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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위해 퍼나른다.2

  • 등록일
    2005/04/28 17:41
  • 수정일
    2005/04/28 17:41
『자본론』은 마르크스의 기념비적인 업적이며, 그의 생애 전체의 작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자본론』의 목적은 그가 제1권 서문에서 썼듯이,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경제사상가들은 자본주의 작동의 이 또는 저 측면만을 파악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앞의 두 장에서 제시된 분석방법과 역사 해석에 따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역사의 종말이나, 인간 본성에 조응하는 사회 형태로서가 아니라, 그 내적 모순들 때문에 몰락하게 되는 역사적으로 과도적인 생산양식으로서 분석했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이 말했듯이 경제학이라는 '우울한 학문'과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이 장의 주제를 간략하게 개관하는 것이 좋겠다. 이 장은 『자본론』의 초석(礎石)인 노동가치론---이에 따르면 시장에서 판매되는 생산물인 상품은 그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서 교환된다---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이론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이에 따르면 노동자가 창조한 잉여가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이윤의 원천이다---의 배후에 놓여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잉여가치의 최대량을 거머쥐기 위한 자본들---개별 자본가이든, 기업들이든, 혹은 심지어 국가이든 간에---간의 경쟁은 일번적 이윤율을 형성시키고, 그리하여 우리가 보게 되듯이 노동가치론에 수정을 가져온다. 경쟁은 또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야기하는데,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규칙적으로 괴롭히는 공황의 근본 원인이다. 노동과 가치 모든 인간사회의 기초는 노동과정이다. 인간은 노동과정에서 협동하여 자연의 힘들을 이용함으로써 자기 욕구를 충족시킨다. 노동의 산물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유용해야만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것을 사용가치라고 불렀다. 사용가치의 가치는 무엇보다 우선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다는 데 있다. 사용가치에 의해 충족되는 욕구가 반드시 육체적 욕구일 필요는 없다. 책은 사용가치인데, 이는 사람들이 읽기 위해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용가치가 충족시키는 욕구가 더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들일 수도 있다. 살인자의 총이나 경찰관의 곤봉은 구운 콩 통조림이나 외과 의사의 메스와 마찬가지로 사용가치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노동생산물은 상품의 형태를 취한다. 아담 스미드가 지적했듯이, 하나의 상품은 단지 사용가치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상품들은 직접 소비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판매되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교환되기 위해서 생산된다. 각 상품은 그 자체로서 "한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양적 관계, 비율"인 교환가치를 가진다. 그리하여 셔츠 한 벌의 교환가치는 구운 콩 통조림 100개일 수 있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서로 아주 다르다. 스미드의 예를 들어 보면, 공기는 인간에게 엄청나게 큰 사용가치이다. 왜냐하면 공기 없이는 인간은 죽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기는 (부나가 덜 오염된 공기를 사는 경우를 무시한다면) 교환가치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는 비교적 작지만, 매우 높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 사용가치는 어떤 교유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배가 고프다면, 책은 (배를 채우는데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상품의 교환가치는 단지 그것과 교환되는 다른 상품들의 양이다. 교환가치는 상품들의 고유한 질보다는,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 빵 한 덩어리는 병따개 한 개와 용도가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직접이든 화폐의 매개를 통해서든, 교환될 수 있다. 이러한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그것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답은 모든 상품들이 가치를 가지며, 교환가치는 단지 그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나타낸다.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의 원동력이기 때문에, 그 비용은 상품의 생산에 투하된 노동량에 의해서만 측정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노동이, 빵 한 덩어리르 굽거나, 또는 병따개 한 개를 제조하는 데 사용된 것과 같은 각각의 개별적인 유형의 노동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구체적인' 노동이라고 표현한 이 현실적인 노동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가치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가치의 척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을 그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추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용가치 즉 유용물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다만 거기에 추상적 인간노동이 대상화, 즉 물질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동은 '이중성'을 가진다.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의 인간노동력 지출이며, 이 동등한 인간노동, 곧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그것은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모든 노동은 다른 한편으로는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의 인간노동력 지출이다.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서는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노동의 이중성을 "내 책에서 최상의 부분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바로 이 지점이 마르크스의 이론이 리카아도를 비롯한 정치경제학자들의 이론과 갈리게 되는 곳이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정확한 공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데에만 거의 전적으로 관심을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물론 그들은 시장가격을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리카아도의 오류는 그가 오로지 가치량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리카아도가 연구하지 않은 것은, 노동이 자신을 상품들에 공통적인 요소로 표현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마르크스는 사장가격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의 목적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 형태로 이해하고, 무엇이 자본주의를 이전의 사회 형태들과 구분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모순들이 장차 자본주의의 변혁을 가져오게 할 것인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얼마나 많은 노동이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구성하는가를 알려고 했다기보다는, 어떠한 형태로 노동은 이 기능을 수행하며, 왜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이 이전 사회들에서처럼 직접 사용하기 위한 생산물의 생산이 아니라 시장을 위한 상품들의 생산인가를 알고자 했다.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노동은 사회적이고 협동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특정한 종류의 노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그러하다. 각 개인 혹은 집단의 노동은 그것이 사회의 욕구들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노동이다. 이러한 욕구들은 모든 종류의 상이한 생산물들---다양한 종류의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 주거, 운송수단, 생산에 필요한 도구 등---을 필요로 한다. 이는 상이한 종류의 유용노동이 수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단지 한 종류의 생산물만을 생산한다면, 사회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는 상이한 생산 활동들에 사회적 노동을 분배하기 위해 특정한 수단들을 필요로 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노동을 특정한 비율로 분배해야 하는 이와 같은 필요성은 사회적 생산의 특정한 형태와 함께 소멸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썼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다른 생산양식들 사이에는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노동 중 얼마만큼이 특정한 과업들에 바쳐져야 하는가 하는 것을 사회가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메커니즘도 갖고 있지 않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전(前)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고찰해야만 한다. 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경제 활동의 목적이 주로 사용가치들의 생산이었으며, 각 공동체는 자신의 필요들의 전부 혹은 대부분을 그 구성원들의 노동으로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필요을 위해 곡물이나, 가축, 실, 아마포, 의복 등을 생산하는 농민 가족의 농촌 가부장적 생산에서...... 가족내 노동의 분배와 가족의 개별 구성원들이 지출하는 노동시간은, 노동의 자연적 조건들의 계절적 변동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성과 연령의 차이에 의해서도 규제되었다. 노동의 분배는 착취와 계급이 존재하는 전자본주의 사회들에서조차 집단적으로 규제되었다. 그리하여 봉건제에서는, 노동과 그 생산물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에서 부역이나 현물공납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가 그와 같은 사회에서 인간들이 서로 직면했던 상이한 역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노동을 통해 개인들이 맺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인격적 관계로서 나타나며, 물건과 물건 사이, 즉 노동생산물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변장되지는 않고 있다. 계급착취에 기초한 생산양식인 노예제와 봉건제의 경우, 생산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생산자들과 착취계급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바쳐졌다. 주요한 문제는 무엇이 생산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사회적 생산물의 분할이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 분업의 발전으로 이제 각 작업장의 생산은 고도로 전문화되며, 다른 작업장으로부터 분리된다. 각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만으로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병따개 공장의 노동자는 병따개를 먹을 수 없다. 살기 위해서 그는 병따개를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야 한다. 그리하여 생산자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상호 의존적이다. 우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산물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매할 수 있는 화폐를 획득하기 위해, 서로서로를 그들 자신의 생산물들의 구매자로서 필요로 한다. 이러한 체제를 마르크스는 일반화된 상품생산이라고 불렀다. 생산자들은 그들 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만 서로 연결된다. 