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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비판

  • 등록일
    2010/05/07 12:29
  • 수정일
    2010/05/07 12:29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비판

- 사회복지에 대한 본질주의적 입장 -


최형익(한신대 강사, 정치학)


1. 

필자는 “사회복지와 노동” 창간기념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여하여 대단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의 토론열기 속에서 “사회복지와 노동”의 밝은 미래와 민중복지운동의 힘찬 전진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당시 분위기에 압도되어 토론 주제였던 “맑스주의와 사회복지”에 대한 전체 논평 글을 써주기로 흔쾌히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기왕 나온 글에 대한 논평을 쓰느니 차라리 “맑스주의와 사회복지”라는 주제에 연하여 토론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전환에는 이제 커다란 주제에 계속 매달리기보다 세부 각론과 쟁점들에 대해 입장을 밝힐 때 논쟁 지점이 명료해지고 맑스의 이론을 현실에서 올바로 구현할 수 있다는 평소 지론이 한 몫 했다.


이 글은 엥겔스가 사회복지의 주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인 주택문제를 둘러싸고 프루동주의자들과 벌였던 논쟁에 대한 필자의 비판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최근에 새롭게 쓴 것은 아니지만, “사회복지와 노동”의 취지에 부합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기고하기로 했다,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이론적 입장은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복지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은 독단론에 다름 아니다. 다만 나는 이 글이 맑스주의 고전들을 암송하는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그러한 독해방식이 문제가 있으며, 정통적 해석에 도전하여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 논쟁을 계속 이어나가는데 일조한다면 소기의 목표를 달성 한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복지와 노동”이 이후 생명력을 갖고 지속적으로 출간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다양한 이론적 쟁점과 현실 사안에 대해서 입장을 밝히고 논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가령 “민중복지연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서의 ‘사회적 임금’을 둘러싼 사이버 논쟁을 지면을 통해 적극 조직하고 다양한 논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싶다.


2.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사회복지라는 주제는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미묘하고 모순적인 테마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말해주듯 사회복지를 통해 얼마간의 물질적 혜택을 제공받음으로써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처지가 개선되지만 그로 인해 영원한 임금노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투쟁 없이 운동을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사회복지의 문제는 주요한 정치적 쟁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1980년 이후 영국의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공세와 그 반동의 물결은 그동안 노동자 계급이 쟁취했던 각종 사회 경제적 권리를 무위로 돌리고 있으며, 급기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이제 한국에서도 만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노동자 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 글과 관련하여 테제로 정리하자면, “일자리를 뺏기면 집도 빼앗긴다”로 요약할 수 있다. 작업장이나 사회적 제 영역에 있어서의 자본의 공세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의 후퇴가 주택, 교육 등 노동자 삶의 재생산과정과 밀접히 맞다있는 생활영역의 권리조차 심각히 훼손시키는 사태로 이어지는 경우란 셀 수 없이 많다. 영국의 대처 보수당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것의 가장 전형적 사례기다. 1980년대 초, 대처 정권이 들어서서 민영화란 명분 하에 시행한 공공주택의 매각과정을 들여다보면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초점이 결코 작업장에서의 노동통제강화나 착취강화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처 정부가 들어선 1979년부터 재정부담 완화를 목표로 시행된 공영임대주택의 매각과정과 주택의 사유화 조치는 삶의 본원적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주거환경 및 인간생활의 기반마저 자본의 입맛에 맞게 유린 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한국 역시 예와가 아니다. 길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이, 얼마 전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은 해고 즉시 그들의 보금자리인 임대 아파트에서 마저 쫓겨나야 했다. 노동자들이 쫓겨난 임대 아파트 자리에는 필시 고급 아파트나 물 좋은 인천의 압구정이 들어서, 때 아닌 ‘환란’에 대박 터뜨린 신자유주의적 ‘중산시민’들의 욕망의 배출구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게 수지맞는 일이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터와 주거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겪는   사태란 대량의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는 일 이외에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정 이럴진대 누가 사회복지의 정치를 개량주의라고 일축할 수만 있겠는가. 노동권이 노동자 복지와 그 생존권의 핵심 사항이듯이 주거권은 그 동전의 뒷면이다. 요컨대, 이 두 가지 사안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문제라 하겠다.


