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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노믹스의 현상과 이에 맞선 노동자계급운동 복원에 따른 단상

  • 등록일
    2010/05/07 12:58
  • 수정일
    2010/05/07 12:58

 MB노믹스의 현상과 이에 맞선 노동자계급운동 복원에 따른 단상


** 요즘 드는 잡생각들을 정리해 보기 위해 기록과 잡생각들을 스케치 형태로 써보았습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론 파생상품이 낳은 부실로 인한 자본의 위기 심화가 노동자 민중의 삼은 파탄상태로 내몰고 있다. 


 한국을 위시한 전지구 자본의 위기심화는 공황 상태에 나타는 현상을 낳고 있다. 기간 자본의 묻지만 파생상품 발생으로 인한 경제위기의 책임을 고스란히 전지구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이 실례로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노동자 대량감원을 통한 자본 구하기가 일상화 되어 있다. 그 단적인 예로 미국을 위시한 선진 G8은 지금 대량 실업의 위기로 인한 노동자 민중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으며, 아시아 또한 중국, 일본, 대만, 말레이시아, 한국 등에서 전지구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장 구조개편이 이루어지고 있다.


○ 자본 문제로 파생한 위기를 노동자 민중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자본은 제조업 인건비 비율이 18.7%에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대량감원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경제위기 책임의 위기가 단지 노동자들의 과잉 인건비로 인한 경쟁력 하락으로 몰아 자본 위기를 숨기고, 노동자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


 현 경제위기 즉 공황에 다다르는 위기는 누가 만들었는가? 이 위기는 자본 자체의 시장 과잉 축척과 신자유주의 규제완화, 금융위기가 부른 현실이다. 이는 현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경제위기에 따른 공황징후라는 현상으로 우리는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 자본의 국가독점 강화현상이 미국을 위시한 G8을 필두로 나타나고 있다.

 세계계다자간무역기구인 WTO를 통한 지역경제 블록화로 대표되던 신자유주의 괴물이 몰락하였다. 미국과 EU는 기간 글로벌 경제위기 극복의 방안으로 자국의 금융, 제조업, 공공서비스업 등에 대한 국유화를 통한 자본구하기에 나서고 있다.

 

 국가부도사태로 위기에 치닫고 있는 EU가맹국 실업과 내수경제침체로 위기로 치닫고 있는 G20은 얼마 전 경제부양책으로 또 다른 괴물을 만들고 있다. 이는 IMF가 채권을 발행하여 부실자본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국가에 대한 지원방안을 내놓고 있고, G20이 공동기금을 통한 20조 달러에 대한 출자합의가 자본의 위기가 심화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 전지구 경제흐름에 역행하는 MB노믹스

 MB노믹스는 198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 자신이 마치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1980년대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는 모든 사업의 규제완화와 시장 민영화를 통한 시장구조개편을 낳았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IMF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으로 한국 DJ정부와 같은 형태로 시장규제완화 내수경기 진작에 있어 단기적 성과는 낳을 수 있지만 결코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을 우리는 현 1980년대 신보수주의로 탄생한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위기 태생적 한계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낳았다 바라볼 수 있다. 미국 또한 철강, 자동차산업, 제조업 사업에 대한 규제완화로 단기적 성과는 낳았으나 그 당시 잠재된 자본의 위기를 심화 확대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 자본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며, 자본 스스로 위기를 포장하고 있다.

 상품시장의 축소, 시장 과잉축척에 의한 과잉생산과 소비의 불균등은 자본 스스로 포디즘(포스트포드주의, 다품종소량생산, 일본의 리엔지니어링:팀제를 통한 작업현장의 다변화전략)으로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극복하지 못하였고, 금융 상품을 통한 무한가치 부여로 극복하고 있지만 노동 가치 창출 없이 자본이 태동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자본은 소비시장의 축소와 과잉축적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은 스스로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으며, 빈곤을 재생산하고 있다.

 

○ 역행하는 MB노믹스

 신자유주의 선봉장으로 MB정부는 모든 산업에 있어서 규제완화, 자본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자본 위기 구원투수로 나선 MB정부는 종부세를 통한 감세정책, 금산법 완화를 통한 자본의 호주머니 챙겨주기,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기간산업의 국부유출 등 자본이 살기 좋은 나라 만들기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MB정부는 빈곤을 양산하고 있다. 자본 살리기는 빈곤의 심화로 이루어질 것이며, 노동자 민중이 쌓아놓은 기간의 역사적 산물을 과거로 회귀 시킬 것이다. 빈곤을 양산은 노동자, 민중의 빈곤의 나락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복지예산축소를 통한 경제 살리기 종부세 인하를 통한 자본의 시장경쟁력 확보 방안 마련은 기간산업의 파탄을 통해 자본만을 위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흐름이다.


○ MB 노믹스 핵심은 다름 아닌 대공장과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조직노동자 때려잡기다.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데올로기엔 노동자들이 항상 걸림돌로 자리 잡고 있다. MB는 경제위기라는 자본의 위기를 기회라고 보고 있다. 조직된 노동자 즉 민주노총으로 대별되는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 때려잡기에 나서고 있다.

 

 쌍차를 필두로 벌어지는 대규모 조직노동자의 구조조정은 경제위기에 불가피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구조조정의 필연성을 통한 자본의 노동시장 지배전략 재편에 나서고 있다.


 쌍차를 비롯한 자본의 구조개편은 자본의 위기심화를 속이고, 자본의 시장 친화적 구조개편이다.


○ 노동시장의 지배전략..... 불안정노동자의 증가로 노동시장 교란과 잠재적 노-노갈등 불화조장

 쌍차투쟁 그리고 현재 이루어지는 구조조정 사업장에 대한 이데올로기 전선을 구축하여야 한다. 전지구적으로 자국보호무역을 통한 국유화 회귀는 자본의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MB노믹스는 자본의 수탈시장에 한국 시장경제 파이를 키우기 위한 방안이다.


○ 노동시장 불안정화 고착 그리고 실업의 증가

 쌍차를 시발로 한 구조조정 귀착점은 노동시장의 불안정화이다.