일반적으로 사용 대상이 상품으로 되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수행되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적 노동의 총체가 사회적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은 그들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만 사회적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도 역시 이 교환을 통해서만 비로소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면, 교환에 의하여 노동생산물들 사이에 수립되는 관계와, 그것들을 매개로 하여 생산자 자신들 사이에 수립되는 관계를 통해서만 비로소 사적 노동은 사실상 사회적 총노동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지금까지는 구체적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노동이었다. 생산이 (생산자 자신의) 사용을 위해, 어떤 특정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생산의 사회적 역할은 분명하며,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생산이 교환을 위해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특정한 생산자가 수행하는 유용노동과 사회의 필요들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한 특정한 공장의 생산물들이 어떤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여부는 그것들이 제조된 다음, 시장의 판매대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만약 어느 누구도 이러한 재화들을 사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생산한 노동은 사회적 노동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사회적 노동과 사적 노동의 차이에는 다음과 같은 두 번째 측면이 있다. 동일한 생산물의 제조업자들은 동일한 시장에서 경쟁할 것이다. 그들의 상대적인 성공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산물을 얼마나 싸게 판매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는 노동생산성의 증대를 수반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높을수록, 어떤 재화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시간은 그만큼 적을 것이며, 그 재화에 응결된 노동량도 그만큼 적을 것이고, 따라서 그 가치도 작을 것이다" 하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경쟁의 압력은 생산자들로 하여금 경쟁자와 유사한 생산방법들을 채택하도록 강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경쟁에서 밀려날 것이다. 따라서 상품들의 가치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의 총량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즉 "어떤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에서 평균적인 노동의 숙련도와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노동강도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노동시간" 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것을 생산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이상을 사용하는 비효율적인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물의 가격이 그의 초과노동을 보상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오로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이 사회적 노동이다. 따라서 추상적인 사회적 노동은 단지 하나의 개념, 즉 정신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생산자들이 '정상적인 생산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사업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사적인 유용노동은 일단 그 생산물이 판매되어야만 사회적 노동으로 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교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각 상품이 포함하고 있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어야만 한다. 사회는 이것을 집단적으로 행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란 생산자들이 단지 그들의 생산물을 통해서만 상호간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한 상품에 보편적 등가의 역할을 맡겨서, 다른 모든 상품들의 가치들을 측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특수한 상품이 보편적 등가의 역할로 고정되면, 그것은 화폐가 된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품이 화폐로 대표된다는 것은...... 상품가치들의 상이한 양이...... 모두 사회적 노동의 구현체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형태로 표현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개별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생산물이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를 미리 알 수 없는 경제체제이다. 생산자들은 오직 시장에서 이 생산물들을 상품으로서 판매하려고 노력해야만 이를 알 수 있다. 상대보다 싸게 판매해서 시장을 차지하려는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하여 생산자들의 상이한 노동들은 하나의 척도, 즉 화폐 속에 체화된 추상적 사회적 노동으로 환원된다. 한 상품의 공급이 그것에 대한 수요를 초과하는 곳에서는, 그 가격은 하락할 것이며, 생산자들은 더 수익성 있는 다른 경제 활동들로 이동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도 간접적으로만, 사회적 노동은 상이한 생산부문들 사이에 분배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가치 분석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독자적인 사회적 생산 형태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초점은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내적 연관"이었다. 그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가치로서 상품은 사회적 크기이며...... 생산 활동에서 인간들이 맺는 관계이다...... 공동체적인 노동이 행해지는 곳에서는 사회적 생산에서 맺는 인간들의 관계가 '사물들'의 '가치들'로서 자신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자본론』이 출판되자마자,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제1권 시작 부분에 나오는 마르크스의 가치에 대한 설명이, 상품들이 실제로 그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교환된다는 명제를 증명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반박을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그 같은 비판자들을 다음과 같이 논박했다. 이 불행한 자들은 내 책에 '가치'에 관한 장은 없지만, 내가 제시하고 있는 현실적 관계들에 대한 분석이 현실적 가치관계의 증명과 전개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임무는 다름 아니라 어떻게 가치법칙이 자신을 관철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외관상 법칙과 모순되는 모든 현상들을 처음부터 '설명'하려 한다면, 그는 과학에 앞서서 과학을 제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론』전체는 노동가치론의 증명이다. 마르크스는 정확한 과학적 방법은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구체적인 것으로 상향"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을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매우 추상적인 형태로 제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분석에서 단지 출발점일 뿐이다. 그 다음 그는 한걸음씩 나아가면서, 복잡하고 ㅤㄸㅒㅤ로는 혼돈된 자본주의 경제 형태가 노동가치론에 기초하여 이해될 수 있고, 또 그 기초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잉여가치와 착취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두 개의 커다란 분리를 수반한다. 첫 번째 것은 우리가 이미 검토한 것으로서 생산단위들의 분리이다. 다시 말하여 자본주의 경제는 상호 의존적이며 경쟁하는 분리된 생산자들로 분할된 체제이다.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각 생산단위 내의 분리로서,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직접 생산자들 간의 분리, 즉 자본과 임금노동 간의 분리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상품은 자본주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화폐와 교역은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은 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사용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상품유통은, C를 상품, M을 화폐로 표시하면, C-M-C라는 형태를 취한다. 각 생산자는 자신의 상품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판매하여 화폐를 손에 넣은 다음, 그 화폐를 사용하여 다른 생산자로부터 다른 상품을 구매한다. 화폐는 거래에서 매개물일 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상품유통은 이와 다른 좀더 복잡한 형태, 즉 M-C-M'의 형태를 취한다. 화폐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자되고, 이 상품들은 다시 더 많은 화폐와 교환된다. 중요한 것은 M', 즉 자본가가 거래 후에 보유하게 되는 화폐는 M, 즉 최초에 투자된 화폐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 초과화폐 혹은 이윤을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그러면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리키아도는 노동이 창조한 가치는 임금과 이윤으로 분할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답했다. 리카아도는 노동을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보았다. 하지만 리카아도는 명백한 모순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임금을 노동의 가치라고 정의했다. 임금이 노동이 창조한 가치보다 작을 경우, 어떻게 임금을 노동의 가치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또 리카아도 자신도 노동이 창조한 가치는 임금과 이윤으로 분할된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리카아도는 잉여가치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잉여가치 문제와 대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관계에 대한 분석에 바탕을 두고 잉여가치의 존재를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과 교환하기 위해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라고 보았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해야 하는 사용가치는...... 생산물에 물질화되어 있지 않으며, 노동자 자신과 분리되어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가능성으로서만, 그의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자본에 의해 가동될...... 때 비로소 현실화된다. 노동력은 하나의 상품이며,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와 사용가치를 가진다. 그것의 가치는 노동자가 살아가는 데, 그리고 자신을 대체할 자녀를 양육하는 데 요구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노동력의 생산을 위해서 벌써 일정한 양의 사회적 노동이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그 후에 행해지는 노동력의 발휘에 있다."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노동이며, 따라서 노동자가 일단 고용되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노동시킨다. 그러나 노동은 가치의 원천이며, 또 노동자는 보통 1노동일 중에 자본가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한 하루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한다.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 즉 단지 가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으로 된다는 이 노동력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이다." 예컨대 8시간의 1노동일 중 4시간의 노동이 자본가가 임금 형태로 투자한 노동력의 가치를 대체한다고 가정하자.