기존 맑스주의 이론에서는 노동을 너무 근본적인 활동으로 생각한 나머지 여타의 권리와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뤄왔다. 이러한 상황은 주거권을 포함하는 다양한 사회복지 정치의 쟁점들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나 실현 될 수 있는 본질주의적 입장으로 치환해 버리는 경향을 낳았다. 현실에 있어서도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주거권의 문제는 도시빈민이나 재개발지역 주민들의 문제로 생각하는 게 다반사고 그러나 보니 ‘주택문제’, ‘교육문제’를 비롯한 노동자 민중의 삶과 직결된 현안들에 대한 맑시즘적 대안과 입장이 부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주거권’과 관련된 사회운동의 담론을 종교단체들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사태를 잘 반영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쟁점들에 대한 맑스주의 내에서 이론적 무관심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은 편이다. 이하에서는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하여”를 비판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자본주의 내에서의 사회복지의 쟁점을 정통 맑시즘이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드러내고자 한다.


3.

엥겔스가 저술한 “주택문제에 대하여”는 별개의 논쟁을 다룬 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 “프루동은 주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프루동주의자인 뮐베르거가 제시한 주택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엥겔스가 반박한 글이다, 제2편 “부르주아는 주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에밀 쟉스라는 미국인 학자의 주택문제에 대한 박애주의적 접근을 엥겔스가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제3편 “프루동과 주택문제에 관한 덧붙임”은 뮐베르거가 엥겔스의 첫 번째 논문에 대한 비판을 엥겔스가 다시 반비판한 보론 형태의 글이다. 이 글에서 중심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내용은 엥겔스가 뮐베르거와 에밀 쟉스와 벌인 논전 그 자체라기보다는,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관한 문제설정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하에서는 주로 제1편과 제2편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제3편 “프루동과 주택문제에 관한 덧붙임”의 경우 논쟁이라기보다 이전 논쟁에서 엥겔스가 자신의 주장과 뮐베르거 주장의 차이점에 대해 재론하여 정리하는 수준이고, 제1편과 제2편의 논쟁 역시 엥겔스 주장이 상당 정도 중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1편 “프루동은 주택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서 엥겔스는 “가옥보유자에 대한 임차인의 관계는 자본가에 대한 임노동자의 관계와 같다”라는 뮐베르거의 주장에 대해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붑ㄹ노동에 기초한 부등가 교환, 즉 착취관계인 반면, 임차인과 임대인의 관계는 등가교환에 근거한 상품판매이기 때문에 자본가와 임노동자의 관계와 주택소유자의 임차인의 관계는 명백히 다른 것이라고 반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주택문제에는 서로 대립하는 두 당사자가 있으니, 임차인과 임대인 혹은 가옥소유자가 그들이다. 전자는 후자에게서 주택의 일시적 사용을 구매하려고 한다. 그는 화폐, 혹은 신용을 가지고 있다, 설령 그가 이 신용을 다시 가옥 소유자 자신으로부터 고리대의 가격으로, 요컨대 할증임대료의 형태로 사들여야 할지라도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상품판매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거래가 아니다. 설령 그가 노동자라 할지라도 임차인은 재산이 있는 사람으로서 등장하며, 그는 자신의 독특한 상품인 노동력을 이미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주택용역의 구매자로서 등장할 수 있거나 이 노동력이 얼마 안 있어 판매될 것을 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력이 자본가에게 판매됨으로서 생겨나는 독특한 결과는 여기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자본가는 구매한 노동력으로 하여금, 첫째로는 자체의 가치를 재산출하게 하고, 둘째로는 잉여가치를 산출하게 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자본가 계급사이에 분배될 것을 일시적으로 그의 수증에 머문다. 따라서 여기서는 여분의 가치가 산출되며 기존가치의 총량이 증가한다, 임대차 거래에 있어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임대인이 임차인을 얼마나 속이는가에 관계없이,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앞서 산출된 가치의 이전에 불과하며 임차인과 임대인은 합하면 보유하고 있는 가치의 총액은 전과 똑같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그의 노동에 대하여 가치이하로 지불하건 가치대로 지불하건 언제나 그의 노동생산물의 일부를 사취 당한다. 임차인은 주택에 대하여 그 가치이상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에만 사취 당한다. 따라서 임차인과 임대인 사이의 관계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와 동렬에 놓으려는 것은 전자의 관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시민사이의 아주 일상적인 상품거래이며, 이 거래는 일반적으로는 상품판매를 규제하고 특수하게는 다음과 같은 상품의 판매를 규제하고 특수하게는 다음과 같은 경제법칙에 의거하여 처리된다. 토지소유, 가옥 또는 해당가옥 부분의 건축비용과 유지비용이 우선 산정된다, 가옥위치의 좋고 나쁨에 제약되는 토지의 가치가 두 번째로 산정된다. 그 순간의 수요, 공급관계의 상태가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린다.