 MB정권은 단기상용직인 청년인턴 채용, 비정규직 계약기간 4년 연장, 공공기관 일자리창출사업은 실업률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진행되지만 질 낮은 일자리와 노동시장의 불안정화를 가속화 시킬 것이다. 공기업, 은행 등 대졸초임 임금삭감, 대공장을 위시한 임금동결, 노사합의하 임금삭감, 복지비 축소는 노동자 전반적 임금 하락으로 이어져, 기간 노동자투쟁으로 쌓았던 임․단협 체계를 무력화시킬 것이다.


 2011년까지 유예되었던 복수노조 건이 내년도로 앞당긴 것은 조직된 대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통한 노동시장 개편전략이다. 우리는 이에 맞선 투쟁을 전개할 것이다.


 자본의 현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일상적 구조조정으로 인한 노동시장 불안정화는 일상적 실업률 증대시킬 것이다. 노동시장의 불안정화를 통한 자본의 지배력 강화와 노조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약화시켜 자본의 이윤 증식을 높이고자 한다.


○ 노동운동 다시금 사회변혁을 넘어선 정치투쟁에 나서야 한다.

 사회변혁적 수식어가 1990년대 중반을 장식하였다. 민주노총, 금속연맹 등 또한 사회 변혁적 산별노조운동이 지배하는 시대를 가지고 투쟁을 하였다.


 1980년대, 1990년대 노동운동은 사회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흐름의 연장 전노협을 대체한 세력으로 민주노조운동세력에서는 전노대를 위시한 전노협을 위시한 업종회의, 언론노련 등이 가세하여 1995년 민주노총을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산별의 시대 무수한 담론 북유럽중심의 산별체계를 고민하던 한노사련의 움직임, 그리고 노동운동을 위시한 전국노운협의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 운동 좌파의 산별노조운동에 대한 대산별 소산별 운동에 대한 다양한 흐름이 있었다. 그렇지만 주요하게 화두로 남긴 것은 변혁적 산별노조운동이라는 서막을 알리던 시기였다. 온통 각 정파들의 기관지에는 담론은 사회변혁으로 수식되는 시기였고, 코프라티즘(노동자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반대를 위한 거대한 흐름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1996년 자동차3사를 중심으로 한 자동차산별의 가시적 움직임 이후 1997년 금속산업연맹(이하 금속연맹) 출범으로 기간 전투적노조운동의 흐름은 노개투 이후 IMF체계를 거치면서 그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수식어는 사라지고, 산별노조 시대가 서막을 알리게 된다.


 IMF체제 이후 민주노총의 사회 변혁적 지위는 거세된다.

 시민운동의 대두.... 90년대 경실련과 환경련과 얼마 지나지 않아 참여연대의 출범은 시민운동은 하나의 코드로 자리 잡았다. 사회변혁의 거세와 시민사회운동의 개량적 흐름의 서막은 사회적 운동에 있어 시민사회의 성숙보다는 몇 명 민주화운동에 이탈한 개량적 흐름의 운동의 주축으로 사회변혁이라는 사회적 책무를 반기하고 다른 운동의 질로 전화된다.

 시민사회의 대두..... 사회변혁의 거세와 시민 없는 시민사회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기간 민주화운동의 주축이었던 몇몇 곳을 제외한 대다수의 시민사회운동은 시대의 키워드로 기간 동구사회주의권 몰락이라는 이데올로기 혼란정세에.... 개량적 운동의 흐름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시민사회에는 시민의 권리는 존재하지만 사회변혁이라는 키워드는 사라지고 만다.

 민주화라는 키워드 고리타분한 담론의 거세.... 시민사회의 확장은 부문운동의 키워드를 낳았지만 부문운동이 정치운동으로 가는데 장막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영역에 고립된 시민운동 연대는 사안별 연대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신좌파운동의 모색은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전취하나 경제, 사회, 문화라는 명역의 종속적 태제를 벗어나지 못한 연대 없는 시민을 위한 영역확보 투쟁으로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민주노총의 탈각화.... 정치투쟁이라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었던 민주노총은 1998년 기점으로 대공장노조운동의 표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기간 전노협정신을 이어받은 민주노총은 산별노조건설로 외형적 규모는 확장되었으나 조직노동자라는 허울 속에 울타리에 갇힌 노조전임자들을 위한 조직 대공장 노조를 위시한 사회적 투쟁을 만들지 못하는 거대한 노동조합센터로 자리매김한다.


좌파운동의 이정표 없는 표류 또한 민주노총의 방향성을 잡는데 크게 기여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맴돌게 된다. 국민승리21을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수식어로 권영길 후보를 내세우고 실패한 후 진정추와 민정련 등 좌파세력과 우파세력 사회원로들이 함께하는 원탁회의를 만들어 좌우합작으로 민주노동당을 출범시킨다. 그러나 태생적 한계 역사적으로 1989년 전민련을 실패에서 보았듯이 예정된 실패를 위한 불안한 공조로 출범하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투쟁의 맹아(1989년부터 남한 사회주의노동자당운동건설투쟁은 좌파운동의 모체였다. 1989년 노태우정권의 6.1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가 선포되고, 이를 시점으로 좌파운동진영에서는 사회주의정당건설투쟁의 시기였다. 그 당이라는 것 또한 계급적기초한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운동이었다. 그러나 1989년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를 시발로 현실사회주의권 붕괴는 이러한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다. 모색 그리고 소련사회주의에 대한 회자에 대한 평가... 그 시기 무수히 많은 서적들은 보면 유럽코뮤니즘의 발호라 평가해 본다. 그람시, 루카치, 알튀세르, 발리바르라는 키워드는 학생운동과 강단피디들의 필독서였고, 유럽코뮤니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학자를 통하여 자본을 바라보기 위한 다양한 시선을 낳았다.(동구사회주의권 붕괴를 맑스-레닌주의 실패의 원인을 맑스로의 회귀로 찾고자 하는 경향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시기 사회주의권 붕괴를 필두로 일부세력이 개량적 시민운동의 태동 참여하게 된다. 그렇지만 남한 좌파에 있어서는 그 계급에 기초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1991년 총선 좌파연합전술로 민중당을 두고 좌파가 연합하여 민중의독자적정치세력화-이하 민독정-을 통한 총선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50곳에 후보를 냈지만 2%이상 전국득표를 하지 못하고 민중당은 역사적 뒤안길을 맞게 된다. 무수한 좌파활동가들의 총선이후에 대한 평가 그리고 개량과 사민주의 길로 각자 걷게 된다. 일부세력 이재오, 이우재를 필두로 한 한나라당 입당파, 주대환이 마창지역을 중심에 둔 사민주의정치운동 태동, 좌파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그 결과 민독정에 참여한 제조직의 상태에 따라 진정추, 한국사회당, 사회당추진위 등으로 세분화 되었다. 이 세분화는 1992 백선본 투쟁 이후 그 형태를 갖추게 된다. 진보정당운동의 모체 태동.... 민중정치연합(이하 민정련), 백선본에 결합하였던 동지들을 중심으로 제파와 사노맹계열 운동세력이 함께하며 출범시킨다. 총선과 백선본 결과물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 기치는 현실 동구사회주의권 몰락으로 탈각화되고 진보정당건설운동으로 전화되고 그 한계적 울타리 벗어나지 못하고 민주노동당으로 통합되고 현 진보정당의 모태로 고착화된다.  신좌파의 태동으로 좌파운동의 분화 그리고 우파의 분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동구사회주의권 몰락은 좌파에게만 충격을 준 것이 아니다.

