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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파업투쟁에 대한 단상
들어가며...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부실에 따른 금융위기를 시발로 전지구적 경제위기가 급물살처럼 번지는 시기 한국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전산업에 걸친 구조조정이 예상되는 가운데 그 한복판에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또한 놓여있었다.
경기지역 노동사회단체들이 모여 쌍용자동차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를 결성하여 4월초부터 본격적인 쌍용자동차 자본의 노동자 위기전가에 맞서 싸우는 정리해고 분쇄 투쟁을 돌입하게 되었다.
다소 늦었으나 민주노총 경기본부와 금속노조 경기지부를 필두로 주요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서울과 다르게 지역의 인프라 한계로 인하여 구체적인 공투본 상황실을 꾸리기 힘들었고, 쌍용차 노조 또한 경험과 활동의 부재로 인한 활동의 열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여건이 미비하였다. 이에 공투본은 지부 협력단위로 논의테이블을 구성하여 공투본 상황실 파견자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공투본에서 주요하게 선전, 기획, 조직팀으로 3팀 체계로 노조와 궤를 같이 하였다.
쌍용차는 거의 투쟁에 있어 활동을 이끌 수 있는 단위가 부재하여 금속노조 전술단 파견, 자문단이 구성되어 투쟁 이론을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참여할 사람이 부재하여 지부 상집들은 거의 일에 전념을 하여야 했으며, 투쟁에 대한 구체적 고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정리해고 통보되는 시점에 지부 상집의 대거 이탈로 인한 어려움 대의원 이탈 그리고 회사의 회유와 협박에 의한 조합원의 죽음 등 많은 심적 부담을 않고 투쟁을 전개하여야 했다.
투쟁의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쌍용차 공장점거 파업 투쟁은 한국노동운동사를 새롭게 획을 그었다. 그 기나긴 80여일에 이르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처절하다 못해 사생결단(死生決斷)의 자세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노동운동에서 노동자가 공장의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자본과 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쌍용차 노동자들은 이를 감수하고 공장점거 파업을 통한 생산수단의 장악과 노동자 통제를 몸소 실천활동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약한 우리의 연대투쟁이 쌍용차 투쟁의 엄호 지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측의 단전단수, 가스차단, 인터넷 차단, 파업대오 고립 등의 악조건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쌍용차 투쟁대오의 함성은 꺼져가는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계급 단결에 하나의 획으로 기억될 것이다.
쌍용차 투쟁은 쌍용차 노동자들만의 투쟁이 아닌 전국노동자투쟁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투쟁 방향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단상에서는 간략히 느끼고 본 과정에 대한 쌍용차 노동자와 함께한 현장의 상황을 기억을 더듬어 써내려가 보고자 한다.
5월 13일 새벽 굴뚝 고공농성 돌입.
원하청 내부단결을 강화시키고 공장점거 파업으로 가기위한 원․하청 공동투쟁의 방안으로 70m 굴뚝 고공농성에 돌입하게 된다. 내부에서는 시기가 좀 늦다고 하였으나 그래도 지부에서 총고용보장이라는 원칙을 갖고 비정규직 투쟁에 동참하기 위한 방안으로 굴뚝 고공농성을 원․하청 공동투쟁을 만들었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었으나 지부와 공투본에서는 비정규직문제를 전면화에 내걸고 투쟁할 수 있는 고민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굴뚝 농성을 진행하면서 조합원 내부에서는 점차 비정규직에 내한 문제를 인식하였다. 그리고 비록 수는 적었으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심각성과 개선점을 알아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굴뚝 고공농성은 단지 공장점거 파업을 가기 위한 수순이 아닌 비정규직 문제를 쌍용차 조합원들에게 알리고 원하청 공동투쟁 이를 넘어 함께 살자는 금속노조 총고용보장이라는 구체적 안을 실현시키는 아주 주요한 전술이었다. 2009년 2월 금속노조는 총고용보장을 내걸고 함께 살자는 구호를 통하여 비정규직 원하청 공동투쟁을 이야기한바 있다. 쌍용차 지부는 다소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지원활동에 있어 미흡하였으나 투쟁의 과정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지부 문제로서 몸소 받아 않았다. 총고용 보장 원하청-협력부품사 노조 20만개 일자리 지키기 위한 투쟁은 굴뚝 고공농성을 통하여 만들어진 투쟁이었다. 비정규직 또한 주체로 전면화에 걸고 지부에 적극 참여하여 이미 정리해고된 300여명 사내하청노동자의 목소리를 쌍용차 파업투쟁 현장에서 생생히 알려나갔다.