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잉여가치 혹은 이윤은 단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특유한 잉여노동의 존재 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의 분석이 가지는 의의는, 이것을 통해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의 기원이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그것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추적한 사회 유형이 자연적인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며, 역사적으로 툭수한 생산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조명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포함한 모든 상품들이 그 가치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하면서도 잉여가치를 해명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속이고 노동력에 대해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등가보다 덜 지불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다. 착취는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정상적 작동의 전형적 결과이다. 그것은 노동력이 일단 가동된 뒤 그것이 창조한 가치와 노동력 가치의 차이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노동자의 분리에 의존한다. "노동자는......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롭다. 즉 그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처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기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다른 모든 상품들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생산요소 그 자체가 한편에서는 집적된 물질적 요인들과 다른 한편에서는 고립된 노동력으로 분리"된 것을 전제로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제1권 제8편에서 이러한 '분리'가 농민이 자신들의 토지에서 추방되고, 처음에는 토지 그 자체였던 생산수단들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한 계급의 독점물로 되는 역사과정의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시민들이 겉보기에는 정치적 평등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현실에서는 계급착취 때문에 불평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자본과 임금노동 간의 교환은 등가물의 교환이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상품소유자이다. 전자는 노동력을 소유하고, 후자는 화폐를 소유한다. 노동력은 그 가치--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대로 지불받는다. 그러면 착취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유통영역', 즉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상품소유자들로 만나는 시장 안에 머물러서는, 착취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입구에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씌어 있는 은밀한 생산의 장소"로 들어가야 비로소 사태가 변한다. 착취는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즉 노동력 상품의 사용가치가 가치와 잉여가치의 원천인 노동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그 노동력이 가동되는 것은 생산에서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생산과정을 고찰하기 전에, 자본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자본은 더 많은 가치를 창조하고 축적하는 가치의 축적이다. 물론 자본주의보다 훨씬 전에 부자들은 노예와 농노의 잉여노동을 수탈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소비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그리하여 그 부자들과 그 식솔들은 더 많은 생활자료와 사치품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는 그것이 잉여노동이라는 공통된 원천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자본은 아니다. 부의 축적이 자본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는 최초의 신호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M-C-M'라는 공식이다. 이 공식은 화폐(M)가 상품(C)과 교환되고, 상품이 다시 더 많은 양의 화폐(M')를 위해 판매되는 거래를 가리킨다. 우선 그와 같은 거래는 예컨대 동방으로부터 향료를 수입한 다음 그것을 다시 북유럽--그곳에서는 육류 보존에 필요한 향료에 대한 수요로 인해 향료 가격이 높았다--에 되파는 상인들이 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자본은 노동력이, 구매되고 판매되는 상품이 될 때에만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에 고유한 생산관계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다음 두 가지 점으로 정의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은 노동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의 축적이며, 이러한 축적은 화폐, 상품 혹은 생산수단--그리고 통상적으로는 세 가지 모두를 결합한--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또 더 많은 축적을 확보하기 위해 행동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가치의 자기증식'이라고 묘사했다. 자본을 반드시 개별 자본가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부유한 개인들은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오늘날은 그 같은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자본이 자기 자신의 생명을 갖고, 그 어떠한 개인도 초월한 경제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실제로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보통 '자본들'이라고 불려지는 개별 자본 단위들은 소기업이나 대기업, 금융기관에서 국민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도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특수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수많은 새로운 개념들을 정식화했다. 우리는 앞 장에서 모든 노동과정에는 두 가지 주요한 요소--노동력와 생산수단--가 존재함을 보았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이들 두 요소가 모두 자본의 형태를 취한다. 자본가가 자신의 초기 투자를 증가시키려면, 화폐를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매하는 데 투자해야만 한다.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사용된 화폐를 마르크스는 가변자본이라고 불렀다. 플랜트, 설비, 원료, 기타 생산수단을 획득하는 데 투자된 화폐는 불변자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름이 붙여지게 된 이유는 노동가치론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하다. 가변자본이 가변적인 까닭은, 그것이 가치의 원천이며, 가치를 증식시키는 상품이 노동력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불변자 본은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은 살아있는 노동--노동력의 가치를 대체하는 동시에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의 노동--과 생산수단에 축적되어 있는 죽은 노동을 모두 관련시킨다. 죽은 노동은 생산수단 생산에 투하된 노동자의 노동이다. 기계는 새로운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감가(減價)되기 때문에, 그 감가된 가치는 그 상품에 이전된다. 잉여가치율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와 노동력에 투자된 가변자본 간의 비율에 대해 부여한 명칭이다. 이 비율은 착취율을 측정한다. 다시 말해,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잉여노동을 뽀아 내는 데 어느 정도나 성공적인가 하는 것을 측정한다. 앞에서 든 예로 돌아가, 만약 필요노동이 4시간이고, 잉여노동이 4시간이라면, 잉여가치율은 4:4, 즉 100%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잉여가치율을 증대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중 하나는 모든 생산양식들에 공통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다. 이들은 각각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이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노동일을 연장함으로써 창조된다. 예컨대 노동자가 하루 8시간이 아니라 10시간을 노동에 지출하는데, 필요노동은 여전히 4시간이라면, 2시간의 잉여노동이 새로이 추가된다. 잉여가치율은 4:4에서 6:4로, 즉 100%에서 150%로 상승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가장 빛나고 위력적인 페이지들에 속하는 것은, 특히 산업혁명 초기 국면에서 자본가들이 어떻게 하여 노동일을 최대한으로 연장하고, 주철공장의 지옥같은 조건에서 9살밖에 안 된 소년들을 12시간 3교대로 노동하도록 강제하는가 하는 것을 묘사한 부분이다. 그는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마치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있는 노동을 빨아먹어야만 살 수 있고, 더 많은 노동을 빨아먹어야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노동일의 연장에는 객관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노동일이 너무 연장되면, "발육과 활동에 필요한 정상적인 도덕적·육체적 조건들이 박탈되어, 인간노동력이 위축될 뿐만 아니라, 노동력 그 자체의 조기 고갈과 요절이 초래된다." 그리하여 가치의 원천으로서 노동력에 의존하는 자본은 그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행동한다. 또한 동시에 노동일의 무자비한 연장은 그 희생자들인 노동자들의 조직화된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의 집단 행동이 영국 자본가들로 하여금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공장법(Factory Acts)을 채택하도록 강제하는 데서 수행했던 역할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표준 노동일의 확립 그 자체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여 총자본, 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 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의 산물이다." 하지만 자본은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통해 잉여가치율을 높일 수 있다.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노동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를 저하시킬 것이다. 만약 생산조건에서 기술 진보가 이루어져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으로 구매하는 소비재가 저렴하게 되면, 노동력의 가치는 저하한다. 이제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더 적은 노동이 필요할 것이며, 필요노동에 바쳐지는 노동일 부분이 감소하고, 더 많은 시간이 잉여가치의 창출에 쓰이게 될 것이다. 가령 소비재 산업에서 생산성 상승이 소비재 가치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해 보자. 앞서 든 예로 돌아가 보면, 이제 필요노동은 8시간 노동일 중 단지 2시간만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잉여가치율은 이제 6:2로 될 것이다. 즉 잉여가치율은 100%에서 300%로 상승했다. 마르크스는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모두 자본주의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발견되지만, 그 중요성은 역사적으로 보아 전자로부터 후자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최초에는 봉건 사회의 수공업으로부터 물려받은 생산방법의 기초 위에서 도입되었다. 이러한 수공업적 방법은 처음에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단지 좀더 큰 생산단위로 묶였으며, 더욱 복잡한 분업에 종속되었을 뿐이다. 새로운 생산관계가 구래의 노동과정에 접목된 것이다. 기존의 노동양식이 주어져 있을 때......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일을 연장해서만, 즉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켜서만 창조될 수 있다. 착취자도 피착취자도 생산력을 증대하는 데 강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봉건제와 같은 생산양식에서는, 직접 생산자들을 더 오래 노동하게 함으로써만 그들로부터 더 많은 잉여노동을 추출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새로운 착취율 제고방법을 도입한다. 생산자들을 더 효율적으로 노동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과 함께, 모든 현실적 생산 형태가 변화되고, 고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생산 형태가 존재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매뉴팩처라고 부른 것, 즉 "도시 수공업과 농촌 가내공업의 광범위한 기초"에 입각한 생산조직이 근대적 대공업, '기계제 생산'(machinofacture)으로 대체된다. 