위에서 인용한 논거를 바탕으로 엥겔스는 노동자들이 더 이상 야만인 이하의 상태에 처하지 않기 위해 노동자 개개인이 자기 소유의 주택을 가져야 하며, 노동자의 주택소유를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임대인은 이자를 지불하지 않고 주택에 대한 원리금만 상환하게 하여 주택을 소유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뮐베르거의 주장을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일축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임차인은 주택의 원가격보다 열 배나 넘는 이자를 지불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기간이 지나도 임차인이 주택소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지금과 같은 사회 경제적 조건에서 주택문제와 해결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그것의 유일한 해결책은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엥겔스가 주택문제 해결의 근거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모순에 처한 자본주의 내에서의 공업발전 등 사회적 생산력 발전에서 찾고 있는 점이다.


공업발전은 개인적 노동을 기계 및 활용가능 하게 된 자연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사회적 노동으로 대체하는데, 이 사회적 노동이 제작한 즉각 교환 가능하거나 사용 가능한 생산물은 여러 개인들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작품이다.(…)여기에 결정적인 점이 있다. 인간노동의 생산력이 이러한 정도의 높이로까지 발전하자마자, 지배계급이 현존할 온갖 구실은 사라진다(…)지배계급의 현존은 공업생산력의 발전에 대해서나, 또한 마찬가지로 과학, 예술, 특히 교양 있는 사교형식에 대해서나 나날이 더욱 장애가 되고 있다.


엥겔스의 이러한 주장은 큰 착각이 아니 수 없다. 왜냐하면 엥겔스가 주택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공업발전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착취기획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비롯되며, 이로부터 ‘공업 생산력의 발전’과 근대 부르주아사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공업 생산력 발전은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전망과 그대로 병치 될 수 없다. 엥겔스의 이러한 문제점은 주택문제의 해결책은 오직 사회적 노동생산력 발전의 귀결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권력쟁취라는 생산력주의에 기대게 한다.


주택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확실한 것은 이미 지금 대도시에는 합리적으로 이용할 경우 모든 현실의 ‘주택난’을 즉각 시정할 수 있기에 충분한 주택용 건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은 물론 오늘날의 소유자들로부터의 몰수를 통해서만, 즉 숙소가 없는 사람들이나 이제까지의 주택에 과도하게 밀집해 있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가옥에 수용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공공의 복지가 필요로 하는 그러한 조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전취하자마자, 마치 오늘날의 국가에 의한 다른 몰수 및 수용이 그렇듯이 쉽게 실행될 수 있을 것이다.


주택문제에 대한 엥겔스 접근방식의 문제점은 제2편 ‘에밀 쟉스 박사에 대한 논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엥겔스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임대주택의 형식을 통해 주택소유를 노동자에게 위탁함으로서 노동자를 주택소유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부르주아적 기만에 불과하며, 나아가 만일 노동자가 주택소유자로 되는 사태는 그들에게 이로운 게 아니라 오히려 해로울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우리는 대도시의 노동자들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제일의 생활조건이며, 토지보유는 그들에게 오로지 족쇄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가옥을 마련해 주어 그들을 다시 흙덩이에 잡아맨다면, 공장주들의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을 꺾게 할 것이다.


노동자둘이 자기 주택을 갖게 되면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이 약화된다니, 참으로 기묘한 논거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주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본악인 자본주의 제도를 폐지할 때만 가능하다.


주택문제의 해결이 동시에,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폐지를 통해서 비로소 동시에 주택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게 된다(…)하지만 처음에는 어떤 사회혁명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접수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다면 우리가 이미 본대로 주택난은 유산계급에게 속하는 호화주택의 일부를 몰수하고 그 나머지 부분에 그들을 수용함으로써 즉각 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현존하는 한, 그런 한에서 주택문제나 노동자의 운명과 관계되는 다른 어떤 사회문제라도 개별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반대로 해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폐지, 노동자계급 자신에 의한 모든 생활수단 및 노동수단의 전유에 있는 것이다.


4.