쌍차투쟁의 원동력 지부 상집- 눈물겨운 노가다 부장들....
지부 임원과 상집은 파업투쟁을 준비하면서 노가다 부장과 임원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루 3-4시간 새우잠을 자면서도 투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하였다.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상집은 투쟁을 이끌기 보다는 노가다를 하면서 파업집회와 파업 물품 구입 등 구진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잠을 설쳐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상집들이 불만을 토로하였으나 이 투쟁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내던졌다. 매일 이어지는 회의와 아침 조례 등 힘든 일정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이 있었기에 이 파업투쟁이 지부-조합원의 투쟁으로 80여일 가까운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공투본 초기 조직진로에 대한 어려움이 산개하였다.
공투본은 파업투쟁 돌입이전 범도민대책위 구성과 관련한 조직 전환이라는 내부적 진통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대시민 선전전을 통한 사회여론 형성에 주목한 단위에서는 경기시민사회연석회의가 공투본이라는 문구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기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필역하였기에 공투본이 아닌 도민대책위를 구성하자는 의견을 필역하여 한달 가까운 기간 동안 명칭 관련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대부분 파견한 단위에서는 쌍용차 투쟁특성을 감안 공투본으로 결정하고, 그렇지 않은 단위에서는 범도민대책위에 참여하여 활동을 하자는 의견으로 정리하였다.
투쟁의 성격상 공투본으로 하자는 의견과 도민대책위를 구성하여 공투본에 참여할 수 없는 단위들은 도민대책위에 참여할 것으로 정리함. 이 논의와 관련하여 주요한 사업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공투본 활동 또한 지부와의 원활한 소통이 되지 않아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촛불문화제와 선전활동을 함께하면서 안착시키는데 상당한 기일이 걸렸으며, 공투본 내부 또한 쌍용차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 차이로 인해 활동을 벌이는데 있어서 다소 의견차이로 매일매일 점검회의를 하면서 일정을 조율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상당수 활동가들이 의견정리가 된 후 자신의 위치를 찾고, 현장 순회투쟁 조직단, 선전팀, 조직팀 등으로 배속되어 현장 분임토론 모니터링, 프로그램 운영, 촛불문화제, 공투본 홈페이지 관리, 언론대응 등 다양한 활동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무엇보다 아쉬움 점은 초기 함께하였던 파견자들이 공장이 공권력과 사측에 의해 고립되면서 공장점거 파업현장에서 대거 나가 밖에서 공투본을 꾸리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서울에 상황실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나 지역에서는 밖에 가족대책위 농성장을 중심으로 결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각 단위별 활동으로 공투본 활동이 그 위상을 공권력에 의한 침탈이 있을 때까지 이어지지 못한 점이 있다. 그러나 현장 안에서는 매일 회의를 진행하며, 공권력과 투쟁 방향을 세우는 매일 점검회의를 진행하며, 지부와 함께 공동투쟁을 벌여나갔다.
공장점가 파업투쟁 초기 쌍용차 지부는 대의원 이탈에 따른 부재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외부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쌍용차 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현장 경험은 활동력으로 극복될 수 있었으나 대의원 부재로 인한 쟁대위(쟁의대책위원회)와 조합원 소통은 원활하지 않았다. 소식을 전할 대의원이 공장점거 파업에 돌입하면서 대거 이탈을 하였다. 그리고 초기 조합원들의 의식이 결여되어 있어 이를 극복할 대안이 필요하였다. 이에 공투본과 지부는 조합원과 일상소통과 활동을 모아내기 위한 방안으로 야간촛불문화제를 개최하게 되었다.