기계제 생산으로 생산이 기계체계 중심으로 조직되고, 노동과정이 기술혁신에 따라 항상 변화한다. "이제 노동과정과 그 현실적 조건들을 변혁하는, 기술적으로도 다른 면으로도 고유한 생산양식--자본주의적 생산--이 출현했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노동과정이 점차 사회화한다는 것이다. 이제 생산은 기계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대규모 생산단위에서 이루어지고, 고도로 복잡한 분업을 수반한다. "노동과정 전체의 실제 담지자는 점차 개별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집합적 노동자'라고 부른 것을 창출하는데, 이제 개인들은 상품 생산에서 그들의 결합된 노력에 의해 연관되는, 집합적 노동자의 손발들이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을 항상 변혁하는 목적은 상대적 잉여가치를 생산해서 착취율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계는,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다른 모든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을 저렴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며, 또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노동일 부분을 단축하여, 노동일의 다른 부분, 즉 그가 자본가에게 공짜로 제공하는 부분을 연장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기계는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다. 이는 우리가 앞 장에서 보았던 명제, 즉 생산력은 지배적인 생산관계가 허용하는 한에서만 발전한다는 명제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특수성은 그 생산관계가 노동생산성의 지속적 향상을 요청한다는 사실이다. 경쟁, 가격 그리고 이윤 『자본론』제1권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매우 높은 추상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상품은 그 가치대로, 즉 그 생산에 수반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비례하여 교환된다고 가정한 사실이다. 특히 그는 경쟁의 효과와 상품의 공급 및 수요 변동의 효과를 배제했다. 이러한 절차가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는, 제1권에서 마르크스의 관심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었으며, 그 원천이 생산과정 내부에서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추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분석에서 마르크스의 대상은 그가 "개별 자본들과는 구별되는 자본 일반"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하나의 추상임을 인정했지만, 이 추상은, 자의적인 추상이 아니라, 부의 다른 모든 형태들--즉 사회적 생산이 발전해 온 다른 여러 양식들--로부터 자본을 구별하는 고유한 특징들을 포착하는 추상이다. 이것은 각종의 자본 그 자체에 공통적인 양상이며, 혹은 각각의 일정한 가치액을 자본으로 만드는 양상이다. "각종의 자본들 그 자체에 공통적인 양상"은 생산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으로서, 자본이 가치의 자기증식이라는 사실로 귀착된다. 그리하여 자본을 "사회적 생산이 발전해 온 다른 여러 양식들"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불불(대가가 지불되지 않은) 잉여노동을 직접 생산자로부터 강탈하는 특수한 경제적 형태"로서 잉여가치이다. '자본 일반'의 분석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기초를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라크스의 자본주의 검토에는 또 하나의 단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 생산양식이 두 가지 분리를 수반함을 보았다. 하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분리인데, 이는 임금노동과 자본 간의 교환의 배후에 놓여 있으며, 잉여가치의 추출을 가능하게 한다. 또 하나는 생산단위들간의 분리인데,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회적 노동이 상이한 부문으로 분배될 수 있는 어떠한 집단적 방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따라서 개별 생산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생산물의 교환을 통해서만 상호 관계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나는 분리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적 ㅤㅌㅡㅇ징은 어떠한 생산자도 홀로는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본은 오로지 다수(多數) 자본으로서만 존재하고, 또 존재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다수 자본'의 영역은 경쟁의 영역이다. 개별 자본들은 시장을 둘러싸고 서로 투쟁하며, 특정한 부문들을 통제하려 한다. 이러한 자본들의 행태는 '자본 일반', 특히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을 분석하는 데서 취한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을 자본으로 만드는 것은 생산에서 가치의 자기증식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경쟁 분석은, 아주 중요한 의미에서 생산과정의 분석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 점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자본론』세 권 전체를 개관해야만 한다. 제1권은 우리가 보았듯이 생산과정의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상품생산 체계이기 때문에, 자본가가 노동자로부터 추출해 낸 잉여가치를 실제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자본가가 이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삼품들을 판매하는 데 성공한 경우에 한에서이다. 마르크스가 생산에서 창조된 가치의 실현이라고 부른 것--가치의 화폐로의 전화--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유통에 의존한다. 『자본론』제2권은 이 유통과정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 함의를 두 가지 방식으로 검토한다.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의 상이한 순환들을 검토한다. 예컨대 화폐자본은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으로 형태가 변환되고, 생산된 상품들은 다시 그 가치대로 판매되어 더 많은 화폐량으로 잇따라 형태가 변환된다. 그 다음에 마르크스는 개별 자본들의 순환들이 뒤얽혀 경제 전체의 재생산을 가져오는 방식을 검토한다. 그가 『자본론』제2권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은 눈부시게 혁신적인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공황을 검토할 때만 그것을 약간 소개할 것이다. 경쟁의 분석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자본론』제3권에서이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전체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다룬다. 생산에서 창조된 가치의 실현이 상품의 유통에 의존하기 때문에, 전체로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통일이다...... 이 책[제3권]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다양한 형태들은...... 서로 다른 각종 자본들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경쟁 속에서, 그리고 생산 담당자 자신들의 일상적인 의식 속에서,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는 자본의 형태로 한발한발 접근하게 된다. 경쟁의 핵심적 중요성은 경쟁의 압력을 통해 개별 생산자들이 자본으로서 행동하도록 강제된다는 사실에 있다. "개별 자본들의 상호 작용은 그들이 스스로 자본으로서 행동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가치법칙--상품 생산에 지출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비례한 상품 교환--은 두 가지 방식으로 경쟁에 의존한다. 마르크스는 상품의 가치와 그것의 시장가격을 구분한다. 가치는 상품에 지출된 사회적 노동이다. 반면 시장가격은 어느 시점에서든 상품이 팔릴 때 얻게 되는 화폐의 양이다. 양자가 다른 경우는 흔하다. 왜냐하면 시장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진동에 따라 변동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시장가격의 변동은 시간이 경과하면 상쇄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상품의 가치는 우리가 이 장의 시작 부분에서 보았듯이, 그 생산에 지출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다. 이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실제의 노동량과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상품의 개별 가치, 즉 그것이 체화하고 있는 노동시간과, 해당 산업에서 지배적인 생산조건을 반영하는 사회적 가치 혹은 시장가치를 구별한다. 상품의 시장가치는 그 산업의 자본들간의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 각 자본은 자기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시장지분(市場持分)을 차지하려고 노력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생산조건을 개선하여, 자기 상품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경쟁을 한다. 통상 그로부터 산출되는 시장가치는 그 산업의 평균적인 생산조건에서 생산되는 재화의 가치로 될 것이다. 이러한 경쟁의 결과, 개별 자본의 생산물은 이들을 생산하는 데 투하된 실제의 노동량인 그것의 개별적 가치가 시장가치보다 높든 낮든 간에, 시장가치대로 판매될 것이다. 그리고 경쟁이 가치법칙의 작용에 개입하게 되는 두 번째 방식이 있다. 이는 상품이 "자본의 생산물"이 라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자본가들이 그의 자본을 투자하여 상품 생산을 하는 것은, 생산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앞 절에서 보았듯이, 잉여가치의 원천은 가변자본, 다른 말로 하면 자본가가 임금을 주고 고용한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자본가는 이 임금을 지불하기 위한 화폐만을 투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계, 건물, 원료, 그밖에 노동자가 실제로 상품을 생산하려 할 경우 필요하게 되는 것들을 사기 위한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된다. 자본가가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단지 가변자본에 대한 수익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총투자, 즉 생산수단에 투자된 불변자본을 가변자본에 더한 것에 대한 수익이다. 마르크스는 이 사실을 인정하여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을 구분했다. 잉여가치율은 단지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우리가 앞 부분에서 보았듯이, 이 비율은 노동력의 착취도를 측정한다. 반면에 이윤율은 총자본, 즉 가변자본에 불변자본을 합한 총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자본주의를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잉여가치율이 더 기본적인 비율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윤율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단지 그가 임금에 지출한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의 총투자에 대해 적절한 수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분명희 두 비율은 다르다. 100명의 노동자를 주당 50파운드의 임금으로 고용하는 자본가의 예를 들어 보자. 그러면 그의 임금 지불총액---그의 가변자본---은 주당 5000파운드이다. 잉여가치율이 100%라면, 매주 생산되는 잉여가치는 5000파운드일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윤이다. 하지만 이 자본가는 또 플랜트, 건물 등등에 지불하기 위해 주당 2500파운드를 투자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이 그의 불변자본이다. 그러면 매주 투자된 총자본은 7500파운드가 될 것이며, 그의 총투자에 대한 수익률인 이윤율은 총자본에 대해 수취한 이윤의 비율로서, 5000파운 : 7500파운드 그러니까 약 67%가 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윤율의 존재는 경쟁이 어떻게 하여 진정한 생산관계를 은폐하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예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일상적인 계산에서 사용하는 것은 이윤율이기 대문이다. 이 개념이 잉여가치를 총자본에 관계시키기 때문에, 노동력이 잉여가치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은폐된다. 