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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주민이 마련해준 작은 환송회...

  • 등록일
    2004/09/29 03:22
  • 수정일
    2004/09/29 03:22

세상 살면서 친구를 하나 얻었습니다.

이전 인천에서 노동정보화사업단 인천지부 활동을 하면서 서울 노동정보화사업단(본조)에서 상근하였던 문태준 동지입니다. 이에 인연이 닿았습니다.

 

내 삶에서 문태준 동지를 만났다는 건 큰 행운입니다. 늘 도움만 받았지... 보태준 것이 없는데도 늘 찾아주고 말 벗이 되어주는 그가 있어 참 행복합니다. 오산으로 내려가더라도 계속하여 연락을 하고 술을 얻어먹을까 합니다/ 저 정말 못됐죠...

 

문태준 동지는 PHP책과 MySQL책을 보면 유독 많이 나오는 이름입니다.

리눅스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던 시기... 홀로 원서인 MySQL책을 번역하면서 많은 이들과 정보공유를 하면서 리눅스 보급에 나름데로 기여한 분입니다.

저와는 이웃동네에 살아서... 술 친구요, 등산 친구요, 말 벗이기도 합니다.



그가 힘들때나 술이 고프면 내 손전화로 전화해 술먹자하면 난 단숨에 나갑니다. 그의 지론 활동하는 사람이 돈이 어디있냐.... 그나마 돈을 버는 사람이 술을 사야한다는 지론으로 무수히 얻어 먹었습니다. 

 

사람하나 믿고 돈을 겂없이 꿔줄 수 있는 사람이 문태준 동지입니다. 저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늘 저는 도움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그가 섭섭하다는 말을 하는데 미안함 때문에 뭐라 할 말도 없고, 잘못했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더군요. 미안해요 태준씨... 정말로.... 그렇지만 계속해 우리 술도 같이 먹고, 등산도 같이 가고, 살아가는 이야기 함께 나눠보죠... 오늘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마련한 작은 환송회자리... 결코 잊지 않을께요...

 

오늘도 손전화하고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내가 활동하였던 노동넷에 상근을 그만둔다는 소식을 손전화 통화를 통해 알고 난 후 섭섭함이 들었고, 만날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저희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의 속내의 말과 활동(지금 서울지역사무노동직노조와 한국정보통신노동조합에서 중요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했는데, 한마디 말없이 오산으로 내려간다는 말이 섭하였나 봅니다.

 

저희 집에 있던 맥주2병을 마시고, 그가 노래방을 가자는 말을 꺼내 우리 둘은 노래방에 갔습니다. 작은 환송회를 해주는 의미의 노래방.... 그와 노래방은 딱 한번 가보았습니다. 예전 술을 먹기만 하면 내가 2차 3차까지 가는 버릇이 있어 그날도 저희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새벽 늦게까지 술을 흥건히 먹고 노래방을 가본 기억... 주로 제가 가자고 했지... 그는 노래방을 가자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노래방을 가자고 해서 우린 노래방에 갔습니다.

추석 전날 새벽인데도 술집의 네온사인은 휘엉찬란하기만 합니다. 돈 벌기 각박하구나... 느끼면서 우리 둘은 주변 수퍼에서 캔맥주를 사서 노래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환송회인지라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참 고맙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어... 저는 그의 노래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기만 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자신의 속내를 나에게 다 말해주고 고민을 털어줄 수 있는 사람.... 나는 그에게 이번 오산건 빼놓고는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는 아니지만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순수와 열정을 가진 그와 오늘 노래방에서 작지만 뜨거운 환송회를 받았다.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갚아나가야 겠다.

 

오산에 내려가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나 심약한 내 마음 흔들릴까봐 말못한 것도 있고, 사무실에서 나올때 오산보다는 막연히 공장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 이외엔 뽀족한 생각이 없어 말 못하였다. 그나마 지금 이야기하고 작은 환송회를 받을 수 있어 기분 좋았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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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과 월출산이 있는 내 고향...