우파 현실사회주의 붕괴로  조선노동당의 실태를 알면서 혁명의 모체였던 사회주의 허구에 대한 충격으로 장명국 계열을 위시한 내일신문파(사람사랑, 이하 사사)로 갈라지면서 세분화 된다. 전민련의 모태로 출범시킨 전국연합이라는 전선체 한계에 대한 도전과 분화가 이루어진다. 좌우를 넘어 동구사회주의권 붕괴는 운동세력을 딜레마에 표류시키게 된다. 모색이라는 담론 패배주의의 1990년대 중반의 흐름.... 김영삼 정권의 출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운동세력의 몰락 그 시발은 운동의 흐름을 역행하게 만든다.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 건설 담론은 개량적 진보정당건설 움직임으로 어느 세 탈바꿈해 있었으며 좌파는 정치세력으로서 고립되거나 지리멸렬한 행보를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1990년대는 신좌파의 태동 그리고 사민주의, 개량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운동 진영으로 세분화된다. 사회주의운동세력의 동구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혁명이론(PDR, NDR)폐기 스스로 사회주의혁명노선에 대한 이탈을 부추기고, 기회주의적 진보정당운동으로 변모한다. 그렇지만 동구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평가는 한국좌파운동진영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과제를 남기게 된다. 여전히 그 맹아를 잡기 위한 사회주의자의 책무는 현실에도 유효하며, 현재 사노준이라는 형태의 혁명운동 또한 이전 역사적 과정에 대한 맥을 닿았다. 이러한 연휴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과정에 대한 이해 그리고 현재 동구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요인들에 대한 철저한 평가가 연구되고 제시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주의운동의 딜레마인 모색이라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사회주의 이행기를 넘어 쿄뮨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한국 사회주의자의 철저한 자기비판일 것이다.)는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출범하면서 개량적 흐름으로 거세되는 위기에 처해졌다.(여전히 사회주의는 유효하다. 모색만 있고 평가 없는 사회주의에 대한 폐기, 원인에 대한 분석 없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주의)의 실패와 당의 관료화로 문제를 쉽게 귀착시킬 사안이 아니다. 노힘 또한 비제도적투쟁정당이라는 말 또한 수박겉핥기에 불과하다. 평가와 원인에 대한 분석없이 스탈린적 당 오류, 당 관료화로 모든 사안을 불식시키기에는 원인과 분석의 결과는 초래하다. 문제는 레닌에 의해 주창된 사회주의는 코뮨주의로 가기 위한 이행기였으나 냉전을 통한 군비경쟁에 대한 막대한 투자 사회주의세력에 대한 경제 봉쇄에 따른 사회주의권 경기침체 등 무수한 자본의 도발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에 대한 원인과 결과 분석은 이후 사회주의 전지구적으로 새롭게 재구축되는데 유효할 것이다. 일국적 사회주의라는 담론 공교히 하고, 전지구적 자본의 위기에 맞서 새롭게 재구축 될 것이라는 낙관을 해본다.)    


민주노총의 표류는 노동자계급운동이 질적 도약에 있어 장막으로 남는다. 밀레니엄시대 IMF정리해고가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많은 수의 노조에서 정리해고가 일어났고 그 정리해고된 자리에 비정규직노동자가 발생한다.


2000년 비정규직노동자 운동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발생.... 좌파진영에서의 비정규직운동세력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공간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른 무수한 토론과 방안들이 마련되었다. 그렇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주체화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한국통신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의 처절함과 요근래 뉴코아, 홈에버투쟁, 특수고용직 투쟁에서 그 현상을 목도하였다.


비정규직노동자투쟁으로 촉발된 롯데호텔투쟁이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해준다. 그렇지만 그 이외 다양한 투쟁이 벌어졌지만 민주노총은 대공장노조 눈치 보기에 머물고 변혁적 산별노조는 산별체제에 갇혀 아무런 저항도 없이 투쟁의 울타리를 단사에 가두어 두는 오류를 범하였고, 전노협의 선진활동가대회 그리고 전국노동자들이 상호교류하고 교육하는 수단에 대한 투자를 저해하였다. 노조전임자들만을 위한 활동공간으로 전락한 민주노총 및 각 가맹산하연맹..... 초기 민주노총을 비롯한 다양한 조합에서는 교육을 통한 조합원들의 의식 교양을 높이는 방안들이 잘되었으나 중앙집중적 산별체계 민주노총을 위시한 각 연맹들로 세분화되면서 조합원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자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노조전임자 위주로 진행하였다. 실종된 교육.... 현실교육공간의 부재(실천투쟁의 부재)가 민주노조운동 위기를 심화 확대시켰다. 