또한 대의원을 대체한 대안권력으로서 조장체계를 확립하여 쟁대위가 관장하도록 하였다. 사측의 희망퇴직 회유와 협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내부체계를 다잡기 위하여 자발적 조장을 뽑고, 분임토론과 교육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교육을 잡는데 있어서도 이견이 있어 어려움이 있었으나 기간 파업투쟁을 전개하였던, 한라중공업(현 현대삼호중공업 99년 파업), 현대자동차(98년 파업), 기아자동차(회사정상화투쟁), 대우자동차(2001년 파업) 투쟁 사례 등을 갖고 투쟁사례 교육을 하였다. 조합원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파업투쟁시기 노동자의 역할과 조합원으로서 투쟁을 임하는 자세.... 구조조정 정리해고 분쇄 투쟁의 당위성들을 각인시켰다. 또한 시기별 이슈에 대한 분임토론을 전개하며, 조합원들에게 투쟁의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파업투쟁시기 대의원이 부재가 조합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함을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다. 조합원의 자발적 성과 또한 컸다. 대의원들에 대한 징계와 조합원 징계를 조합원 스스로 이끌었다. 조합원들은 초기 자신들이 살기 위한 방안으로 파업 미참가자에 대한 징계를 지부에 강력히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투쟁이 점차 확산되자 파업대오 안과 밖의 중요성을 알아가면서 밖에 대오에 대한 조직화에 힘을 기울이며, 조합원들에게 조합 지침을 따라 사측의 희망퇴직과 개별동의서를 쓰는 것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초기 자신의 살기 위한 길을 선택하여 파업대오에 합류한 조합원들이 스스로 노동자 투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파업투쟁 진행기간 내내 발견할 수 있었다.
조합원의 역동성과 지부의 활동이 한국노동운동사의 새 역사를 만들었다. 공장점거 파업에 있어서 공권력에 맞서 결코 물러섬 없이 투쟁을 전개한 사업장은 없었다. 쌍용차의 경우 외부적 연대조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80여일 공장점거 파업을 전개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다른 투쟁과 다르게 연대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동지를 믿고, 나를 믿고, 지도부를 믿고 투쟁을 전개한 쌍용차 투쟁은 꺼져가는 민주노조운동의 불씨를 다시금 살리는 기회가 되었으며,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는 전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투쟁의 성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야간 촛불문화제 조합원과 지부를 엮는 자발적 소통의 창구로 거듭나다.
파업투쟁에서 일상적 소통은 매우 어렵다. 쟁대위 지침과 명령 하달이라는 일방적 소통만이 오가는 현 노조 체계와 계통에서 조합원들과 지부를 잊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쌍용차는 문예패 활동이 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발적 촛불문화제는 조합원들의 참여와 파업결의를 높이는 주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무엇보다 조합원들이 지부에게 요구를 가감 없이 하면서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인식을 받고 활동을 고민하게 되는 성과도 이루어내었다.
문화패의 부재를 촛불야간문화제로 극복하였다. 대공장노조 대부분이 문예패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파업시기 마다 율동패와 풍물패들이 파업투쟁의 흥을 돋우지만 쌍용차의 경우 문예패 활동가들이 많이 없었으며, 희망퇴직을 신청한 사람들이 많아 풍물패를 운영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한 문화적 공백이 컸으며, 초기에는 전문 문예활동가가 와서 파업대오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비용이 많이 소진되어 자체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다. 문예활동으로 진행된 야간촛불문화제를 통한 조합원 발언과 참여로 인한 내부 소통의 주요한 무기로 작동하였다.
지도부 또한 초기에는 야간촛불문화제를 진행하는데 다소 좋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조합원 직접 참여하는 야간촛불문화제가 진행되면서 내부 단결 강화 수단으로 작동하며, 조합원 전체를 단일한 대오로 이끄는 문화제로 진화하였다.
무엇보다 야간촛불문화제는 기간 지도부의 일방소통을 넘어 쌍방향 소통을 일구어낸 소중한 경험이었다는데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파업시기 지도부 지침과 일방향적 조합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아래로부터의 소통을 열어나간 것이 이후 투쟁에서 주요하게 고민되어야 할 점이다.
파업시기 일상적으로 지도부의 일방적 연설과 조합원들의 냉소가 아닌 서로 어울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파업투쟁의 기초를 야간촛불문화제가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쌍용차를 둘러싼 쟁점들
쌍용자동차에서 주요하게 3가지 원칙을 잡고 초기에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 대한 이해와 설득을 하기 위한 공투본 파견자 내부논의는 인식의 차이로 인한 어려움들 또한 존재하였다.