마치 생산수단에 투자된 불변자본도 가치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데 기여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상품 물신성이라고 부른 것, 즉 자본주의 경제의 작용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관계가 물리적 대상들---사용가치와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용된 기계---에 의해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지배된다고 믿는 방식의 한 예이다. 그 효과는 이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다음과 같은 자본가들의 주장, 즉 자본가들도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생산물의 생산에 협력했으므로, 생산물의 분배에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정당한 지분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이윤율에 대해서는 이러한 신비화 이외에 더 살펴볼 것이 있다. 마르크스는 지배적인 생산조건에 따라 이윤율이 산업마다 다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또 하나의 개념, 즉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이는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이다. 다시 말하여 그것은 (가치텀으로) 어떤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계, 원료 등등의 양을 소요되는 노동력과 비교하여 나타낸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실제로 노동생산성의 척도이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더 효율적으로 되면, 한 개별 노동자가 가동시키는 기계가 많아질 것이고, 노동자가 사용하는 원료 등등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 고도화된다. 이것은 이윤율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 두 자본가 A,B의 경우를 검토해 보자. 각각의 자본가가 동일한 주당 임금 지불 소요액---5000파운드---을 가지고 있으며, 마르크스가 가정한 것처럼, 잉여가치율이 각각 100%로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그리하여 각자는 주당 5000파운드의 이윤을 수취한다. 그러나 A는 매주 5000파운드의 불변자본을 투자하고, 다른 산업부문에 있는 B는 10000파운드의 불변자본을 투자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A의 경우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즉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은 5000파운드 : 5000파운드, 즉 1:1이다. 그의 이윤 5000파운드는 충자본 1000파운드에 대해 얻어진 것이므로, 그의 이윤율은 5000파운드 : 1000파운드, 즉 50%이다. 한편 B의 경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10000파운드 : 5000파운드, 즉 2:1로서 A의 두 배이다. B의 이윤율은 5000파운드 : 15000파운드, 즉 33%이다. 그리하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을수록, 다시 말하여 각 노동자가 사용하는 기계와 원료가 많을수록, 이윤율은 낮아진다. 왜냐하면 노동력만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자신의 투자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최대의 수익, 즉 될 수 있는 대로 최고의 이윤율을 획득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계, 건물 등의 양이 산업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시 말하여 어떤 산업들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다른 산업보다 높기 때문에, 자본은 이윤율이 더 높은 곳으로, 다른 말로 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더 낮은 곳으로 유입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가 B가 그의 자본을 A 산업에 투자하여, 50%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면, 단지 33%의 수익률만을 얻을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자본을 계속 투자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이윤율의 균등화라고 부른 것을 낳는다.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본 유입은 이윤율의 차이를 없애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경제 전체에서 생산된 총잉여가치와 투자된 사회 총자본 간의 관계를 반영하는 일반적 이윤율이 형성된다. 개별 자본들은 그들이 투자한 가변자본이 아니라, 그들이 투자한 총자본의 비율에 따라 착취된 총잉여가치에서 각기 자기 몫을 수취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마하는가 하는 것을 보기 위해 A와 B의 경우로 되돌아가, 그들이 경제체제에 존재하는 자본 전부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총잉여가치는 10000파운드이고, 사회 총자본은 25000파운드일 것이다. 일반적 이윤율은 10000 : 25000, 즉 40%일 것이다. 이는 B는 원래 33%보다는 높지만, A의 50%보다는 낮다. 이제 각 자본가는 그들의 총자본에 대해 40%의 수익률을 얻을 것이다. A는 그의 총자본 10000파운드에 대해 4000파운드의 이윤을 얻을 것이고, B는 그의 총자본 15000파운드에 대해 6000파운드의 이윤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각 자본가는 자신의 노동자들로부터 5000파운드의 잉여가치를 추출했으므로, 1000파운드가 그들간에 이전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불행히도 A와 B 두 자본가만 있는 위의 예는 이러한 잉여가치의 이전을 낳는 메커니즘을 보이기에는 너무나 단순하지만, 우리는 계속 위의 예를 사용하여 이러한 메커니즘이 작동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자본가 B는 A가 자기보다 더 높은 이윤율을 수취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당연히 자기 자본의 일부를 A 산업으로 이전시킬 것이다. 이는 A 산업의 생산을 증가시킬 것이며, 이같은 생산 증가는 이 재화의 공급이 그것에 대한 수요를 초과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공급되는 재화가 구매자보다 더 많게 되면, 그 재화의 가격은 저하할 것이다. 그리하여 A 산업의 상품은 급기야 그 가치 이하로 판매될 것이며, A 산업의 이윤율은 저하할 것이다. 거꾸로, 자본가 B가 자신의 화폐 일부를 자기 산업으로부터 빼내 갔으므로, B 재화의 생산은 감소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재화의 공급이 그 수요보다 낮아지고, 가격이 상승할 것이며, 결국 그 재화들은 자기 가치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될 것이다. 처음에는 낮았던 B 산업의 이윤율은 상승할 것이다. 자본은 항상 최고의 수익률을 찾아 다닌다. 이 ㅤㄸㅒㅤ문에 노동력에 비해 플랜트, 기계, 원료를 덜 사용하는 산업, 다시 말하여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낮고 이윤율이 높은 산업에는 투자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그 산업의 재화 가격은 저하할 것이고 이윤율도 저하할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은 산업에서는 정반대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상대적 수익성에 따라 상이한 생산영역간에 항상 재분배되도록 하는, 자본의 "이와 같은 부단한 유출과 유입"은, "생산영역들에서 평균 이윤이 동일하게 되고, 따라서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공급과 수요의 비율을 만들어 낼" 때까지 계속된다고 보았다. 상이한 재화의 가격들이 모든 자본에게 동일한 이윤율을 얻게 해주는 수준으로 정해질 때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노동자들이 어느 곳에 고용되어 있든, 그들로부터 뽑아 낸 잉여가치를 모두 하나의 저수지에 모은 다음, 거기에서 자본가들이 자기가 투자한 자본의 양에 비례하여 이윤을 퍼가는 것과 같다. 잉여가치의 기원은 그리하여 더욱 신비화된다. 왜냐하면 한 자본가가 획득하는 이윤은 자기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수행한 노동의 양과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모든 현상"은, "가치는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리하여 경쟁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러한 외관은 일단 우리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전반적인 관계를 고려하면 사라진다. 자본가 전체뿐만 아니라 개별 자본가들도 각각의 특수한 생산분야에서 총자본에 의한 총노동계급의 착취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조건들이...... 불변이라면, 평균이윤율은 총자본의 총노동 착취 수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그들이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쥐어짜낸...... 불불 노동량을, 특수한 자본이 직접 생산한 잉여노동에 따라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특수한 자본이 대표하는 총자본의 상대적 지분에 다라, 이차적으로는 총자본이 생산한 잉여노동의 양에 따라, 자기들끼리 나눠먹는 싸움(이 싸움이 경쟁이다)을 벌인다. 자본가들은 적대적인 형제들처럼 다른 인민의 노동으로부터 약탈한 것을 자기들끼리 분배하며, 그리하여 평균하여 한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 동등한 양의 불불 노동을 수취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호 경쟁에서는 그렇게도 형제답지 않게 행동하는 자본가들이 왜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해서는 진정한 비밀결사를 결성하게 되는가 하는 것에 관해 수학적으로 정확한 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윤율의 균등화 때문에 가치법칙이 수정된다. "일반적 이윤율의...... 출현은 가치들이 그것들과는 다른 생산가격으로 전형되는 것을 필연으로 만든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앞의 자본가 A, B의 예로 돌아가 보자. 자본가들의 주당 생산물의 가치를 계산하기 위해, 그들이 매주 투자하는 불변자본이 전부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들로 이전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들의 주당 생산물의 총가치는 잉여가치+가변자본+불변자본과 같게 된다. A의 경우 이것은 5000+5000+5000=15000 이 되고, B의 경우 이것은 5000+5000+10000=20000 이 된다. 하지만 이윤율의 균등화는 1000파운드의 잉여가치가 A로부터 B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생산된 가치는 이 재분배를 고려하기 위해 수정되어야만 한다. 즉, A의 경우 우리는 4000+5000+5000=14000 을 얻을 것이며, B의 경우는 6000+5000+10000=21000을 얻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일반적 이윤율의 형성을 반영하는 이러한 전환된 가치를 생산가격이라고 불렀다. 생산가격의 형성은 "자본은 다수 자본으로서 존재하며, 오로지 다수 자본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의 불가피한 귀결이다. "경쟁이 우선 하나의 생산분야에서 달성하는 것은, 상품의 다양한 개별 가치로부터 단일한 시장가치와 시장가격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상이한 분야들 사이에서 이윤율을 균등화시키는 생산가격이 성립되는 것은, 상이한 분야들의 자본들 사이의 경쟁에 따른 것이다."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은 가치 자체의 형성과 동일한 과정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상품이 우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판매되도록 하는 것은 개별 산업들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되는 것은 노동가치론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치와 생산가격의 괴리는 "어느 상품에 잉여가치가 너무 많이 들어가면 다른 상품에는 잉여가치가 너무 적게 들어감으로써 상품들의 생산가격과 가치 사이의 괴리는 서로 상쇄된다는 사실에 의하여 항상 해결된다"고 지적한다. "사회 전체에서...... 생산된 상품들의 생산가격의 합계는 그들의 가치의 합게와 같다." 우리가 두 문단 앞의 A와 B의 경우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그들의 생산물의 총가치 35000파운드는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형되기 전이나 후나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전형 문제'(轉形問題)는 『자본론』제3권이 출판된 1894년 이래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으며, 오늘날에도 완화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비판들 중 어떤 것은 마르크스 이론의 성립과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도 있다. 예컨대 전형 문제를 처음으로 논의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오이겐 폰 뵘바베크(Eugen von Böhm-Bawerk)는 마르크스가 『자본론』1권을 쓴 후 생각을 바꾸어, 상품은 결국 그 가치대로 교환되지 않는다고 결단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사망한 후 엥겔스가 『자본론』제3권을 출판할 때 지적했듯이, 『자본론』제3권이 근거하고 있는 초고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제1권의 최종 원고를 완성하기 전인(!) 