 

 이로 인해 새롭게 조직하야야 할 미조직노동자들에 대한 사업은 날로 갈 수록 힘들고 가장 비중이 낮은 일로 비춰지고 이 일은 민주노총 및 각 산하연맹에서 급기야 형식적 조직 부서로 전락하였다. 가장 비중 있고 심도를 기울여야 할 조직사업이 당면 투쟁에서 소외되는 사업으로 전락하면서 민주노조 운동은 그 건강성을 잃고,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구호는 빛바랜 추억으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우리의 투쟁을 다시금 자랑스럽게 되돌아보고 현장을 다시금 재조직화 들어가야 한다. 실천투쟁과 선진활동가들에 대한 교육, 투쟁을 통한 쇄신만이 현 민주노조운동을 돌파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이를 통한 노동자계급운동세력으로서 자리매김 시킬 것이다.


 다시금 노동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을 넘어선 사회혁명의 선봉대로 나서야 한다.

 노동운동의 사회변혁운동으로의 전진은 선제조건이 있다. 사회변혁운동은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통한 정치투쟁을 통해서만 전취될 수 있을 것이다. 맑스는 당이란 “노동자계급의 무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행위를 위해서는 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당이란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표현이다 이러하기에 이제 노동운동은 사회변혁을 넘어 사회혁명세력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반으로 한 연대 아니 노동자동맹, 노동동맹, 노동자평의회를 통한 현장생산수단 장악과 노동자통제권 부여야말로 노동자들이 국가를 전취하고 사회주의 이행기를 넘어 나아가 코뮨 국가 건설(궁극적으로 국가의 사멸을 불러올 것이다.)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 1% 자본을 위한 자본공화국

 1% 자본을 위한 자본공화국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MB정권은 시장의 민영화는 자본의 날개 달아주기이다.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추진을 통하여 자본의 이윤 증대를 통한 자본 살리기를 할 것이다.

 

 1970년대로의 회귀 자본의 제2 재벌공화국 구축을 부축이고, 자본의 가치증식을 증대하기 위한 개발독재주의로 공기업 사유화(자본에게 바치기를...)를 가속화 시킬 것이다. 정확히 MB의 경제관은 박정희 개발독재주의와 맞닿아 있다. 천민자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한 개발독재로 포장된 녹색성장론을 펼칠 것이다. 박정희 때와 다른 것은 이전 박정희 개발독재는 빼먹을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알짜공기업을 통한 빼먹고 부실화 시킬 공적영역의 공기업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기간산업인 한전을 필두로 한 철도, 주택공사, 금융 등 즐비하게 많다는 것이다. 이런 연휴로 이명박 정부는 산업은행 민영화를 가속화 할 것이다. 이를 통한 정치자금 리베이트 또한 막대한 금액을 거뭐 질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또한 금융과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공적기업을 통한 정치자금 확보와 건설자본과 결탁하여 정치자금을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상은 철저히 노동자 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금융산업 민영화(우리, 국민, 외환, 조흥, 서울은행과 지방 경기, 광주은행 등의 정부지분 매각)를 통한 견실한 금융기업을 자본에게 팔아넘겼다. 외환은행 매각에서 보듯 정부는 정치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우량기업의 회계를 조작하여 매각, 서울은행에 공적자금을 퍼 붓고 매각하여 손실금 또한 국민혈세로 내고 있다. 그리고 무수한 기업에 대한 매각을 통하여 막대한 정치 리베이트자금 확보에만 열을 올리며 혈세를 낭비하였다.


 이렇듯 자본은 국민혈세를 갖고 공적자금을 통하여 정치자금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는 내수경기부양책으로 카드사 규제완화를 통하여 전국민을 카드 빛쟁이를 만들었다. 노무현정부 또한 전국도 균형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전국토 땅값을 올려 주택장만을 하지 못한 노동자 민중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행정수도 이전이 그 전적인 예로 지금 행정수도 이전부지에 대한 투자과열과 아파트 건설은 고스란히 건설사 부실과 과잉으로 이한 거품을 만들었고, 건설사의 도미노 붕괴 그리고 과도한 은행의 모기지론을 통한 주택담보대출로 인한 금융의 부실화를 부추겼다.


 MB정부의 알맹이 없는 녹색성장론 빛 좋은 개살구다.

 1% 자본을 위한 자본공화국 만들기는 녹색성장론으로 대표되어 표현되고 있다. 알맹이 빠진 녹색성장은 대규모 토목공사와 건설사 배불리기 그리고 자본의 신성장동력이라는 미명하게 공적자금 밀어주기로 나타나고 있다.


 녹색성장을 위한 자전거 산업육성.... 한마디로 자전거 도로확보로 이어질 것이며, 이는 도로정비를 통한 건설사 배불리기이다. 4대강 정비사업.... 토목공사의 대역사라고들 하지만 죽어가는 토목공사 건설사를 살리기 위한 방편이다. 다리, 수로 확보 등 자연파괴현상을 초래할 것이지만 대규모 공적자금을 통하여 건설경기를 부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설경기 부양은 누구를 위한 부양인가? 자본가 정권의 수혜를 위한 사업이다.

 

 4대강 수로정비에 따른 대규모 토목공사로 자금압박과 과잉으로 점철된 건설업체를 부추길 것이다. 건설사에 대한 지원을 위한 정책 이외에는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내수건설경기와 토목공사로 인한 국토 황폐화는 이루 말 할 수 없다. 강원도지역이 수해로 인한 피해는 인재이지 자연재해가 아니라고 말하듯 전 국토는 개발논리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손쉽게 빼먹을 수 있는 이권이 있는 건설사는 정치권은 가만히 나두지 않는다. 아파트 산업만 해도 유수의 기업들이 진출 한 것도 이와 맥이 닿아있다.


 한국자본은 전국민을 불안정노동자 아니 반실업상태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공황기 노동자들을 강위력한 투쟁이 없다면 현장은 자본에 의해 침탈되거나 장악될 것이다, 우리는 모던타임즈에게 1930년대 미국 공황기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 그리고 사회가 겪게 될 위기를 찰리 체프린의 무성영화를 통하여 어느 책 구절보다 현실적 문제로 간접적으로 나마 목도하였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투쟁을 준비하지 않은 이상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자본주의 자동붕괴론(공황기가 심화 될수록 노자간의 대립으로 인한 사회적불만을 통한 자동적으로 사회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체제전복이 이루어질 것이다.)이라는 허상에 휘말려 자생성 굴종이라는 무오류률 범할 것이다.(자본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서 밝혔듯 공권력이라는 국가물리력을 통한 노동자 통치와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노동자계급투쟁에 대한 무력사용을 통한 진압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선진노동자계급에 대한 끊임없는 조직화와 투쟁을 통한 노동자계급 주체들의 각성과 성찰로 인한 실천을 통한 사회주의 기치 아래 국가는 종말에 사멸할 것이다. 다만 이 자리에 대한 노동자계급정치에 대한 우리의 고민과 끊임없는 실천활동이 필요하다.)