쌍용차는 초기 노조에서 자구안을 마련하였다. 자구안의 내용은 총고용 보장의 전제한 5+5 순환휴직, 임금채권을 담보로한 1,000억원 출연, 12억 조합비를 담보로 한 비정규직 총고용보장을 내걸고 함께 살자는 구호를 통한 자구안을 회사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회사는 이에 대한 묵묵부답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며, 2646명에 달하는 정리해고를 단행하였다. 무엇보다 쌍용차 정리해고는 이후 있을 자동차 산업에 대한 자본과 정부의 구조조정이라는 의미에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중요한 싸움이었다.
이에 노조 자문단에서는 자구안을 통한 회사 회생의 밑그림을 그렸다. 또한 금속노조는 쌍용차 투쟁에 대한 전망을 3주안에 교섭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총파업투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예상은 빛나갔다. 초기 공투본에서는 금속노조 정책국장이 투쟁은 공멸의 길을 이야기하며, 공생의 길을 찿기 위한 쌍용차 파업투쟁을 교섭으로 마무리 짖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어 공투본 단위에서는 강한 이의를 제기하였다.
상하이 먹튀 투기자본의 문제를 투기자본감시센터(이하 투감센터)에서 예견하였지만 쌍용차 투쟁대오가 과거 보여준 모습이 투쟁적이지 않기에 상하이 먹튀 자본 축출은 어렵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금속노조에 대한 강한 이의제기를 하며, 공투본 한 단위에서는 쌍용차를 둘러싼 삼각구도를 설명하였다.
삼각구도는 쌍용차 지부, 상하이 먹튀(먹고튀는) 투기 자본, 이명박 정부가 서로 삼각구도를 형성하여 투쟁이 장기화 될 조짐이 있다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상하이 먹튀 자본이 쌍용차에서 철수하지 않는 이상 쌍용차의 미래를 없기에 상하이 먹튀자본을 축출하고 쌍용차 지부가 요구하는 총고용 보장, 상하이 먹튀 자본 주식소각, 공적자금 투입이라는 수순을 밟도록 내부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이 삼각구도에 대한 의견에 다들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투본 대다수에서는 상하이 먹튀 자본 축출-공권력 대립(정권과의 투쟁)이라는 2단계 투쟁이 있음을 직시하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금속노조 차원의 대정부투쟁임을 서로가 합의를 하였다. 그러나 지부 임원들의 경우 투쟁을 준비하는데 겨를 이 없이 이 논의에 대한 구체적 고민을 하지 못하고, 지부장과 임원들이 공유만 하였다.
현장 조합원들은 분임토의를 통해 알려나갔으며, 이 내용을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교선실에서는 쟁대위 속보를 통해 주요 이슈와 사측의 회유와 협박에 대한 반박 글을 내면서 사측과의 대립각 세웠다.
초기 바라보았던 데로 이 투쟁은 상하이 자본의 주식 감자와 공권력 침탈로 마무리 되었다. 상하이 정부는 물러서게하였지만 우리가 당초 목표하였던 공적자금 투입은 일정부분 전개되지만 공기업화를 통한 회생보다는 산업은행은 쌍용차 회생 가닥을 일시적 공적자금 투입으로 회생시킨 후 전지구적 경제위기로 인한 경제여건상 국내자본에 대한 제3자 매각으로 가닥이 잡혀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의 노동유연화를 통한 비정규직 대량 확산을 쌍용차 투쟁이 막아내지 못하였지만 이 투쟁은 향후 구조조정 정리해고가 어떠한 투쟁을 노동자들이 전개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례와 투쟁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현재 48:52라는 대통합은 있지만 이후 8월 11일부터 진행될 실무교섭에서 이 투쟁의 방향이 마련될 예정이다. 이 투쟁의 최종 정리가 되는 합의안이 도출될 때 쌍용차 파업투쟁에 대한 투쟁평가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해고자 원직복직투쟁을 위한 기나긴 투쟁이 쌍용차노동자들에게 남아 있다. 교섭과 해고자 원직복직이라는 기나긴 투쟁에서 더욱더 힘찬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기조 토론을 통해 3대 기조를 공투본 회의를 통해 마련하였다.