지금까지 엥겔스가 주택문제를 둘러싸고 뮐베르거와 에밀 작스 박사와 벌인 논쟁을 살펴보았다. 뮐베르거와 에밀 쟉스의 주장이 공상적이며,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실현 불가능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엥겔스와 비판은 옳다 치고 그렇다면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은 과연 적절한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조차 정당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는 주택문제에 대해 이론적으로 적극 끌어안지 않고 사회혁명에만 기대는 엥겔스의 견해는 사실상 권리정치에 대한 본질주의적 견해에 다름 아니다. 엥겔스의 “주택문제에 관하여”를 “국가와 혁명”의 주요테마로 다루고 있는 레닌 역시 사회적 권리에 관한 한 엥겔스와 논문들이 파리 꼬뮌의 경험을 고려에 두고 있고, 국가와 관련한 혁명의 임무를 다루었으며, 노동계급이 모든 노동수단, 모든 산업을 실제적으로 장악할 필요성,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 계급의 폐지, 아울러 국가의 폐지로 가는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필요성을 확인시켰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레닌의 언급에는 중대한 모순이 발견된다. 그것은 과연 주택문제가 이행기 문제와 얼마만큼 큰 연관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사안인가의 여부와 그렇다면 사회적 이행시기이외에는 주택문제가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주택문제란 정확하게 자본주의 사회이건 이행의 시기이건, 아니 그것을 뛰어넘은 공산주의 사회이건 일상적 삶을 영위하고 재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고려되어야 할 주요한 이론적 문제이며 변치 않을 사실이다. 정확히 엥겔스의 글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택문제와 관련된 논쟁 주제들은 혁명 등 이행 시기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도 주요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현실적인 주택문제를 다루고 있다. 엥겔스 역시 먼 미래에나 실현될지 말지 할 그러한 주장과 일반적 원칙을 내세우기에 앞서 주택문제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방침을 정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다.


엥겔스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와 주택소유자와 임차인 관계의 근본적 차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논고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둘간의 경제적 관계는 물론 다르다. 그러나 엥겔스는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른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주택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단지 자신의 입금잔액을 저축해서 소유자로서 집주인과 상품거래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주택의 사용가치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가 좋은 주거공간에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란 그것이 상품소유자간의 거래관계냐, 그렇지 않으면 착취관계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안전하고, 쾌적한, 그리고 좋은 노동조건에서 노동을 영위하고자 하는 노동자 계급의 작업장내에서의 요구와 사실상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주택문제가 마르크스의 권리의 정치이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유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좀 더 많은 화폐와 교환하고자 하는 생존권 요구와는 달리 쾌적하고 좋은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자 하는 욕구는 법적으로 표준노동시간이 제한됨으로서 그만큼의 잔여시간을 공장바깥에서 보내기 때문에 발생하는 생활권 실현의 요구 때문이다. 물론 주택문제가 노동자의 생존권 요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노동자가 공장에서 보내는 사회적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될 수록 고된 일과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정신과 육체의 기력을 재충전하는 공간으로서, 그리고 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녀교육을 실행하고, 문화적 생활을 즐기기 위해 쾌적한 주거환경을 욕구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절실한 행복권 추구의 요구이다. 왜냐하면 안락한 주거환경은 매우 절실한 행복권 추구의 요구이다. 왜냐하면 안락한 주거환경은 질 높은 문화적 삶의 핵심으로서 노동자들의 일상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중요한 생활공간으로 자리매김 되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주택문제를 뮐베르거라는 프루동주의자가 제기했다는 사실에만 시선을 빼앗겨 노동자계급의 권리정치의 맥락에서, 주거권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주택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론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뮐베르거와 에밀 쟉스 박사 등이 다른 때도 아닌 전 유럽적 차원에서 그것도 노동일이 법적으로 제한되는 그러한 시점에서 주택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은, 그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주택문제가 노동자계급은 물론 사회전체의 정치적 현안으로 제기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노동자들이 단순히 임금수취를 통한 생존권 기획에서 벗어나 생활권적 요구에 조금씩, 그리고 새롭게 눈뜨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주거권 실현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주택에 대한 권리요구가 정당한 것임을 내세우는 문제설정방식이 올바른지 주택문제가 노동자 자본과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상이한 “두 시민사이의 아주 일상적인 상품거래”이며, “주택문제의 해결이 동시에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폐지를 통해 비로소 동시에 주택문제의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는 식으로 결론짓는 것은 현실 노동자 대중들에게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의 생활권 실현이라는 권리정치적 문제설정을 통해서만이 그가 ‘사회문제의 해결’이라고 지칭한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폐절이라는 혁명적 문제의식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적어도 주택문제에 연해서만큼은 적절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주택에 대한 요구가 공장주들의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본”d[서 인용된 바 있는 “공장감독관보고서”등에 따르면, 자신들의 임금인하가 강제되는 상황에서도 대두사의 영국 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으로 노동일을 제한하는 표준노동일 제정에 대부분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던 바, 엥겔스의 주장을 놓고 따지자면 동일한 근거에서 노동시간의 법적 제한이 노동자들의 임금인하에 대한 저항력을 상실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주택문제가 소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지니며,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가 폐지되어야만 온전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장시간 노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 자본 그 자체가 폐절되기 전까지 노동자들이 노동시간단축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논법이다. 따라서 사회적 권리문제 등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만 폐절된다면 당신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실행될 수 있다는 식의 천년왕국의 도래를 얘기할 뿐 노동자들에게 매우 절실한, 예를 들면 주택문제 등 생활의 권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무런 대안도 제시할 수 없게 하는 잘못된 문제설정이다.