1864년과 1865년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다. 여하튼 그보다 더 전인 1861/63년 초고로 이루어진 『잉여가치학설사』는 마르크스가 자신보다 앞선 리카아도와 마찬가지로,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가 가치법칙의 수정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더 가치 있는 약간의 기술적 비판들도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전형 예에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이 나타내는 상품들의 가치도 생산가격으로 전환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따라서 내 예에서도 그렇게 했듯이, 전형 이전에도 이후에도, A의 자본을 10000파운드로 또 B의 자본을 15000파운드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소비하는 재화와 그들이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플랜트, 기계 등등은 그 자체가 일반적 이윤율 형성의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생산가격으로 전형된 가치를 가질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 문제를 의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문제가 걱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후의 연구들은 마르크스가 틀렸으며,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완전한 전형은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들을 수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도달된 전형 문제에 대한 수학적 해법들이 가치의 생산가격으로의 전형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 설명을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몇몇 경제학자들은 아직도 '전형 문제'가 노동가치론이 거부되어야 하는 논거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요한 주장은 가치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서도 상품 가격을 결정하는 기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옳은 말이지만, 노동가치론의 핵심은 놓친 것이다. 노동가치론의 주요한 목적은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을 결정하는 공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물론 마르크스의 전형방식을 정정한다면, 그러한 공식이 제공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의도는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역사적 발전의 경향을 폭로하는 것이다. 노동가치론은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밟은 절차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이라는 그의 일반적 방법을 반영하는 것이다. 제1권과 제2권에서 마르크스는 '자본 일반',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기본 특징들을 분석하면서, 상품들이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고 가정한다. 이는 완전히 타당한 가정이다. 왜냐하면 전형 문제는 우리가 자본들간의 차이를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제3권에서 '다수 자본'의 영역, 그리고 다수 자본들간에 발생하는 경쟁을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상품들이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가정을 기각한다. 이는 우리가 "전체로서 자본의 운동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체적 형태들을 발견하고 서술해야" 할 때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본 일반'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추상, 즉 상품이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추상을 했던 한에서이다. 리카아도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요한 비판은 리카아도가 일반적 이윤율의 존재를 가정만 했을 뿐이며, 경쟁으로부터 독립하여 가치와 잉여가치를 고찰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리카아도의 오류는 "추상력의 결핍이며, 상품의 가치를 검토할 때, 경쟁의 결과로서 그가 직면하는 요인인 이윤을 잊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태까지 '자본 일반'과 '다수 자본' 간의 관계를, 단지 그것이 어떻게 가치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가에만 촛점을 맞추어 정태적으로 고찰했다. 이제 우리는 더 동태적인 관점을 택하여, 자본들간의 경쟁이 부르주아 경제의 발전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검토하고자 한다. 축적과 공황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들로부터 구분하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자본의 축적이다. 노예제나 봉건제 사회에서는 착취자는 그가 직접생산자로부터 빼앗은 잉여생산물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생산은 여전히 사용가치가 지배하고 있었다. 생산의 목적은 소비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일단 지배하게 되면 사태는 변한다. 노동자들로부터 쥐어짜낸 잉여가치의 대부분은 소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의 증대를 위해 재투자된다. 이러한 과정, 즉 잉여가치가 더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항상 재투입되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이라고 불렀다. 『자본론』제1권의 유명한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자본축적이 어떻게 자본가계급에게 '절욕'(節欲)의 이데올로기를 낳으며, 그 속에서 부르주아지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소비조차 부정하고,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를 저축하여 재투자하도록 고무되는지 보여 주고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이며 예언자이다. '근면은 재료를 제공하고, 절약은 그것을 축적한다'고 [아담 스미스는 말했다.] 따라서 절약하고 또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혹은 잉여생산물 가운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으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와 같은 축적의 동기는 탐욕이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개인으로서 자본가는 탐욕적일 수 있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서 어떤 '물물교환의 자연적 속성'을 찾을 필요가 없다. 체제 그 자체가 자본가의 동기를 제공한다. 자본가가 인격화된 자본인 한, 그의 활동 동기가 되는 것은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략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그것의 증식이다...... 그런 한에서 그는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공유한다. 그러나 수전노의 경우에는 개인의 광기로 나타나는 것이 자본가의 경우에는 그가 단지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사회적 기구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적 기구'는 '다수 자본'간의 경쟁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은 그들이 스스로 자본으 로서 행동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축적 그 자체에 특히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잉여가치를 재투자하지 않는 자본은 자신의 경쟁자들, 즉 더 개선된 생산방법에 투자하여 더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게 된, 그리하여 자신의 상품 가격보다 저렴하게 상품을 내놓을 수 있게 된 경쟁자들에 의해 자신이 밀려나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축적하는데 실패한 자본은 이내 파산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축적과정은 자본들간의 경쟁과 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원만하거나 평탄한 과정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축적과정은 또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생산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마르크스가 시사하는 바는 생산이 항상 갱신되지 않는 한, 사회는 존속할 수 없으며, 생산의 갱신은 자본가들이 시장에서 실현한 가치를 생산에 재투입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재생산의 두 가지 형태를 구별한다. 단순재생산은 생산이 종전과 동일한 수준에서 재개될 때---따라서 경제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될 때---발생한다. 하지만 확대재생산은 잉여생산물이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사용될 때 이루어진다. 자본주의에서 통상적인 것은 확대재생산이다. 『자본론』제2권에서 마르크스는 단순 혹은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조건들을 분것한다. 그는 여기에서 사용가치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보여 준다. 재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노동력과 생산도구를 구매할 수 있는 화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자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소비재와 그들을 작업시키기에 충분한 기계, 원료가 또한 존재해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를 크게 두 부문, 즉 제Ⅰ부문과 제Ⅱ부문으로 나눈다. 경제의 제Ⅰ부문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부문으로서,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이나 원료를 생산하는 광산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다. 제Ⅱ부문은 식품이나 의복과 같은 소비재를 생산한다. 마르크스는 단순재생산이나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부문이 재화들을 특정한 비율로 생산해야만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경제의 상이한 부문들간에 이 비율들이 실제로 지켜지는 것은 대체로 우연적이다. 자본가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을 위해서 생산한다. 생산된 것이 소비될 것이라는 그 어떠한 보장도 없다. 소비될지 여부는 상ㅇ품에 대한 유효수요(有效需要)의 존재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하여 어느 누군가가 그 상품을 구매하기를 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화폐를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흔히 이 같은 유효수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경제공황이다. 예컨대 제Ⅰ부문(생산수단)의 자본가들이 잉여가치율을 증대시키려고 그들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제Ⅰ부문의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적은 양의 제Ⅱ부문 생산물(소비재) 를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Ⅱ부문의 자본가들은 이 같은 자기들 시장의 감소 사태에 대해 다시 신규 플랜트 설비에 대한 주문의 감축으로 반응할 것이다. 제Ⅰ부문의 자본가들은 다시 이 같은 자기들 생산물에 대한 수요의 감소에 대응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할 것인데, 이는 또 다시 이전과 동일한 제Ⅱ부문 자본가들의 반응을 낳게 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반복된다. 이러한 과정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에게는, 케인즈(J. M. Keynes)의 1936년 저작『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의 출간 이후에야 실제로 이해되었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과정을 이미 70년 전에 케인즈보다 먼저 『자본론』제2권에서 분석했던 것이다. 경제공황의 가능성은 상품의 본성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 단순상품유통이 C-M-C라는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상품이 판매되고, 화폐가 다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판매 다음에 구매가 반드시 뒤따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판매자는 자기 상품을 일단 판매하면, 그가 수취한 화폐를 축장(蓄藏)할 수도 있다. 