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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인간의 시간

  • 등록일
    2004/08/03 11:12
  • 수정일
    2004/08/03 11:12

인간의 시간

 

                                                     백무산

 

 

마른 풀잎 위로 부드러운 빗방울이

깃털처럼 내린다

굴므은 산자락까지 내려와

게릴라처럼 주의 깊다

비에 씻긴 바람도 저희들끼리

아주 주의 깊게 착지를 찾는다

개울은 작은 푸씨 하나라도 깨울까봐

뒤꿈치를 들고 걷는다

시간은 자신의 거처를 몰라 머뭇거린다

 

나무들도 옷을 벗는다

지난 가을에 외투만 벗은 나무는

마지막 단추까지 푼다

소리없이 안으로 옷을 벗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대지에 무슨 음모가 시작되는가

새들도 숨을 죽인다

언제 명령이 떨어지는가

누가 발진을 지시하는가

시간도 순응하는 시간

 

일사불란한 지휘계통도 없이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흙 알갱이 하나하나 수소처럼 가볍다

새들도 숨을 죽인다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

소모와 죽음의 행로를 걸어온,

날로 썩어가고 황무지만 진전시켜온

죽은 시간을 전복시킨다

대지는 단절을 꿈꾼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

대지는 이렇게 혁명을 하는 것

 

잠든 씨 알갱이들과 언 땅 뿌리들을

불러내는 것은 봄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밀어올리는 것

생명의 풀무질을 충만하게 가두고

안으로 눈뜬 초미의 주의력을 늦추지 않는 것

시간과 봄은생명력의 배경일 뿐

 

역사가 강물처럼 흐른다고 믿는가

그렇지 않다

단절의 꿈이 역사를 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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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백무산] 슬픔의 맞불

  • 등록일
    2004/08/03 11:01
  • 수정일
    2004/08/03 11:01

또 한차례의 패배가 이 땅을 후비쓸고 가던 날

막다른 골목 어두운 길 돌아서다가

바람 휘감기는 모퉁이에서 나는

바람에 떠 있는 허연 어덩이와 마주쳤다.

 

골목 앞 허름한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실하던 남편 공장 사고로 잃고

현기증 많던 딸아이 하나

아지랑이 따라 집을 나가고

늙도록 계절 없이 혼자 산 여자

넋을 놓고 혼이 빠져 반편이 된 여자

어두운 골목길에서

훌러덩 엉덩이 다 드러내놓고

오줌을 누고 있었다

 

펑퍼짐하고 혀연 살덩이

생산을 끝낸 그 허전한 엉덩이 위로

서늘한 먼지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스쳐온 바람이 내 눈으로 들어와

그만 참았던 눈물 흘리고 말았다

생산을 중단한 자의 귀가길이여

 

오, 그것은 슬픔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돌아나올 수밖에 없는 길 없는 길이었다

그것은 슬픔의 맞불

한 슬픔이 다른 슬픔을 꺼버리는

슬픔의 맞불이었다

돌아나올 수밖에 없는

길 없는 길이었다

모든 시작처럼 그렇게 담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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