 MB정권은 공권력을 통한 노동자 민중에 대한 폭력정치를 발휘할 것이다. 자본의 이윤증대와 자본공화국 건설을 위한 다양한 사업수행에 있어 국가공권력을 동원한 반대목소리를 거세할 것이다. 우리는 용산철거민, 촛불탄압, 정치검찰 탄생, 노동자 구조조정 등에서 보여진 정권의 본질을 잘 안다. 철저히 자본을 위한 판짜기 노동자 죽이기를 위한 노자대립의 서막은 피할 수 없는 길임을 우리는 현 MB정권의 태도에서 확인하고 있다.


 1% 자본공화국에 대한 투쟁선포가 필요하다.

 쌍차는 1% 자본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MB정권의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쌍차투쟁의 파열음은 MB정권의 추구하는 경제정책에 대한 전면적 투쟁일 것이다. 우리가 엄호 지지를 넘어 공동투쟁을 전개하는 것에 대한 함의는 이 투쟁이 향후 남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에 맞선 저항운동의 표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업종을 넘어선 투쟁을 넘어선 노동자계급 연대투쟁을 넘어선 노동자동맹 투쟁 기치를 세우자.

 산별체계를 넘어선 전국노동자계급연대투쟁을 전개하자!!

 변혁적 산별노조 건설은 전제조건이 있었다. 전국적 총파업전선투쟁의 강화라는 구호와 일치단결된 노동자계급투쟁을 위한 민주노조운동의 질적도약이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산별노조는 중앙교섭이라는 막대한 노동자 권력을 휘두르는 공간으로 전락하였다.

 

 총파업투쟁에 대한 지침하나 내오지 못하는 산별노조는 우리에게 과연 필요한 존재인가? 아니면 폐기해야 할 대상인가? 현재 산별노조는 노사합의주의라 그렇게 비판하였던 코프라티즘에 사로잡혀 허우적 대고 있다.

 

 산별노조의 울타리를 넘어 전국총파업투쟁의 위용을 가동할 수 있는 전국총파업전선구축을 투쟁을 위한 실천투쟁이 필요하다.

 

 경기지역의 경우 건설노조, 공공노조, 금속노조 등은 MB정권의 구조조정의 서막을 알리는 공간이다. 금속은 단사별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건설노조는 건설경기침체와 건설산업이 갖는 하도급 다단계 구조로 인한 근본적 문제, 공공노조는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구조조정이 현실 문제로 받아 않고 있다. 이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연대전선을 넘어선 동맹파업투쟁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여야 한다.

 

 공장울타리 즉 산별체계에 갇힌 투쟁이 아닌 산별체계를 넘어선 동맹파업투쟁을 통한 총노동대 총자본의 대립을 통한 투쟁의 국면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제 구호뿐인 연대투쟁을 뛰어넘는 노동자 동맹파업투쟁을 위한 준비를 공황시기 투쟁을 통하여 만들어내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각성을 통한 노동자 동맹파업 투쟁을 촉발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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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비판

  • 등록일
    2010/05/07 12:29
  • 수정일
    2010/05/07 12:29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비판

- 사회복지에 대한 본질주의적 입장 -


최형익(한신대 강사, 정치학)


1. 

필자는 “사회복지와 노동” 창간기념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여하여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토론열기 속에서 “사회복지와 노동”의 밝은 미래와 민중복지운동의 힘찬 전진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당시 분위기에 압도되어 토론 주제였던 “맑스주의와 사회복지”에 대한 전체 논평 글을 써주기로 흔쾌히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기왕 나온 글에 대한 논평을 쓰느니 차라리 “맑스주의와 사회복지”라는 주제에 연하여 토론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전환에는 이제 커다란 주제에 계속 매달리기보다 세부 각론과 쟁점들에 대해 입장을 밝힐 때 논쟁 지점이 명료해지고 맑스의 이론을 현실에서 올바로 구현할 수 있다는 평소 지론이 한 몫 했다.


이 글은 엥겔스가 사회복지의 주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인 주택문제를 둘러싸고 프루동주의자들과 벌였던 논쟁에 대한 필자의 비판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최근에 새롭게 쓴 것은 아니지만, “사회복지와 노동”의 취지에 부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기고하기로 했다,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이론적 입장은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복지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독단론에 다름 아니다. 다만 나는 이 글이 맑스주의 고전들을 암송하는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그러한 독해방식이 문제가 있으며, 정통적 해석에 도전하여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 논쟁을 계속 이어나가는데 일조한다면 소기의 목표를 달성 한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복지와 노동”이 이후 생명력을 갖고 지속적으로 출간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이론적 쟁점과 현실 사안에 대해서 입장을 밝히고 논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가령 “민중복지연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의 ‘사회적 임금’을 둘러싼 사이버 논쟁을 지면을 통해 적극 조직하고 다양한 논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2.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사회복지라는 주제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미묘하고 모순적인 테마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말해주듯 사회복지를 통해 얼마간의 물질적 혜택을 제공받음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처지가 개선되지만 그로 인해 영원한 임금노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투쟁 없이 운동을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사회복지의 문제는 주요한 정치적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1980년 이후 영국의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공세와 그 반동의 물결은 그동안 노동자 계급이 쟁취했던 각종 사회 경제적 권리를 무위로 돌리고 있으며, 급기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이제 한국에서도 만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노동자 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 글과 관련하여 테제로 정리하자면, “일자리를 뺏기면 집도 빼앗긴다”로 요약할 수 있다. 작업장이나 사회적 제 영역에 있어서의 자본의 공세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의 후퇴가 주택, 교육 등 노동자 삶의 재생산과정과 밀접히 맞다있는 생활영역의 권리조차 심각히 훼손시키는 사태로 이어지는 경우란 셀 수 없이 많다. 영국의 대처 보수당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것의 가장 전형적 사례기다. 1980년대 초, 대처 정권이 들어서서 민영화란 명분 하에 시행한 공공주택의 매각과정을 들여다보면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초점이 결코 작업장에서의 노동통제강화나 착취강화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처 정부가 들어선 1979년부터 재정부담 완화를 목표로 시행된 공영임대주택의 매각과정과 주택의 사유화 조치는 삶의 본원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주거환경 및 인간생활의 기반마저 자본의 입맛에 맞게 유린 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한국 역시 예와가 아니다. 길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얼마 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은 해고 즉시 그들의 보금자리인 임대 아파트에서 마저 쫓겨나야 했다. 노동자들이 쫓겨난 임대 아파트 자리에는 필시 고급 아파트나 물 좋은 인천의 압구정이 들어서, 때 아닌 ‘환란’에 대박 터뜨린 신자유주의적 ‘중산시민’들의 욕망의 배출구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게 수지맞는 일이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터와 주거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겪는   사태란 대량의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일 이외에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정 이럴진대 누가 사회복지의 정치를 개량주의라고 일축할 수만 있겠는가. 노동권이 노동자 복지와 그 생존권의 핵심 사항이듯이 주거권은 그 동전의 뒷면이다. 요컨대, 이 두 가지 사안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 하겠다.