  • 등록일
    2004/09/28 23:49
  • 수정일
    2004/09/28 23:49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이라는 촌 구석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부모님의 성화로 인해 졸지에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에서 언 20년이란 세월을 타향살이 하는 신세입니다.


영산강 하구를 막기전에는 농사일과 어업을 하면서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농촌에 태어나 갯벌과 산들녘을 벗하는 곳이죠. 강과 산이 정겹게 들어서 있고 소나무 숲과 감나무 대나무 밭이 무성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연과 벗 삼아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일 즐겁고 재미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봄이면 형들따라 월출산에 올라가고 여름이면 영산강 갯벌에서 멱감고(수영) 가을이면 산들에 매달린 과일들을 따라 다니고 겨울이면 토끼나 꿩 잡으러 다니는 생활을 하면서 남 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죠. 지금은 이 지역도 도시화에 밀려 인심이 각박해졌지만, 제가 살때만 해도 정겹고 아름다운 고장이었죠. 

 

서울에 올라와서 시골이 있고 자연을  벗삼아 살아왔다는 것이 때론 자랑거리로 내세울 때가 많았죠.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그래도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청명한 하늘 쏟아질 듯 미어터지는 별  그리고 노루, 토끼, 꿩, 다람쥐, 살퀭이, 뱀, 갯벌의 무수한 어족들 남들은 돈내고도 구경하기 힘든 그런 삶을 저는 태어나 고장에서 늘 벗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내 고장이 변하지 않기만을 바랬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그런 자연이 풍미들이 빛을 발하였습니다. (한라 삼호조선소가 저희 동네 근처에 자리잡히면서 그런 추억 거리들이 사라졌죠.)



 이 땅의 부모님들이 다 그렇듯이 자식들 만큼은 자신들 처럼 힘들 노동을
 시키지 않겠다는 일념하나로 형편이 좋지 않은 집에서 서울 유학을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러한 부모님  사
 랑만 받았지 사랑을 배풀지 못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남들은 부모님들 보려 방학이면 내려가서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와주었지
 만 저는 대학들어온 이후 시골에 내려가기는 켜녕 그저 서울에 안주해 부
 모님 생각은 켜녕 저 한몸 지탱하는데 안주하면서 살았죠. 지나고 생각해
 보니 불효중에 불효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간 시간이지만 부모 살아생전에 효도하라는 말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
 니다. 지금은 부모님 묘소만 있는 시골에 내려가자니 서글픈 마음이 들더
 군요. 그리고 다음달 초에 동생이 결혼을 하는데.... 부모님에게  알리려
 고 가려니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내려가봐야죠...
 
 부모님이 아프다고 해도 내려가지 못한게 지금은 한으로 남더군요.
 무엇이 급했는지.... 그리고 생각치 못한 구속으로 교도소에 있는데 뜻하
 지 않게 어머님의 죽음을 교도소에서 소식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부모님 병들었을 때 내려가봐야 했는데... 그래서  시
 골에 내려가는게 때로는 그때일을 떠올리기에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내려가면서 또한번이 속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동생이 결혼해서 다행입니다.
 
 동생이 결혼한다니 청첩장이라도 부모님 묘소에 전해드리고자 오늘  저녁
 차로 시골에 내려 갑니다. 주저했지만 그래도 제일 먼저 결혼소식을 부모
 님에게 알려야죠 남동생이 어엿한 가장이 된다고... 살아계셨으면 흐뭇해
 하셨을 건데...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야 결혼이라는 가부장적 생활을 하지않고 혼자  자
 족적 삶을 살고자 하는데... 동생이 한켠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어서 이제
 는 부모님 묘소에 면목이 슬 것 같습니다.
 
 남도에 비도 많이 왔다는데 부모님 묘소도 살펴볼겸 내려갑니다...
 
 기차시간이 남아 사무실에서 참세상 공간중 자주들리는 이 공간에 횡설수
 설 잡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간장 오타맨....
 
p.s 명절때와 가족 경조사가 있을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더욱더 나더군요.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않다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을 이때 만큼은 절실하게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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