총고용 보장(원하청-협력부품사), 상하이 먹튀 자본 주식소각, 공적자금 투입이라는 전제를 달았고 노정교섭을 요구하였다.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공기업화, 국유화를 통한 노동자통제 등 다양한 세력들의 의견은 있었으나. 위 3가지 전제를 갖고 투쟁에 돌입하기로 하였다. 이 투쟁이 성격을 대정부 투쟁으로 못 박았다.
상대적으로 비정규직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문제가 전면적으로 내걸지는 못하였지만 총고용보장이라는 기족 그리고 노정교섭이라는 대정부 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쌍용차 투쟁은 사회화 된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해고는 살인이다!
5월부터 조합원 부인의 죽음을 시작으로 정리해고 스트레스와 경제적 고립감으로 자살을 한 노동자와 가족이 총 7명에 이르는 해고 살인정국을 맞이하였다. 공황기 경제위기가 노동자들의 삶과 가족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쌍용차 투쟁은 말해주고 있다.
5월초 정리해고가 예고된 시점에 조합원 부인이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 조합원 부인 유산, 엄인섭 조합원 스트레스성 심근경색으로 사망, 관제데모에 참여한 죄책감으로 김영훈 조합원 뇌출혈로 사망, 도장2팀 비정규직 조합원 경제적 어려움 비관 자살, 창원지회 희망퇴직자 경제적 비관 자살, 노조 상집 간부 부인 자살 등 가족과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해고는 살인이었다.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에게 고통 전가하는 노동자 정리해고는 이처럼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특히 경제위기가 한창인 지금 정리해고는 곧 죽음이라는 등식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후 정리해고로 인한 스트레스, 우울증이 어떻게 노동자와 가족을 옥죄여올지 자명하다.
쌍용차만이 아닌 이후 다른 사업장에서도 이와 동일한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정리해고가 갖고 있는 사회적 타살에 대해 주목하고 이에 따른 정리해고 분쇄와 노동자 일방적 고통전담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여야 한다.
무급휴직=정리해고, 분사 외주화,
분사 외주화를 통한 구조조정은 쌍용차를 시발로 자동차산업 그리고 다양한 업종에서도 이와 동일한 형태로 자본의 변형될 전망이다.
쌍용자동차의 경우 초기 정비지회 인력이 상하이 매각당시 1000여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상하이 매각이후 업체 외주화로 정리해고 당시 367명으로 인원이 축소되었고, 비정규직은 1,700여명에 달하던 것이 300명으로 축소되었다. 이렇듯 분사 외주화는 쌍용차 경쟁력 없는 회사로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산업은행이 자동차법에 위배되는 것을 알고도 묵인하였다.
분사 외주화는 현재 기아 모닝차를 만드는 동희오토 형태로 만들기 위한 자동차산업 전반의 구조조정이라는 인식을 갖고 자동차 4사 정비지회 공동기자회견을 진행하였다. 정부가 향후 쌍용차만이 아닌 현대기아, 대우차 등에서도 정비지회 분사 외주화를 통한 기업 경쟁력 강화라는 이명박 정부의 노동유연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노조는 천명하였고, 쌍용차 단체협약에서는 분사는 노사 합의사항임을 분명히 못 박고 있다.
정비지회만이 아닌 협력지원파트에 대한 분사를 계획하고 있어 공장전체 라인을 제외한 지원협력파트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야기 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노조는 분사 외주화는 결코 방관하지 않고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었다. 큰 틀의 합의에서 분사 외주화는 주요 이슈로 부각될 전망이다.
또한 분사 외주화와 동시에 삼일과 삼정회계법인의 회생계획안 라인 배치인원의 허구성이 밝혀져 이에 대한 대응 또한 주요하게 진행되었다. 자문단에서는 삼일, 삼정회계법인의 회생계획안에 따른 작업라인 인원배치 때 871명이 추가인력 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필역하며, 회생계획안은 노동자 정리해고를 위한 일방적 고통분담과 남아 있는 노동자들이 라인을 운영할 수 없는 허구성임을 폭로하였다. 특히 쌍용차의 경우 일방 승용라인이 아니라 RV와 SUV를 생산하는 회사로 차체가 크기에 시간당 인원배치에 있어서 다른 승용을 만드는 자동차 기업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을 알렸다.