엥겔스가 주택문제에 대해서 노동자들에게 전한 핵심적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 주택문제란 노동자와 자본의 적대에 기초한 착취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시민적 거래자들, 즉 상품소유자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주택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노동자들로서 착취하는데 따른 직접적 귀결이 아니며 ‘태생적’ 한계를 지닌, 그 성격상 소부르주아적 권리요규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주요한 정치적 관심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주장은 주택문제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설정방식이 그 출발지접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현대 대도시의 노동자들과 일부 소부르주아들의 주택난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생산방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비교적 작은 이차적 폐단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택난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노동자들로서 착취하는데 따른 직접적 귀결이 결코 아니다. 아 착취는 사회혁명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폐지하면서 폐지하기를 바라는 근본적 악이다(…)주로 이러한 종류의 고통, 즉 노동자 계급이 다른 계급들, 특히 소부르주아 층과 공통으로 당하는 고통에 즐겨 몰두하는 것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이며, 프루동도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앞에서 본 것처럼 결코 전적으로 노동자들의 문제가 아닌 이 투잭문제를 우리 독일의 프루동주의자가 그 무엇보다도 먼저 부여잡는 것, 거꾸로 주택문제를 진정으로 전적으로 노동자들으 lans제라고 선언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주택문제가 “오늘날의 자본주의 생산방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수많은 비교적 작은 이차적 폐단들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주택문제를 생존 생활기획이라는 권리정치의 맥락에서 제기하는 것조차, 다른 이유도 아닌 단지 주택문제의 성격 자체, 즉 ‘주로 이러한 종류의 고통, 즉 노동자계급이 다른 계급들, 특히 소부르주아 층과 공통으로 당하는 고통에 몰두한다는 이유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택문제와 관련된 고통이 노동자계급에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층과 공통으로 당하는 고통이기 때문에 이차적 폐단이라는 주장,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기반으로 자신과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구별방식은 이론적으로 유치한 방식이다.


임금과 노동시간의 문제 등은 노동자가 자본의 직접적인 생산관계에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과학적 사회주의이고, 자본주의적 생산으로부터 연유된 것이긴 하지만, 이차적 폐단인 동시에 노동자와 소부르주아가 함께 겪는 고통이기 때문에, 주택문제 등에 몰두하는 것은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마르크스 정치이론을 속류화하는 결론을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착취기획에 맞서 사회적 진보를 달성한 실제 사례는 대개 노동자 대중운동의 생존 생활기획의 실현을 위한 권리정치에 기반 한 것이라 하겠다. 오히려 엥겔스처럼 노동 자본간의 생산관계는 부불노동이 수취되는 부르주아사회의 근원적 관계이고, 주택문제 등은 자본주의 일반 시민들의 상품거래관계라고 단순 비교하며, 노동 자본간의 모습에 기인한 자본주의적 착취체계라는 근대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심층의 문제설정을 바로 정치 사회적 혁명으로 표출시키는 형태의 이론적 접근방식을 취할 경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적 관계의 제 연관구조와 그로부터 전개되는 다양한 정치동학을 사상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칫 경제적 파국론이라는 단선적 결정론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엥겔스 사후의 독일 사민당 혹은 현대 사민주의의 역사란 그러한 파국론이 카우츠키, 베른슈타인류의 개량주의나 사회적 배외주의 등으로 변질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엥겔스가 “주택문제에 대하여”에서 보여 준 경제주의적 관점의 또 다른 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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