기존 맑스주의 이론에서는 노동을 너무 근본적인 활동으로 생각한 나머지 여타의 권리와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뤄왔다. 이러한 상황은 주거권을 포함하는 다양한 사회복지 정치의 쟁점들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나 실현 될 수 있는 본질주의적 입장으로 치환해 버리는 경향을 낳았다. 현실에 있어서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주거권의 문제는 도시빈민이나 재개발지역 주민들의 문제로 생각하는 게 다반사고 그러나 보니 ‘주택문제’, ‘교육문제’를 비롯한 노동자 민중의 삶과 직결된 현안들에 대한 맑시즘적 대안과 입장이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주거권’과 관련된 사회운동의 담론을 종교단체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사태를 잘 반영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맑스주의 내에서 이론적 무관심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은 편이다. 이하에서는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하여”를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복지의 쟁점을 정통 맑시즘이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3.

엥겔스가 저술한 “주택문제에 대하여”는 별개의 논쟁을 다룬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 “프루동은 주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프루동주의자인 뮐베르거가 제시한 주택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엥겔스가 반박한 글이다, 제2편 “부르주아는 주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에밀 쟉스라는 미국인 학자의 주택문제에 대한 박애주의적 접근을 엥겔스가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3편 “프루동과 주택문제에 관한 덧붙임”은 뮐베르거가 엥겔스의 첫 번째 논문에 대한 비판을 엥겔스가 다시 반비판한 보론 형태의 글이다. 이 글에서 중심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내용은 엥겔스가 뮐베르거와 에밀 쟉스와 벌인 논전 그 자체라기보다는,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관한 문제설정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하에서는 주로 제1편과 제2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제3편 “프루동과 주택문제에 관한 덧붙임”의 경우 논쟁이라기보다 이전 논쟁에서 엥겔스가 자신의 주장과 뮐베르거 주장의 차이점에 대해 재론하여 정리하는 수준이고, 제1편과 제2편의 논쟁 역시 엥겔스 주장이 상당 정도 중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1편 “프루동은 주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서 엥겔스는 “가옥보유자에 대한 임차인의 관계는 자본가에 대한 임노동자의 관계와 같다”라는 뮐베르거의 주장에 대해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붑ㄹ노동에 기초한 부등가 교환, 즉 착취관계인 반면, 임차인과 임대인의 관계는 등가교환에 근거한 상품판매이기 때문에 자본가와 임노동자의 관계와 주택소유자의 임차인의 관계는 명백히 다른 것이라고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택문제에는 서로 대립하는 두 당사자가 있으니, 임차인과 임대인 혹은 가옥소유자가 그들이다. 전자는 후자에게서 주택의 일시적 사용을 구매하려고 한다. 그는 화폐, 혹은 신용을 가지고 있다, 설령 그가 이 신용을 다시 가옥 소유자 자신으로부터 고리대의 가격으로, 요컨대 할증임대료의 형태로 사들여야 할지라도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상품판매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거래가 아니다. 설령 그가 노동자라 할지라도 임차인은 재산이 있는 사람으로서 등장하며, 그는 자신의 독특한 상품인 노동력을 이미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주택용역의 구매자로서 등장할 수 있거나 이 노동력이 얼마 안 있어 판매될 것을 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력이 자본가에게 판매됨으로서 생겨나는 독특한 결과는 여기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자본가는 구매한 노동력으로 하여금, 첫째로는 자체의 가치를 재산출하게 하고, 둘째로는 잉여가치를 산출하게 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자본가 계급사이에 분배될 것을 일시적으로 그의 수증에 머문다. 따라서 여기서는 여분의 가치가 산출되며 기존가치의 총량이 증가한다, 임대차 거래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임대인이 임차인을 얼마나 속이는가에 관계없이,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앞서 산출된 가치의 이전에 불과하며 임차인과 임대인은 합하면 보유하고 있는 가치의 총액은 전과 똑같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그의 노동에 대하여 가치이하로 지불하건 가치대로 지불하건 언제나 그의 노동생산물의 일부를 사취 당한다. 임차인은 주택에 대하여 그 가치이상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만 사취 당한다. 따라서 임차인과 임대인 사이의 관계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와 동렬에 놓으려는 것은 전자의 관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시민사이의 아주 일상적인 상품거래이며, 이 거래는 일반적으로는 상품판매를 규제하고 특수하게는 다음과 같은 상품의 판매를 규제하고 특수하게는 다음과 같은 경제법칙에 의거하여 처리된다. 토지소유, 가옥 또는 해당가옥 부분의 건축비용과 유지비용이 우선 산정된다, 가옥위치의 좋고 나쁨에 제약되는 토지의 가치가 두 번째로 산정된다. 그 순간의 수요, 공급관계의 상태가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린다.


