 모으고, 작업자 개개인에 대한 정보 관리를 강화하고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 등으로 감시활동이 바뀌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마침내 오늘날 정보 파놉티콘의 시대를 가능케한 것이다. 정보 파놉티콘의 시대는 국가, 기업, 개인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역감시하는 사회다. 따라서 지금은 과거 특정 권력자들에 의해 일방적인 감시와 통제를 당하던 시대는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권력자들 마저도 시민들에게 언제든지 감시당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보 파놉티콘 사회에서 나타나는 우려할 만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잘 언급해주고 있다. 예컨대, 벤담이 말한 파놉티콘과 달리 전자 파놉티콘은 전자 감시가 피감시자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신용카드 사용부터 전자 메일과 포털 사이트를 무료로 이용하기 위해 또는 당첨될 확률이 극히 희소한 경품 때문에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성명, 주소, 전화번호까지 제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디 그뿐인가. 적립금이나 마일리지 보너스를 위해 멤버쉽 카드를 만들고, 이를 위해 자세한 신상 정보까지도 제공하는 형편이다. 이러니, 프라이버시 침해의 심각성과 그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여기에 문제의식을 가진 진보넷 같은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정보의 수집을 제한하는 강력한 프라이버시 기본법의 입법화, 역감시를 위한 정보 공개권 확보 등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저자도 "프라이버시란 죽었다고 간주해야 할 권리가 아니라, 21세기에 적극적인 의미로 새롭게 부활시켜야할 기본권"이라고 역설한다. 그런데도 정부는 틈만 있으면 추진하려는 전자주민카드나, 2003년에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핸드폰을 통한 위치 추적 시스템 도입에 적극적이라니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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