이에 대해서는 사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고, 신규인력 채용에 있어 비정규직채용을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무마하였다.
노동법에서는 신규인력(정규직) 채용시 정리해고자 우선 고용이라는 조장이 있어 이를 위배하고 공장을 비정규직이 넘쳐흐르는 생산기지로 쌍용차 채질을 개선시키고자하는 음모를 들어내기도 하였다.
무급휴직은 곧 정리해고이다. 무급휴직자들은 타 기업에 종사할 수 없고, 단기 아르바이트 또한 할 수 없다. 무급휴직은 노동자 경제적 고립감을 더욱더 옥죄여 오고 있기에 12월부터 휴직에 들어간 조립1팀의 경우 사실상 정리해고가 아니냐라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에 무급휴직이 아닌 노조는 5+5 순환휴직을 주장하였다. 일자리 나누기를 통한 잡세어링(job sharing, 일자리 나누기)을 통한 일자리 확보와 총고용보장의 틀을 갖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안과 밖의 투쟁을 통한 연대의 확산과 사측의 노노갈등, 노조무력화에 맞서 투쟁하다
연대투쟁이 확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이슈 쟁점화와 연대를 확산하기 위한 안과 밖 투쟁을 준비하였다. 금속노조 경기지부 또한 쌍용차 파업투쟁 돌입시기 13개 지역 지회사업장들이 파업에 돌입하여 쌍용차 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있지 못한 현실을 감안하여 공투본 차원에서는 지역연대를 확산하기 위한 현장순회투쟁을 쌍용차 파업대오와 함께 충남, 경기지역 단위사업장을 방문하여 연대를 하였고, 서울상경투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금속노조 연대투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금속노조의 경우 총파업투쟁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확대간부파업과 지역지부 순회파업을 전개하였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직접 투쟁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서울상황실을 꾸려서 안과 밖의 투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연대파업은 쉽지 않았다. 서울상황실의 역할은 주요하게 대정부 요구안과 사회적 쟁점형성이었으나 용산, 미디어법, 비정규직법 등에 따른 임시국회 일정으로 쌍용차 투쟁에 있어 연대의 파급력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서울상황실은 주요하게 대정부 투쟁과 산업은행 압박 그리고 정치권 압박투쟁을 담당하였으나 파업대오가 고립되면서 소통에 있어서 원활하게 운영되지는 못하였다.
안과 밖의 투쟁은 존재하였으나 연대투쟁을 책임질 금속노조의 미온적 대응이 쌍용차 투쟁에 있어 아쉬움으로 남는다. 금속노조의 강력한 연대파업과 쌍용차 공장점거 파업이 만나지 못하고 쌍용차 노동자의 고립 그리고 사측과 공권력의 압박에 따른 고립감으로 피로도 누적 그리고 단수, 단전, 가스중단에 따라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초기 6월 26일과 27일 사측과의 갈등에서 빚어진 노노갈등과 노조무력화에 대한 사측의 시도는 안의 투쟁대오로 인하여 무력화되었지만 사측의 간괴에 속아 넘어간 조합원과 일부관리직의 준동은 노노갈등과 노조무력화 씨앗을 남겼다. 이후 쌍용차 지부가 현장 장악력을 높이며, 풀어야할 과제로 남겨졌다.
쌍용차 지부 정부의 구조조정은 산업지형 개편과 노동유연화를 통한 비정규직 양산 저지 투쟁
이명박 정부는 5월 7일 노동유연화를 통한 비정규직 양산을 통한 일자리 확대방안을 발표하면서 노동조합 무력화를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천명하였다. 이 발표는 쌍용차 지부 투쟁만이 아닌 이후 있을 공기업, 민간 부문 구조조정에서 정리해고를 통한 노노갈등을 조장하면서 노동조합 무력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98년 정리해고 당시 노동조합 무력화를 시키기 못한 것에 대한 한을 이야기하며, 구조조정을 통해 고통전가만이 아닌 노동조합 무력화를 통한 노사선진화를 안착 시키겠다는 의지를 공공연히 표명하였다. 쌍용차 지부는 그 한복판에 있었다.