위에서 인용한 논거를 바탕으로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야만인 이하의 상태에 처하지 않기 위해 노동자 개개인이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가져야 하며, 노동자의 주택소유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임대인은 이자를 지불하지 않고 주택에 대한 원리금만 상환하게 하여 주택을 소유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뮐베르거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일축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임차인은 주택의 원가격보다 열 배나 넘는 이자를 지불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기간이 지나도 임차인이 주택소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지금과 같은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주택문제와 해결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그것의 유일한 해결책은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엥겔스가 주택문제 해결의 근거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모순에 처한 자본주의 내에서의 공업발전 등 사회적 생산력 발전에서 찾고 있는 점이다.


공업발전은 개인적 노동을 기계 및 활용가능 하게 된 자연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사회적 노동으로 대체하는데, 이 사회적 노동이 제작한 즉각 교환 가능하거나 사용 가능한 생산물은 여러 개인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작품이다.(…)여기에 결정적인 점이 있다. 인간노동의 생산력이 이러한 정도의 높이로까지 발전하자마자, 지배계급이 현존할 온갖 구실은 사라진다(…)지배계급의 현존은 공업생산력의 발전에 대해서나, 또한 마찬가지로 과학, 예술, 특히 교양 있는 사교형식에 대해서나 나날이 더욱 장애가 되고 있다.


엥겔스의 이러한 주장은 큰 착각이 아니 수 없다. 왜냐하면 엥겔스가 주택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공업발전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착취기획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비롯되며, 이로부터 ‘공업 생산력의 발전’과 근대 부르주아사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공업 생산력 발전은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전망과 그대로 병치 될 수 없다. 엥겔스의 이러한 문제점은 주택문제의 해결책은 오직 사회적 노동생산력 발전의 귀결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쟁취라는 생산력주의에 기대게 한다.


주택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확실한 것은 이미 지금 대도시에는 합리적으로 이용할 경우 모든 현실의 ‘주택난’을 즉각 시정할 수 있기에 충분한 주택용 건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물론 오늘날의 소유자들로부터의 몰수를 통해서만, 즉 숙소가 없는 사람들이나 이제까지의 주택에 과도하게 밀집해 있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가옥에 수용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공공의 복지가 필요로 하는 그러한 조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전취하자마자, 마치 오늘날의 국가에 의한 다른 몰수 및 수용이 그렇듯이 쉽게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주택문제에 대한 엥겔스 접근방식의 문제점은 제2편 ‘에밀 쟉스 박사에 대한 논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엥겔스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임대주택의 형식을 통해 주택소유를 노동자에게 위탁함으로서 노동자를 주택소유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부르주아적 기만에 불과하며, 나아가 만일 노동자가 주택소유자로 되는 사태는 그들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해로울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우리는 대도시의 노동자들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제일의 생활조건이며, 토지보유는 그들에게 오로지 족쇄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가옥을 마련해 주어 그들을 다시 흙덩이에 잡아맨다면, 공장주들의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을 꺾게 할 것이다.


노동자둘이 자기 주택을 갖게 되면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된다니, 참으로 기묘한 논거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주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본악인 자본주의 제도를 폐지할 때만 가능하다.


주택문제의 해결이 동시에,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폐지를 통해서 비로소 동시에 주택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게 된다(…)하지만 처음에는 어떤 사회혁명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접수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본대로 주택난은 유산계급에게 속하는 호화주택의 일부를 몰수하고 그 나머지 부분에 그들을 수용함으로써 즉각 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현존하는 한, 그런 한에서 주택문제나 노동자의 운명과 관계되는 다른 어떤 사회문제라도 개별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반대로 해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폐지,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한 모든 생활수단 및 노동수단의 전유에 있는 것이다.


4.

지금까지 엥겔스가 주택문제를 둘러싸고 뮐베르거와 에밀 작스 박사와 벌인 논쟁을 살펴보았다. 뮐베르거와 에밀 쟉스의 주장이 공상적이며,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실현 불가능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엥겔스와 비판은 옳다 치고 그렇다면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은 과연 적절한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조차 정당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주택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적극 끌어안지 않고 사회혁명에만 기대는 엥겔스의 견해는 사실상 권리정치에 대한 본질주의적 견해에 다름 아니다.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관하여”를 “국가와 혁명”의 주요테마로 다루고 있는 레닌 역시 사회적 권리에 관한 한 엥겔스와 논문들이 파리 꼬뮌의 경험을 고려에 두고 있고, 국가와 관련한 혁명의 임무를 다루었으며, 노동계급이 모든 노동수단, 모든 산업을 실제적으로 장악할 필요성,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 계급의 폐지, 아울러 국가의 폐지로 가는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필요성을 확인시켰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레닌의 언급에는 중대한 모순이 발견된다. 그것은 과연 주택문제가 이행기 문제와 얼마만큼 큰 연관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사안인가의 여부와 그렇다면 사회적 이행시기이외에는 주택문제가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주택문제란 정확하게 자본주의 사회이건 이행의 시기이건, 아니 그것을 뛰어넘은 공산주의 사회이건 일상적 삶을 영위하고 재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고려되어야 할 주요한 이론적 문제이며 변치 않을 사실이다. 정확히 엥겔스의 글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택문제와 관련된 논쟁 주제들은 혁명 등 이행 시기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주요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현실적인 주택문제를 다루고 있다. 엥겔스 역시 먼 미래에나 실현될지 말지 할 그러한 주장과 일반적 원칙을 내세우기에 앞서 주택문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방침을 정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다.