자본가들이 바로 이렇게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자본가들은 투자를 하기에는 이윤율이 너무 낮을 경우 화폐를 축장한다. 그리하여 공황의 원천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계획적 성격에 있다. 마르크스가 썼듯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발적 성격 때문에, 균형 그 자체가 우연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공황이 가능하다는 것만을 보여 줄 뿐이다. 왜 공황이 현실적으로 발생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축적과정의 성격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경제공황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그가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라고 부른 것에 기초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법칙이 "모든 측면에서 근대 정치경제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며, 가장 곤란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법칙"이라고 썼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자본주의에서는 일반적인 저하 경향을 갖는다고 말한다. 단지 경제의 특수한 영역들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또 특수한 시기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러한데, 그 이유는 노동생산성의 지속적 증대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 이윤율의 점진적 저하 경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특유한, 사회적 노동생산력이 천천히 발달하는 것의 표현일 뿐이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질수록, 개별 노동자가 감당하는 기계와 원료가 많아지게 된다. 다시 말하여 플랜트, 설비 그리고 원료에 투자된 불변자본의 양이 노동자의 임금 지불에 사용된 가변자본에 비해 많아진다. 가치텀으로 말하면, 이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잉여가치의 원천은 노동력이기 때문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수록, 이윤율은 저하한다. 그리하여 생산성이 증대하면, 이윤율은 저하한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자본가들은 생산을 더 높이려고 투자를 하는가? 그 답은 자본가는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투자함으로써 이득을 보기 때문이며, 장기적으로는 손실을 입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으로 인해 투자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한 상품의 개별 가치, 즉 그것에 체화되어 있는 실제 노동은 그 산업에서 평균적인 생산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사회적 가치, 즉 시장가치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제 이러한 평균적 생산조건을 사용하는 개별 자본가의 경우를 들어 보자. 그리고 개별 자본가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의 생산성을 평균 이상으로 올리는 신기술을 도입한다고 가정하자. 그의 상품의 개별적 가치는 그 사회적 가치 이하로 저하한다. 왜냐하면 그의 상품은 그 부문에서 표준적인 것에 비해 더 효율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상품의 가격을 사회적 가치보다는 낮은 수준으로 매김으로써 그의 경쟁자들보다 싸게 팔면서도, 자기의 개별적 가치보다는 높게 매겨, 초과이윤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무한정 계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자본가들도 남들이 자기보다 싸게 팔아 자신이 사업에서 밀려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신기술을 채택하기 때문이다. 일단 이러한 혁신이 그 산업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되면, 그 생산물의 사회적 가치는 혁신자의 상품의 개별적 가치 수준으로 내려가고, 그의 초과이윤은 소멸한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경쟁의 압력을 통해 신기술을 채택하여 노동생산성을 높이도록 강제된다.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은 그리하여 "경쟁의 강제법칙"으로서 작용한다고 마르크스는 썼다. 개별자본가가 "가치규정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오직 그것이 개별 자본가의 상품 생산비를 높이거나 낮추는 한에서만이고, 그리하여 그것이 그의 지위를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이다." 각각의 자본가는 오직 경쟁자들을 타도하는 수단으로서만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 결과 모든 '다수 자본'은 가치법칙에 적응하도록 강제되며, 항상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도록 강제된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그들의 노동자와 경쟁자로부터 가로챌 수 있는 잉여가치의 양을 증대하려는 이 같은 모든 자구 행동들의 결과는 일반적 이윤율을 저하시키게 된다. 새로운 생산방법이 아무리 생산적이라 하더라도, 또는 그것이 아무리 잉여가치율을 올린다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면, 그 방법을 자발적으로 사용할 자본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새로운 생산방법은 어느 것이나 상품을 저렴하게 하며, 따라서 자본가는 처음에는 그 상품을 그것의 생산가격보다도 높게, 아마도 그것의 가치보다도 높게 판매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상품의 생산비와 더 높은 생산비로 생산되는 다른 상품들의 시장가격 사이의 차액을 취득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산방법이 사회적 평균보다 우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은 그 새로운 방법을 보편화하고 그것을 일반적 법칙에 복종시킨다. 그리하여 이윤율의 저하가 야기된다. 이윤율 저하는 아마도 이 생산분야에서 먼저 나타나고 나중에 다른 분야의 이윤율과 균등해진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저하는 자본가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은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일정한 점을 넘어서면, 생산력 발전이 자본에 대해 장애가 되며, 따라서 자본관계가 노동생산력 발전에 대해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점증하는 힘을 반영하는 노동생산성의 증대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다. 바로 이 과정이 경제공황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기존 생산관계 사이에 점증하는 양립 불가능성은 격렬한 모순, 공황, 경련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윤율 저하는 마르크스가 한 자본주의 공황 분석의 출발점일 뿐이다. 그는 "일반법칙의 효과를 억제하고 상쇄하며, 그 법칙에 하나의 경향일 뿐이라는 성격을 부여하는 상쇄요인들이 작용하여," "법칙의 절대적인 관철이 저지되고 지연되고 약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를 초래하는 바로 그 원인들이 이 저하를 저지하고, 연기시키며, 부분적으로는 마비시키기까지도 하는 반대작용을 야기한다." 예컨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주어진 양의 상품을 좀더 적은 노동자가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가는 과잉 노동자를 해고함으로써 이에 대응할 것이다. 이는 실제로 그가 최초에 신기술을 도입한 목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 자본축적은 언제나 노동자들을 생산과정에서 축출하는 결과를 동반한다. 마르크스가 '상대적 과잉인구'라고 말한 것이 창출된다. 상대적 과잉인구는, 맬더스나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식량보다 인간의 수가 많이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많은 인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과잉인구는 생존에 필요한 임금까지 박탈당하고 만다. 노동력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치---즉 그 생산에 소요된 노동시간---와 가격---그것에 대해 지불된 화폐량---을 갖는다. 노동력 가격은 임금이며, 다른 모든 시장가격과 마찬가지로 임금은 노동력의 공급과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등락에 따라 변동한다. 하지만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노동력의 공급을 추웁낳게 유지해 주기 때문에, 노동력 가격이 그 가치 이상으로 상승하는 것이 저지된다. 마르크스는 "임금의 일반적 변동은 산업예비군의 팽창과 수축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가 '임금 철칙설'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 철칙설에 따르면, 임금은 노동자가 겨우 생존할 수 있을 정도의 육체적 최저 수준 이상으로 상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지적했듯이, 소위 '임금 철칙설'은 맬더스의 인구론에 기초한 것이며, 따라서 완전히 오류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자본주의는 노동생산성의 항상적인 상승을 수반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노동력을 포함한 상품가치의 지속적 감소를 초래한다. 소비재의 가치 저하는, 노동력의 가치가 저하한다 할지라도, 노동자의 임금 구매력이 과거와 동일한 수준에서 유지되거나 심지어 상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절대적으로는 노동자의 생활 수준은 상승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노동자들의 처지는 여전히 악화된다. 왜냐하면 잉여가치율이 상승하고, 따라서 그들이 창조한 총가치에서 그들의 지분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자본가의 입장을 강화하며, 자본가로 하여금 잉여가치율을 증가시키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만약 자본의 총량이 동일하게 유지된다면, 이윤율은 상승할 것이다. 그리하여 더 높은 착취율은 이윤율 저하에 대한 상쇄요인의 하나이다. 하지만 착취율의 상승은 모순적 효과를 낳는다. 만약 착취율의 상승이 노동생산성의 증가를 통해 성취되었다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될 것이며, 이 경우 잉여가치율의 상승은 이윤율의 저하를 의미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와 같은 상황이 이윤율의 저하에 전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높은 임금 상승으로 경제공황을 설명하려는 모든 종류의 시도를 거부했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잉여가치율......의 상승 경향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윤율의 저하를 임금률의 상승으로 설명하는 것---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다...... 노동이 덜 생산적으로 되기 대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더 생산적으로 되기 때문에 이윤율이 저하하는 것이다. 잉여가치율의 증가와 이윤율의 저하는 노동생산력의 증대를 자본주의적으로 표현하는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와 마찬가지 이야기를 또 다른 상쇄요인인 불변자본 요소들의 저렴화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Ⅰ부문, 즉 생산수단 생산부문의 생산성 상승은 불변자본을 구성하는 플랜트, 기계 등의 가치가 저하함을 의미한다.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 비율(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증가와 함께, 노동생산성도 증가하고, 사회적 노동생산력 발전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노동생산성의 증대 결과, 기존의 불변자본 가운데 일부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감가(減價)된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그것에 원래 투하된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재생산될 수 있는 노동시간에 의존하는데, 이 후자가 노동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지속적으로 감소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많은 비판가들(그들 중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있다)은 이처럼 노동생산성 상승이 불변자본의 요소들을 저렴화한다는 사실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 다시 말하여 생산수단과 노동력 간의 물량 비율이 엄청나게 증가한다 할지라도,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비용이 저하하기 때문에, 가치텀으로 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종전과 동일한 수준을 유지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시하고 있는 점은 자본가들이 중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원래 투자에 대한 수익이라는 점이다. 