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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통

내가 갖고 있는 ‚대통령’의 이미지는 아마 초등학생에게나 어울리는 이미지일 거다.

통 큰 사람.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배경은 아마, 물가에서 무를 다듬는 아낙네들이 왜 저런당가 도체 이해할 수 없는, 마을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내전으로 점철된 한국사회의 모순을 몸으로 체험한 어른들의 말없는 바램일 거다. 아마 그런 바램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잡은 결과일 거다. 통 큰 사람이 나타나 모두를 다 담는 화해자가 대통령이 되기를, 화해자가 아니면 최소한 그런 중재가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 결과일 거다.
   
박근혜가 이런 통 큰 사람?

지배자/승자가 베푸는 ‚망각’(Amnesty/사면, amnestein/망각되다)과 정의 실현에 전제되는 피지배자의 밝힘(진실) ‚추모, 그리고 평가 사이를 부동하는 화해에 대하여 해야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선 박근혜의 통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본의아니게“ 망언 관련

갈라진 사회가 통합을 향하는 길목에는 „transitional justice“란게 있다. ‚과거를 청산하는 과도기적 정의’ 정도로 번역되는 용어인데, 뭔가 아닌 것 같다.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transitional justice“와 함께 „과도기적 정의“란게 뭔지 알쏭달쏭하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넘어간다는(transire) 말인가? 시대흐름이 일정기간을 통과한다는 말인가? 그럼 달라지는 것이 뭔데?

시대연속성의 단절이 아닐까? 기존의 관행을 잠정적으로나마 유보하는 것이 아닐까? 기존의 관행이 자신을 넘어서, 자신이 같혀있는 틀에서 벗어나 지난 일을 밝히고 평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물가에서 „무를 다듬고, 총기로 더렵혀진 땅을 빨래질 하는“ 아낙네들의 ‚그람 모써’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비해 „본의아니게“란 망언에는 – 프로이드적인 실수행위론에 입각한 분석은 차치하고 - 군사적, 정치적, 법적, 철학적 기존 관행과 참조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협소한 시각이 스며있다.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없이, 자신의 협소한 세계관에 같혀 과거를 좀 단장해서 현재로 넘어가겠다는 말이다. 아낙네들이 바라는 통 큰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작전 수행 능력은 탁월하지만 조준선 한 치 옆을 보지 못하고, 그런 건 ‚콜래터럴 데미지’라고 하는 시야 좁은 마인드에서 나온 말이다.

2. 박상일•이영조 후보의 공천 전격 취소

„본의아니게“ 망언과 박상일.이영조 후보의 공천 전격 취소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본의아니게“ 망언과 박상일.이영조의 발언은 사실 같은 선상에 있다. 근데 왜 박상일.이영조만 쫒겨났지?

새누리당은 후보의 도덕성과 공천의 투명성, 원칙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건 내용이 공허한 강령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좋게 말하면 절차에 충실하겠다는 말이다. 그럼 위 공천 전격 취소는 뭔가?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인가? 내용도 없고 절차도 개판이란 말인가?

내용없이 크게만 그려 놓은 원을 절차로 채우겠다는 새누리당의 뻥튀기가 제대로 될일이 없다. 충실한 내용을 축으로 하여 모순과 논쟁을 거쳐 통합으로 향하는 큰 통이 되는 작은 씨앗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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