엥겔스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와 주택소유자와 임차인 관계의 근본적 차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논고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둘간의 경제적 관계는 물론 다르다. 그러나 엥겔스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주택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단지 자신의 입금잔액을 저축해서 소유자로서 집주인과 상품거래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주택의 사용가치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가 좋은 주거공간에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란 그것이 상품소유자간의 거래관계냐, 그렇지 않으면 착취관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안전하고, 쾌적한, 그리고 좋은 노동조건에서 노동을 영위하고자 하는 노동자 계급의 작업장내에서의 요구와 사실상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주택문제가 마르크스의 권리의 정치이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유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좀 더 많은 화폐와 교환하고자 하는 생존권 요구와는 달리 쾌적하고 좋은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자 하는 욕구는 법적으로 표준노동시간이 제한됨으로서 그만큼의 잔여시간을 공장바깥에서 보내기 때문에 발생하는 생활권 실현의 요구 때문이다. 물론 주택문제가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노동자가 공장에서 보내는 사회적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될 수록 고된 일과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정신과 육체의 기력을 재충전하는 공간으로서, 그리고 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녀교육을 실행하고, 문화적 생활을 즐기기 위해 쾌적한 주거환경을 욕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절실한 행복권 추구의 요구이다. 왜냐하면 안락한 주거환경은 매우 절실한 행복권 추구의 요구이다. 왜냐하면 안락한 주거환경은 질 높은 문화적 삶의 핵심으로서 노동자들의 일상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중요한 생활공간으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주택문제를 뮐베르거라는 프루동주의자가 제기했다는 사실에만 시선을 빼앗겨 노동자계급의 권리정치의 맥락에서, 주거권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주택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론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뮐베르거와 에밀 쟉스 박사 등이 다른 때도 아닌 전 유럽적 차원에서 그것도 노동일이 법적으로 제한되는 그러한 시점에서 주택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은, 그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주택문제가 노동자계급은 물론 사회전체의 정치적 현안으로 제기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노동자들이 단순히 임금수취를 통한 생존권 기획에서 벗어나 생활권적 요구에 조금씩, 그리고 새롭게 눈뜨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주택에 대한 권리요구가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문제설정방식이 올바른지 주택문제가 노동자 자본과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상이한 “두 시민사이의 아주 일상적인 상품거래”이며, “주택문제의 해결이 동시에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폐지를 통해 비로소 동시에 주택문제의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는 식으로 결론짓는 것은 현실 노동자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의 생활권 실현이라는 권리정치적 문제설정을 통해서만이 그가 ‘사회문제의 해결’이라고 지칭한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폐절이라는 혁명적 문제의식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적어도 주택문제에 연해서만큼은 적절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주택에 대한 요구가 공장주들의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본”d[서 인용된 바 있는 “공장감독관보고서”등에 따르면, 자신들의 임금인하가 강제되는 상황에서도 대두사의 영국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으로 노동일을 제한하는 표준노동일 제정에 대부분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던 바, 엥겔스의 주장을 놓고 따지자면 동일한 근거에서 노동시간의 법적 제한이 노동자들의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주택문제가 소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지니며,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가 폐지되어야만 온전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장시간 노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자본 그 자체가 폐절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이 노동시간단축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논법이다. 따라서 사회적 권리문제 등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만 폐절된다면 당신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실행될 수 있다는 식의 천년왕국의 도래를 얘기할 뿐 노동자들에게 매우 절실한, 예를 들면 주택문제 등 생활의 권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무런 대안도 제시할 수 없게 하는 잘못된 문제설정이다.


엥겔스가 주택문제에 대해서 노동자들에게 전한 핵심적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주택문제란 노동자와 자본의 적대에 기초한 착취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시민적 거래자들, 즉 상품소유자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주택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노동자들로서 착취하는데 따른 직접적 귀결이 아니며 ‘태생적’ 한계를 지닌, 그 성격상 소부르주아적 권리요규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주요한 정치적 관심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은 주택문제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방식이 그 출발지접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현대 대도시의 노동자들과 일부 소부르주아들의 주택난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생산방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비교적 작은 이차적 폐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택난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노동자들로서 착취하는데 따른 직접적 귀결이 결코 아니다. 아 착취는 사회혁명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폐지하면서 폐지하기를 바라는 근본적 악이다(…)주로 이러한 종류의 고통, 즉 노동자 계급이 다른 계급들, 특히 소부르주아 층과 공통으로 당하는 고통에 즐겨 몰두하는 것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이며, 프루동도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결코 전적으로 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닌 이 투잭문제를 우리 독일의 프루동주의자가 그 무엇보다도 먼저 부여잡는 것, 거꾸로 주택문제를 진정으로 전적으로 노동자들으 lans제라고 선언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주택문제가 “오늘날의 자본주의 생산방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비교적 작은 이차적 폐단들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주택문제를 생존 생활기획이라는 권리정치의 맥락에서 제기하는 것조차, 다른 이유도 아닌 단지 주택문제의 성격 자체, 즉 ‘주로 이러한 종류의 고통, 즉 노동자계급이 다른 계급들, 특히 소부르주아 층과 공통으로 당하는 고통에 몰두한다는 이유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택문제와 관련된 고통이 노동자계급에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층과 공통으로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에 이차적 폐단이라는 주장,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기반으로 자신과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구별방식은 이론적으로 유치한 방식이다.


임금과 노동시간의 문제 등은 노동자가 자본의 직접적인 생산관계에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과학적 사회주의이고, 자본주의적 생산으로부터 연유된 것이긴 하지만, 이차적 폐단인 동시에 노동자와 소부르주아가 함께 겪는 고통이기 때문에, 주택문제 등에 몰두하는 것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마르크스 정치이론을 속류화하는 결론을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착취기획에 맞서 사회적 진보를 달성한 실제 사례는 대개 노동자 대중운동의 생존 생활기획의 실현을 위한 권리정치에 기반 한 것이라 하겠다. 오히려 엥겔스처럼 노동 자본간의 생산관계는 부불노동이 수취되는 부르주아사회의 근원적 관계이고, 주택문제 등은 자본주의 일반 시민들의 상품거래관계라고 단순 비교하며, 노동 자본간의 모습에 기인한 자본주의적 착취체계라는 근대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심층의 문제설정을 바로 정치 사회적 혁명으로 표출시키는 형태의 이론적 접근방식을 취할 경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적 관계의 제 연관구조와 그로부터 전개되는 다양한 정치동학을 사상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칫 경제적 파국론이라는 단선적 결정론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엥겔스 사후의 독일 사민당 혹은 현대 사민주의의 역사란 그러한 파국론이 카우츠키, 베른슈타인류의 개량주의나 사회적 배외주의 등으로 변질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엥겔스가 “주택문제에 대하여”에서 보여 준 경제주의적 관점의 또 다른 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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