내부적 단결이 필요하였기에 지도부는 쌍용차 조합원들에게 총고용보장이라는 원칙을 확고히 수립하여 원․하청-협력부품사 20만 일자리 지키기 위한 투쟁임을 끊임없이 알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을 갖고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쌍용차 지부는 금속노조가 밝힌 입장을 갖고 실천투쟁을 전개하였다. 80여일에 거친 투쟁 금속노조는 쌍용차 지부라 표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쌍용차 지부가 금속노조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노동유연화를 통한 산업지형 개편에 맞선 투쟁을 쌍용차 노동자들은 공권력과 사측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전개한 것이다. 8월 6일 비록 교섭을 통한 큰 틀의 합의로 이 투쟁이 일막이 끝났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들은 많다. 무급휴직, 분사, 정리해고, 외주화 등 다양한 이슈 그리고 징계와 복직 정리해고자 복직투쟁 등 이 싸움의 처절한 이막이 시작되고 있다.
쌍용차 투쟁은 기울어져 가는 노동운동의 한줌의 빛으로 남겨져 있다. 처절한 안시성 전투에서 비록 굳건히 지키고자 하였으나 고립으로 인한 피로도 누적으로 공권력 침탈에 맞서 저항하였으나 다시금 투쟁을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금 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 쌍용차 투쟁은 전국의 민주노조 활동가들에게 큰 교감이며, 노동운동의 공장점거 파업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이 공장점거를 통한 생산수단의 장악의 의미를 여실히 보여준 투쟁이었다. 쌍용차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가열찬 투쟁이 정리해고 일정부분을 물리칠 수 있었으며, 비록 정권에 맞선 승리적 투쟁은 연출하지 못하였지만 분명한 것은 상하이 먹튀 투기자본을 몰아내는 투쟁을 전개하였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 ‘
나가며....
2009년 8월 6일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역사적 공장점거 파업투쟁이 저물었다.
사측에게는 부담으로, 노동자에게는 계급의 힘과 가능성을 알려나갔던 쌍용차 지부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단 마감되었다. 5월 21일 조바심을 시작으로 전개된 노동자 투쟁 투쟁전선이 명확히 그어지지는 않았지만 기간 지역에서 투쟁을 안하기로 소문난 쌍용차 노동자들이 일어섰다. 완강한 파업투쟁 대오는 국가권력과의 대결을 예상하면서도 결코 한 치 물러섬 없이 가열찬 투쟁 노동자의 근성을 보여주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리는 현 정세에서 쌍용차 노동자 투쟁이 전국의 노동자들에게 전면적 연대투쟁을 제기하면서 투쟁을 알려나갔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에 대한 총파업 투쟁 지침을 기달리다 치친 쌍용차 노동자들은 스스로 무장을 하며, 사측과 정부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였다.
우리의 기억에서 쌍용차 투쟁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보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만들어 갔던 의미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서의노동자 투쟁의 양산이 어떠할 지에 대한 예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가 공권력에 맞선 전면 대치하며 평택공장 하늘을 지배하였던 모습 연일 메스컴에서 떠들어대는 각종 유언비어들은 한 낮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주먹밥과 체류탄을 뒤집어쓰면서 공장을 지키겠다고, 동료들의 죽음이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며, 나를 믿고, 동지를 믿고 투쟁하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투쟁 대오의 모습이 생생히 화면에 펼쳐진다.
평가는 이후 8월 11일부터 진행되는 실무교섭 끝난 이후 각 단체들에게서 전개되겠지만 한국노동운동사에 새로운 공장점거 역사를 만든 쌍용차 투쟁에서 우리는 민주노조의 현주소와 과제를 도출하여야 한다.
노동자 단결과 연대 그리고 민주노조의 소중함을 여실히 실감하는 투쟁이었다. 비록 쌍용차에서는 전국적 연대투쟁으로 확산되지 못하였지만 노동자 자존심이 무엇인지를 자본가와 정부여 쌍용차 노동자는 보여주었다.
노동자 파업투쟁의 무기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기억하게 해주었다. 이제부터 쌍용차 노동자들의 원직복지 투쟁에 기간 투쟁의 반성과 한계를 벗어 던지고 함께 어깨 걸고 연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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