자본가가 플랜트, 설비 등에 지출한 돈은 이들 생산수단을 원래 가치대로 구입한 것이지 미래에 그것들을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구입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본가는 이 원래 투자에 대해 적정한 이윤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 공황 자체를 살펴보기로 하자. 불변자본의 가치가 "그것에 원래 들어 있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재생산될 수 있는 노동시간"으로 맞추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주로 공황을 통해서이다. 경제공황은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공황은 어떤 중요한 원료 가격의 갑작스런 상승---예컨대 1973~74년 석유 가격의 4배 상승---으로 초래되기도 한다. 흔히 공황은 금융체제의 어떤 혼란---예컨대 주요 은행의 파산 혹은 주식시장의 붕괴---을 통해 시작된다. 『자본론』제3권의 많은 부분은 점점 많은 화폐가 은행 자신을 통해 창조되는 결과로서 신용체제의 발전이 어떻게 하여 공황을 저지하는 동시에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하지만 공황의 배후에 있는 원인은 항상 이윤율의 저하 경향과 그것이 동시에 작동시키는 상쇄요인이다. 우리는 상품의 본성 때문에 C-M(판매) 다음에 M-C(구매)가 반드시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상품을 판매하여 획득한 화폐는 다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축장될 수도 있다. 이는 경제공황 시에는 대규모로 이루어진다. 엄청난 양의 상품이 팔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이전의 생산양식들과 구별하는 것이다. 노예제와 봉건 사회에서는 공황은 모든 사람들을 먹이기에도 충분치 못한 과소생산(過少生産)과 부족의 공황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공황은 과잉생 산 공황이다. 하지만 이는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생산물의 양이 그것들에 대한 필요에 비해 과잉"임을 의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생산의 한계가 결코 생산자들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에 의해 설정되기" 때문이다. 즉, 자본가의 적정 이윤을 실현하기에는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우리는 서방에서는 농산물 가격을 높게 유지하기 위해 산더미 같은 버터와 호수 같은 포도주의 재고가 쌓이는데도, 제3세계에서는 7억의 인구가 굶주리고 있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공황은 자본축적의 내적 모순들에 의해 야기되는 동시에, "공황은 항상 기존 모순들의 일시적·폭력적 해결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의 감가 혹은 평가절하라고 부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자본이 생산한 재화들에 대한 시장의 붕괴는 많은 자본들을 파사나게 한다. 그 결과 많은 양의 자본이 파괴된다. 자본의 파괴는 때때로 말 그대로 이루어진다. 즉 기계가 녹슬고, 재화가 썩거나 파괴된다. 하지만 가격 저하는 동시에 생산수단 가치의 대부분을 청산한다. "공황을 통한 자본의 파괴는 가치의 파괴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그 후 이 자본이 자본으로서 자신의 재생산과정을 동일한 규모로 갱신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경제공황을 통해 불변자본의 가치는 그것을 원래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 재생산하는 데 드는 노동시간으로 맞추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낮아지고, 따라서 이윤율이 회복된다. 그리하여 공황은 자본을 복구시켜, 그것이 수익성 있게 사용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기존 자본의 가치 감소---이것은 이윤율의 저하를 저지하고, 새로운 자본을 형성하여 자본 가치의 축적을 촉진하기 위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하는 수단이다---는 자본의 유통과정과 재생산과정이 진행되는 주어진 조건들을 교란시키며, 따라서 생산과정의 갑작스러운 중단과 공황을 수반한다. 공황이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저지하는 데 기여하는 다른 방식들도 있다. 마르크스는 "공황은 항상...... 임금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노동자계급이 연간 생산물 가운데 소비로 사용하는 부분이 더 큰 몫을 실제로 받는 바로 그러한 시기에 준비된다"고 말했다. 이는 경제호황의 절정에서는 가능한 한 큰 시장 지분을 차지하려는 많은 자본들 때문에 상품들에 대한 초과수요가 생겨나 많은 상품들이 희소해지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경제 성장이 가속됨에 따라 산업예비군이 줄어들고, 노동자들, 특히 숙련 노동자들이 희귀해진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강화되어, 노동력 가격의 인상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임금률이 상승한다. 그런데 경제공황이 일어나면, 실업자가 증가하여, 고용주는 임금을 인하하고, 아직 해고되지 않은 노동자에게 더욱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황은 투자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이윤율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가 재조직되고 재형성되는 시기이다. 모든 자본들이 이 과정에서 똑같이 이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취약하고 비효율적인 기업들, 특히 낡은 기계의 부담이 큰 기업들은 사업에서 도태된다. 강하고 효율적인 자본들이 살아남으며, 침체 후에는 더 강력해져서 등장한다. 그들은 매우 낮은 매매 기준 가격으로 토지와 생산도구들을 긁어 모을 수 있으며, 잉여가치율을 제고할 수 있는 노동과정의 변혁을 노동자들에게 강제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공황은 마르크스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라고 부른 과정에 기여한다. 자본들의 규모가 잉여가치의 축적을 통해 증가할 때, 집적(集積)이 발생한다. 한편 집중(集中)은 더 큰 자본들이 더 작은 자본들을 흡수하는 것이다. 경쟁과정 자체는 이 추세를 조장하는데, 이는 더 효율적인 기업들이 자신들의 경쟁자들보다 싸게 팔 수 있으며, 이로 인해 파산한 경쟁자들을 합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불황은 불황 후 생존한 자본들이 생산수단을 저렴하게 매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이 과정을 가속한다. 그리하여 개별 자본규모의 항상적인 증가는 축적과정의 불가피한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근대 산업에 특징적인 진행과정은 (더 작은 규모의 변동에 의해 중단되는) 평균 수준의 호황, 활황, 공황 그리고 침체로 이루어지는 주기적인 형태를 취한다"고 썼다. 호황과 불황의 교체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인간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공황과 호황으로 살아간다...... 공황과 호황은 자본주의의 탄생기부터 자본주의에 내재하며, 무덤까지 자본주의를 따라갈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전개한, 공황이 자본축적에 내장되어 있는 방식에 대한 분석은 매우 높은 추상 수준에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분석은, 우리가 마지막 장[8장]에서 보게 되듯이, 자본주의 체제가 노쇠함에 따라서 일어나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으로 인하여, 공황이 예전처럼 수익성 있는 축적조건들을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점점 곤란하게 되는 사태에 대한 설명으로 정교화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이해하려면 『자본론』에서 출발해야 한다. 결론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현실이 변증법적이며, 내부에 모순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일반적 명제를 예증한다. 예컨대 한편에서 기술진보, 즉 새로운 생산방법의 도입은 자본주의의 존재 그 자체의 일부이다. 경쟁의 압력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항상 혁신하도록 강제하고, 그렇게 해서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불가피하게 공황을 발생시킨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공산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를 항상 변혁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생산관계와 사회의 모든 관계들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낡은 생산양식을 변하지 않은 형태로 유지하는 것은...... 이전의 다른 모든 산업계급들의 일차적 존립조건이었다. 생산의 항상적 변혁,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부단한 교란, 영속적인 불확실성과 동요는 부르주아 시대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시켜 준다. 자본주의와 그것에 선행한 사회들 간의 차이는 생산관계로부터 생겨난다. 생산물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가 지배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는 어디에서나 잉여노동이 대체로 한정된 욕망의 범위에 의해 제한되며, 따라서 잉여노동에 대한 무한정의 갈망은 생산 그 자체의 성격으로부터는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봉건 영주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익숙한 방식대로 사는 데 필요한 지대를 그의 농민들로부터 수취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자본가는 "잉여노동에 대한 게걸스러운 탐욕", "굶주린 늑대와 같은 잉여노동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경쟁자들의 기술 진보를 따라잡으려는 필요(그렇지 않으면 파산하기 때문에)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전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향수와 같은 애착을 가지고 있던 낭만주의자들에 대항해서, 그가 "자본의 위대한 문명화 효과"라고 부른 것을 단호히 옹호했다. 마르크스는 리카아도가 "자본주의적 생산을 고찰할 때 오직 생산력의 발달에만 주의를 집중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리카아도에 대한 감상주의적 반대자들이 그랬듯이, 생산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생산이아먈로 인간 생산력의 발전, 다시 말하여 목적 그 자체로서 인간 본성의 풍부함의 발전이라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이다. 자본주의는, 국경과 편견을 넘어 나아가고, ...... 또 모든 전통적인, 속박된, 자급자족적인 틀에 갇혀 있는 욕망의 충족과 구래의 생활방식의 재생산을 넘어 나아간다. 자본주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파괴적이며, 그것을 항상 변혁하며, 생산력의 발전, 욕망의 확대, 생산의 다양성, 자연력이나 정신력의 이용과 교환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파열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자본주의가,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가장 합리적인 사회 형태이기는커녕, 생산력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그것에 대해 질곡으로 되는, 역사적으로 제한적이며 모순적인 생산양식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이다." "자본에 대해 외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닌, 자본의 자기보존을 위한 한 조건으로서 자본의 격렬한 파괴는, 자본이 빨리 지구에서 사라져 더 높은 단계의 사회적 생산에 자리를 내주라는, 자본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충고이다."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를 포함한 많은 논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붕괴가 불가피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는 "영구적인 공황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본 것처럼, "공황은 항상 기존 모순들의 일시적·폭력적 해결이다." 노동자계급이 실업, 생활수준의 저하, 노동조건의 악화라는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자본주의 체제가 그것으로부터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공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황이 "사회적 생산의 더 고차적 상태"로 인도될지 여부는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행동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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